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샬 그린 혼내준 박대통령

박상길 전청와대 대변인은 이런 에피소드를 전해준다(『나와 제3, 4공화국』).

'1965년 5월 5일 경으로 기억된다. 5·16 혁명 때에 주한 미국 대리 대사였던 마샬 그린씨는 미 8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과 함께 5·16군사혁명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끈덕지게 혁명군의 철수와 장면 합법정부의 권능 회복을 고집했었다. 대통령에게는, 아슬아슬한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이들의 승복을 받고 미 본국 정부의 지지를 얻어 최고회의 통치를 정착시킨 쓰라린 회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제 3공화국의 발족과 5대 대통령 취임, 그리고 그간의 경제발전, 한일회담 타결, 대통령의 방독, 월남파병 등으로 확고한 궤도에 올라 선 박정권은 마지막으로 한미정상회담을 열어 미국과의 관계만 확고히 매듭지으면 이제 일사천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또 이러한 정황 변동과 필요성은 미국측 또한 매한가지였다.

이런 연유로 한·미 양국 정부는 드디어 이해 2월 24일 워싱턴과 서울에서 존슨 미국 대통령의 공식초청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인 방미를 공동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대사로 전임되었던 마샬 그린씨가 내 기억으로는 미 국무성 극동담당 부차관보가 되어 본국으로 부임하는 길에 한국에 들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보고에 접한 대통령은 잘되었다는 듯하면서도 얼마간 경계하는 듯한 눈치였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에 묘한 정보가 청와대에 보고되었다. 전임 대통령이자 민정당의 총재인 윤보선씨가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와 단독으로 만나 박대통령의 방미초청을 취소하도록 건의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집무실로 불려간 나를 세워놓고 대통령은 내뱉듯이 대갈하였다. '그 X버선인지 헌 버선인지 하는 자가 하는 말을 나는 다 알고 있지. 새까만 일본 헤이타이(兵隊) 출신인 쬐끄마한 네가…… 제까짓 게 뭘 알겠느냐, 이런 말 아니오? 도대체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이오?' 나는 대통령이 이때처럼 대노한 일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런 후 마샬 그린씨는 예정된 날에 청와대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분 역시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먼저 윤보선씨를 만나고 온다는 것이었고, 선입감인지는 모르나 그의 태도는 얼마간 오만한 듯하였다. 그 자리엔 마샬 그린씨 외에 통역책임비서관과 내가 배석하였다. 영접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대통령은 담배를 꼬나 물고 다리를 포개고 버릇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상대방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응시하며 통역비서관에게 엄명하는 것이었다.

'이자에게 내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빼지 말고 그대로 통역토록 하시오.'
'그래 윤보선씨가 뭐라고 하던가?'
'당신은 지금도 내가 물러가야 된다는 소신에 변함이 없는가?'
대통령의 불을 뿜는 눈은 상대를 바위가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이 손님은 대통령의 원색에 가까운 표현쯤의 한국말은 알아들을 처지로 여겨졌다. 정말 옆에서 보기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항용 미국 사람들은 이 나라 대통령을 만나도 그 사람들 식으로 예사로 무릎 위에 한쪽 다리를 겹치고 담배는 자기 취향대로 피우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손님은 대통령의 말씀이 몇 마디 진행되자 겹친 무릎을 풀고 자세가 장군 앞에 선 병졸 모양으로 초긴장되면서, 교장선생에게 꾸중 듣는 학생 모양으로 담배는 커녕 손끝까지 떨리는듯 하였다. 그리곤 정확한 발음으로, “예-써 엑설런시(Yes, Sir Excellency)' 소리만 연거푸 하다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정신없이 나갔다. 나는 이때 크든 작든 한 나라의 국가원수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로구나 하고 느꼈고, 한 독립국가의 주권에 대하여 뼈로부터 우러나오는 긍지를 통감하였다.'

집무실엔 도청방지장치

이 무렵 사석에서 박대통령은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인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를 가리켜 '귀때기에 피도 안 마른 새끼!'라고 했고, 누군가가 대통령의 흰 머리카락이 늘었다고 하니까 '버거 대사 그놈 때문이다'고 내뱉았다.

1977년 어느 날 박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자로 전향한 남로당의 거물인사 ㅂ씨를 초청, 청와대에서 1시간 30분 동안 밀담한 적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미국이 우리한테 군사원조를 해주는 것 같지만 원조액의 몇 배나 되는 무기를 우리가 사주어야 한다'면서 미국의 정책을 비난했다. 그때까지 박대통령에게 비판적이었던 ㅂ씨는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뒤 가슴이 쓰라렸다. 미국으로부터 소외당하고 포위당한 대통령의 고독감, 고립감, 그리고 쌓인 한이 자신에게도 전염되어오는 듯했다'면서 이 면담 뒤로는, 적어도 인간적인 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미워할 수가 없게 되더라고 했다.

1977년 미군 철수 문제를 논의하는 고위 당정회의에서 가장 강경한 반미 발언을 한 것은 박대통령이었다는 것이 박준규의 증언이다. '나가려면 나가라고 해! 누가 말릴 줄 알아!' 박정권 말기에 가면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척 제한되어 있었다. 자유당 시절처럼 미군 고문단이나 군사원조를 통해서 군 인사에까지 간여할 수도 없었고, 친미 정치가들을 조종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내 언론과 의회를 통해서 말로써 시끄럽게 여론을 들끓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것이 박대통령의 깐깐한 신경을 건드렸다.

박준규 공화당 정책위의장은 1976년쯤 미국에 갔다. 미국 하원의 친한파 의원이 그에게
'청와대가 도청당하고 있다. 청와대내의 모든 사항이 보고되고 있다.'
고 귀띔했다. 귀국한 박의장은 박대통령에게 이를 알렸다. 대통령은 '과연 그런 기술이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했다. 박의장이 그 얼마 뒤 대통령 집무실에 갔더니 도청방지장치가 달려 있었다. 대통령이 대화중에 책상에 붙은 보턴을 누르면 덜덜 소리를 내면서 진동을 일으키는 장치였다. 이것은 전파에 의한 원격도청을 막아준다는 것이었다. 다시 그 얼마 뒤에 갔더니 도청장치가 떼내어지고 없었다.

박대통령은 '그놈이 시끄러워서 떼버렸다. 미국사람들이 도청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못하겠는가, 우리가 뭐 역적 모의하는 것도 아닌데 도청 하려면 실컷 하라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한미, 한일 관계를 살펴보면 지도자 사이의 인간관계가 외교관계에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박대통령은 미국의 존슨, 포드 대통령과 일본의 기시, 사토, 후쿠다 수상과는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맺고 있었다. 케네디, 닉슨, 카터, 다나카와는 인간적 유대가 약했고, 그것은 불편한 국가간의 관계로 나타났다. 유혁인 같은 측근 참모는 정상간의 인간관계야말로 외교관계를 규정짓는 기본인자라고 말했다.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뒤 문상을 온 다나카 일본 수상이 박대통령에게 '혼이 나셨다면서요?'라고 말하면서 무례한 몸짓을 하는 것을 본 뒤에는 사석에서 '경망한 놈!'이라고 말할 정도로 싫어했다.

박대통령의 추종자들도 일본의 기시-후쿠다 계열과는 가까왔으나 다나카파와는 끝내 소원하게 지냈는데, 두 정상 사이의 불편한 인간관계에서 영향받은 바도 컸다는 게 통설이다. 박대통령은 1974년 겨울에 한국을 방문했던 포드 대통령에 대해선 매우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포드 대통령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한다고 전제, 방한에 대한 체면치레로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었다. 박대통령은 포드가 돌아간 뒤 그 요구를 받아주어 거의 모든 시국관련 구속자들을 석방했었다.

승부의 기미를 읽는 야수의 본능

박대통령만큼 결단을 여러 번 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대숙군 때의 조직 계보를 털어놓기로 한 결단, 5·16 전후의 결단, 민정 이양, 월남 파병, 한일회담, 고속도로 건설, 3선개헌, 10·2항명파동, 유신 선포 등등. 그래서 그의 오랜 측근이었던 장태화(張泰和·전서울신문 사장)는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나라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그분의 결단이 돌파구를 마련한 감이 든다'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의 결단이 대체로 그의 뜻대로의 국면 타개에 성공한 것은 정확한 상황 판단력과 기민한 찬스 포착력, 그리고 과감한 행동력 덕분이었다. 이것은 그의 천성적인 재능이었다.

서기원(徐基源·최규하 대통령 시절 청와대 대변인)은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 1970년대의 어느 날 박대통령은 울산 현대조선소의 유조선 진수식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뒤 칵테일 파티가 현장에서 있었다. 언론사 경제 부장들과 그때 경제기획원 대변인이었던 서씨도 참여했다. 사람들은 박대통령 주위에 몰려 섰다. 대통령 바로 앞에는 음식상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파리 한 마리가 음식 위로 윙윙 날아다니고 있었다. 대통령은 담소하다가 말고 그 파리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휙 내리치면서 그 파리를 손바닥으로 잡아버렸다. 그 동작에서 찬 바람이 나더란 것이 아직도 생생한 서씨의 기억이다. 먹이를 노리다가 일격에 나꿔채는 맹수의 모습을 박대통령에게서 보았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의 이러한 동물적인 승부 본능은 결정적인 시기때마다 늘 적중했다. 그 몇 가지 사례-.

5·16을 성공시킨 세 번의 결단

1961년 5월 15일 밤 11시께 서울 청진동 미화여관에 있던 한웅진 준장(당시 육군 정보학교 교장)은 박소장으로부터 '급한 일이 생겼으니 빨리 우리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장군은 그 이틀 전에 박장군 호위의 임무를 띠고 부하 10명을 사복으로 갈아입힌 뒤 영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 한준장은 장경순 준장과 함께 신당동으로 지프를 달려 갔다. 박소장은 현관 옆 응접실에 작업복에 군화를 신고 출동준비를 끝낸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김종필(金鍾泌) 등 몇몇 측근들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박정희는 대충 이런 말을 했다.

'조금 전에 김재춘 대령(6관구 참모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계획이 누설됐다. 밤 12시에 출동하기로 된 부대를 장도영 총장이 못 나오게 막고 있다. 그렇다고 지방의 동지들에겐 계획 중지의 연락을 취할 수도 없다. 전화는 전부 도청되고 있다. 김재춘은 헌병들이 6관구사령부에 모인 동지들을 포위, 체포하려 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할까.'

박소장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한준장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합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박소장은 한참 골똘히 생각하더니 벌떡 일어나면서 '갑시다!'라고 말했다. 한준장은 이 운명의 밤에 박소장이 세 번의 결단을 잘했기에 거사가 성공했다면서 첫째가 헌병들에게 포위된 6관구사령부로 '갑시다'는 결심이었다고 했다.

박소장은 한웅진 준장과, 한장군이 박소장의 호위로 데리고 온 신동관(申東寬) 소령과 함께 이주일 2군 참모장이 쓰던 지프차에 올랐다. 밤 11시 30분께였다. 뒤에선 장경순이 탄 지프가 따랐다. 두 지프차는 청진동 미화여관 쪽으로 달렸다. 장도영 총장의 지시로 박소장을 미행중이던 방첩대의 두 지프차가 따랐다. 이 미행 차를 따돌릴 겸 여관에 두고 온 권총을 가지고 나올 겸 해서 한웅진은 차를 바로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로 몰지 않고 청진동 쪽으로 몰게 했다고 한다. 그때 박소장과 한준장은 45 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다.

한준장은 지프차를 여관 골목 앞에 세우게 하고 여관으로 달려가 6·25때 빼앗아두었던 소련제 권총 두 자루를 갖고 와 권총을 바꿔 찼다고 한다. 다시 출발한 두 지프를 여전히 방첩대 지프가 따라붙었다. 서울역 근방에서 요리조리 골목을 들락거렸으나 미행차를 떼놓지 못했다. 6관구사령부 입구에 닿으니 보초는 쿠데타 군의 편이 아니었다. 한준장과 박소장은 차를 내려 걸어서 사령부 건물까지 들어가야 했다. 5∼6명의 헌병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 감시하는 속에서 걸어갔다. 뒷 차에서 이 모습을 본 장경순은 체포당하는 것으로 판단, 차를 돌려 김포의 공수단으로 갔다.

6관구사령부는 원래 쿠데타군의 임시 지휘본부로 지정되었었다. 정보 누설로 주동자들을 체포하러 온 헌병 및 CID대원들과 주동자들이 뒤섞여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적과 아군이 공존하고 있었다. 박소장은 부사령관실에서 김재춘 대령으로부터 계획된 부대 동원이 어렵게 되었고 공수단과 해병대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 보고를 받았다.

이때 서울지구 방첩대에 있던 장도영 총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장총장은 '출동부대를 못 나오게 했으니 가서 자고 내일 나와서 이야기합시다'고 말렸다. 박정희는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각하를 모시고 하는 것이니 가만히 보고만 계십시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다. 박소장은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얼마 뒤 편지를 읽은 장총장이 다시 전화를 했다. '편지는 잘 보았는데 장면(張勉) 정부에 경고하는 것으로 그칩시다'고 또 말렸다. 박정희는 언성을 높여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했다는 것이 그 자리에 있었던 윤필용 중령의 기억이다.

'청년장교들이 백척간두에 선 국가와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섰읍니다. 막지 마십시오.' 전화기를 내동댕이치듯 하여 끊었지만, 이때 박정희는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다. 한웅진에 따르면 박소장은 여기서 박치옥 공수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포에서 출동할 시간인 밤 12시가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박치옥 단장은 장도영으로부터 출동 금지를 엄명하는 전화를 받고 흔들리고 있다고, 통화를 끝낸 박소장은 말했다. 또 다른 출동부대인 해병여단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쿠데타군은 이렇다 할 병력 없이 지휘부만 6관구사령부에 모여 고립돼버린 셈이었다.

박소장은 일어서면서 '직접 가보자'고 했다. 이것이 두번째 결심이었다. 박소장은 한준장과 함께 지프를 타고 공수단 쪽으로 달렸다. 공수단에서 박소장은 박치옥을 따로 불러내 '장총장도 오케이했어'라고 속임수를 썼다는 것이, 박소장의 말을 전해들은 한준장의 얘기다. 박소장 일행이 공수단장실에 가보니까 장경순 준장이 거기에 있었다. 부대 출동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박소장이 독려차 출동, 부산스런 출동준비가 시작되었다. 박치옥의 출동 지연에 갑갑증을 느끼고 있던 차지철 대위 등은 무기고를 때려부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박정희가 목격했다. 한준장은 '무덤까지 따라간 차지철이 그토록 중용된 것은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보인 그의 충성심을 박장군이 확인했고, 그 인상이 오래 갔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공수단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박소장은 다시 지프차를 타고 해병여단 쪽으로 달렸다. 그날 지프차 안에서 박소장은 겉으로는 침착 냉정했다. 그러나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뒷자리에 앉은 한준장과 앞자리의 박소장은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하여 그날 밤 여섯 갑을 태웠다고 한다. 박소장은 라이터를 쥐고 있으면서도 한준장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독촉하기도 했다. 한준장은 박소장을 위로한다고 이렇게 말했다.

'실패하면, 빌어먹을, 산속에라도 들어가 협상이라도 벌입시다.'
'병력이 나와야 협상이라도 하지.'
박소장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박소장은 도중의 경찰지서에 내렸다. 경비전화로 해병대와 연락하려 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시 지프를 몰고 달렸다. 며칠 뒤 박정희는 한준장에게 '내가 그때 지서에 지휘봉을 놓고 나왔어. 신동관이보고 찾아오라고 했지'라고 했다. 박소장은 그만큼 속으로는 떨고 있었다. 박소장은 도중에서 해병여단 정모 중령의 지프차와 만나 해병대가 이미 출동, 한강다리 쪽으로 진군중임을 알게 되었다. 박정희 소장이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끄고 다가오는 해병대를 만난 것은 양화교 부근에서였다. 여단장 김윤근 준장, 대대장 오정근 중령, 김동하 예비역소장과 반갑게 악수했다. 육영수가 피살된 뒤 박대통령이 박종규 경호실장의 후임으로 차지철과 함께 오정근을 생각한 적이 있었던 것도 이때의 고마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해병대 뒤를 이어 공수단이 따라와 붙었다. 김윤근 준장은 다른 육군 부대의 출동이 여의치 않아 해병대가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고 쇠뭉치로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김준장은 평소에 '해병대가 반란군의 선두에 서면 누가 정권을 잡든지 해병대를 없애버릴 것이다'고 생각하여 선두를 피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해병대와 공수단 병력이 한강다리에 진입, 선봉이 강 북쪽에 거의 이르렀을 때 총성이 처음으로 울렸다. 이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장도영이 배치한 헌병들이 차량 헤드라이트를 비춰놓고 일제사격을 가해왔다. 해병대 병사들은 차에서 뛰어내려 엎드렸다. 이때 박소장 지프차는 해병대와 공수단 사이에 있었다.

박소장과 한준장은 지프에서 내려 다리의 보도를 걸어 앞으로 나갔다. 핑 핑 총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가고 있었다. 김윤근 준장이 달려오더니 '전진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했다. 그때는 대부분의 병력이 다리 위에 얹혀 있어 사격선에 완전히 노출돼 있었다. 박소장은 다리 난간을 붙들더니 물끄러미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그 심각한 인상이 한준장의 뇌리에 오래 남았다. 그래서 나중에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읍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가족들 얼굴이 한강물에 떠오르더군.' 박정희는 난간에서 몸을 돌리더니 일본말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라고 내뱉았다. '한번 더 밀어봅시다.' 이것이 박소장의 세번째 결단이었다.

김윤근 준장은 재공격을 지시, 저지선을 돌파했다. 한강을 넘은 것이다. 불과 수천의 병력이었지만 서울의 도심지는 무방비상태였다. 장면 총리 편일지도 모르는 60만 대군은 너무 멀리 있었다. 5월 16일 오전 5시께 남산 KBS 방송실에서 박정희 소장은 그날 밤 처음으로 웃는 얼굴이 되었다. 한웅진 준장은 그날 밤 줄곧 박정희와 동행하면서 '방송이라도 하고 죽읍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방송 원고를 박소장이 직접 읽기를 바랐다. 다른 장교들도 권했다.

그러나, 박소장은 잠시 부끄럼을 타더니 원고를 박종세 아나운서에게 건네주었다. 한준장은 이게 매우 섭섭했다는 것이다. 한웅진은 '5·16 그날 밤 박소장의 침착 결연한 행동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했고, 윤필용도 '5·16은 의지력의 싸움이었고, 이 싸움에서 그분은 장면과 장도영을 압도했다'고 말했다.

10·2 항명파동때의 비정

'오치성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안이 공화당내 4인체제의 기습으로 가결된 1971년 10월 2일 저녁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후락 정보부장은 성북동의 한정식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기분도 기분인지라 별다른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때 어디에선가 이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 각하, 알았읍니다'라는 이부장의 대답소리를 듣고 김실장은 박대통령에게서 걸려온 전화라는 것을 알아 차릴 수가 있었다. 이부장은 '알았읍니다'만 연발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말없이 자리에 돌아온 이부장은 언더락스 잔에 양주를 가득 채워 스트레이트로 석 잔을 거푸 마시더니 '저 먼저 가보겠읍니다. 오늘 저녁에 중대한 일이 있을 겁니다'하고 일어섰다. 김실장은 그때 등골에 식은땀이 저절로 흐르더라고 했다. 이부장의 표정이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월간조선』 1985년 3월호, 신형식 전공화당 사무총장이 쓴 『김성곤은 박정희를 시험했다』)

박대통령이 공화당의 실력자 김성곤·길재호를 항명으로 규정, 제명하고 4인체제 추종 인물들을 혹독하게 다루도록 한 데 대하여, 유혁인(10·26 당시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이 그때 이 문제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풀이했다.

'그분은 이 시점에서 4인체제를 휘어잡지 못하면 그뒤로는 대통령 행세를 제대로 할 수 없고, 공화당도 콘트롤할 수 없을 뿐 아니라 4인 체제에 얹혀서 잔여 임기를 보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승부의 찬스로 삼았던 것 같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럴 위기감을 느낄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박대통령은 승부의 기미를 읽는 데는 도통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것이 합당한 대응이었는지 아닌지는 쉬 가늠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어쨌든 10·2 항명파동 이후 여권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읍니다. 공화당은 독자성을 잃고 슬슬 기기만 했읍니다. 공화당 운영은 위탁경영에서 대통령 직영체제로 바뀐 것이지요.'

유신 선포하던 날 아침의 박정희

10·26당시의 대통령 특별보좌관(새마을 담당) 박진환은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당일의 박대통령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아침에 우리 특보들은 부름을 받고 대통령의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에 모였읍니다. 분위기가 팽팽하고 싸늘하더군요. 박대통령은 그때 양복을 입고 있지 않았읍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상황실에 좌정한 야전지휘관 같은 옷차림이었읍니다. 커피가 나오고 이어서 소책자 한 권씩을 돌립디다. 표지를 넘기니까 '국회해산' '비상계엄령선포'란 글이 눈에 홱 들어오지 않겠읍니까. 저는 뒤통수를 한방 맞은 것처럼 머리가 핑그르 하는 기분이었읍니다. 배경설명을 읽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읍니다.

한참 있다가 대통령은 '어때요?'라고 물어요. 아무도 대답을 안하길래 제가 '정치문제는 모르겠고 자원파동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위기는 이걸로 극복이 될 것 같습니다'고 했읍니다. 나중 이야깁니다만,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누가 반대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하지 않더군'이라고 했답니다. 조금 있으니까 이후락 부장이 들어오더니 미국대사관측에서 연락이 왔다고 해요. 유신 선포의 배경설명에 '미국과 중공의 접근' '월남 평화협상'의 예를 들면서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라는 내용이 있었읍니다. 미국 쪽에선 그 대목을 빼달라고 한다는 거예요. 박대통령께선 '뭐' 내가 거짓말했나.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라면서 못마땅해하셨어요.

김정렴 비서실장이 옆에서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면서 설득을 하니까 '그래, 빼줘!'라고 하셨어요. 얼마 있다가 또 김실장이 들어왔어요. 이번엔 일본대사관에서 배경설명에 있는 '일본도 중공과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하는 대목을 빼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대통령께선 대뜸 일본말로 '호네누키노곤야쿠다'라고 내뱉았어요. '뼈를 빼버린 곤야쿠다'는 뜻인데, 핵심을 뺀 이야기가 되지 않겠나 하는 뜻으로 하신 것 같아요. 결국 일본측의 요구대로 해주었읍니다. 그때 박대통령의 비장한, 결연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결단력 약해지면서 다변이 돼

지도자로서 박정희의 가장 큰 무기는 침묵이었다. 그는 침묵으로써 자신을 방어했고, 상대를 긴장시켰으며, 그 귀한 침묵을 깸으로써 호의나 결의를 나타냈다. 그는 침묵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정치인으로 꼽힐 것이다. 박정희 장군의 사단장 시절,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사위 한병기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늘 자세를 꼿꼿하게 다져잡고 딱 버티고 말없이 앉아 있으니 도무지 허점이 안 보여요. 말을 많이 하면 저절로 빈틈이 노출되는데 그 말을 아끼니까 파고들 구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사람을 멀리하는 게 아니라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어요. 그분을 따랐던 청년장교들이, 그분의 언변에 감동한 것은 아니었읍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랬지만 사단장 시절에도 부하들이 브리핑을 하면 절대로 참견하지 않고 듣기만 해요. 잘잘못을 지적하지도 않고, 좋다 나쁘다 표현도 안하시지요.

다만 브리핑을 다 듣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그게 바로 핵심을 찌르는 거예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그 브리핑에 대한 평가가 될 만한 그런 질문이었읍니다.'

박대통령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는 나타내지 않았다. 말없이 듣는 동안 그는 온갖 계산을 머리속에서 하고 있을 터이지만 표현을 절제했다. 이것이 부하들에겐 무서운 태도였다. 윤필용 전수도경비사령관의 말.

'보고를 받으시는 그분의 모습은 세 가지였읍니다.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 만족한다는 뜻이고, 꼿꼿하게 듣기만 하시면 그럴 듯하다는 뜻이고, 담배를 빨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계시면, 그때는 보고를 중단하고, 좀더 연구해가지고 오겠읍니다고 말한 뒤 나와야 해요.'

소설가이기도 한 서기원 전청와대 대변인은 박대통령이 경제각료회의 등에서 몇십 분 동안 말없이 브리핑을 듣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휙 나가버리는 일이 더러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 대통령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회의가 별도로 열리곤 했다. 서씨는 '박대통령은 아주 간결하고 적확한 언어감각을 가진 분이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글로 옮겨놓아도 문장이 될 정도였다. 무엇을 표현하는 데 정확한 낱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비슷한 낱말을 빌어쓰지 않고, 적합한 낱말이 생각날 때까지 한참 침묵하곤 했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의 결단은 오랜 침묵과 계산 뒤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과감하고 단호한 결심으로 비쳐졌을 뿐이었다. 유신 말기에 접어들면서 박대통령의 결단력에 적신호가 나타나고 있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 임방현(林芳鉉·민정당 국회의원)은 박대통령이 가끔 혼잣말처럼 '내가 하긴 참 오래 했지. 위기도 많이 넘겼어. 6·3사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이제 다시 그런 결단을 내리라면 못할 것 같애'라고 뇌까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방송 회장이던 최석채(崔錫采)는 이렇게 말했다(『월간조선』 1986년 1월호 「퇴역한 현역 최석채」).

'박대통령과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서 세상 이야기를 했는데, 벼슬을 바라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든지 했거든요. 재미있는 건, 초기엔 내가 50분 얘기하면 그분은 계속 듣다가 한 10분쯤 얘기했어요. 그런데 1968년 이후는 내가 30분 얘기하면 그쪽에서 30분 얘기했고, 70년 이후엔 반대로 그쪽에서 50분 얘기하고 내가 10분 얘기했거든요.'

유신체제에 안주하면서 야성을 잃기 시작

박대통령의 결단력은 10월유신 선포 이후 서서히 약화되어갔다. 10·2항명파동으로 여당은 그의 사조직으로 전락했다. 유신 선포로 대통령 경선의 부담도 덜게 되었다. 여당이 약화되니 야당도 약해졌다. 윤필용·이후락·김종필이 차례로 권력 핵심부에서 물러남으로써 그에게 거북한 부하들도 사라졌다. 그들 대신에 등장한 김재규·차지철·최규하(崔圭夏)는 적어도 그의 위광에 도전할 인물들은 못 되는 것 같았다. 깨끗이 정지작업한 권력 핵심부에서 박대통령은 도전다운 도전 없이, 안주하게 되었다. 도전이 없으니 결단도 없었다. 그의 결단력과, 인심과 시류의 변화를 기민하게 파악하는 통찰력은 무디어가기 시작했다.

유신 선포에 의한 장기집권 체제는 박대통령으로부터 야성을 빼앗아갔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그런 박대통령을 퇴행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이후 정권적 차원의 도전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박대통령에게 1979년은 너무나 갑자기, 또 무섭게 덮쳐왔던 것이다. 더구나 그 도전의 지도자는 51세의 팔팔한 김영삼이었다. 박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체제에 안주함에 따라 그는 이 세상과 점점 멀어져갔다. 측근에 의해 그의 인간 접촉은 통제되었고 그는 '영명한 지도자'로 신격화되어갔다. 박근혜양이 양로원에 주는 물품이 '하사품'으로 보도될 정도였다.

박대통령은 군인시절에 바른말하는 부하들을 좋아했었다. 유신 말기에 가면 그는 그런 부하들을 점점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그와 절친했던 서정귀(徐廷貴·전호남정유 사장)는 술자리에서는 대통령에게 'X만한 게 간이 얼마나 크기에 혁명했노?'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스스럼이 없었다. 10월 유신 뒤 서씨에게 작가 이병주(李炳注)가 '요즈음은 대통령에게 직언을 안하나?'고 물었다. 서씨는 '쳇, 요사이는 그 사람이 모든 데 통달한 천재가 돼가지고, 나 같은 범재의 말을 듣나!'라고 했다. 서서히 박대통령의 패기 있고 소탈한 모습도 가부장적인 근엄한 면으로만 국민들 눈에 비쳐지기 시작했다.

소탈한 멋도 빛을 잃고

윤필용은 박대통령의 진면목인 소탈 겸허한 모습이 말기에 가서 권위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청와대 측근들 때문이라고 통탄했다.

'제가 월남에서 돌아와보니 골프 치는 모습이 바뀌어졌어요. 그전에는 대통령이 칠 때는 앞뒤로 두 홀 정도 비워놓았어요. 그러면 박대통령은 자신 때문에 밀린 사람들에게 모자를 벗어 '먼저 가서 미안합니다'고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골프 코스로 나가시곤 했읍니다. 박대통령의 인사하는 모습이 그렇게 겸손하고 미안해보일 수가 없었읍니다. 그런데 월남에 갔다가 와보니 박대통령 근처에 사람 그림자도 얼씬 못하게 해버렸더군요.'

박정희는 장군·대통령이 된 뒤에도 천성적인 부끄럼 타는 성격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윤필용은 20년간 곁에서 모셨지만 박정희가 이빨을 드러낼 정도로 크게 소리내 웃는 것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늘 픽 또는 씩 웃는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처음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한웅진 준장에게 이렇게 내뱉았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가두에 사람들을 동원해서 웬 환영을 한다고 그래!'

윤필용은 박정희 대통령과 술을 마셔본 이들은 그에게 반하게 된다고 했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셨어요. 집무시의 꼿꼿한 자세를 풀고 술을 권하시는 모습은 꼭 형님같이 다정했어요. 얼큰해지면 힘이 빠진 상체를 비스듬히 놓으시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렇게 친근감을 느낄 수가 없었읍니다. 이런 모습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읍니다.' 윤필용은 '박대통령이 말기에 가서는 완전히 피로해지셨다'고 말했다. '그러니 술과 여자에 빠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분은 장기집권은 안된다는 것을 그런 종말로써 보여주신 겁니다. 저도 도로공사 사장을 6년 했는데 후반기 3년이 전반기 3년과 같지 않더군요.'

종교 및 이념의 빈곤에서 허무주의적 타락으로

장기집권 체제에 안주하면서도 날카로운 판단력과 결단력을 유지해가려면 체계적인 지식과 세계관, 그리고 철학적인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무신론자였고, 그렇다고 확고한 이념체계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지독한 가난에 쪼들리며 살아온 박대통령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파악한 사람이었다. 보리고개를 없애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가 그린 '조국 근대화'란 청사진의 밑그림이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배가 불러야 민주주의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곤 했다.

그는 권력을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동원했다. 그가 군 시절에 그토록 저주했던 부정과 부패도 '배고픔의 해소'란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라며 용인했다. 그런 박대통령은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문제, 즉 인간의 가치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윤필용은 '그분이 종교적이나 철학적인 자기성찰을 한 사람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고 했다. 박정희란 인간과 그의 통치기구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인간은 어떤 존재냐'하는 철학적 인식이었다. 철학, 즉 사상적인 지식체계가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엔 일관성이 없었고 그의 정책엔 원칙이 없었다. 실용적인 지식에만 관심이 컸던 박대통령은 장기집권으로 빠져들수록 철학의 부족에 의한 허무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