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석유 파동으로 조성된 위기의 바탕
1979년은 6·25 이후 사건이 가장 많았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정치 사건으로는 백두진 파동, 5·30 신민당 전당 대회, 신민당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사건, 김영삼 의원 제명, 부마사태, 10·26, 12·12등 대사건들이 잇따라 터졌다.
경제사건으로는 율산그룹의 도산, 은행장 집단인사, 석유파동, 돼지값 폭락, 부동산 경기 침체, 쌀 수입, 수출부진, 도산과 해고·체임 사태, 물가고 중화학 공업의 위기 등등 한국의 경제기반을 강타한 구조적 문제들이 잇따랐다.
사회면적 사건으로 두 차례에 걸친 부산의 토막 살인 사건, 부산 효주양의 두 번째 납치, 금당 정사장의 실종·피살, 오원춘 사건, YH여공 사건, 도시산업선교회의 문제, 태풍 주디호의 피해 등등 한 시대의 종말에 어울리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사건은 우연하게 터지는 것 같지만 한꺼풀 벗겨 보면 뚜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 사건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어떤 사건이 터질 수 있는 기초환경이 조성된 뒤 잠복돼 오던 불씨가 폭발하든지, 다른 데서 불티가 날아올 때 폭발이란 형태로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결국 큰 사건은 그 시대와 역사의 한 반영인 것이다. 1979년은 여러 가지 사건이 터질 확률이 높은 환경, 즉 발화점에 가까운 온도에 다달아 있던 해였다. 그 원인은 박정희란 한 독재자의 내부 붕괴뿐 아니라 지배 체제의 경직화에 따른 적응력 상실, 그리고 경제불황의 급속한 확산과 심화였다.
1979년의 사건환경에서 지배적 요인은 제2차 석유파동이었다. 1979년 초 이란 혁명으로 세계석유시장에서 일시적으로 공급부족 현상이 빚어졌다. 1차 오일쇼크에서 혼이 난 소비국들은 공황현상을 나타내며 사재기 경쟁에 빠졌고 원유가격은 삽시간에 두 배로 뛰었다. 수출액의 약 3분의 1을 원유수입에 써 '기름을 사기 위해 경제를 돌린다'는 말을 듣기도 했던 한국은 강타를 맞았다.
3월 7일 정부는 국내 석유 제품 값을 평균 9.5퍼센트 인상한데 이어 7월 10일에는 석유 제품 값을 평균 59퍼센트, 전력요금을 평균 35퍼센트나 올렸다. 이 여파로 물가고가 극심해졌다. 1979년에 소비자물자는 12퍼센트나 올랐는데, 이것은 정부의 목표(10퍼센트)를 배나 웃도는 것이었다.
'민원 수수료 300퍼센트 인상'
'버스 토큰 사재기 소동'
'교통 범칙금 77퍼센트 인상'
이런 신문 제목이 연일 등장했다. 정부는 신현확 부총리의 지휘에 따라 긴축정책을 실시, 통화량 증가는 24.7퍼센트로 억제했다. 물가는 오르고 돈은 잘 돌지 않으니 기업 도산과 실업 사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70년대의 상징적 기업인 율산그룹이 무너지고 종합상사 삼화그룹이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대기업이 흔들리면 중소기업은 넘어진다. 1979년 5월말 현재 임금체불은 296개 기업에 136억 원에 이르러 1978년 동기간의 88배를 기록했다. 5월중 서울지역 부도액은 1973년 이후 최고 수준인 293억 원이었다. 신발 공장들이 많은 부산진구 취재를 맡고 있었던 나도 1979여름에는 '정년 낮추어 무더기 해고' '해고된 노동자 쇼크사'란 기사를 써야 했다. 물가고·도산·해고 사태와 함께 부동산 경기는 얼어붙어 복부인의 활동도 주춤해졌고 농촌에서는 돼지파동이 빚어졌다.
양돈 농가의 증가로 3만원에 팔리던 돼지 새끼 값이 1천 원까지 떨어지더니 나중에는 그 돈으로도 살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돼지 새끼 집단 학살·유기 사태가 났다. 진주 남강에서는 버려진 돼지 새끼들이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수출액도 1979년에는 전년보다 18.5퍼센트의 증가에 그쳤고, 수입은 크게 늘어나 무역적자는 1978년보다 85퍼센트나 불었다. 국민들을 가장 크게 자극한 것은 세금과중이었다. 부마사태의 주요한 요인으로 지적된 것이 부가가치세 등 세금의 과중징수였다. 부산지역의 경우, 1979년에 시민들이 낸 세금은 약 3,880억 원으로서 1978년보다도 무려 32퍼센트가 늘어났다. 이 세금과중은 보수적인 부산 중심지 상인들까지도 반정부 쪽으로 돌려놓아 부산사태의 확산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사건 환경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를 상징하는 큰 사건 두 건이 한 여름에 터졌다.
오원춘 구속으로 천주교단 발칵
경북도경은 8월 10일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이사 겸 영양군 청기면 분회장 오원춘(吳元春·31)납치설에 대한 진상을 조사한 결과, 납치설은 허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오씨와 이 사건에 관한 유인물을 만들면서 국가 안녕 질서를 문란시킬 내용을 삽입한 천주교 안동교구청 정호경신부(38), 유인물을 배포한 정재돈씨(25·안동교구청 사무원·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총무) 등 3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오씨는 지난 5월 5일부터 21일까지 포항, 울릉도 등지를 개인적인 이유에서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모기관원에 납치돼 폭행, 감금 또는 감시받았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으며 정신부는 안동교구 두봉주교(프랑스인)의 지시에 따라 오씨 사건을 조사, 유인물을 작성하면서 정부가 농촌부흥을 짓밟고 농민을 천시하며 정당한 농민운동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려한다는 등의 왜곡된 설명문을 날조해 전파했다는 것이다.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총무인 정재돈은 정신부의 지시를 받고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유인물 7천부를 찍어 이중 4천부를 지난 달 17일 전주 가톨릭 센터에서 있은 성직자 세미나에서 신부와 신자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 유인물에는 오씨가 가톨릭 농민회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지난 5월 5일 낮 영양에서 정체불명의 모 기관원에 납치돼 15일간이나 포항, 울릉도등으로 끌려 다니면서 구타당하고 기절하는 곤욕을 치른 뒤, 집에 돌아왔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으나 수사결과 이들 내용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 7월 18일부터 이 사건수사에 착수, 5월 5일부터 21일까지의 오씨 행적을 조사한 결과 5월 5일 낮 12시쯤 애인 이양(가명)과 점심을 함께 했으며, 5월 6일 울릉도행 한일호를 혼자서 타고 갔다는 것과 울릉도에 머무는 동안 울릉성당에서 신부와 여러 차례 만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오씨가 납치사건을 조작한 것은 처자가 있는 몸으로 금년 2월부터 영양 모 다방에 종사하는 이모양(19)과 관계를 가져 천주교 십계명을 어겼고 그 사실을 신부에게 고백하지 못한 죄책감과 이 사실을 부인이 알고 가정불화가 일자 현실 도피적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주교계에선 당국의 발표가 보도되자 교계에서 자체 조사한 오원춘 사건의 진상을 소책자에 실어 뿌리기 시작했다.
천주교 전주교구 사제단을 비롯한 전주지역의 다섯 교계 단체에선 『짓밟힌 농민, 짓밟힌 교회』한국 가톨릭 농민회와 대전교구 사제단 및 정의 평화위원회는 『안동사태에 대한 진상과 경과』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당국은 매스콤을 통해서, 천주교단은 지하 유인물을 통해서, 일대 선전전을 폈다. 이 선전전이 격렬해짐에 따라 오원춘 사건은 상징적 의미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천주교뿐 아니라 개신교 계통의 민권단체도 천주교편을 들고 나섰고 거의 모든 반정부단체가 이에 가세했다. 사실 자체보다도 이 사건이 상징하는 대결의 뜻이 더 크게 보이게 됐다.
정부대 민권단체의 회전이 돼버린 이 사건의 진상은 8월 21일 대구 교도소 소장실에서 있은 해프닝으로 더욱 애매모호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사회 각계각층 인사와 내외신 기자들이 지켜본 가운데 경찰관과 검찰관이 사건내용을 브리핑하고 국내 3대 텔레비전 방송국에선 특집프로를 만들어 방영했다. 9월 5일 첫 공판에서 오원춘의 변호인단은 '이것은 형사법상 전무후무한 사건재판이며 긴급조치에 대한 보도 그 자체가 긴급조치에 위반되는 것인데도 이 보도를 허용한 것은 이해가 안된다' 고 말했다.
진상은 뒷전, 서로 선전전만
가톨릭의 소책자들은 이 사건이 가톨릭 농민회 청기면 분회장으로 '감자 피해 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영양군에서 1978년에 가을감자 '시마바라'를 심도록 적극 권장했었는데 종자가 엉터리인지 재배 농가의 89퍼센트가 감자싹이 트지 않아 폐농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당국에선 별다른 피해 보상 대책을 세워 주지 않았다. 오원춘은 '청기 감자 피해 보상 대책위원회'를 구성, 한달간에 걸쳐 피해 실태 조사를 끝내고 보상 요구를 정부에 냈다. 오원춘의 지도로 34농가는 피해 보상을 받았는데 이때의 앙갚음을 공안기관이 했다는 것이 천주교단의 풀이였다. 오원춘이 썼다는 양심선언은 이런 내용이었다.
양심선언
본인은 가톨릭 신자로서 소명을 다하여 농촌 사회에 그리스도적 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76년 12월부터 가톨릭 농민회 운동을 시작하여 이웃 농민들의 아픔과 보람을 함께 나누고자 애써오던 중 79. 5. 5일 영양 버스 정류장에서 정체 불명의 두 사나이로부터 납치당하여 안동을 거쳐 포항 모건물(포항제철 부근 잿빛건물)안에서 이유도 모를 폭행을 당하고(체제에 반항하는 놈은 그냥 둘 수 없다며 폭행하였음)울릉도까지 15일 동안 강제 격리된 상태에서 불안한 날들을 보낸 사실이 있어 이를 교구 정의 평화위원회에서 구성한 조사단과 농민회 조사단, 본당 신부님께 하느님께 받은 양심에 의하여 진술한바 있습니다.
이 사실은 차제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실'이며, 만약 번복된다면 이는 외부적 압력이나 위협에 의한 강제적 결과일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농민들과 함께 일하려는 나의 동료 형제들에게 또다시 쏟아질지도 모르는 이런 폭력과 압력 밑에서, 주여 작은 저희들을 지켜주소서.
영양 천주교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아래서
1979. 7. 5
오원춘
오원춘 사건은 천주교단 안의 모든 단체를 결속시켰다. 김수환 추기경이 안동 목성동 성당에서 전국기도회를 열고 이 사건을 정보기관의 조작극으로 규정한 것은 그 뒤 모든 천주교인들이 오원춘 사건 조작을 확신하는 근거가 됐다.
'경찰이나 정보기관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이 같은 관념이 바로 오늘날 우리 모두가이 시간까지 겪어온 그 많은 인권 유린 사례를 낳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국민이 눌려 있지만은 절대로 않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국민을 계속 누르면 국민의 마음은 정부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눌리면 눌릴수록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를 누르고 있는 정부에 대해 항거하여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원춘을 위한 기도회, 단식, 농성, 사건진상 홍보유인물 배포, 성명서, 재판 방청 따위 갖가지 저항운동이 8월부터 전국의 천주교계를 휩쓸었다. 바티칸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지켜봤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건의 진상은 안개에 가려져 헤아릴 수가 없었다. 특히 제도언론의 제한된 보도로는 사건의 진상은커녕 윤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는 오원춘이 텔레비전회견에서 자신이 사건을 조작했음을 자인하고 9월 4일의 첫 공판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함으로써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미궁속으로 빠져 들었다.
대구지법 법정에서 변호인단은 오피고인이 구속된 뒤 경찰에서 모든 것을 자백하고 두봉 주교에게 보내는 사과 편지까지 쓰고 난 뒤인 7월 31일자로 된 '나는 위협받고 있다. 떠들지 말고 기도해달라'는 오씨 자필의 쪽지를 보이고 이것을 쓰게 된 동기를 물었다. 오피고인은 '뚜렷한 동기는 없고 그 당시 잘못된 생각에서 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쪽지를 썼다고 말했다. 천주교도들은 이것이야말로 오원춘이 두봉 주교에게 보낸 사과 편지는 강압 속에서 쓴 것이며 그뒤에 쓴 쪽지가 참말이라고 믿어 조작에의 확신을 더욱 굳혔다.
대구지법에서 열린 공판은 방청온 천주교도들의 오원춘 응원으로 더욱 대결의 분위기를 높여갔다. 400명이 넘는 방청객들은 '알퐁소(오원춘의 세례명) 힘내라!'고 외쳐댔다. 천주교계에선 오원춘 사건이 농민 의식화운동의 정예그룹인 가톨릭 농민회를 탄압하려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오원춘 사건으로 천주교단은 내부적으로도 갈등을 겪었다. 1979년 10월 사회 참여에 대해 신중론을 편, 나이 많은 사제들은 '교회의 현실을 우려하는 연장 사제' 49명의 이름으로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
우리는 '하나이오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믿기에 주교님들의 협력자로서 사제가 되었고 우리의 봉사직이 보람된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정은 교회본연의 순수성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보아 우리의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우려는 우리의 사명달성을 위해서 또 한국교회 자체를 위해서 중대한 위기란 생각마저 갖게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인 교회 : 교회의 단일성 및 그 일치성은 교의나 제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신비체적 생활과 복음적 애덕의 충일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다양성의 명분에서 발로된 다양한 의견이 교회 내에서 의견과 행동의 대립을 초래하였고 그 결과는 사랑을 미움으로 치닫게 하는 현상에마저 이르렀다고 우리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 : 교회의 신성성은 비록 죄인들이 모인 교회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신성성이 투영된 교회로서 세속에 해하여 거룩한 교회의 품위를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교회마저 세속화에 합세하여 거룩하고 품위 있고 고상한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실로 개탄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공번된 교회 : 교회의 보편성은 선인 악인 차별 없이 고루 대하시고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보편성을 구현한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교회내부에 있어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배척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편파적 자세로 교회의 보편성은 저해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뿐 아니라 교회를 기피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도적 교회 : 사도전래적 교회의 특성은 수좌 베드로 사도와 일치하는 사도단의 후계자들로서 주교님들을 교회의 구심점으로 하는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 교도권을 수락하며, 이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우리의 긍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풍토는 주교님들에게서 그 시범이 흐려지고 있고, 사제들에게 있어서는 존경과 순종보다 비판과 저항이 앞서고 있음을 목도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교도권의 권위 하락상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오늘의 상황을 이상과 같이 진단하면서 이러한 현실이 바로 한국 가톨릭의 위기이며 우리 자신들의 위기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이오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순수성의 보전과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일치와 사랑과 평화안에서 우리의 아낌없는 여생을 바칠수 있기를 염원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충정의 호소를 드리고자 합니다.
1. 일치의 교회 구현을 위해서 주교님들께서부터 일치의 시범을 주시도록 감히 청원합니다. 교회내의 불일치가 특히 시국에 관하여 주교단의 불일치에서 연유되었음을 통감하여 왔기에 드리는 호소입니다.
2. 주교 공동성에 따른 주교단의 결속으로 한국 가톨릭의 질서와 규율을 우선적으로 확립시켜 주십시오. 특히 성전과 거룩한 전례의 속화, 일치를 저해하는 교회내의 탈선단체, 교도권의 인준없이 임의 남발되는 모든 성명서를 조정시켜 주십시오.
3. 교회 교도권에 대한 존경과 순종의 정신풍토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특히 상하 위계 질서가 분명하고 품위있는 교회 풍토를 확립시켜 주십시오.
4. 사회 참여의 교회적 한계, 교회적인 방법에 관한 교회 최고 교도권의 지침을 공개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주교님들께서는 조국과 민족적인 차원의 문제에 한하여 그리고 윤리적 가치 차원에 한하여 대화의 방법을 견지해 주시기 바라며, 성직자들은 평신도 교육이라는 제2선에 머물러 있게 하여 주시고, 사회 제일선에서는 평신도들 스스로가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은 내정 간섭의 오해나 마찰을 초래하지 않도록 한국인 사제 이상으로 지혜로운 처신을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5.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려하지 않는 정신풍토와,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 하느님의 법이 최후의 기준임에서 불구하고 개인의 양심만을 최후 유일의 기준으로 하려는 윤리판단기준의 오류를 시정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호소를 드리는 우리 사제들은 지속성을 띤 단체가 아니고 오로지 이 호소의 뜻을 같이하는 것뿐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1979년 10월 일
한편 오원춘은 10월 15일 대구지법 제3 형사부(재판장 서정제 부장판사)로부터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 형은 자동적으로 확정되었다.
또 다른 드라마 : YH여공 농성
경찰이 오원춘 사건을 발표한 8월 10일. 또 다른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었다. YH무역의 여공들이 농성장을 공장에서 신민당사로 옮긴 것이었다. 공장에서 농성중 여공들이 발표한 호소문은 이 사건의 과정을 이해하는 기초자료다.
호소문
정부와 은행은 근대화의 역군을 윤락가로 내몰지 말라.
눈물이 흐릅니다. 가슴이 메어지게 아파옵니다. 목이 터져라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외치곤 쉬어 버린 목으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란 유행가에 우리가 작사를 붙인 노래입니다. 함께 힘차게 불러 보시지 않겠습니까?
YH옥상 위에 노총깃발 꽂아놓고
사랑하는 동지들과 한백년 살고 싶네.
임금은 최저임금 생산량은 초과달성
연근 야근 다해줘도 폐업이란 웬말이냐
YH옥상에다 노총깃발 꽂아놓고
사랑하는 동지들과 한백년 살고 싶어
이렇게 320여명의 여성근로자인 우리는 10일째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존경하옵는 정부당국 및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시는 여러분! 제발 귀를 기울여 저희들의 억울하고 비참한 실정을 들어주십시오. 그래서 저희들이 산업전사로서 조국 근대화의 역군으로서 부모님께 효성스런 여식으로서 웃으며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불과 4년만에 400배로 급성장한 YH, 대통령 훈장 받음
YH무역은 1966년 재미교포인 장용호가 왕십리에서 단지 10여명의 종업원으로 가발을 시작해서 4년 후인 1970년에는 약 4,000여 명을 고용하는 국내 최대 가발 업체가 되었고 당시 수출 순위가 15위였던 대기업으로 기적같이 급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표창, 석탑 산업 훈장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이 성장의 비결 : 저임금, 열악한 근로조건, 근로자들의 희생
그러나 누구나 다 잘 알 듯이 가발 산업은 어떤 산업보다 노동 집약적인 사업이 아닙니까? 당시 불어온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당국의 수출정책이 YH무역의 성장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여성 근로자의 세심한 노동력과 근면이야말로 무역의 성장비결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재적인 고용권의 횡포와 생존권을 위협하는 도급제의 저임금, 그리고 노동법상의 권리를 박탈한 장용호의 악질적 착취가 바로 YH무역의 성장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장용호와 진동희의 사기극과 배반'을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리고 분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성장한 회사를 보며 뿌듯해 했고, 이렇게 큰 공장에 다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용호 사장과 그의 동서인 진동희 부사장이 국가의 정책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우리들을 배반하는 엄청난 사기극을 시작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던 것입니다.
장용호 회장 미국에 백화점 설립, 외화 도피의 수단
1970년 장용호는 회장이 되고 동서인 진동희를 사장으로 앉히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백화점을 차렸던 것입니다. 이 백화점이 바로 우리들의 피땀 흘려 만든 상품이 원가에 가깝게 수출되어 하나마나한 수출실적을 올리게 하는 부정의 근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회사가 망하게 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동희가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사장으로 있으면서 장용호에게 1975년까지 받기로 하고 300 만불(15억 원)어치의 상품을 외상으로 수출했는데 그 돈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피와 땀의 결정체는 부자 나라 미국으로 보내어졌으며 빛난 석탑산업훈장의 영예는 시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장용호 회장이 대통령 표창, 석탑산업훈장의 밑바닥을 쥐새끼처럼 갉아먹고 있을 때 진동희 사장은 국내에 YH해운을 설립했으며 그 자본은 물론 YH무역으로부터 나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국외와 국내로 자본을 빼앗긴 YH은 무역은 1971년을 전성기로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진동희 사장과 장용호의 협잡 : 외화도피 10억 원의 소문
더구나 진동희 사장은 장용호 회장이 미국으로 건너가 백화점을 설립했던 1970년 사원들의 상여금으로 10억여 원을 주었다고 꾸미고 그 돈을 유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저희들의 사건이 난 후에 현 회사의 경영 간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며 증거는 없으나 감사를 해보면 당장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의 회사 순이익은 12억 7,389만 원으로서 최대의 순이익을 올렸던 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동희 사장과 장용호는 외화 도피와 탈세는 물론 엄청난 범법행위와 불의를 저지른 것이 된 것입니다.
박정원 현사장의 취임과 무리한 경영, 폐쇄된 친척간의 경영으로 계속되는 부정
1975년은 장용호 회장이 외상 수출의 빚을 갚기로 약속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돈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74년 은행빚은 6억 3,255만원이었는데 1975년이 되면서 껑충 뛰어 16억 9,1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1975년 12월 23일, 진동희는 YH해운의 사장으로 취임하고 현 박정원 사장이 취임했으며 장용호의 대부인 김종혁이 재정관리 상무이사로 왔습니다. 박정원 사장은 은행빚을 얻어 1977년 오리온전자를 인수하고 새한칼라의 주를 44퍼센트나 매입하는 등 무리한 경영을 했습니다. 그래서 1977년의 은행 빚은 31억 7,357만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리온전자도 망했고, 회사는 빚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장용호의 매부인 김종혁은 박사장 몰래 회사의 기계를 4천만원을 넘게 팔아 먹었으며 이 돈은 현 박사장과 김종혁 사이에 지금도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억울한 근로자는 해고, 계속되는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
1970년부터 일어난 계속되는 회사의 부정과 부패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만이었습니다. 1970년의 4,000여 명은 점점 줄어 1975년에는 1,800여명으로 줄어들어 약 2,000여명이 죄 없이 길거리로 쫓겨났고, 더 이상의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을 이기지 못해 마지못해 사표를 썼던 것입니다. 당시 저희들의 일당은 단돈 220원에 불과했었던 것이며 회사는 독재적 경영권을 휘둘러 불법적 해고, 부당한 전직 및 전출, 감봉 등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도저히 참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노조의 결성 희망과 감격
1975년 5월 24일, 저희들은 엄청난 시련과 대가를 치르고 전국섬유노동조합 YH 무역지부를 결성했습니다. 이 기쁨은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인지 확실히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1976년 우리는 회사 창립 이후 처음으로 50퍼센트의 상여금을 받았습니다.
계속되는 투쟁, 회사의 경영부진과 노조의 투쟁
회사는 박사장 취임 이후 경영 부진과 계속되는 부정부패로 인하여 은행의 비중만 늘어나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77년은 회사의 인건비와 맞먹는 은행이자로 3억 2,100만원이 지출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회사는 감원의 필요를 느꼈고, 폐업을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답게 산다는 것과 정의롭게 산다는 것을 노동조합으로부터 배운 우리는 똘똘 뭉쳐 회사의 부당한 감원에 반대하며 또한, 차근차근 임금인상과 작업조건의 개선, 상여금 인상 등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여기서 회사는 엄청난 배반을 하게 됩니다.
경영자의 속셈 : 노동조합의 파괴, 공장의 위장 이전과 위장 장기휴업
1977년 회사는 정부당국의 시책에 따라 가발과를 충북 청산 두메산골로 이전한다는 공고를 써 붙였습니다. 그때 500명이 넘던 가발과 조합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진 사표를 쓰고야 말았습니다. 정부당국의 시책이라는 말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협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해고 수당 문제로 끝까지 남아 청산까지 가서 투쟁한 30여 명은 300퍼센트의 해고 수당을 받고 퇴사했습니다. 회사는 코라량이 충분했음에도 작업량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며 장기휴업을 통하여 생계의 타격을 주어 직장을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회사가 작업량을 하청 공장에 맡겨 생산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업주가 더 이상 회사를 경영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리하여 떠나간 우리의 동료들은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차가운 거리로, 보다 열악한 하청 공장으로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여자의 마지막 밥벌이로 나갔던 것입니다. 1978년 조합원수는 500여명으로 줄고 회사는 돈이 없다며 가지고 있던 코라는 전부 하청 공장에 맡기고 우리도 다른 회사의 하청만 맡아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박정원 사장은 회사가 계속 적자가 난다고 엄살을 했습니다.
본부조합의 불법 대의원 대회와 우리의 분노
1978년 전국섬유노동조합의 대의원 대회가 부산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위원장 후보로는 동일방직똥물사건으로 유명한 현 위원장 김영태와 마산합일합섬의 지부장인 이유복씨와 대결이 있었습니다. 누가 당선될지 그 세력은 비슷비슷했었습니다. 여기서 김영태는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제지하기 위해 핑계를 만들고 원풍, 반도, YH, 세지부를 대의원 대회에 강제로 참석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이후 본 조는 우리 지부로 공문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계속 회사가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합원을 계획적으로 감원시키는 진정한 이유-외화도피와 경영부실-을 몰랐던 우리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고 만들어야하겠다고 생각했고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했습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600여 명이었던 조합원은 500여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1978년 5월, 제3차 정기 대의원 대회 때 우리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위장 휴업과 그로 인한 자진 사표를 써내는 조합원들이 없어야겠다는 결의로 휴업과 공장 이전은 노사 협의 하에 할 것과 인원의 감원(자연 감소도 포함)때는 곧 모집할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습니다. 이날 밤늦게 북부 노동청 소장님과 관계기관의 입회 아래 위장 휴업과 공장 이전은 노사합의 아래 할 것이며 인원이 감소되면 즉각 고용토록 한다는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지부장 중정 연행과 농성
1979년 3월 25일, 우리 지부장님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중앙 정보부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알고 보니 원풍·반도·동일방직 지부장에서도 지부장님, 간부들이 중앙 정보부에 연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부장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부장님이 무사히 나오시길 바라면서 정상작업이 끝난 후에 모두 모여 '지부장님을 돌려달라'며 3일간 농성을 했습니다. 회사와 태능서에선'너희 지부장은 반공법에 걸렸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믿지 않았습니다. 3일째 지부장님은 무사히 돌아오셨고 우리는 모두 운동장에 뛰어나와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그날뿐이었습니다.
날려락, 노사 협의 중에 폐업공고
1979년 3월 29일, 회사 정문에 4월말로 공장을 폐업한다는 공고가 붙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회사와 임금인상 문제를 자기고 노사협의 중이었습니다. 박사장은 폐업 사유서를 통하여 회사의 부실화는 장회장이 갚지 않은 15억 원의 부채가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 총 자산은 23억 원인데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으로부터 빚이 40억 5천만 원에 이르게 되었고 YH무역과 대보해운(구 YH해운)의 주식100주를 조흥은행이 압수하고 월900만원의 적자를 보게 되어 임금체불의 염려가 있는 데다가 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함으로서 이에 폐업한다고 했습니다.
각자 살길을 찾읍시다 : 조흥은행 이상무
저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장용호의 외화도피는 물론 악덕 기업주와 은행의 부정 대출결과가 우리를 길거리로 내쫓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치가 떨렸습니다. 4월 2일 북부 노동청을 찾아간 저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진 자가 하기 싫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과장의 말만 듣고 억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되돌아 서고 말았습니다. 이에 저희는 4월 6일 긴급 대의원 대회를 개회했고 호소문과 결의문을 결의했으며 4월 13일까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조합원 총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관계당국의 요구대로 4월 13일까지 조용히 생활에 전념해왔으나 우리의 기대는 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분노했고 다시 4월 13일의 조합원 총회 개최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조합원 총회는 결코 도중 하차를 않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폐업공고가 붙자 회사의 일감이 줄어 4월 17일께에는 일감이 떨어질 예정으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저희들은 신문에 보도된 율산사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YH무역과 율산사건을 비교해 보았으며 결국은 두 사건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니 YH경우는 규모가 작을 뿐 율산보다 더욱 부당하고 못된 경우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조합원총회와 농성 : 기동대의 난입과 2시간의 난투극
저희들은 죽어도 대회장안에서 죽고 살아도 대회장안에서 살겠다는 각오를 하고 500여 전 조합원이 단결하면 산다라는 생각만으로 총회에 임했습니다. 준비물은 빵 1,000봉지 코덱스 120봉지, 약품, 이불깔판으로 스티로폴 200장을 준비했습니다. 거의 매일 노조 사무실로 출근을 하던 태능서 형사는 우리의 준비물과 결의를 태능서에 보고했습니다. 오후 2시에 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양일동 통일당 총재, 교회 청년 단체 등에서 보내주신 격려전보가 9장, 그리고 취재기자 10여명과 12명의 내빈이 우리에게 힘을 보태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를 해결해야 할 회사와 은행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존권과 근로권의 보장, 폐업공고 즉각 철회, 조흥은행은 YH 무역을 은행관리기업으로 인수하여 현 부채 상환을 5년 거치 5년 상환으로 완화할 것, 조흥은행은 경매 처분할 경우 고용 승계·금품청산을 보장할 것 등을 결의하고, 오후 3시부터 농성에 들어간 저희들은 평화적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9시 30분 경 태능 경찰서장이 나타나 '20 분 후에 해산하지 않으면 100여 명의 기동대를 풀어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정과 부패로 기업을 쓰러뜨리고 근로자를 길거리로 내쫓는 악덕기업주와 은행을 다스리고, 민중의 지팡이로서 약하고 억울한 사람을 보호해야 할 민주 경찰이 헌법이 보장한 정당한 생존권을 달라고 평화적으로 농성하는 우리들에게 기동대가 웬말입니까?
우리들은 회사 정상화 대책이 설 때까지 물러설 수 없음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120여 명의 경찰이 우리가 앉아있던 걸상을 빼내어 조합원들은 뒤로 넘어졌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단결했고 경찰은 더욱 강하게 나와 2∼3명이 우리들 한 명씩을 떼어내려 했고 잘 안 되자 긴 가죽구두로 옆구리를 차고 곤봉으로 어깨와 손을 마구 때렸습니다.
우는 소리, 고함소리가 굉장했습니다. 그래도 잘 떨어지지 않자 우리의 앞가슴을 만졌고 당황한 조합원들이 떨어지자 어두운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이렇게 두 시간을 싸운 후 우리는 운동장에 끌려나와 또 농성을 했습니다. 이숙희(21)동지가 뇌를 다쳐 실신하여 입원을 했으며 2명의 조합원이 10일의 진단서를 떼었고 15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전원이 결리고 아픈 증세로 며칠을 고생했습니다. 영수증으로 보관하고 있는 약값만 18만 여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한푼의 돈도 치료비에 보태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는 기숙사로 들어갔고 다음날 아침 8시에 출근, 밤 11시까지 농성을 했습니다. 이렇게 닷새가 흘러갔을 때 노동 위원회가 모였습니다. 4월 17일 드디어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현재는 대보해운으로 이름을 바꾼 YH해운의 진동희 사장과 박정원 사장이 노동청 박창규 차장과 관계기관 태능서 담당자의 입회아래 폐업 공고를 즉각 철회하고 회사 정상화를 책임진다는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조흥은행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노동청 박차장은 임금체불은 없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일단승리의 기쁨을 맛보며 다음날부터 즉시 생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우리가 갖는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고 곧 진짜 싸움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