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예감 : 머리맡에 권총 깔고 자

박대통령이 말년에는 자기한테 다가오는 운명을 예감했음인지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다는 증언들이 많다. 말년의 박대통령과 인간적으로 아주 친했던 육사동기생 심흥선(沈興善·당시 총무처장관)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대통령께서 초조 불안하신 것 같다. 술을 잡수시면, 누가 나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고, 머리맡 요 밑에 권총을 숨겨두고 잠을 잔다는 이야기도 하시더라.'

1977년에 박대통령은 대구사범 시절의 담임선생이던 일본인 기시(岸米作)를 청와대로 초빙, 이런 이야기를 하더란 것이 기시의 증언이다.
'이 집을 무력으로 점령한 내가 주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데 대해서 운명의 불가사의를 느낍니다. 그런 저이기 때문에 언제 나 자신이 살해될지 모른다고 각오는 하고 있읍니다.'

1979년 여름 오랜만에 그를 찾은 5·16주체 이모 장군에겐 집안의 단명(短命)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나도 단명할 것 같아'라고 했다. 이장군이 '각하는 인중이 좋으신데……'라고 해도 '아니야, 난 단명할 것 같애'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당시 대통령 주치의사였던 김병수 공군준장(국군 서울지구병원장)에 따르면 박대통령의 건강상태는 거의 완벽했다고 한다. 박상길 전청와대 대변인에 따르면 박정희는 5·16 전에 이미 흥국생명보험에 들었다고 한다. 몇 번이나 사선을 넘어온 그는 평소에도 죽음을 자주 생각했던 모양이다.

배신한 사람의 강박관념

박대통령이 기시에게 했다는 말은 '나도 모반하여 정권을 잡았으니 언제 배신당해 죽을지 모른다'는 뜻이겠다. 이 말은 그의 뇌리를 옥죄고 있던 강박관념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그는 여순반란사건 직후의 대숙군 때와 5·16때 두 번 크게 배신하고 모반한 사람이었다. 첫번째의 배신은 그의 목숨을 구했고, 두번째의 모반은 정권을 탈취했다. 배신해본 사람만이 인간심리의 바탕에 깔려 있는 배반에의 유혹을 알 것이다. 그리하여 주위 사람들을 믿지 않고, 운명적으로 자신의 최후를 체념하기도 한 것이 박정희였다.

5·16엔 박정희 소장의 수많은 육사 동기생들 중 한웅진 준장만 가담했다. 모의 단계에서 한준장이 한신(韓信) 장군 등 신망 있는 동기생들을 끌어넣자고 여러 번 건의했었다. 그때마다 박소장은 '성공한 뒤 우리 동기생을 중용하면 되는 것이다. 다 끌어넣었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우리 둘만 희생되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기생들은 안 끌어넣겠다는 박정희의 말은, 많은 동기생들이 박정희를 '숙군에 동료들을 물고 들어간 사나이라고 야릇하게 보고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의 역할을 잘 아는 동기생들, 특히 수사에 참여했던 동기생은 박정희에 대해 나쁘게 얘기했다고 한다.

일군·만군 출신자나 2기생, 5기생 가운데는 박정희의 진술에 의해 구속되어 옥고를 치른 이모(무죄선고·뒤에 육군대장 예편), 남모(유죄선고·2기생), 박모(일본 육사 후배·5기생·뒤에 공군장성 역임) 등도 있어 원성을 사기도 했다는 것이다. 숙군때 김창룡(金昌龍 )의 사감에 의해 구속됐다가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던 김모 대령(1기생)도 '나는 5·16때까지도 박정희를 배신자라고 생각하여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5·16 모의에서는 박정희도 과거의 쓰라린 행적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고, 동기생들도 그에게 신뢰가 가지 않아 서로 멀어졌던 것 같다. 다만 한웅진은 여순반란사건 전후의 시기를 박정희와 함께 했던 사람이다.

박정희와 이주일(李周一)의 친분관계도 특이하다. 약 40년간에 걸친 두 사람의 우정은 한반도 단절되지 않고 10·26까지 이어졌다. 한때는 친구들을 잡아넣고, 한때는 동지를 우대하다가도 뒤에는 소외시키는 일을 많이 해온 박정희이지만 이주일에게만은 평생 의리를 끊지 않았다. 함북 경성 출신인 이주일은 박정희보다는 한 살 아래이지만 만주군관학교는 1기 선배이다. 만군장교로서 두 사람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고, 해방 뒤 북경으로 가서 급조된 광복군에서 같이 중대장으로 있다가 귀국했다. 이주일은 박정희보다 2년 늦게 육사 7기 특별반으로 군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끈끈하게 묶어놓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란 것이 관계자들의 얘기다. 즉, 박정희가 숙군때 구속되어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 털어놓은 조직 명단에 이주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주일도 구속되어 넉 달쯤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생했다. 재판에서 이주일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사람들이 많아 그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주일을 만났다는 당시 육본 정보국 소속 김모씨(당시 하사관)는 이씨가 '박정희 때문에 내가 애매하게 고생한다'고 불평하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이주일에게 마음의 빚을 항상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에게만은 박정하게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밀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구했던 사람이다. 그런 경험의 소유자로서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허무주의적인 불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 불신은 불안과 초조로 나타났다. 그가 측근들을 비정하게 자르고, 늘 이간질시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해온 것도 그런 불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

지도자로서 박대통령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었다. 그의 오랜 측근이었던 이낙선(李洛善·전상공부장관)은 박정희의 독심술을 '인간을 투시하는 능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정희 소장이 사람됨을 적절히 파악, 오랜 준비기간 동안 많은 장교들을 포섭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거사계획서를 미리 보여주고 나서 그는 걱정하는 부하들에게 '장장군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하고 자신있게 말하더란 것이다. 상대방의 장단점을 정확히 재고, 그런 판단 아래서 대담하게 행동한 것이 박대통령이 권력을 잡고, 그것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최대 비결이었다.

5·16전까지 군인으로서 박정희는 단점이 퍽 적은 사람이었다. 일부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신화적 존재였다. 많은 장교들을 끌어 모은 그 용인술의 비결은 인간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 외에 출중한 지모, 개혁의지, 반골의식, 평소 쌓아온 부하에 대한 사랑, 인간차별을 하지 않는 성격, 그리고 청렴결백이었다. 그가 무덤까지 갖고 간 개인적인 결백과 소박함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언이 있다.

1955년 7월 1일 광주 포병학교 교장이던 박정희 준장은 제5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홍종철(洪鍾哲) 중령의 아내 기정자는 전송하러 관사에 갔다가 박준장이 광주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다다미방의 소반 위에 차려진 음식은 국수 한 그릇이었다. 5일뒤 박준장이 서울에 세방을 얻어두었다는 기별을 보냈다. 이사짐은 기차 화물칸에 실어보내고 운전병 이타관(李他官)이 몰고 온 드리쿼터에 육영수는 어머니(이경령)와 자매를 태우고 서울로 떠났다.

이타관은 이렇게 기억한다. '서울에 와보니 노량진역 앞의 세방이 아직 비지 않았어요. 저는 노량진역에 세워둔 화물칸에서 3일밤을 잤읍니다. 육여사는 오빠 육인수씨 집으로 가서 자고요. 3일 뒤 짐을 우선 청량리역 근처의 국민주택에 살고 있던 김종필씨 댁으로 가져가 맡겨두었지요. 5일쯤 지나서 입주를 했읍니다. 김인수라는 운수업자의 집 문간방에 세들었는데 부엌이 없었읍니다. 저와 연락병이 부엌을 급조했지만 아궁이가 현관 마루 밑에 있어서 솥을 걸 데가 없었읍니다. 풍로를 사다가 남비로 음식을 끓일 수밖에 없었읍니다.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노량진 생활이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생애에서 가장 비참했다고 박준장의 장모 이경령은 뒤에 회고한 적이 있었다.
'방에는 불도 들이지 않고 방바닥에서 물이 줄줄 나서…… 그때 군인의 비옷인 고무로 만든 장옷을 방바닥에다가 깔면 축축하게 누기가 차서 도무지 앉지도 눕지도 못하여 밤이나 낮이나 서성거리며 밥이라고 풍로에다가 해서 끼니라고 때우고, 그때 참말로 고생을 말할 수 없이 하고요, 손녀딸 근혜는 아파서 울곤 했어요.'

박정희는 양구의 사단장 숙소에서 주로 지냈고, 집에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들렀다고 한다. 토요일에 나와 일요일엔 돌아가는 나들이였다. 노량진 집은 단간 세방이라 운전병 이중사는 잘 데가 없었다. 그는 집 바깥에 세워둔 지프차 안에서 담요를 덮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추웠다. 부엌 아궁이 곁에서 육영수 여사와 함께 불을 때면서 몸을 녹이기도했다. 간혹 여관이나 친척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순전히 육영수의 힘으로 박준장이 집을 마련한 것은 1956년 4월이었다. 충현동의 2층 목조건물, 연건평 30여 평의 낡은 일본식 집이었다.

박준장 밑에서 군수 참모로 근무했던 윤필용 중령은 육영수가 집에서 개를 키우는 것을 보고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달라고 했다. 그뒤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한 마리도 안 주고 다 팔아 생활비를 마련할 만큼 생계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윤필용 전수도경비사령관은 '그분은 신분이나 능력에 따라 인간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못난 부하는 못난 대로,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부리는 것이 그분이었다'는 것이다.

준장시절 박정희의 당번병과 운전병은 10·26 그날까지 약 25년간을 따라다녔다. 낮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박정희에 감복한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문제점 있어 보이는 부하를 많이 써 '작전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란 비난을 부하들로부터 받기도 했지만, 그는 그 약점들을 내려다보고 쓰는 것이었다.

이간질과 시기심의 확대

윤필용은 청년장교들이 박장군을 따랐던 이유는 '나라 걱정을 많이하고 부하들을 골육의 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강아지는 밥 주는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를 가장 좋아하는 식구를 따른다고 합니다. 한번 그분의 부하가 돼본 장교들은 거의가 그의 심복이 되었읍니다.' 윤씨는 '박장군이 정을 주는 순서는 동기생, 부하, 상관순이었던 것같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사단장 앞으로 나오는 월 정보비 7만원씩을 네 참모들에게 꼭 나눠주었다. '예하 부대에 가서 손 벌리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더라고 한다.

윤중령이 느낀 박소장의 부하사랑으로는 이런 예가 있다. 광주 1관구 사령관 시절(1960년 가을)인데, 부대 사정이 좋지 않아 장교들의 회식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느 날 박사령관의 전속부관 김성구 대위가 전화로 윤중령을 찾더니 '사령관께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신다'고 했다. 사령관에게 갔더니 박장군은 부사령관 및 참모장과 함께 불고기를 먹고 있었다. 박소장은 윤중령을 힐끗 보더니 '웬일이야'고 했다. 윤중령은 찾는다고 해서 왔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박소장은 윤중령을 합석시키더니 술과 고기를 권했다. 한참 술잔이 돌아 거나하게 취하자 박소장이 부사령관을 보고 말했다.

'실은 내가 윤중령을 오라고 했어. 나를 따라다니는 이 친구가 꼭 데려온 자식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윤중령은 눈물이 핑 돌더란 것이다. 윤필용은 그러나 박정희가 사단장 시절부터 부하들끼리 싸움을 붙여 자기 체제를 이끌어가는 관행이 있었다고 말했다.

'참모들에겐 연대장의 비리를 절대로 눈감아주면 안된다고 하고, 연대장들에겐 참모들의 월권을 보고하라고 지시하곤 했어요. 대통령이 되신 다음에도 그런 식으로 하셨는데, 좋은 의미에서의 상호 견제가 아니고 이간질이 될 때가 많았읍니다. 제가 어느 날 이후락씨를 멀리하라고 진언을 드렸더니 바로 그 다음날 이씨가 전화를 해서 섭섭하다는 거예요. 그분은 누가 자네에 대해 이런 말을 하던데, 식으로 소스를 밝혀 이야기하니 측근들끼리 감정이 나빠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육사동기생 한웅진도 박정희가 위관시절부터 남을 부추기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싫어하는 상관이 있으면 나를 쿡 찌르며, 어이 한번 뒤집어엎어 하고 선동하는 것이었읍니다. 내가 이에 장단 맞추어 술에 취한 척하고 술잔을 집어던지는 등 행패를 부리면, 박정희는 시치미를 뚝 떼고, 한중위 왜 이래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말리는 것이었어요.'

군인시절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 장기집권의 폐해인 정보의 왜곡과 대인(對人)접촉의 제한은 그의 눈을 흐리게 했다. 부하들에 대한 격의 없는 사랑도 약화됐다. 측근에 대한 의심과 이간질, 김종필·김성곤 같은 정계 실력자들에 대한 시기심은 확대돼갔다. 박대통령은 천성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골프장에서도 부하가 더 잘 치면 괜한 트집을 잡곤 하여, 말년에는 일부러 져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에 있을 때도 그는 자기와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김형일(金炯一) 등 엘리트 장군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많은 형제 중에서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을 독점하면서 자란 어린 시절의 영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군인사회는 상하 관계로만 되어 있고 수평적 관계가 약한 것이 특징인데, 박대통령도 선의의 경쟁자와 같은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대단히 거북하게 느꼈던 것같다. 박대통령의 이런 성격으로 해서 김종필(金鍾泌)은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는 해석도 있다.

조카사위를 질투한 대통령

1967년 5월의 대통령 선거를 여섯 달쯤 앞둔 1966년말 윤필용 방첩 부대장은 청구동 김종필 공화당의장으로부터 '좀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의장은 침통하게 말했다.
'윤장군, 나 그만두기로 했소. 당의장인 내가 김형욱이한테 도청을 당하고, 우리 집을 출입하는 사람은 일일이 체크되어 가택수색까지 당하고 있어요. 국회의원들도 우리 집을 드나들면 공천 길에서 멀어진다고 해요. 사흘간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심했어요. 각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윤준장은 '0을 하나 더 보태 30일간만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의장은 '그보다도 월등히 오랜 기간 생각해왔다'면서 이미 대통령 면회신청을 해두었다고 말했다.

윤준장은 김당의장 집을 나오자마자 예고 없이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가는데 이후락(李厚洛) 실장 방에서 나오는 이실장 및 김형욱 부장과 딱 마주쳤다. 윤준장이 '각하께 급한 보고가 있다'고 했더니 이실장은 '아웃라인을 이야기해줄 수 없느냐'고 했다.
'보고 전에는 이야기 못하겠읍니다.'
'혹시 김당의장에 관한 것도 들어 있읍니까?'
'있읍니다.'
'이미 그 문제에 관해서는 각하의 결심이 끝났읍니다.'
'그 외에도 긴급보고 사항이 있읍니다.'
이래서 윤준장은 집무실에서 박대통령과 독대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뤄진 대화를 윤씨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단다.

'선거를 앞두고 당의장을 바꾸면 안됩니다.'
'종필이는 너무 옹졸해. 남을 포용할 줄 몰라. 심지어 자네까지 자르라고 하더군.'
'저는 백 번 잘려도 좋은데, 선거가 걱정입니다.'
'이후락이는 나에게 종필이 칭찬을 많이 하는데 종필이는 이후락이 욕만 해.'
'제가 두 사람이 멀어진 이유를 보고드리겠읍니다.'

윤준장의 간곡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대통령은 신범식(申範植) 대변인을 부르더니 '당의장 면회신청은 거절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신대변인을 통해 김당의장에게 친서를 전했고 그 일요일에 대통령이 당의장을 골프에 초대, 사의를 번복시켰다는 것이다.

윤씨는 '그때 나는 누구 편도 아니었지만 선거를 생각하니 자연히 4인체제보다는 김씨편을 들게 되더라'고 했다. 윤필용은 박대통령이 김종필을 미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고 했다. 김형욱 부장은 전과자를 고용, 김종필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과자가 방첩대에 자수, 윤준장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종필이가 너를 그렇게 미워한다면 넌들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 대통령의 반응이었다. 한웅진도 박대통령이 그의 조카사위를 가리켜 '약아빠진 X, 내가 정권을 걔에게 인계할 것 같애?'라고 쏘아붙이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다른 측근은 박대통령이 '그 자식 이름만 들으면 밥맛이 떨어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종필은 10·26뒤 사석에서 '각하께서는 나에게 난파선만 남기고 가셨다'는 뜻의 술회를 한 적이 있다.

윤필용 사건으로 측근진 교체

박대통령의 용인술에 파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73년 3월의 윤필용 사건때부터였다. 아직 미스터리가 많은 이 사건에 대해서 나는 직접 윤필용(전매공사 이사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윤필용 소장은 맹호부대장으로 있던 월남에서 귀국한 직후인 1970년 1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사실은 그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내정돼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군내의 인맥이 서종철(徐鍾喆) 참모총장 그룹과 김재규 보안사령관, 한신 장군 등 2기생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어요. 서총장 쪽에서 저를 천거한 겁니다. 대통령께서 서총장의 천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석연찮은 표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읍니다.'
윤소장은 취임 직후 모종의 사건을 적발, 수도경비사령부내의 보안부대 요원들을 내보냄으로써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한번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아직도 김재규와 싸우고 있나'라는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김상현이와 조연하가 저렇게 까부는 것도 내 임기가 얼마 안 남았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럴수록 너희들이 결속해야 할 것 아닌가!'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 뒤 박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정략적 차원에 맡겨선 안된다. 이렇게 돈 드는 선거를 해선 국가적 낭비다. 먹고 살 정도가 돼야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 아닌가'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뭔가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형욱은 그의 회고록에서, 윤사령관이 유신 선포 5일 전에 이후락 부장과 만나 '형님이 이제 정치를 맡으십시오. 각하를 잠시 쉬게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고 건의했다고 썼다. 윤씨는 이부장을 만난 것은 유신선포 직후에 '오지암'에서였다고 했다.

'이부장의 초대를 받아 갔더니, 박용학, 김창원, 서정귀, 김정희, 서종철, 그리고 재일동포 정건영씨 들이 미리 와 있더군요. 그 자리에서 이 부장에게 제가 한 말은, 앞으로 구성되는 국회에 군 출신들을 많이 뽑아 달라는 것뿐이었읍니다.

그 무렵 저는 이부장에게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읍니다. 나의 참모장 손영길 준장이 이부장과 동향이고, 이부장 밑에서 감찰실장으로 있던 이모가 저의 친구였는데 이 두 사람이 서로 연락하여 저와 이부장 사이를 좋게 하려고 애썼는데, 이게 무슨 작당이나 하는 것으로 오해받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박대통령이 사람을 쓸 때 그 사람됨을 훤히 알고 일정기간 쓰신 다음에 버리신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각오도 하고 있었읍니다. 박정희란 보호막이 무너진다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은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박대통령이 춘천에서 8기생 출신 사단장들과 술을 함께 마신 뒤 이렇게 말했다는 정보도 윤소장에게 들어왔다.
'너희들이 윤필용이 동기생이구먼. 겁나는 것은 김대중이가 아니야. 윤필용이가 겁이 나.'
박대통령은 군 인사에 매우 신경쓰고 있었다. 윤필용은 '그때 국방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을 결정할 때는 나의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된 것도 사실이다'고 했다. 윤씨에 따르면 박대통령은 사단장급까지의 인사만 결재했으나 관심은 연대장급 인사에까지 쏟더라고 했다. 군 내부에 대한 동향보고는 매일 받았다.

노망하시기 전에……

윤필용은 자신이 거세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1973년초 하루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저를 불렀어요. 전날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읍니다.' 골프 한 코스를 돈 뒤 커피 숍에서 박대통령, 신범식 당시 서울신문사장, 박종규 실장 등 3명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신사장이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다.
'각하께서 연만하시니 더 노쇠하시기 전에 후계자를 키우셔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후락 부장이 후계자로 좋다는 이야기도 있읍니다.' 박대통령은
'미친 놈들, 내가 아직 노망하려면 멀었는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세 사람은 다시 골프장으로 나갔다. 골프를 다 치고 필드를 나왔을 때 박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신사장에게 무섭게 물었다.
'아까 그 말 말이야. 누가 그런 소릴 했어? 이후락이가 그랬나?' 박종규의 설명에 따르면 신사장은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고 한다.
'이름은 못 대겠읍니다.' 박실장이 권총을 뽑아 '이름을 대라'고 위협했다. 신사장은
'윤필용 장군이 그럽디다'고 했다는 것이 박실장의 설명이었다.

윤사령관은 그 말을 듣자마자 피가 역류하는 듯하여 전화기를 들고 신사장을 부르려 했으나 박실장이 말렸다. 박실장은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주십시오'라고 했다.
'제가 형무소에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왜 신씨가 그러한 말을 했는지 이해가 안돼요. 어떤 추리까지 해보았읍니다. 그때까지 신씨는 저와는 가깝고 이부장과는 아주 사이가 나빴어요. 그런데 7·4 성명과 유신이후에 이부장의 힘이 세어지니까 혹시 이부장이 후계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 직접 각하의 의중을 시험해보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무섭게 추궁하니까 다급해서 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고. 대통령께서도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가볍게 넘겨버릴 것이란 계산에서 말입니다. 그 전에 신씨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노쇠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간 적은 있었읍니다.'

윤필용에 따르면 유신 선포 뒤의 어느 날 신씨가 윤사령관,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김시진 민정수석비서관, 수경사 지성한 대령 등을 어느 비밀요정으로 초대하여 술대접을 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신씨는 대강 이런 뜻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각하께 정말로 충성하는 분이라면 각하께 연만하셔서 노쇠하시기 전에 청와대를 물러나십시오, 우리가 모시겠읍니다, 그러면 영원한 대통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런 말씀하실 분은 윤장군뿐이십니다.' 윤사령관은 '술집에서 당치도 않은 말씀하십니다'면서 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조사받을 때 보니 신씨가 한 말은 내가 한 말로 돼 있고, 내가 한 좋은 말은 전부 거두절미하여 오해하기 좋게 만들어놓았더군요.'

그것은 급전직하의 시작

1973년 4월 28일 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독직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윤씨는 항소를 포기, 약 2년간 복역한 뒤 1975년의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그뒤 지금껏 신씨를 만난 적도 없고, 그 사건에 대해서는 더 알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이 사건은 결론적으로 '나에 대한 박대통령의 신임이 철회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고 덧붙이면서 일본의 『방위연감』에 '이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오직 박대통령뿐이다'고 씌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의 박대통령 측근에 의하면 이후락 부장도 윤필용 사령관과 함께 거세될 처지에 있었으나 대통령께 눈물로 호소하여 구제를 받았다고 했다.

이부장에 의해서 윤필용 사건을 취급한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은 한직으로 물러났고 그 직후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윤필용 사건으로 박대통령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던 이부장이 만회의 도구로 쓴 비상수단이 김대중 납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로 1973년 말엔 이부장 역시 물러나야 했고, 일본에서의 반한 무드 속에서 문세광(文世光)의 살의가 탄생했다. 육영수의 죽음은 인간 박정희의 자제력을 약화시켜, 정권 종말을 재촉했다. 이런 연쇄반응의 과정을 짚어보면 '내사건 이후 그분이 급전직하했다'는 윤씨의 말이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같다.

'형무소 안에서 박대통령을 많이 원망했읍니다. 군복만 벗기면 됐지 옥살이까지 시키는 것은 너무 야속하십니다고요. 육여사 피격 소식을 형무소 안에서 듣고 많이 울었읍니다. 그분을 내가 누구보다도 오래 알았고 육여사의 나라를 걱정하고 부정을 싫어하는 착한 마음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많았읍니다. 내가 풀려난 이후, 박대통령을 한번도 뵙지 못했읍니다. 저는 계속해서 감시를 받았읍니다. 다만, 충격받은 내 아이들을 기분 전환시키려고 외국으로 보낼 때 김재규 부장이 각하와 의논하여 선처해준 적이 있읍니다.'

가진 자에 대한 반감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가난에 쪼들리며 성장한 박정희는 천성적인 반골이었다. 그의 생애를 일관한 이 반항의 대상은 가진 자, 일제, 경찰, 그리고 미국이었다. 그의 반항하는 방법은 체계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이었고, 감상적이었다. 박정희는 확고한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가질 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철학적인 인간성찰을 해본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의 반항방식은 낫세르, 카다피, 레닌, 모택동, 카스트로와 같을 수가 없었다.

박준규(전공화당 의장)는 박대통령은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진 자'에 대한 생래적 반감을 거의 적개심처럼 표현하곤 했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그분은 여러 번, 거의 습관적으로 재벌이나 호화스럽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꾸지람을 하시곤 했읍니다. 정주영씨 같은 사람을 좋아한 것은 그런 사람의 추진력과 실적 때문이지 결코 인간적으로 기업인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읍니다. 재벌에 수많은 특혜를 준 것도 그들을 이용하여 일단 경제의 규모를 키워놓자는 뜻에서 였읍니다. 그분은 재벌에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재벌을 이용한 것입니다.
경제정책에서 그분이 늘 염두에 두었던 것은 서민 대중, 그 중에서도 특히 농민이었읍니다. 그분이 경제각료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무리를 해 가면서 서민들을 위한 시책을 펴온 것을 예시하자면 참으로 많습니다.'

박대통령이 술자리에서 박준규가 젊었을 때 대구에서 유복하게 자라고 공부한 것을 빗대어 '그때는 박의장이 잘 나갔지'라고 농담조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투에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는 것 같아 대통령의 인간미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더란 것이다. 다시 박준규의 이야기를 듣는다.

'최근 중공 당국에서 하와이대학의 동서문제연구소장 조이제 박사에게 '박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한 연구를 의뢰했다고 합니다. 중공에서는 박대통령이 만군에서 장교로 근무할 때도 반일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면서 박대통령이 서민 위주의 이념을 갖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자본주의를 이용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더란 것입니다. 그분의 그런 정책은 중공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근대화정책에 중요한 시사가 되기 때문에 연구를 의뢰했다는 것입니다.'

1977년도 예산을 확정하기 위한 당정회의가 청와대에서 있었다. 남덕우 부총리가 박준규 공화당 정책위의장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가 아무리 각하께 이야기를 드려도 소용이 없으니 박의장께서 꼭 진언해주십시오. 내년에 15만 호의 농가개량을 하게 돼 있읍니다. 이렇게 하면 인플레가 생깁니다. 5만 호로 줄여서 하자고 말씀드려주십시오.'
박의장은 회의 도중 그 대목이 나오자 주문대로 발언했다. 박대통령은 언짢은 듯
'그건 그대로 넘어가!'라고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회의가 끝나고 청와대를 나오려는데 대통령이 박의장을 불렀다. '아까 그 이야기는 공화당의 의견이 아니지? 그 사람들(경제각료)에게 맡겨두었다가는 아무것도 안돼!' 박의장은 '농민들도 부담이 크다고 울상입니다'고 했다. '농민들이 언제 스스로 자기들 생활을 개선하자고 나선 적이 있나. 당장은 어렵겠지만 일단 해놓으면 이익이 되는 거야!'

박대통령은 재벌들이 설립한 문화재단 등을 겨냥한 규제법을, 직접 유정회의 구태회(具泰會) 의원과 공화당의 박준규 의원을 지명, 국회에서 발의하도록 시켰다. 구의원은 럭키재벌 집안이고, 박의원은 삼성그룹과 친하다고 알려져 있던 터였다.

미국과의 긴장관계가 올가미 구실

박대통령은 '가진 자'와 함께 미국에 대해서도 거센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감정적인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던 그는 해방 뒤에는 미국은 일본을 대신한 외세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대구사범 동기생으로서 5·16 모의에 가담했던 황용주(黃龍珠·전MBC사장)의 얘기다. 경찰에 의한 형의 피살, 사상적 편력, 숙군때의 고생, 그뒤 줄곧 따라다닌 사상적인 의심 등등, 그의 반미감정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뼈에 사무친 것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도식적으로 연결해보면 미국·일본과의 긴장관계가 중요한 배후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의 죽음에 크게 기여한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된 것은 일본과 유관하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서 반한 무드가 휩쓸고, 그 소용돌이에서 이후락 정보부장이 물러나고, 문세광의 살의가 굳어졌다. 그의 총탄은 육영수와 함께 박종규를 청와대에서 사라지게 하여 차실장의 등장을 가져왔다.

월남에서 한국군이 철수한 뒤 박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지렛대를 잃었다. 7·4성명, 유신 선포 등 박정희의 독자노선은 미국을 자극했다. 1975년부터 미국을 뒤흔들기 시작한 박동선(朴東宣) 사건은 망명한 김형욱이 가세하면서 반박(反朴)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박대통령도 미국 정보기관에 의한 청와대 도청설을 꼬투리로 잡아 격렬한 반미 캠페인을 폈다. 1976년 11월 주미 한국대사관 일등서기관 김상근의 망명은 신직수 정보부장의 퇴진과 김재규의 등장을 결과했다. 즉 박정희의 종말에 있어서 두 주역인 김과 차는 미국·일본과의 갈등 속에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박대통령과 미국과의 관계는 숙명적이었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1953년 3군단 포병단장 시절 박정희 대령은 포병단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단장 베이커 중령과 사이가 아주 나빴다. 고문단은 10여명의 장병으로 구성돼 있었다. 한국군 취사장에서 약 200 미터 위쪽에 미군들이 변소를 지으려고 했다. 박대령이 이에 항의했다. 미군들은 분뇨가 지하수에 스며들지 않도록 하겠다고 나왔다. 박대령은 '그렇다 하더라도 밥짓는 데 가까이 변소를 만드는 것은 우리 풍습에 어긋난다. 한국 땅에선 한국 풍습에 따라야 된다'면서 끝내 변소를 못 짓게 했다고 당시 전속부관 원병오 중위(경희대 문리대학장)는 말한다.

베이커 중령은 미8군의 포병부장 파커 준장에게 박대령에 대해서 나쁘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파커 준장은 박대령을 아는 사람이었다. 나쁜 보고가 올라오고 있으니 유의하라고 박대령에게 귀띔을 해준 모양이었다. 화가 난 박대령은 베이커 중령을 불러 '왜 그따위 보고를 올렸느냐?'고 꼬치꼬치 따졌다. 원병오 중위에 따르면 박대령은 미 고문단 장교들이 턱도 없는 참견을 하면 면전에서 '잠꼬대 그만 하라고 그래!'라고 쏘아붙였다. 통역장교가 그걸 적당히 통역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박정희에게는 늘 숙군 연루자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원부관에 따르면 박대령이 3군단 포병단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부단장으로는 정봉욱(鄭鳳旭) 대령이 같이 임명되었다. 정대령은 6·25때 인민군 포병중좌로 참전했다가 국군에 투항해왔었다. 미국측에선 그런 전력이 있는 두 사람이 같이 근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부단장을 딴데로 보내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박단장은 '정대령이 귀순한 것은 북괴군이 유리할 때이다. 그러니 그를 의심해서는 안된다'면서 같이 데리고 있으려 했으나 결국 정대령은 전보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 정장군을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이낙선(당시 대위)은 1954년에 미국에서 포병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박정희 준장이 '왜 미국놈들은 식당에서 줄을 안 서고 한국 장교들만 줄 서게 하느냐'면서 구내식당에 가지 않고 버틴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박정희 소장이 5·16 거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계기도 그가 미군에 의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을 때였다. 최경록(崔慶祿) 육군참모총장 밑에서의 작전참모부장이란 요직을 맡게 된 박소장에 대해 미 8군은 여러 가지로 견제를 걸어왔다는 것이 당시 박소장 밑에서 작전참모차장이었던 김안일(金安一) 당시 준장의 이야기다.

김준장은 박소장과는 육사 2기 동기생으로서 숙군때는 박소령을 구속 조사했던 사람이다.

'그때 미국측에선 사상적 전력이 있는 박소장이 작전 책임자로 있는데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읍니다. 미 고문관이 불쑥 나타나 1급 비밀인 한국군 방어계획을 보자고 할 때가 있었어요. 박소장은 기분이 상해 못 보여주겠다고 해요. 그러면 총장을 통해 압력을 넣어 보여주라는 지시가 떨어지곤 했어요. 미8군에선 박소장을 예편대상자로 지정, 총장을 통해서 계속 압력을 넣었읍니다.

어느 날 퇴근 무렵인데 박소장이 최총장 방에 불려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어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어요. 총장이 통보를 했던 것 같아요. 박소장이 '김형!' 하면서 저를 불러요. 이 문제는 김형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게 됐으니 8군 사령부에 가서 이야기를 잘해달라는 청을 간곡하게 합디다. 저는 그 청을 못 들어주고 말았지요.'

위기에 빠진 박소장을 구출한 것은 2군사령관 장도영 중장이었다. 2군 부사령관으로 박소장을 피신시켰다. 이 한직에서 박소장은 본격적인 모의에 들어갔던 것이다. 군복을 벗어야 할 날이 임박했다는 초조감이 무서운 집념으로 변해 그의 결단을 재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