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조짐은 1978년부터
1979년의 파국은 1978년에 벌써 시작된 것이었다. 1978년은 박대통령이 집권한 지 17년, 유신체제가 출범한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대통령은 피곤했고, 체제는 더욱 굳어가고 있었다. 선거의 해 1978년은 3대 스캔들의 해였다. 기업부정(현대아파트 사건), 공무원 부정(경북교위의 가짜교사사건), 정치인의 타락(成樂鉉 스캔들)으로 이어지는 3대사건은 유달리 더웠던 이 해의 여름에 몰려 터졌다. 박정권의 논리성과 윤리성이 막다른 골목길로 몰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사건들이었다. 1978년은 긴급조치 9호의 공포에서 벗어난 민주화운동 세력의 저항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했다. 3년 묵은 긴급조치 9호는 그 약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중요 학생사건 일지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1975년엔 10건, 1976년엔 13건, 1977년엔 23건으로 늘더니 1978년엔 31건으로 급증했다. 1978년의 학생사건들 가운데 3분의 2는 통일주체대의원 선거와 그들에 의한 대통령선거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났다. 노동자·농민의 조직적 저항도 심상치 않게 나타났다. 1월 21일 대구 아리아악기 노동자 다섯 명은 부사장 집에서 인질 농성을 벌였다. 2월 21일엔 유명한 동일방직 노동자 추방사건이 일어났다.
2월 28일엔 서울에서만 80여명의 반정부 인사들이 자기 집에 연금 당했다. 3·1절 행사에 대비한 정보기관의 예비검속이었다. 3·1절 기념예배가 중단된 곳도 많았다. 3월 26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선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예배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억울함을 호소하려다가 여섯이 구속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중계방송이 잠시 중단됐다. 4·19를 맞아 반정부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수유리의 4·19 혁명 희생자 무덤에서 예배를 올리다가 사복형사들에게 붙들려갔다.
4월 24일엔 전남 함평 고구마 부정수매사건 피해자들이 광주 북동 천주교회에서 농민대회를 열고 항의농성을 벌였다. 5월 4일엔 이화여대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주동하여 반정부 유인물을 돌리다가 3명이 구속됐다. 사흘 뒤 이대 학생들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 교내시위를 벌였다. 8일엔 서울대학교에서 데모가 있었고, 9일엔 이화여대생 천 명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유신반대 데모를 벌였다. 24일엔 서울구치소에서 썩은 음식 배식사건이 일어났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1978년도 사업보고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사건은 4월 23일 서울구치소가 3천 명의 재소자들에게 상한 국을 줌으로써 일어났다. 긴급조치 위반자 등 양심수들은 이에 항의, 농성을 벌였다. 5월 24일에도 구치소 당국은 상한 두부국, 썩은 김치를 내놓았다. 그나마 두부는 정량보다 3분의 1이 적었다. 재소자들은 다 같이 식사를 거부하고 3시간 동안 '정량 배식하라' '두부 정량 내놔라'고 외치며 구치소 소장의 해명을 요구했다.
성의 있는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27일엔 또 썩은 단무지가 나왔다. 수감자들은 다시 한 차례 농성을 벌였다. 구치소에선 긴급조치 위반자를 비롯한 양심범 13명을 독방으로 집어넣었다. 명찰을 뗀 교도관 40여 명이 이들에게 뒷수갑을 채운 뒤 입에서 거품이 나도록 때리고 3시간씩이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만행으로 장기표(서울법대 출신) 등 여러 수감자들은 호흡 곤란을 겪었다. 성종대(연세대)는 실신, 병원으로 옮겨졌다.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숨이 막혀 괴로와하는 김거생(연세대)을 보다 못해 방독면을 조금 늦추어주려던 일반 출역수 한 사람은 교도관들에게 들켜 뭇매를 맞았다. 박석운(서울법대 4년)은 전등도 없는 '먹방'으로 보내져 두 팔을 뒤로 묶인 채 잠도 못 자고 개밥을 먹었다.
신광용(평화시장 노동자)은 접견장에서 이런 사실을 폭로하다가 교도관에게 끌려가 뭇매를 맞았다. 이에 앞서 5월 13일엔 긴급조치 위반 학생들이 통대 대의원 선출 부재자 투표를 거부했다가 교도관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일도 있었다. 구치소 당국은 5월 31일 새벽에 이들 34명을 전국 각지의 11개 교도소로 옮겨버렸다.'
5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인명진 목사가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4월 17일에 청주 도시산업 선교회에서 마련한 농민을 위한 기도회에서 설교한 내용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검사의 공소장엔 인목사가 인용한 성서 귀절(「마가」2장 1절, 7장 3절)이 적혀 있었다. 권력자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꾸짖은 이 성서 귀절이 공소장에 인용되자 기독교계에선 '기소된 성서'라 하여 반발, 검사는 1심 재판 뒤 그 귀절을 공소장에서 슬그머니 빼버렸다. 이 사건에 대해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는 성명서를 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 정부가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도록 강요하고 찬송을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게 탄압했으며 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없도록 한국 교회에 압력을 가한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성서의 본문을 죄목으로 기소하여 목사를 구속까지 한 데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읍니다.'
인목사는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으나 여섯 달 뒤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통대 대의원 선거에 대한 투쟁
5월 18일로 예정된 통대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권단체와 학생들은 이 선거의 허구성을 비난하고 나섰다.
'우리는 소위 유신체제 제2대 대의원 선거를 치르는 현시점에서 오늘의 언론 현상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강요된 사고만을 전파하기에 길들여진 현 언론은 민중이 두려워 권력층에 아부하고 역사가 두려워 사실을 왜곡하고 정의가 두려워 불의에 타협하는 타성에 젖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는 것이 무서워 눈을 감아버리고 듣는 것이 무서워 귀를 막아 버리고 말하는 것이 무서워 입을 다물어버리는 오관상실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의 언론은 분명히 역사와 민중과 정의 앞에서 단죄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현제도 아래서의 선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아울러 사이비 언론에 대한 범국민적인 거부 운동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동아투위 성명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안고 있는 문제는 젖혀두고라도 정적이나 정치적 반대자를 구속해놓은 상황 아래에서, 그리고 사실상의 계엄령과 다름없는 긴급조치 아래에서의 선거란 무의미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에 대한 아무런 반성이나 개선도 없이 선거를 강행하는 것은 정직치 못한 일이요 국민을 우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본위원회는 통대선거가 무의미하며 부당한 것임을 결의한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교회와 사회위원회 결의문)
5월 7일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오늘의 한국 언론인 여러분께」라는 공개서한을 발표, 동일방직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을 비판했다. 8일엔 서울대학생 1,500명이 통대선거 반대, 동맹휴학, 민주헌법 부활 등 7개항을 결의하고 학원민주선언문을 발표했다. 동맹휴학 가담자는 계속 늘어가 19일엔 서울대학생들의 40퍼센트가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5월 16일엔 한신대생 100여명 들고 일어났다. 대학당국에선 학생들의 공기가 이상하다면서 15∼20일을 독서주간으로 정해 사실상 휴강을 선언하자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이에 반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18일 오후 6시께 사복형사들이 예배실로 들어가 10여 명의 학생들을 붙들어갔다. 5월 18일 통대 선거는 투표율 78.95퍼센트를 보이고 끝났다.
그 뒤로도 대학의 저항은 계속됐다. 6월 1일 오후 1시께 서울농대생 200명 가량은 '농촌문제에 관한 학술 심포지움'을 열다가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 교정으로 뛰어나가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시작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이 땅의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선혈로 사라져간 김상진 형을 생각하며 모두 일어나자'고 했다. 이들은 경찰과 맞서다가 여학생 기숙사로 쫓겨들어갔다. 오후 6시께 경찰은 평화적 협상을 거절하고 기숙사를 에워싸고 최루탄을 쏘아댔다. 격분한 학생들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경찰들과 치고 받는 난투극을 벌였다. 학생 50여 명이 연행됐고, 신언관·이병호·권오훈군이 구속됐다.
6월 12일 낮 12시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생들이 「학원민주선언」을 낭독하고 교정으로 뛰어나왔다. 자연대학 학생들도 가세했다. 데모대는 3천 명쯤으로 불었다. 경찰이 교내로 쳐들어가 진압작전을 폈다. 이날 학생들은 6월 26일 오후 6시에 세종로 네거리에서 전 시민·학생 반정부 시위를 갖는다는 행동지침을 공표, 당국에 대결을 예고했다. 12일의 데모로 60명쯤이 경찰에 끌려갔다. 김수천 등 아홉 학생들은 구속됐다.
6월 16일 서울대 농대 학생 3명은 이 데모 소식을 편지로 지방 친구들에게 알렸다가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유신체제의 정보정치는 개인의 편지까지 손대고 있었다. 이때 부산 중부교회의 김형기도 서울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에게 '지금은 침묵이라도 해야 할 때다'는 충고 편지를 썼다가 검열에 걸려 경찰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았다. 24일엔 동국대 학생 3명이 친구에게 6월 26일 광화문으로 나오라는 편지를 썼다가 들통이 나 구속됐다. 편지 쓰는 것도 죄가 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예고된 6월 26일이 왔다. 경찰은 새벽부터 수많은 반정부 인사들을 미행 감시 연금했다. 오후 6시 40분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민권의 노래」를 시작으로 700명쯤의 대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했다. 서울대·고려대·숭전대·이화여대·외국어대 학생들이 뒤엉켰다. 그들은 경찰의 제지를 받으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수법으로 국제극장 건너편, 동아일보사 앞, 종각 앞, 종로2가 등 도심의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시위했다. 이날 데모는 밤 10시 20분까지 계속됐다.
이런 야간데모는 1년 뒤 부산 광복동에서 벌어져 유신정권의 뿌리를 뒤흔들 터였다. 광화문 야간 데모에 서울 시민들은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손뼉 치는 사람도 적었다. 꺼리는 반응까지도 보였다. 이날에 데모 가 터질 것임을 감방에서 알고 있었던 서대문구치소 양심범들도 광화문 데모와 때맞춰 옥중 농성을 벌였다. 광화문 데모 현장에서 70여 명이 경찰에 끌려갔다. 고려대 강춘구 등 20명이 구속되고, 20명은 즉심에 돌려져 구류 20일 처분을 받았다.
대통령 선거 직전의 시위사태
6월 27일 전남대학교 송기숙 등 열한 명의 교수들은 「우리의 교육지표」란 성명을 발표했다. 송기숙 외에도 김두진·김정수·김현곤·명노근·배영남·안진오·이방기·이석연·이홍길·홍승기 교수가 서명한 이 교육지표는 '대학인으로서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볼 때 오늘의 교육은 실패했으며 국민교육헌장은 이러한 실패를 집약하는 본보기'라고 지적했다. 이 사건과 관련, 교수 열한 명 모두가 수사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자퇴 형식으로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송기숙 교수는 구속됐다.
다음날 전남대 학생 200명 가량은 정오께 학교 도서관 앞에 모였다. 그들은 '연행된 교수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교수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29일 정오께에도 전남대학생 700여 명은 도서관 앞에 모였다. 『6·27 양심교수 연행에 대한 전남대 민주학생 선언문』을 낭독한 뒤 그들은 도서관 2, 3층을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오후 6시께 경찰은 페퍼포그를 쏘며 도서관에 몰려들었다. 치고 때리면서 그들은 학생들을 밖으로 끌고 가 경찰버스에 태워 경찰서로 연행했다. 학생들은 밤 11시께 해산했다. 이것을 기다리던 경찰은 또 100명쯤을 잡아갔다.
이튿날 오전 등교했다가 '임시휴교'가 나붙은 학교 주변을 서성대던 학생들은 경찰이 에워싸 무차별 폭행을 가해오자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학생들은 경찰에 쫓겨 광주거리로 쏟아져나갔다. 그들은 오후 3∼4시까지 시내 곳곳에서 데모를 벌여 경찰과 맞부딪쳤다. 다친 학생들은 100명 가량이나 됐다. 학생 500명쯤이 데모 이틀 동안 경찰에 끌려갔다. 이영송 등 학생 열 명이 구속됐다. 유인물 제작을 도와준 YMCA 김경천 간사, 인쇄업자 정문철도 구속됐다.
이런 모든 사건들이 매스콤에선 한 줄도 비치지 않았다. 7월 6일의 대통령 선거날이 다가옴에 따라 정부의 민주인사 탄압과 학생들의 저항은 도를 더해갔으나 언론은 귀를 막고 눈을 감았으며 국민들은 무관심으로 대했다. 9대 대통령 선거날이 다가오자 공안기관은 예비검속을 강화했다. 서울에서 당국은 7월 4일 밤 10시부터 민주화운동권 인사 100여 명에 대한 가택연금을 실시, 8일 밤 10시까지 나흘간 계속했다. 한 집에 7, 8명씩의 사복경찰을 깔았고, 항의하는 사람에겐 '상부의 지시'라고만 얘기했다.
5일 윤보선·문익환을 중심으로 한 각계 인사 300 여 명은 민주주의 국민연합을 발족시켰으나 민주인사 연금사태로 창립총회를 갖기 못했다. 5일 오후 전주교구 신부 30여 명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국이 신부들에 대해 미행, 감시 등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데 항의하고 파티마 성당 옥상에서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밤 10시 30분께 이 성당에 경찰에 쳐들어갔다. 그들은 신부들을 두들겨 패고 문정현 신부를 끌고 갔다. 경찰은 기동타격대까지 동원, 사제관 창문을 부수고 들어갔었는데 항의하던 박종상 신부는 얻어 맞아 중상을 당했다.
10일 밤 전주교구 중앙성당에서 신부 80여명 등 1,500여 명이 모여 '정의평화 기원 미사'를 올렸다. 미사를 마친 뒤 신부와 신도 300 여 명은 밤 10시께, 카톨릭 센터 옥상에서 7·6사태를 규탄하며 농성중인 신부 20 여 명을 찾아가 격려했다. 이들이 해산하려는 때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강덕형 신부를 곤봉으로 때리는 등 과격한 방법으로 신도들을 해산시켰다. 격분한 신부들은 11일 밤 다시 전동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정의 평화위원회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경찰에 집단폭행을 당한 뒤 사경을 헤메는 박종상 신부를 한밤중 길거리에 내버린 비인도적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신부들에 대한 미행·감시 중단과 내무부장관의 공개사과 등 여섯 항목의 요구 사항을 내세우고 이날 밤부터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전주교구내 모든 신부들이 단식기도에 가담했다.
13일 오후엔 전주교구 평신도사도직 협의회도 긴급총회를 열고 불법처사를 빨리 바로잡을 것과 신앙자유의 보장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날 밤 8시께 중앙성당에선 다시 2천여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가 끝난 뒤 신부 및 신자 350여 명은 철야기도를 시작했다. 단식 여드레 만인 18일 전라북도 경찰국장 등 당국자의 사과를 받고 이들은 단식을 끝냈다.
● 단일후보
● 반대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 99%의 투표율 99% 찬성 투표
〓한국인권운동협의회〓
78민중선언
이 무렵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앞에 실린 바와 같은 내용의 전단을 찍어 뿌렸다. 유신체제 아래서 수많은 지하유인물이 나왔지만 이 전단과 견줄 만한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객관성과 함축성, 유신체제의 본질을 까발린 간결성·해학성으로 해서 이 전단은 예술적 감동마저 주고 있다. 이 전단을 지하유인물 가운데서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은 안전성 덕분이었다. 여기에 인용된 것은 모두 유신체제에 편입된 제도언론과 관제 교과서였기 때문에 법으로 옭아맬 아무런 꼬투리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전단엔 주관적 서술이 없다. 그런 것은 오히려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비교법이 완벽하다.
통대 대의원 선거와 대통령선거가 지나가고 한여름에 3대 스캔들이 국민들을 화나게 한 뒤 각급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9월 13일 오전 11시께 서울대학교 2천 명 가량은 반독재선언문을 발표, 교내데모에 들어갔다. 2층 베란다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던 조성을은 뛰어내려 달아 나려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며 진압에 나섰다. 학생들은 세 시간 동안 학교 건물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다니면서 데모를 계속했다. 경찰은 강의실에까지도 마구 쳐들어갔다. 오후 3시께엔 학교에서 버스로 10분쯤 떨어져 있는 장승백이에서도 일부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다.
이날엔 세 가지 선언문 「우리의 주장」「결의사항」「행동강령」이 발표됐다. 행동강령 중엔 '10월 16일부터 21일까지 전대학 동맹휴학'과 '10월 17일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반정부 범시민궐기대회'를 요구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경찰은 이날 학생 50여 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조성을 김종복 등 학생 10명을 구속했다.
고려대 학생들 2천여 명은 9월 14일 오전 11시 강당에서 「78 민중선언」을 채택한 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반정부 데모에 들어갔다. 거리로 뛰쳐나가려다 제지당하자 연탄을 집어던지고 교문을 잠그고 맞서다가 학교내 기관원 대기실을 습격했다. 그 안에 있던 성북서 정보과장이 학생들에게 끌려가 뭇매를 맞았다. 12시께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교정으로 쳐들어와 학생들을 흩었다. 이날 기관원 초소에서는 교수 및 학생의 동태를 파악 보고하는 경비일보 용지가 발견됐다. 경찰은 학생 52명을 연행했고 이혜자, 천상만 등 일곱 명을 구속했다.
1. 1퍼센트 뒤져 박대통령도 신경 곤두세워
1978년 12월 12일의 10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예전처럼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 정국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유혁인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은 최근 나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박대통령께서는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읍니다. 공화당에서는 일부 지역에 복수공천을 하고 싶다고 했으나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관권선거도 못하게 했어요. 박대통령은 국회 의석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유정회가 있는데 구태여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김치열 내무장관도 관권선거의 배격을 건의했었다. 어쨌든 12·12 선거는 가장 깨끗한 선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박대통령에게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당선자는 공화당 68명, 신민당 61명, 통일당 3명, 무소속 22명이었는데 총득표수에서는 신민당이 1.1퍼센트를 더 얻었다. 물론 신민당은 여러 지역구에 복수공천을 했었다. 득표율로 볼 때는 '사실상 야당 승리'란 주장은 설득력을 띠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겉으로는 이 결과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청와대 대변인이 제공한 기사 자료에 따르면 박대통령은 12월 14일 오후'10대 국회의원 선거는 공명선거를 치른 점에서 대성공이었으며 선거에 또 하나의 혁명을 성취한 것으로 자랑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치열 내무부장관에게는 친서를 보내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여준 장관 이하 전내무공무원들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고 했다.
15일 박대통령은 경제기획원에서 월례 경제동향 보고를 받았다. 그뒤 장관실에서 여당 간부, 장관 들과 점심을 들면서 환담했다. 이 자리에서도 박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는 내가 당초 생각한 대로 표가 나왔다'고 했다. 그는 또 '국회의원의 3분의 1인 유정회 의석을 의식하면서도 그 정도의 표를 준 것은 공화당으로서는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이어 '서울의 결과를 보니 집권당을 견제하려는 뜻에서인지 무조건 신민당에 표를 찍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친여 무소속의 표를 합하면 여당표가 더 많아질 것이다'고 하여 신민당의 1.1퍼센트 승리 주장에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였다.
박대통령은 '대도시에서 신민당이 표를 많이 얻은 것은 물가고와 세 부담 등에 의한 그동안의 불평을 주민들이 표로써 표현한 것이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박대통령의 표면적인 여유만만함과는 달리 측근에서는 선거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작성, 여권내 주요 인사들에게 배포한 '선거평'은 그런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의 선거분석 보고서
1.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여론은 공화당의 저조한 득표율 및 일부 당직자의 고전 내지는 탈락, 특히 수도권에서의 여·야 후보의 현격한 표차, 신인 무소속의 진출 등 일련의 선거 양상을 종합할 때 여당이 의석수에서는 이겼다고 자부할지 모르나 '국민의 절대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집약되고 있음.
더구나 5천년사에 신기원을 이룩해놓은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인 신임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울분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음. 부가가치세, 물가고, 노풍(魯豊) 피해, 각종 스캔들 등 시기적으로 불리한 여건이 있었다고는 하나 방대한 조직과 국내외적으로 공인된 유신 치적의 좋은 대국민 설득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 위에 재벌 있다'는 등 야당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시종 수세에 몰렸음.
선거 결과 도시 서민층은 거의 여당을 외면한 듯한 결과를 빚게 한 것은 그간 정부의 중간관리층이 경제가 성장되고 생활에 여유를 갖게 될수록 이에 파생되는 국민의 불평불만도 그만큼 다양화되고 비례된다는 민심 추세를 깨닫지 못하고 성과만 올리면 국민은 무조건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관료적인 풍조가 조성되어 국민을 의식하는 행정 자세가 결여되었음.
또 정치권 역시 민족중흥사업에 기여할 수 있는 정치인 스스로의 좌표를 설정치 못하고 보장된 5년간의 임기를 적당히 보낸 안일한 타성 때문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으며 더우기 야당측에서는 금번 총선에서 3분의 1석에는 미달하였지만 득표 결과를 대여투쟁에 자신있게 적용하여 대여공세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체제계열에서는 금번 총선을 통해 자기들의 주장이 민의에 영합되었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세움.
이러한 민심 추세를 정부·여당이 막지 못할 때 그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 있는 실정임. 정부·여당은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할 필요가 있고 총선을 통해 드러난 허점을 과감하게 시정, 자체 전열을 정비하여야 함. 큰 변화 없는 모습의 유신 제2기 출범이 될 때 국민의 실망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점을 유의, 국정 전반에 획기적인 쇄신책이 긴요시 된다는 여론이다.
2. 금번 총선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
여당의 총선대비 문제
유신 제1기 동안의 국방·경제면에서 놀랄 만한 업적을 쌓았을 뿐 아니라 80년대의 사회개발시책과 더불어 세계 강대국 대열에 발돋움할 웅대한 비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대결에서 야당의 공격을 선제할 만한 뚜렷한 대응전략을 수립치 못함으로써 대다수 후보자들이 차원 낮은 지역구 공역사업 위주로 중구난방식의 발언에 그치는 등 서민층에 속하는 많은 유권자의 괴리감만을 조장한 결과를 빚었음.
기업인들로부터도 여당의 정책 빈곤에 대한 원성을 사기도 하였는바 이는 총선에 임하는 대여당으로서 이론 정비조차 되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음. 특히 선거기간중 중앙당의 통제조정기능이 마비상태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는 평으로서 공천에서 탈락된 이해원(李海元) 의원에게 선거대책 업무를 일임하고 당직자 거의가 각자 선거구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선거사령탑으로서의 중앙당 역할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었음.
제 10 대 총선의 정책 지원을 위해 발족된 정책자문위원회조차 정책 지표의 문안 작성을 1차 협의한 데 그쳤을 뿐 거의 활동이 없었다는 것도 무성의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음. 한편 여당 일각에서는 금번총선의 고충으로서 행정부측의 비협조와 국회 경시풍조로 여당 의원들의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선거에 임했을 뿐 아니라 평소 당정협의체제가 원활치 못해 선거구민의 숙원사업을 소화치 못했으니 어떻게 월등한 지지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점 등을 들고 있음.
국민을 의식하지 않고 성과 위주로 밀고 나가려는 행정부측의 독주적 경향 때문에 금번 선거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는 불평이 나오고 있음.
여당의원의 자세 문제
6년간의 의원 임기가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유권자들의 공통적인 경향인 데 반해 일단 당선된 의원의 입장에서는 보장된 임기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게 된 나머지 지역구 관리를 등한히 함으로써 선거구민들간에는 출신의원의 이와 같은 처신에 대한 저항감이 팽배한 실정이었으며 10대 국회에 진출하게 될 여당의원 중 50대 이상의 의원이 41명으로서 이들 중에는 연령상 '마지막이며 이로써 족하다'는 생각으로 지역구 관리를 소홀히 할 소지가 있음은 경계해야 할 문제로 지적되고 있음.
또한 지방 유권자들은 새마을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으나 국회의원들은 농촌 실정과는 아랑곳없이 골프나 치고 요정이나 출입 소일하면서 국민의 어려운 곳은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불신감에 차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낙현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겠느냐는 비난이며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치적에 대한 국민적 신임을 과신한 나머지 자만과 안일에 빠져 있다는 평들임.
금번 낙선의원 중 P모 의원은 당 요직을 역임한 명성을 믿고 5년간 지역구 관리를 전혀 도외시하였다는 것이며 또 P모 의원은 대통령께서 참석하신 새마을지도자대회의 파급효과만을 기대하고 낙관하고 있었다는 것임.
내각 및 공무원의 자세 문제-총선 결과를 통해 나타난 유권자들의 의식성향을 볼 때 행정부의 지나친 경직성으로 인해 국민의 소리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염증에 차 있고 서울 도봉구의 홍성우 후보가 변두리 서민층의 지지를 얻어 무난히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최근의 민심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는 여론이었음.
단기간에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오는 과정에서 강력한 행정력이 뒷받침이 된 것은 사실이나 목표 달성을 위하여는 국민의 희생쯤은 감수해도 무방하다는 자만심이 부지불식간에 공무원사회에 쌓이게 됨으로써 빈번한 도시계획 변경 등으로 시민에게 불의의 피해를 발생케 해도 해명조차 없이 그대로 넘어가기가 일쑤이고 시책의 졸속 추진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러도 국민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는 사과 한마디 없는 것이 예사가 되었음.
억울한 일은 호소해도 외면 당하고 있다는 것이 국민의 불평불만을 사고 있는 주원인이 되었으며 공무원들간에 '돈만 받지 않으면 누가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는 일종의 무사안일한 풍조가 싹터 대민봉사에 있어 불친절하고 업무추진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음.
더우기 일부 각료 가운데는 '엘리트' 의식이 지나치게 강해 시책을 다룸에 있어 국민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안하무인격으로 우쭐대는 인상을 줌으로써 일을 잘하든 못하든간에 우선 짜증스럽고 불쾌하다는 반응이 일고 있으며 정부시책에 적극 호응해온 경제계에서조차 금번 총선을 전후하여 여론 소통이 안되어 답답하기만 하다는 불평을 토로하고 있는 실정이었음.
한편 공무원들의 애로사항으로 주목을 요하는 점은 선거가 끝나면 대대적인 숙정이 있을 것이 아니냐면서 공연히 불안하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데다가 봉급 외의 수입원을 마련키 위해 정부에서 권장한 재형저축 또는 투자신탁에 가입하였으나 인플레로 실익이 없고 소액이나마 증권에 투자하였으나 손해만 보았다는 푸념을 하고 있는 실정임.
특히 부처내 인사에 있어 지연 등이 지나치게 작용되어 예를 들면 경상도 출신이 아니면 기용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등 편파적인 인사에 사기가 저상되어 있는 실정으로서 관계(官界)의 총화를 위한 대책이 요망된다는 여론도 대두되고 있음.
김정렴 실장의 퇴진으로 비극의 씨앗 배태
12월 20일 박대통령은 유정회 제3기 의원 후보 77명, 예비후보 8명을 일괄 추천, 유혁인 정무제 1수석비서관을 통해 국회의 사무처에 접수시켰다. 이 후보자의 선정에는 유수석비서관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다. 이날 『서울신문』은 1978년 한 해 동안 박대통령이 4,639명의 각계 인사를 접견했고, 하루 평균 53.7킬로미터의 출장을 했다고 썼다. 접견인사들을 직업별로 분류한 것을 보면 공무원이 54.9퍼센트로 가장 많고, 민간인 14.6퍼센트, 단체 12.2퍼센트, 정치인 10.8퍼센트, 외국인 7.5퍼센트의 순서였다. 정치인이 적은 게 눈에 띄었다.
22일 박대통령은 내각을 개편,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 9개 부처 장관을 유임시키고, 남덕우 부총리 등 11개 부처 장관을 바꾸었다. 이 인사에서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이 물러나고(뒤에 주일대사로 임명됨) 김계원(金桂元)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백두진(白斗鎭)은 그의 회고록에서 '여기서 청와대의 비극은 배태되었다'고 했다. 박대통령의 용인술이 빗나갔다는 얘기다.
김계원은 박대통령과 같은 포병 출신으로서 군인시절부터 가까왔다. 유순한 성격의 김계원은 5·16 주체는 아니었지만 박대통령 치하에서 육군참모총장·중앙정보부장 직을 거쳤고, 주중대사를 오래 했다. 김계원은 군 후배인 김재규와도 특별한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다. 김재규가 자동차 추락사고로 피투성이가 된 것을 김계원이 업고 병원으로 옮겨 살려 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김재규는 주중대사이던 김계원을 귀국시켜 12·12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김계원은 한 달 동안 경북 봉화·영주 지역의 표밭을 점검해보았다. 10·2항명파동 뒤 공화당에서 쫓겨나 있던 김창근(金昌槿)의 뿌리가 너무 굳어 김계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김재규는 김창근을 공화당에서 영입, 봉화·영주 지역구에서 출마하도록 한뒤 김계원을 비서실장으로 추천한 것이었다. 이 인사에는 차지철도 보조를 맞추었다고 한다.
차는 김정렴 비서실장이 아무래도 거북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은행가 출신인 김실장은 차실장보다 5년이나 먼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와서 바깥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지능적으로 대통령을 보필했다. 후발주자인 차실장이 월권을 하기엔 빡빡한 상대였다. 너무 순하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1년쯤밖에 못 있고,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물러났던 김계원을 차실장은 처음부터 만만하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청와대 비서실장의 교체는 김재규와 차지철의 역학관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2월 27일 오전 박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제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4년 12월 26일까지 임기가 보장된 유신 제2기의 막이 올랐다고 전국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이날 저녁의 경축연은 신축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다. 박대통령과 두 딸, 한 아들 등 네 식구는 만찬이 끝나자 세종문화회관에 도착, 경축공연을 구경했다. 국립국악원의 연주단과 합창단이 궁중음악인 「장춘불로지곡」을 노래했다. 박대통령은 민속무용 「풍요한 내 고장」이 공연될 때 박수를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