어떻든 김재규는 권총이 고장나자 밖으로 나갔다. 이때의 상황은 심수봉 양과 신재순 양이 알고 있다. 오른쪽 팔목에 총알 한 방을 맞은 차지철은 화장실로 달아나 있다가 김재규가 나간 걸 알고, 화장실 문만 열고 내다보면서 {각하 괜찮습니까?}하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나는 괜찮아}했다. 가수 심양이 대통령 곁으로 다가가 {진짜 괜찮습니까}하고 물었으나 심한 신음만 들렸다. 심양이 대통령을 일으켜 앉혔다. 옆에 있던 여대생 신양이 등뒤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았다. 차지철은 그제사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방패처럼 잡고 있었다. 김재규는 불발이 된 총을 버리고 대기실에서 나오는 박선호의 권총을 달라고 해서 그걸 가지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문갑을 잡고 피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복부를 향해 권총을 쐈다.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던 심양은 이때 김재규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는 전등불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심양은 {설마 하는 데 김재규가 구부리고 앉아있는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길래 방을 뛰쳐나갔다}라고 말했다. 신양도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나 숨었다}고 했다. 김재규는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서 50센티쯤 앞에서 [야수의 마음으로 정분을 끊고] 박대통령의 머리를 쏘았던 것이다. 이렇게 유신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이때 복도에 나가 있던 김계원씨가 방으로 들어오다가, 일을 다 끝내고 뛰쳐 나오던 김재규와 마주쳤다. 김재규는 김실장에게 {일이 다 끝났읍니다. 보안을 철저히 해 주십시오}했다. 김계원씨는 그때 김재규가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고 회상한다.
- 그때 실장께서 김재규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하셨다는데, 그 말이 후에 김재규와 사전에 무언가가 있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을 하게 하는 빌미가 됐었지요.
{확실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당시 내 심정은 빨리 각하를 병원에 모셔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김재규 이 자식 너 빨리 가버려라 하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또 그때 난 그 안에 청와대 경호원이 잔뜩 있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들이 다 맞아죽은 줄 몰랐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라고 그러면 그 경호원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서 각하를 모시고 병원에 가느냐 하는 말이었읍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국무총리 같은 분을 말한 건 아니고}
- 사실 실장께선 총격사건 직후에 청와대에 가서 최규하 총리한테 둘이 싸우다가 잘못해서 쏜 것처럼 말씀을 하셔서 오해를 받았지요?
{예, 그렇습니다. 내가 청와대에 돌아가서 최규하 총리한테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쏜 총에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분명히 그렇게 보고 드렸는데 그때까지도 난 김재규가 잘못해서 각하를 쏜 줄 알았어요}
- [잘못]과 [고의]를 구분할 수 없었읍니까?
{각하가 총에 맞은 건 내가 알았지요. 그런데 어두컴컴한데서 빵빵 쏘니까 차지철이를 겨냥해서 쏜다는 게 차지철이 움직이는 바람에 각하가 맞은 줄 알았죠} ―조명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얼굴은 보일 정도였겠죠. {얼굴이 겨우 보일 정도였지요. 내가 심수봉이 얼굴을 잘 못 볼 정도였읍니다. 대통령께선 밝은 곳에서 술을 잘 안 드십니다}
작고 가벼웠던 박 대통령의 시신
―사상자가 더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겠네요.
{그렇죠. 심지어 나중에 각하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는데, 그 운전기사가 난 각하 운전기산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까 정보부 사람이야. 차를 빨리 안 몰아요. [빨리 가, 빨리 가!]하고 차안에서 내가 얼마나 독촉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운전도 서툰 사람이야}
어떻든 김재규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하지?}하는 말을 받아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하여 돌아가셨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하고 말했다. 김계원씨는 밖에다 대고 {얘들아! 어서 들어와! 각하가 부상당했다!}하고 소리쳤다. 이때 이기주가 권총을 가지고 들어왔다. {한 녀석이 권총을 가지고 차지철을 보면서 [아직 안 죽었다, 안 죽었다]하면서 쏠려고 그래요. 그래 이걸 내가 빼앗았지. 그 권총을 내가 가지고 있다가 육본에 가서 정승화 총장을 줬어요} 김실장은 이기주에게 {각하를 빨리 모시라}고 고함을 쳤다. 이기주도 그때서야 처음으로 대통령이 총에 맞은 것을 알았다.
김계원 실장은 경비원 서영준에게 대통령을 업히고, 이기주는 뒤에서 받치게 하고 현관쪽으로 나갔다. 김실장은 중정의 유성옥이 모는 차의 뒷자리에 앉아 대통령을 받아 무릎 위에 비스듬히 안고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갔다. {박대통령 체구가 아주 작고 가벼웠어요.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서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죠. 처음엔 좀 신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내 양복에 피가 많이 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내 양복에 피가 많이 묻었는데 그것도 몰랐어요. 병원에 가서 얘기 들으니까 [이미 절명하셨읍니다]그래요}
- 그때 병원에 가셔 가지고 그 병원의 의사나 병원장에게 환자나 대통령이란 말을 안했다고 해서 석연찮다는 얘기가 오갔읍니다.
{준비 없이 각하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발표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날 밤은 각하하고 나하고만 술을 마셨읍니다. 차지철이 하고 김재규는 술 한 방울도 안했읍니다. 둘 다 보통때도 안합니다. 김재규는 간경화증 때문에 술하면 죽습니다. 그래서 각하하고 나하고 술(시바스 리걸) 한 병 다 마시고 두 병째 절반쯤 마셨어요.
각하가 날 좋아한 건 술 상대가 돼서 그렇기도 했을 겁니다. 나하곤 늘 잔을 주고 받고 했지요. 그래서 그날 밤 나는 꽤 취했읍니다. 그러나 각하를 모시고 있는 자리기 때문에 정신을 좀 차리고 있었읍니다. 그런데도 내 머리엔 [각하가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되나] 이런 생각이 떠올랐읍니다. 당장 큰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내 지금도요, 그날 저녁에 내가 한 일을 보면, 세상없는 사람도 내 이상 못했다고 생각해요}
소식 듣고 총리도 흐느꼈다
김계원실장은 박대통령의 시신을 병원에 안치해 놓고 저녁 8시15분쯤 택시를 타고 청와대에 도착했다. 그가 더 이상 잘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 조치의 첫번째 행동은 이런 것이었다. {경호실 차장 이재선 중장을 불러서 [경호실장이 지금 지휘를 할 수 없게 됐다. 당신이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 경비를 잘하라. 그리고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그때 문제는 정보부 애들이 경호실 애들을 죽여 놓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둘이 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경호실 애들한테도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걸 알면 그 사람들이 정보부에 뛰어가지 가만히 있겠어요. 경호실 사람들도 충성심 강합니다}
김계원 실장은 그 다음 최규하 총리와 몇몇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각하를 병원에 모셔두고 청와대로 돌아가서 총리를 모셔와야겠는데 내가 번호를 모르니 전화를 걸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경호실 사람한테 전화를 걸라고 했어요. 총리가 내 전화를 받고 바로 들어오셨어요. 총리한테 내가 말했어요. [차지철이하고 김재규하고 싸우다가 김재규 총에 맞아 각하가 돌아가셨다]고. 그랬더니, 총리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 말을 듣고 갑자기 힘이 빠지며 상체가 축 늘어지더군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총리님 이제부터 이 나라는 각하께서 끌고 나가셔야 됩니다. 전느 비서실장입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읍니다] 그랬더니 총리가 기가 막힌지 대번에 막 흐느끼십디다. 그때 내가 [이게 문제가 큰데 보안을 잘 유지해야겠읍니다] 그랬지요. 총리가 [그래 김재규 지금 어디 있느냐]고 해서 [어디 있는지 모르겠읍니다]하고 대답했어요}
한편 궁정동에서 일을 끝낸 김재규는 별채로 가서 김정섭 차장보와 식사를 하고 있던 정승화 총장과 함께 육본으로 갔다. 김정섭 차장보와 박홍주도 동승했다. 그들은 8시5분쯤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고 1군과 3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하고 국방장관, 합참의장, 해군총장, 공군총장, 연합사 부사령관 등을 육군 벙커로 오도록 연락했다. 한편 김계원 실장은 청와대에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김재규가 어디 가서 무얼 하나 하고 굉장히 불안해 했읍니다. 아 그때 정보부장 앞에서 큰 소리 칠 사람이 누가 있었읍니까}
- 그때 쿠데타로 발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으셨죠.
{그렇죠. 그게 젤 염려되는 거였죠. 쿠데타라고 해도 무혈이면 그래도 좋겠는데 난다면 대통령이 죽었는데 어떻게 무혈쿠데타가 됩니까}
육군본부 장악된 줄 알아
이런 판에 김계원 실장은 육본에서 걸려온 김재규의 전화를 받았다. 누가 들을까봐 조심하는 듯한 목소리로 {육본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김재규가 육본에 있다는 걸 알고는 일단 안심했어요. 위치를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안심할 일이 아니었읍니다. [육군참모총장도 여기 있읍니다] [국방장관도 여기로 오고 있읍니다]하니 기가 막혔죠. 난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오라고 연락했는데! 또 조금 있다보니 국방장관이 그리고 갔고. 난 문제가 나는 줄 알았죠. 김재규가 육군참모총장하고 국방장관을 벙커에 잡아놓고 뭘(쿠데타) 하는 줄 알았어요}
- 그런데 최총리와 몇몇 장관들한테 그런 위험한 곳으로 가자고 한 분이 실장이셨던 걸로 알려졌는데요. 그땐 왜 그랬읍니까?
{그런 어떻게 해요. 안 가면 수습을 못하지요. 내가 김재규한테 [총리도 여기 계시니 오라]고 그랬죠. 그런 중에 총리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리로 갑시다]하데요}
이렇게 돼서 최총리, 김계원 실장, 박동진 외무, 구자춘 내무, 김치열 법무 등이 청와대를 출발해서 밤9시30분쯤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김계원실장은 처음 벙커 안에 들어가서 많은 장성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처음엔 김재규가 육본을 장악한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부대 출동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다들 김재규가 범인임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다소 안심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 그때 육본 벙커에 있는 화장실로 김재규를 데리고 가셨는데 왜 그랬읍니까?
{나는 아무도 없는 데 가서 [각하 돌아가셨다. 너 자수하라]할라고 그랬어요. 그래 거기로 데리고 갔더니 자기가 먼저 얘기하더군요. 혁명위원회를 만든다고 하고, 무슨 혁명위원회 간판을 단다고 해요. 그래 난 그 자리서 다른 말을 못했어요. 그때 나한테 말하는 걸 보니 보통때 나한테 얘기하던 것하고 어감이 달랐어요. 그래 [아이쿠, 이거 생각이 달라졌구나]하고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못했어요}
- 생각이 달라졌다는 건?
{뭔가 자기가 저지른 일을 합리화시킬 구체적인 일을 하겠다는 걸로 알았어요}
한편 육본의 좁은 벙커 안에는 최총리와 김재규 그리고 장관들이 좁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때까지 [대통령이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총을 쏜 김재규 자신과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김계원 실장, 그리고 그에게서 보고를 받은 최총리뿐이었다. 김치열 장관은 자신도 그때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어떻든 이런 가운데 김재규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보안유지]와 계엄령 선포를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진상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설왕설래했다.
이러다가 노재현 국방이 {여기는 좁으니 내 방으로 올라가자}고 해서 최총리와 장관들, 그리고 김재규와 김계원 실장 등이 장관실로 옮겨갔다. 김계원실장은 이때 군부가 김재규한테 가담하지 않았다는 걸 파악하고 김재규를 체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에겐가 국방장관과 정승화 총장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정총장이 그 누군가의 전갈을 받고 장관실로 올라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떻든 김계원실장과 노 국방, 그리고 정 총장이 가까이 만나게 됐는데, 이때 국방장관 보좌관 조약래 준장이 세 사람을 장관실에 달린 조그만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거기 들어가서, [김재규가 범인이니 잡아야 한다.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 소란을 벌이면 안되니 조용히 체포하라]고 말했읍니다}
대통령은 곧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런데 그 얘기가 끝나자마자 아슬아슬하게 김재규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그 [조용한 방]으로 들어섰다. {오싹했어요. 김재규 얼굴을 보니 나를 의심하는 거 같아요. 뭔가는 얘기해야겠는데 언뜻 생각나는 게 계엄군 특식 문제야} 김계원씨는 그 순간 김재규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총장, 계엄군의 숙식비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시오} 하고 엉뚱한 말을 했다. 이렇게 돼서 김재규 체포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국방장관실에서 밤11시 50분부터 국무회의가 시작됐다. 김계원씨는 벙커에서 김재규 체포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정승화 총장에게 {빨리 김재규를 체포하라. 국무회의 시작이 늦어지고 있다}고 몇차례 전화로 독촉했다고 정승화씨가 증언했다.
국무위원들은 박 대통령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회의를 정회하고 김계원 실장과 함께 국군통합병원 서울지구병원으로 갔다. 그들은 김병수 원장의 안내로 박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갔다. 흰 시트를 벗겼다. 누군가 박 대통령의 몸에 묻은 피를 닦고 옷을 갈아 입혀 놓은 듯했다. 두번째 총알은 귀 뒤로 들어가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은 거의 변형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창백한 얼굴은 잠자는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들이 국방부에 도착했을 때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는 이미 체포돼 있었다. 27일 새벽2시 국방부 상황실에서 속개된 국무회의에선 [대통령은 곧 대한민국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감격적인 장면이 일어났다. 회의가 속개된 직후 신현확 부총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박대통령께서 서거하셨읍니다. …한시라도 통치권자의 공석은 있어선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 헌법에는 통치권자의 공석이 있을 때의 승계순위가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읍니다. 그 규정에 의하면 국무총리가 계승을 하게 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최규하 총리께서 지금부터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셨으니 이점을 국무회의에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겠읍니다}
이때 국무위원석 뒤에는 수십 명의 군 장성들이 배석해 있었다. 부총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장성들을 일제히 일어나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10월27일 새벽 국민들은 [대통령 유고]와 함께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져 있다는 긴급뉴스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해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61년 5월16일 새벽 [5·16혁명]을 알리는 방송으로 국민들을 선잠에서 깨워 어리둥절하게 해놓고 국민들 앞에 나타났다가, 18년 후인 10월27일 새벽 또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긴급뉴스로 선잠을 깨워놓고 국민들로부터 사라진 것이다. 그는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와서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간 것이다.
비보 듣고 당찼던 근혜(槿惠)양
金실장은 국방부에서 金載圭의 체포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 비상 국무회의에는 배석하지 않고 청와대로 갔다. {27일 새벽2시쯤 청와대에 도착했는데 근혜, 근영 양에게 어떻게 알릴까 고민이 됩디다. 내실 담당 직원에게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더니, 펄쩍 뛰면서, 지금 당장 알려야 한다고 해요. 두 따님의 방은 본관 2층에 있었읍니다. 연락을 받고 잠옷차림에 가운 같은 것을 걸치고 나온 근혜양과 2층계단에서 마주쳤읍니다. 따님얼굴을 보니까 말문이 막히고 눈물부터 쏟아져요} 槿惠양은 {실장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말했다. 金실장은 그래도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실장님 말씀하십시오. 저는 어머니 일도 당해보았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견딜 수 있어요} 朴양은 차분하게 말하더란 것이다.
{각하가 서거하셨읍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金실장은 전날 저녁에 崔圭夏총리에게 맨 첨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朴양은 눈물을 보이지 않고 아주 당차게 아버지의 비보를 듣더라고 한다. 육사생도 지만(志晩)군은 백석주(白石柱)교장으로부터 이날 새벽에 연락을 받고 곧 청와대로 달려왔다. 金실장은 청와대 직원들에게 빈소를 차리도록 지시하고 朴대통령 가족과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등 정신없이 바빴다. 피묻은 웃옷을 바꿔 입을 겨를도 없었다.
27일 저녁에 金실장은 잠시 시간을 내어 집에 들렀다. 계엄사 합수단의 수사관이 찾아왔다. 여기서 1차 신문조서를 받았다.
{그날 조서를 받을 때 녹음을 했는데 나중에 내가 구속된 뒤 그것을 다시 들어보니 내가 착각하여 진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예컨대 나는 총을 맞은 각하를 병원으로 옮겨다 놓은 뒤 걸어서 청와대로 돌아왔다고 진술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택시를 탄 기억이 나더군요. 그날 저는 너무 바빴어요. 아마도 모든 정부인사들 가운데 제가 가장 분주했을 것입니다. 여러 장관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그들을 데리고 궁정동―병원―청와대―육본·국방부·청와대를 옮겨다녀야 했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누구한테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더구나 그때 저는 상당히 취한 상태였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그날 밤 제가 한 행동은 크게 잘못된 점이 없다고 봅니다} ―처음 신문을 받을 때 구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읍니까? {천만에요. 제가 왜 구속돼요.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다고…}
그러나 그는 10월29일에 다시 연행된 뒤 구속되어 金載圭의 공범으로 발표되었다. 그의 연행을 허가했던 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은 {워낙 큰 사건이므로 수사대상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단 수사를 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鄭총장은 金씨가 아무 죄가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너가 왜 죽니?
1979년 12월20일 金桂元피고인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金載圭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종사 미수죄였다.
- 사형선고를 받을 때 기분이 어땠읍니까?
{저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살려놓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읍니다. 선고 전에 담당 변호사 김수룡씨가 오더니, [내 생각으로는 무죄가 아니면 사형이 될겁니다]고 말하면서 [무죄를 확신하니 꿈이나 잘 꾸시오]라고 합디다.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어머님이 면회 오시더니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가 왜 죽니. 너 절대 안죽는다. 조금도 염려말아라. 나도 걱정 안한다] 그러시면서 웃으시는데 저도 용기와 희망이 생깁디다}
지난 8월 월간조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鄭昇和씨는 {나는 김계원씨가 무고하다고 생각했읍니다. 무죄선고를 받지 못하더라도 지휘관의 형량 확인과정에서 형집행정지로 감형하여 석방시키려고 했는데 12·12사건이 났읍니다}고 말했었다. 계엄고등군법회의는 1980년 1월28일 金桂元피고인에게 무기를 선고했다. 군검찰이 공소장을 변경하여 죄명을 단순살인죄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金씨의 부인은 이날 아침 수사관이 가져온 재산헌납증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해 5월20일 대법원전원합의체는 金載圭, 金桂元 등 10·26사건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판결은 만장일치의 합의가 아니고 6명의 대법원판사가 소수의견으로써 이견을 냈다. 梁병호 대법원판사는 소수의견에서 金桂元피고인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원심이 채택하고 있는 증거들을 아무리 정사(精査) 검토할지라도 피고인이 김재규와 더불어 의사연락하여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할 것을 상호 공모하였다 함을 인정할 자료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중앙정보부 궁정동 식당에 미리 도착한 피고인이 김재규와 함께 식당 현관앞 정원의 경계석에 앉아 대화 도중 피고인이 {차실장, 그 친구 강경해서 야단이야}라고 말하자 김재규는 {그 친구 오늘 해치워버릴까}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인정되나 {해치워버린다}는 말이 깡패사회도 아닌 피고인들과 같은 국가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죽여 없앤다는 뜻의 말로는 도저히 새겨들어지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피고인이 차지철을 살해하겠다는 것을 인식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는 보여지지 아니한다] [원심 판시사실은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하고 현관을 나오면서 피고인에게 {이젠 다 끝났으니 보안유지를 철저히 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이후의 피고인의 관여 행위에 대하여 이를 내란중요종사미수를 범한 것으로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피고인이 담당종사한 중요임무로는 보안유지를 하는 것이 그 임무의 하나였다는 취지로 보여지는 바 살피건대 피고인은 김재규가 불의에 대통령 등을 총격 살해한 돌발적인 공포분위기의 현장에서 보안유지를 해달라는 요구를 그저 {알았소}라고 할밖에 다른 도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짐작되거니와 피고인이 대통령의 유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하고 대통령 수석비서관들과 경호실 차장을 비상소집하고 국무총리와 각 장관들에게 알려 청와대로 오게 한 것 등은 사실을 숨기거나 허위보고를 한 잘못은 있다 할지라도 김재규의 보안유지의 당부를 어기고 사건을 고위직 관계 인사들에게 알리는 자기 나름대로의 조치는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형장으로 가는 金載圭의 모습
12·12사건 뒤 육군교도소에서 鄭昇和 전 계엄사령관, 金桂元, 金載圭 세 피고인은 같은 사(舍)의 같은 층에 있었다. 서로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마주친 적도 대화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1980년 5월24일 새벽 金載圭가 서울 구치소의 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金桂元씨는 문틈에 눈을 갖다대고 일순간이나마 金載圭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가 있던 감방 쪽을 기웃거리는 게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어요. 끝내 한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한 채 이승과 저승으로 갈렸읍니다} 가까운 방에 있었던 鄭昇和씨도 이날 새벽 잠을 못자고 있다가 金載圭가 끌려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소란은 없었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이 누구한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읍니다}
1980년 5월26일, 金載圭의 사형이 집행된 2일 뒤 무기수 金桂元씨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옥중생활중 그는 고혈압을 얻었다. 한번 쓰러진 적도 있다고 한다. 1982년 1월8일 어머니 李一順여사(당시 80)가 별세했다. 金씨는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장례식 사진만 볼 수 있었다. 그해 5월 1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金씨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의 자택에서 34년째 살고 있다. 대지 2백여 평에 건평이 약70평인 일본식집이다.
金씨의 아버지 金吉濬씨(88)는 최근까지 자신이 설립한 풍기고등학교(경북 영풍군 풍기읍 소재)의 이사장으로 일했다. 金桂元씨는 {제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버님은 교육 유공자로서 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으셨더구먼}이라고 했다. 金씨는 노쇠한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으려 했으나 자신이 복권되지 않은 상태여서 포기했고, 얼마 전 세째 동생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고 한다.
金씨는 4남1녀의 형제 가운데 장남이다. 둘째 동생은 10·26당시 육군소장이던 金桂一씨였는데, 형이 구속된 뒤 군복을 벗고 지금은 모 국영기업체의 상무로 있다. 金桂元씨는 2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장남은 국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차남과 막내딸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오는 10월 초 막내딸이 미국에 사는 한국인 변호사와 결혼을 하게 돼 있어 9월 중순에 金씨는 여권을 내고 비자를 받느라고 한참 바빴다고 한다. 金씨는 {출소한 뒤 이번이 첫 해외여행이다}고 말했다. 金씨는 원효로 집에서 부인과 늙은 가정부 등 셋이서 살고 있다. 생활비에 대해서 물어 보았더니 강남에 있는 또 하나의 집을 외국인에게 세주고 받는 돈이 주된 수입원이라고 밝혔다.
金씨는 고혈압 때문에 약을 매일 복용하면서 암투, 아침 운동으로는 배드민턴을 친다. 아침운동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식사를 하면 오전10시쯤. 그 뒤로는 집에 칩거하여 독서, 음악감상, 비디오시청 등으로 소일한다는 것이다.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하는데 요즈음은 기자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골치가 아프다}고 웃었다. 金씨는 출소하여 그동안 가족들이 모아두었던 10·26 사건관계 신문철을 뒤적여 보았다고 한다.
金씨는 그 소감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했다. {아니, 왜 신문은 군검찰보다도 앞서가는 겁니까?} 요즈음 잡지나 신문에 포승에 묶인 자신의 사진(10·26사건의 현장검증 및 재판)이 실리는 것이 아주 싫다고 했다. {제가 감옥에서 나와보니 군대와 관계 있던 물건을 집사람이 다 없애버렸더군요. 친지가 재향군인회에 전화를 걸어 저의 연락처를 물으면 그런 장군은 없다고 한다나요} 전직 육군참모총장이었던 그는 지금 예비역도 [무등병]도 아니다. 따라서 그는 군인으로서는 아무 것도 아닌 몸으로, 어서 사면 복권이 되어 잃어버린 세월과 경력을 되찾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