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변화 : 차실장의 월권

1979년 1월 신정연휴 기간에 박대통령은 가족들과 함께 부산 해운대와 경주로 여행했다. 부산 동래에 있는,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순국한 송상현 동래부사의 사당인 충렬사에 참배했고 경주의 황룡사지 발굴조사 현장, 분황사 석탑 등 고적도 둘러보았다. 경주 보문지구 관광단지의 건설 현황도 살폈다. 이 무렵 박대통령은 역사를 의식하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자랑삼아 했다.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후세사가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왔다.'

박대통령이 신정휴가를 즐기고 있을 동안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조가 낙조를 맞고 있었다. 시위·발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이란에서는 팔레비의 출국이 임박했다는 보도 속에서 한 독재정권이 쓰러져가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신정휴가 기간중에도 정부내 이란사태 대책반으로부터 이란사태의 진전을 수시로 보고받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이란사태가 그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을 그때는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란사태로 이란의 석유생산량이 감소되면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기름값이 두 배로 뛰었다. 이것은 제1차 오일 쇼크 때보다 훨씬 격심한 타격을 한국경제에 안겨다 주었다. 1977∼78년의 호황기 때 한창 벌여놓았던 중화학공업이 제2차 석유파동이란 강타를 얻어맞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해고사태, 물가고, 조세저항 등 경제적 불안이 깔리는 속에서 정치적 위기가 닥쳐왔고, 그것은 부마사태로써 폭발하게 된다.

1979년 들어서 박대통령의 집무방식에 작지만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청와대의 일과는 오전 8시 30분의 대통령수석비서관 회의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각 수석비서관들은 그날의 보고사항을 이야기하고, 비서실장은 이를 메모하여 오전 9시 30분에 박대통령이 2층의 침실에서 1층 집무실로 출근하면 맨 먼저 들어가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때 비서실장은 각 치안·정보기관에서 올리는, 봉투에 밀봉된 보고서들도 함께 가지고 들어간다. 박대통령은 이 봉투를 가위로 잘라 읽어보고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은 뒤 그날의 국정 방향을 감 잡고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계원 실장 취임 이후, 비서실장의 아침 정례 보고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밀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차실장이 비서실장보다도 먼저 들어가 정보 보고를 하기 때문에 비서실장이 기다려야 하는 일이 더러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박대통령의 측근에 있었던 고위 보좌관들은 대통령에게 누가 먼저 보고를 하느냐 하는 것이 파워 게임에서 중대한 변수였다고 말하고 있다. 꽉 찬 일정에 쫓기는 대통령은 일단 먼저 받은 보고에 따라 선입관을 갖게 되어 그뒤에 다른 사람(예컨대 비서실장)이 들어와서 같은 건의 보고를 하면 짜증을 낼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박대통령에의 접근권을 차지철이 장악하게 됨으로써 자연히 1979년 들어서면서 차지철의 영향력이 커졌다.

차지철은 이 무렵 법에도 없는 일종의 사설 정보기관을 운영하면서 김재규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 기관의 책임자는 헌병감 출신인 이모 예비역 장군이었다. 박대통령도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차실장에게 돌려 그 정확성을 조사 보고토록 했기 때문에 차의 월권을 방조하고 있었다. 차실장은 국회에까지도 여러 명의 정보수집 요원을 파견해놓고 있었다.

1979년에 들어서 박대통령을 둘러싼 권력기관의 힘의 균형이 깨지고 차실장이 독주하고 있다는 조짐은 여러 군데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어느 정부 고관이 1979년초에 차실장 사무실을 예방했다. 차실장은 명단이 적힌 보고서 용지를 꺼내놓으면서 '청장께서는 지난번 선거때 부여에 들르셨더군요?'라고 추궁하듯 말했다.

1978년 12월 선거에서 김종필 전공화당 의장이 부여에서 출마했다. 이때 김재규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김종필 후보를 지원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올렸던 것이다. 청장은 펄쩍 뛰면서 '나는 부여 근처에 간적도 없읍니다. 그것은 잘못된 보고입니다'고 말했다. 차지철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들더니 김재규 부장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 보고서에 고관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착오인 것이 분명하니 다시 조사하여 '김부장이 직접 각하께 해명하시오'라고 명령조로 얘기 하더란 것이다.

1979년 하반기에 가면 차지철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김재규 부장의 대통령 면담은 자신의 사전 허락을 받아 시키도록 지시하기에 이른다. 중앙정보부장보다 경호실장이 먼저 주요 정보를 보고하여, 뒤에 하는 정보부장의 보고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던 것이다.

백두진 파동으로 김영삼의 입장 강화

2월 19일 박대통령은 여당권을 개편했다. 공화당 의장이던 이효상 의원을 당총재 상임고문으로 앉히고, 박준규 의원을 당의장서리로 임명했다. 유정회 의장엔 태완선(太完善)을 임명했고, 국회의장 후보엔 예상을 뒤엎고 백두진 전유정회 의장을 지명했다. 국회의장에는 정일권(丁一權) 의장의 유임설과 김종필 의원의 추천설이 유력했던 것이다. 백두진을 의장으로 민 것은 차지철이었다. 백두진은 2년전 나에게 '내가 차실장 덕으로 국회의장이 됐다고 하는데 그러면 박대통령은 차실장의 로보트였단 말인가'고 반문했다.

신민당에선 백씨가 지역구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반발하고 나섰다. 김영삼 의원이 이 반발을 주도했다. 이틀간 국회가 헛도는 백두진 파동을 겪은 다음 국회는 3월 17일에 백씨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신민당 의원들 중 회의장에 참석, 백지투표를 한 것은 이철승(李哲承) 대표최고 위원 등 7명뿐이었다. 이 파동은 김영삼의 선명성을 부각시켜, 전당대회를 겨냥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도록 했다.

차지철은 그 뒤에 있었던 국회 상임위원장 선거에 있어서도 공화당을 통해 몇 명을 지명했다. 박준규는 '차의 추천이 그 개인의 뜻인지 박대통령의 뜻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박대통령이 정치와는 무관해야 할 경호실장을 통해서 그런 지시를 했든 경호실장이 대통령의 위광을 이용했든, 그것은 조직의 논리를 무시하는 행동이었고, 권력 핵심부의 불화를 촉진시키게 됐다. 차지철이 여권내에서 일종의 대통령 권한대행 노릇을 하게 되었고 이 불화는 변란의 불씨로 더욱 약화되어간다. 측근에서 벌어진 불화를 박대통령이 알고도 내버려두었든 전혀 몰랐든 그의 판단력은 허점을 보이고 있었다는 얘기다.

김재규와 김영삼의 비밀면담

10·26뒤 강신옥 변호사와 옥중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재규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김부장은 1979년 5월 30일의 신민당 전당대회 며칠 전 밤 8∼10시 사이 3시간 동안 김영삼 총재후보와 비밀요담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밀담에서 김부장은 김영삼 후보와 그의 참모들에 대한 비행조사서를 들이대면서 김후보의 후보사퇴를 종용했다.

결국 김후보와 그의 참모들을 기소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김후보와 모종의 극적인 합의를 하였고 김재규는 청와대에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역정을 내고는 '정보 수집해봐! 김영삼이는 안돼! 안될 놈한테 왜……' 운운 하면서 김부장의 '극적 합의'보고를 묵살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때 차실장은 이철승, 김부장은 김영삼 쪽을 맡고 있었던 듯하다.

김영삼의 증언은 좀 다르다. 그는 최근 나에게 5·30 전당대회 며칠 전 밤중에 롯데호텔의 어느 객실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몇 시간 단독 면담을 한 적이 있긴 있다고 말했다. 이 면담을 주선한 사람은 김녕(金寧)김씨 문중의 사람이었다. 김재규는 김영삼에게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고 했다. 같은 김녕김씨임을 강조한 말이었다. 김부장은 김영삼에게 총재후보를 사퇴하도록 끈질기게 부탁했다고 한다.

'대통령 각하의 생각이 확고합니다. 김총재도 생각해보십시오. 정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그분이 가만두겠읍니까.' 그러면서 김재규는
'만약 총재 경선을 강행하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총재후보를 포기한 뒤 모씨를 지원할 때의 반대급부를 제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영삼은 이 제안들을 모조리 거절했다고 한다.

김영삼은 김부장과 그토록 오랫동안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별로 나쁜 인간이라는 인상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저를 지원하던 의원들은 차지철과 김재규 쪽으로부터 집중적인 유혹·위협을 받고 있었읍니다. 그럴수록 저도 오기가 생겼읍니다. 특히 1975년에 박정희씨와 단독 면담한 뒤 느꼈던 배신감이 되살아나 투지가 더욱 굳어졌지요. 이 단독 면담에서 박씨는 나에게 민주화를 곧 단행하겠다고 약속한 뒤 이 사실을 공표하지는 말아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권력의 누수현상이 일어나 통치가 안된다는 거예요. 저는 당내의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이 약속을 지켰읍니다.

그런데 박씨는 그뒤 더욱 저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저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하고, 비서실장 김덕룡(金德龍)을 구속하는가 하면 김옥선(金玉仙) 의원 파동을 일으켰어요. 사람이 한번 만나면 그 뒤로는 정이 붙고 원수 사이라도 달라지는 법인데, 박정희씨는 정반대로 나오는 거예요. 그때의 배신감을 저는 잊을 수 없읍니다.'

박대통령은 이해 4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하자 '김영삼이는 총재가 되어선 안돼!'라고 몇 번이나 강하게 다짐했다. 정치란 결국 인간들의 관계인데, 박정희와 김영삼 사이에는 아무런 신뢰관계가 없었다. 여야를 대표한 두 정상의 삭막한 인간관계는 1979년의 파국에 중요한 인자로 작용한다.

김대중 연금해제는 김재규의 사보타지?

10·26뒤 계엄사 합동수사반은 김재규의 부하들을 불러가 조사를 했는데, 외사국장 조성구는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5월 30일의 신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두고 김영삼측에서 중국집 아서원에 김대중(金大中)을 참석시키고 단합대회를 연다는 첩보가 있었다. 김부장에게, 이 단합대회에 연금상태에 있는 김대중을 가세시키면 이철승 지지파가 감화되어 불리하니 강권을 발동해서 김대중의 외출을 저지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으나 끝내 이를 방치하여 결국 정세가 김영삼에게 유리하게 진전되어 오늘과 같은 정치 혼란상태를 가져 온 것은 김부장의 책임이다.'

10·26 사건 1주일 전에 김녕김씨인 김재규와 동성동본인 당시 상공부 차관보 김동규(金東圭·현재 통일민주당 의원)는 개인 일로 김재규를(그의 공관으로) 찾아갔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는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내가 공작을 해보니 김영삼씨를 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김대중씨의 연금을 그날 하루만 풀어준 것이야.' 김재규는 그의 집을 나서는 김동규의 등뒤에다가 '누군가가 후세에 이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말해두는 거야'라고 했다.

김대중은 이 문제에 대해 『월간조선』기자에게 이렇게 증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다. 어떤 때는 집을 나서도 막지 않는 경우가 있긴 했다. 신민당 총재 선거기간중에는 연금이 강화돼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김영삼씨를 밀기로 하고 총재경선에 나선 조윤형씨 등 3명을 사퇴시켰다. 그런데 그날 저녁엔 이상하게도 집을 나서는데 경찰이 막지 않았다.'
김대중은 그 길로 중국음식점 아서원에 갔다. 신민당 총재후보 김영삼을 지지하는 대의원들 8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김씨는 약 한 시간 동안의 연설을 통해
'이번 전당대회는 당내의 친유신파와 반유신파의 대결이다'고 규정하고 김영삼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김대중의 열변은 대의원들 사이에 바람을 일으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하는 데 기여했다.

10·26 사건으로 피크를 이룬 1979년의 대파란은 김영삼의 총재 당선을 시발점으로 한 것이었다. 김재규가 김대중에게 하루 동안의 외출을 허용해준 것은 한 정권의 운명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셈이다. 당시의 박대통령 고위 보좌관에 따르면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차지철 경호실장은 이철승·신도환 두 총재후보를 밀었다고 한다. 공화당에서는 이철승만 밀어야지 왜 신도환까지 지원하여 혼선을 가져오느냐고 차지철에게 반발했다고, 당시 공화당 의장 박준규는 말한다.

그래도 차지철은 막무가내로 밀고 나갔고, 이철승·김영삼 두 사람을 놓고 벌인 총재 경선 2차 투표에서 신의 표가 김영삼 후보 쪽으로 많이 가버려 김씨가 이기는 요인이 됐다. 김재규는 신민당 공작을 차지철이 주관하는 데 화가 나서 '김대중씨 1일 연금해제'란 일종의 사보타지를 했다는 분석도 있다. 중앙정보부 김근수 안전국장은 10·26뒤 계엄사 합수반의 신문에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가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고 김부장이, 차실장이 신OO을 어떻게 조정했는지 모르겠다, 신OO이가 무슨 보스냐, 이기택이보다도 못한 머저리·바보라고 불평을 토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고 진술했었다.

역전 드라마의 감동

김영삼의 승리는 바람의 승리였다. 이철승 연합부대의 막강한 조직을 뛰어넘은 것은 야당성 회복이라는 명분의 바람이었다. 한 신문의 스케치가 그때의 민심을 전해준다. 대회장 바깥의 함성 못지 않은 관심이 서울 거리를 넘치고 있었다. 모두가 라디오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 라디오마저 예견이 없었다. 진행과정을 전하다간 이내 정규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궁금한 시민은 신문사와 신민당에 전화를 건다. 신민당의 전화는 기자들의 송고용으로 바쁘다. 그래서 문의 전화에 '상황 진전이 없다. 바쁘니 끊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그런데 어느 중년 독자의 목소리-. '야! 신민당이 좋아서 물어보는 게 아냐. 나쁜 놈들.' 그러면서 댕겅 전화를 놓았다.

어느 작가의 방청기는 이러했다.

내가 신민당 전당대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민당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더구나 있을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신문에서 읽은 조직과 자금 대 바람이란 말뿐이었다.…… 당헌 개정안 수정안이라는 매우 어려운 낱말을 놓고 40분이나 회의가 춤을 춘 다음 기껏 '민주주의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말로 철회되었을 때 기자들이 '저건 장난이다'하고 수군거리는 것에도 지체 없이 수긍이 갔다. 끼가 있는 꾼들같이만 보였다.

구걸하여 지은 당사에도 생각이 미쳤다. '야, 차라리 고스톱으로 당권 따먹기 하자'고 어느 대의원이 소리쳤을 때도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도 정강정책 개정안의 상정중에 빵과 우유봉지가 돌려지고 마침내 정회가 선포된 가운데 맞은 점심시간에 나는 웬지 줄곧 창밖의 함성에 신경이 쓰였다.
'스피커 달아라!'
'마이크 당장 달아라!'
바람이 조직과 금력의 대항무기라지만 창을 열어도 바람 한점 없는 창밖, 그것이 안타까와설까. 투표권도 없는 젊음들이 저 너무나 엄청나게 낮은 곳에 서서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구경하러 온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땡볕에 서서 종일 소리치지만 겨우 끼여들어온 나더러 무얼 어쩌란 말인가.

기자석은 냉랭하게 이성적이었다. 외국기자도 섞여 앉아 1차 투표의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 이기택(李基澤) 92, 신도환 87……의 결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박철승이란 표가 나왔다고 한다. 이름 석 자 중 두 자만 맞으면 유효하므로 그건 유효표일 거라고 그들은 유권해석을 한다. 그러나 나는 확언할 수 있지만 보도진의 영지(領地)엔 뭔가 '일말의 기대'를 좇는 말없는 시선들이 분명히 번득이고 있었다. '승자는 관용, 패자는 승복이지요.'

창밖 을씨년스런 풍경의 공지에서 솟구쳐오르는 열기를 끄듯 의사봉은 간헐적으로 딱딱이 소리를 내고 나는 지리하고 숨막히는 관전에 지쳐 떨어져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 층층대에 바쁜 사람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몰리고 화장실도 출입을 통제하란다. 민생고를 핑계로 밀고 들어가자 화장실이란 장소에 잘 어울리는 말투의 난무 속이다.
'지랄 마! 난 못 가, 죽는 줄 뻔히 알면서 죽는 길로 난 못 가. 불러와. 자긴 혼자 며칠 전부터 언약을 받았을 거야. 제기랄. 난 죽는 길로 못 가. 당신이 말해. 결정을 내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누군가 드디어 수도물도 나오지 않는 세면대에 내리 코피를 쏟는다. 무엇같이 또 코피가 쏟아지네 하면서. '당신'이라는 사람이 마침내 누구라고 선언하고 모두가 좋다고 소리치기 바쁘게 화장실은 휑뎅그렁한 빈 방이 되어버린다. 그들이 만약 반대결의를 보았더라면 나중의 표차는 적어도 5표 이상 더 벌어졌을 것이다.

기표는 진행중인데 복도와 화장실은 마지막 작은 단합대회 같은 비밀회의가 숨가쁘게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도로라는 낱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저렇게 가벼운 소신이라면 돈 받고 꼼짝 못하게 벌써 묶여 있을 텐데 하는, 그러나 뚜껑을 열자 소신은 따로 있었지 않은가. 정당의 집회란 원래 그런 것이며 그래야 정치집회다운 것인지 모른다. 목욕하고 이발한 말쑥한 차림으로 중학생 수학여행 떠나듯 하는 모임이 정당의 전당대회라면 그 침묵의 행렬에서 우리가 구경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언뜻 보아 대단한 덩치의 목소리 큰 사람들에게나 잘 어울리는 집합장소 같은 그곳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그들을 묶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활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적어도 민주적인 방식에의 승복은 위대한 전진에의 보폭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예상밖의 대역전 드라마를 감격으로 수용할밖에 없었다. 9회말 역전극이라는 운동경기가 있다지만 그 순간 아무도 거기에 비기려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페어 플레이. 승자는 관용, 패자는 승복이라지만 이 드라마는 경기 결과처럼 될 것 같진 않으며 그렇게 얼버무려서도 안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니 그보다도 '접시물의 반란'같이만 본 패배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체험으로 가진 것이 그날의 모든 사람들이 얻은 소득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점을 승자는 '위대한 민권의 승리'라고 표현하여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민주회복의 새 시대가 마침내 열렸음을 믿자고 그는 선언했다. '새로운 김영삼으로 새 출발함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너무 격앙하여 기표소에 들어가 주먹을 치며 우는 대의원이 있었다. 그러다간 뛰어나와 손바닥이 깨지도록 박수 치는 대의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번 신민당 전당대회는 한마디로 희망이었다.

어쨌든 70년대를 마지막 보내며 개최되는 최대의 희화적인 쇼를 구경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예상을 마지막에 뒤엎은 제 1야당의 전당대회는 분명히 역사적인 의미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뭔지는 모른다고 나는 우선 말해두겠다. 그러나 이철승씨가 아니고 김영삼씨가 당수가 된 것이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른 것일까.

김영삼 총재의 등장은 박대통령의 포석을 뒤집고, 1979년의 정치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박대통령은 유신 선포 이후 처음으로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김총재의 등장은 또 권력 핵심부를 강타, 자체 분열의 불씨를 던졌다. 이 대회를 계기로 김재규·차지철 두 사람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김계원도 10·26사건 법정 신문에서 신민당 전당대회 이후인 1979년 중반기부터 김·차 두 사람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고 말한 바 있다. 박대통령이 차지철에게 신민당 공작을 맡긴 것은 그의 국회의원 경력을 중시했기 때문인 듯하다. 유정회 의장이었던 태완선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저녁을 먹는데, 박대통령이 차지철을 창쪽으로 불러 '자네는 국회에 있었으니까 잘 알 것 아닌가'하고 무슨 일을 부탁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읍니다.' 조일제(趙一濟·전중앙정보부 차장보·국민당 의원 역임)에 따르면 차지철은 1974년의 신민당 전당대회 때도 국회의원 신분으로서 정보부를 젖히고 반(反)김영삼 공작을 주도했다고 한다. 당시 정보부장 신직수는 조차장보에게, 신민당 공작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전당대회에서도 김영삼 의원이 총재로 당선돼 1974∼75년의 해빙기를 주도했었다.

차지철에 굽히기 시작한 김재규

전당대회 공작의 실패에 책임을 진 것은 김재규였다. 실무책임자가 아니라 훈수하는 입장을 취해온 차지철은 일이 잘되면 자기 공, 못 되면 김재규 책임으로 돌리곤 했다. 그는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는 홀가분한 입장이었다. 책임을 안 지는 입장에 있으면 자연히 강경책을 주장하고, 실천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저절로 온건해진다.

박대통령은 전당대회 이후 더욱 김부장을 경시, 차실장을 중용한다.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 신형식(申炯植)은 '불신하면 잘라야 하는데 그 중요한 직책에 계속해서 김재규를 앉혀놓은 것이 그분의 실수였다'고 했다. 당시 법무장관 김치열도 대통령이 인사에 비정하지 못했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평했다.

김영삼 총재 등장 직후 차지철은 정재호(유정회), 박찬종(공화당) 의원등에게 '박대통령의 특별한 당부인데, 앞으로의 정국 대응책에 대한 보고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1978년까지만 해도 차지철은 '그런 것은 당에서 할 일이지 내가 뭐라고 할 수 없다'고 정치문제에는 겸양의 자세를 보였던 사람인데 이제는 경호실장 겸 정치실장 노릇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성구 외사국장은 10·26 뒤 계엄사 합수단에서 이런 진술도 했다.

'어느 날 아침 회의에서 제2차장보(김정섭)가 '요사이 경호실장은 내가 3국장(정치담당) 시절에 하던 일을 떠맡아 일을 하고 있다'고 빈정 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제2차장보는 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유혁인(정치담당수석비서관)이 우리 일을 가로채 각하께 보고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유혁인은 '1979년에 들어서 김재규 부장의 차가 경호실장 사무실 앞에 서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한나절 동안 계속해서 주차해 있는 일도 있어, 바쁜 정보부장이 저렇게 해도 업무 처리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0·26 뒤 궁정동의 중정 경비원 이기주는 '궁정동 경비원들까지도 부장님이 차실장한테 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귀찮아 죽겠다. 자꾸 식사나 커피를 같이 하자고 부른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김이 차에게 '보고한다'느니 '불려간다'는 말이 그의 부하들 사이에도 퍼졌을 정도다.

박준규 당시 공화당 의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차실장의 부하가 와서 꼭 실장 방에 들렀다 가라고 해요. 갔더니 김재규 정보부장과 내무·법무 장관이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어요. 제가 큰 소리로, 차실장, 이게 뭐요, 안보담당 책임자들이 이렇게 모여 있다가 김신조가 내려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고 농담반 진담반을 했더니 차실장이 이러더군요. '우리나라에서의 국가보위는 곧 대통령의 경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호에 직·간접으로 관계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이것이 바로 국가안보 업무입니다.'

박찬현 당시 문교부장관의 증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차실장이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전화를 했어요. 대통령이 부르는 줄 알고 달려갔더니 글쎄 차실장이 이러는 거예요. ‘각하께서 오늘 대전을 다녀오시는 길에 옛날부터 보아온 OO학교의 큰 나무가 잘려진 것을 아시고 대노하셨으니 진상을 조사해 보고하시오.' 전화로 말해도 좋을 사소한 일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데 불만이 컸지만, 각하의 지시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읍니다.'

권력 핵심부에 있었던 네 사람, 즉 대통령·경호실장·비서실장·정보부장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관계가 빚어지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차실장을 감싸고 돌수록 김비서실장과 김부장은 가까와졌다. 김비서실장은 김부장과 차실장의 불화를 중화시키지 못하고 김부장 편을 들면서,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낙선(전상공부장관)은 이즈음 기능올림픽대회 수상자들을 데리고 대통령에게 인사차 갔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이씨에게 차실장에 관한 비난을 했고. '차실장 때문에 김재규 부장이 욕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실장은 대장, 김부장은 중장 출신으로서 대위 출신인 차실장이 안하무인으로 노는 데 기분이 상했다. 차실장은 지역구 국회의원이란 프라이드가 있어 두 김씨의 정치력을 업신여겼다. 불씨는 김재규가 차실장과 같은 오만무례한 사람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우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데 있었다. 부하나 상사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김재규는 박대통령의 권위에 눌려 차실장의 무례함을 인내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1979년에 들어서서 사람이 달라진 것은 박대통령과 차실장뿐이 아니었다. 김재규의 내면도 변화하고 있었다.

18번까지 같았던 두 사람

하늘은 박정희와 함께 김재규를 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운명적'이란 말로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둘은 같은 고향(경북 선산군)에서 태어났다. 똑같이 일군(日軍)과 교사 경력이 있다. 똑같이 초창기에 군에서 추방됐다가 복직한 경험이 있다. 더구나 육사 동기였다. 묘하게도 술자리에서 부르는 '18번'도 『으악새 슬피 우니……』로 같았다. (두 사람이 술자리를 함께 했을 땐 김재규가 박대통령에게 '18번'을 양보하곤 했다고 한다.) 다른 점은 나이가 위인 박대통령이 시종일관 김재규를 끔찍이도 아끼는 '시혜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박대통령은 5·16주체도 아닌 김을 5·16 직후에 국영기업체 사장으로 중용했고, 6·3사태 때는 서울지구 계엄부대장, 3선개헌과 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국군 보안사령관, 예편 뒤엔 유정회 국회의원·정보부 차장·건설부장관·정보부장으로 요직만을 맡겼다. 김재규가 10·26때까지 한번도 중단 없는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박대통령의 배려 덕분이었다.

박대통령은 육사 동기생들의 노후 생활을 보살피는 데 김을 심부름꾼으로 부렸고, 대통령의 몸으로 사단장인 김을 밤에 몰래 찾아가 단둘이서 통음하기도 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의 죽음 이후, 박대통령의 인사(人事)엔 능력보다는 충직, 합리보다는 의리, 비정보다는 인정에 더 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재규의 정보부장 임명이었다. 박대통령은 김재규를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두면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런 김재규는 왜 총부리를 박대통령에게 돌렸던가. 김재규는 2심 최후진술에서
'박대통령은 사적으로는 친형제와 다름없었다. 나는 개인적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고 말했다. 우직한 김재규를 야수로 만들어간, 그의 심리적 변화과정이야말로 10·26 사건을 이해하는 핵심인 것이다.

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 경북 선산군 선산면 임은동 687번지에서 부친 김형철과 모친 권유금 사이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형철은 30세 이전에 자수성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연간 100석 내외를 추수하는 동네의 유지였다. 동네의 유지이자 마을에서 손꼽히는 큰 집의 장남인 김재규는 유년시절을 아무 구김살 없이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네 소년들이 그를 많이 따랐고, 병정놀이에서는 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남에게 빠지지는 않는 언변에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하고, 거기에다가 가정환경에 힘입어 별로 크지 않은 몸집에도 '골목대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1939년 선산국민학교를 졸업한 김재규는 1941년, 5년제의 안동농림 학교에 입학한다. 이 사이에 2년의 공백이 있는데, 그 이유는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안동농림학교는 1933년에 설립, 농업과와 임업과를 두었는데, 경북 북부지방에 있는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으로 입학 경쟁율이 매우 치열했다. 안동농림학교 농업과 학생 김본원일(金本元一·김재규의 창씨개명한 이름)은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훗날 재판정에서 그는 성적이 상위권이라고 진술했지만, 그의 성적표는 그가 결코 상위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1학년 석차가 110명 중 100등, 2학년 때가 106명 중 87등이었다. 1학년 때 80점이 넘는 과목은 영어(85점), 식물(81점)이었고, 제일 점수가 낮은 과목은 교련(56점), 2학년 때는 조림삼림보호 과목이 제일 성적이 좋았는데(75점) 물리, 생물 등 과학 계통의 성적이 나빴다. 결석도 많아 1학년에 27일, 2학년에 15일이나 됐다. 3학년에 올라가서는 성적이 점수로 표시되지 않고 수우미양가로 나왔는데, 영어에서 수를, 대수와 교련에서 가를 맞았다. 후일 군인이 된 그가 교련점수가 낮았다는 것이 눈에 띈다.

노기 대장이란 별명답게 행동

김재규는 안동농림 4학년 재학중 일본 요카이치(四日市) 항공병학교의 특별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4학년생 전원(100명)이 지원을 강제 당했으나 시험과 면접에서 김재규 등 3명만 합격했다. 1944년 4월 18일 비오는 날 김은 기차편으로 부산을 향해 떠났다. 입대일은 4월 22일이었다. 이때 김과 동행한 사람이 담임선생인 히구치 미노루 교사였다. 축산과목 선생인 그는 기병대위 출신. 히구치는 김재규를 떠나보내면서 '얼마 안 있어 일본은 망할 것이다. 그때까지 꼭 살아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요카이치 항공학교는 가미가제 특공대 요원도 배출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히구치 교사의 이 충고를 평생토록 감사하게 생각했다.

1979년 9월,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에도 70노인이 된 히구치를 초청, 비원에서 안동농림 동급생들과 한나절을 보냈다. 김은 히구치에게 칙사대접을 해 보냈다. 안동농림 시절, 김재규는 두 개의 별명을 갖고 있었다. 노기 대장, 그리고 에노켄.

노기 대장은 러일전쟁 때 여순을 함락시킨 명장으로 메이지 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따라서 자결한 일본 무사정신의 화신이다. 에노켄은 당시 유명한 만담가였다. 그 별명들은 그에게 상당한 유머 감각이 있었음과 아울러 그가 추구하고 원했던 사나이의 상이 어떤 형이었는지를 한 단어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오기와 고집이 센 그는 친구들 사이에선 늘 리더였고, 불 같은 성질도 갖고 있었다. 하숙방에서 공부하는 그를 놀래주려고 뒤에서 고함을 지른 친구의 얼굴에 잉크병을 집어 던질 정도였다.

그의 동급생 김모씨는 '재규의 부모는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모르는 인격자였다. 친척간 우애도 깊어 부러움을 샀다'고 회고했다. 10·26사건 재판을 통해 교도소의 김재규를 가장 많이 만난 강신옥 변호사는 '그는 사생관이나 행동거지에서 일본 무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요카이치 항공병학교에서 임관 여섯 달을 앞두고 해방을 맞은 김재규는 귀국, 1년간 교사로 일하다가 육사 2기에 지원, 1946년 12월에 졸업했다. 사관생도 시절에도 김재규는 그렇게 특출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루 세끼 고구마 2개씩을 먹고 훈련했다 해서 '2기는 고구마만 먹고 훈련받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보급 등이 엉성했지만, 김재규는 열심히 공부해 14등으로 졸업, 10177의 군번을 받는다. 박정희 소위는 3등으로 군번 10166. 일부 동기생들은 그가 그렇게 군번이 빠른 것에 지금도 놀라와한다.

김재규는 조선경비대 제2연대에서 근무하던 중 사병들의 패싸움에 대해 당직장교로서의 책임을 추궁당해 1947년 6월에 면직됐다. 그뒤 김천중학, 대구 대륜중학교의 체육교사로 일했다. 김은 3단넓이뛰기·장대높이뛰기에 능했다. 김천중학 시절의 제자 중엔 10·26 사건의 '주요 범인'이었던 박선호(당시 정보부 의전과장)가 있고, 대륜중학교 시절의 제자 중엔 이만섭(李萬燮) 국민당 총재가 있다.

1948년 10월에 다시 소위로 복직한 김은 1949년 안동지구 전투사령부에 정보참모로 배속됐다. 이 시절 안동 금남여관에서 김과 같이 투숙했던 최모 예비역 장군은 '그는 겁이 없고 의리가 있어 부하로 데리고 있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은 이때 혼자였는데 중매결혼한 첫 부인과는 첫날밤 직후에 헤어졌다고 한다. 안동에선 술집 작부와 가까이 지냈는데, 어느 날 최장군(당시엔 중위)에게 '형님, 저 여자하고 같이 살렵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결국 결혼은 안했지만 김재규는 그 정도로 순진했었다는 것이다.

3사단 22연대 2대대장으로 6·25를 맞은 김재규는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했다. 북진 때는 함경남도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 몸이 쇠약해져 입원했다. 퇴원한 그는 여수의 제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여기서 김재규는 네 살 아래인 순천 사람 김영희와 연애결혼했다. 미모인 김영희는 그때 광주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외딸이 있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다. 김재규의 장인 김완근은 순천 유지로서 군인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처가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인사를 올리는 김재규에게 '난 그래도 군인은 싫다!'하면서 인사도 안 받더란 것이다. 박정희 준장은 1954년 5사단장으로 부임하여 다른 부대에 있던 김재규 대령을 5사단 36연대장으로 불러 아래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