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의 병은 만성간염

제명 다음날은 추석이었다. 유정회 대변인이었던 정재호는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1979년 추석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유혁인씨가 롯데호텔로 빨리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최규하 총리, 김성진 문공장관, 유혁인, 오유방, 공화당 대변인, 외무차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궁정동 정보부장 관사로 가서 이야기하지고 해서 우리는 그곳으로 옮겼고 총리만 공관으로 갔다. 김재규가 우리를 맞더니 총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접니다. 각하가 국수 주셔서 맛있게 먹고 오는 길입니다. 각하께선 대단히 기분이 좋으십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한국을 경찰국가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이 비난에 대해 미 국무성의 고위 관리가 케네디 의원은 마치 자기가 차기 대통령이나 된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냉소적인 코멘트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런 정보를 올렸더니 각하께서는 흥분하셔서 여당 대변인들이 이에 맞춰 케네디 의원을 반격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문안 작성회의가 시작됐는데 김부장은 바쁜 일이 있다면서 나가버렸다. 그러자 김의 부하 한 사람이 '코멘트를 한 사람은 미 국무성 고위관리가 아니고 서울 미 대사관의 참사관이며, 그것은 사석에서 한 얘기다' 고 했다. 나는 그런 일로 추석날에 이런 회의를 소집한 김재규에게 울화통이 터졌다. 총리에게 문안을 보고하러 가는 김성진 장관의 차중에서 '저런 돌대가리가……' 하고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총리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는 논평이라고 했으나 총리는 '기왕 김부장이 보고한 사항이니……' 라고 해서 짤막한 성명문을 다음날 발표하긴 했다.'

당시의 김재규는 얼굴이 까맣게 타 있었다고 한다. 간이 나빠서 그랬다고도 하고 김의 소행을 간 질환에 기인한 정신 착란으로 풀이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점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김재규는 간 전문가인 서울의대 김정룡(金丁龍) 교수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김교수는 1971년부터 김부장을 치료해 왔었다. 부마사태 무렵의 김재규는 '만성 활동성 간염'으로서 악화가 정지된 '현상 유지'의 상태였다. 일상 생활엔 별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이 상태는 간경변증의 전 단계로서 얼굴 검은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김교수는 1주에 한 번씩 공관으로 김부장을 찾아가 주사를 놓거나 약 처방을 해 주었다.

김재규는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고단백식품, 평형식 등 의사가 내리는 처방에 충실히 따라 김교수에겐 '모범생 환자'로 기억되고 있다. 김재규는 10여 년간 만난 사이인데도 공무와 관계된 이야기나 잡담은 전혀 없어 '차갑다'는 인상이었고 의사라면 누구에게도 '박사님'이라 부르며 공손했다고 한다. 부마사태를 전후하여 몇 번 만났지만 그의 심경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군시절 포사격으로 오른쪽 고막에 손상을 입어 쳥력이 다소 약했다. 그래서 대통령께 보고할 때는 왼쪽 귀를 그쪽으로 향할수 있도록 좌석 배치를 해 달라고 부하에게 명령하곤 했다. 그의 보고태도는 신하가 왕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부마사태 직전의 시점에서 김재규가 반의(反意)의 씨앗을 품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징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에 대한 '1일 연금해제' 그전의 김대중 병원 이감 조처, 김영삼과 비밀면담 했을 때 간절하게 '이러면 대통령도 불행해진다.' '대통령이 당신을 구속하려 한다.'고 털어놓은 일 등등. 그러나 이런 징후들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노출됐을 뿐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충직한 보필자였다. 문제는 그의 '반의'가 어떤 계기로 터지는가 였다. 그 시기는 의외로 빨리 닥쳤다.

김재규를 괴롭힌 김형욱 회고록

김재규가 김영삼 의원 제명을 앞두고 차지철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골치를 앓고 있던 9월 하순, 그는 김형욱의 자서전 문제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서전 출판을 둘러싼 김형욱과 김재규의 비밀협상은 한때 돌파구를 찾는 듯 했으나 9월 하순께는 국내 정치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부 인사들은 10·26거사의 배경에는 김형욱 실종사건도 얽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박정권의 최후의 순간에 일어난 전 정보부장 김형욱의 실종과 현 정보부장 김재규의 모반이야말로 박정권의 생리를 들여다보게 하는 열쇠 구멍이기도 하다.

김재규가 1976년 12월에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기 전까지는 두 사람이 감정을 갖고 부딪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업무상 두 사람이 처음 관련을 가졌던 것은 6·3사태 때였다.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데모가 격렬해져 정부는 서울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 서울에 진주한 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산하의 3개 사단이었다. 김재규 소장은 제6사단장으로서 덕수궁에 본부를 두고 치안유지에 나섰다.

이때 계엄 업무를 맡고 있었던 수도경비사령부 김진위 소장, 김재규 소장, 제20사단장 정봉욱 소장, 33사단장 이병엽 준장 등은 회의를 열고 김종필(당시는 공화당의장을 물러난 직후)을 정계에서 퇴진시켜야 군과 민심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통첩을 보냈다고 한다.

김형욱은 이들 장군들은 당장 병력을 출동시켜 김종필 등을 잡아넣으려는 기세였는데 자신이 나서서 무마하고 김종필을 재차 외유시키도록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뒤에 말했다.

김재규가 본격적으로 김형욱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뒤부터였을 것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이후락의 실각을 가져왔듯 박동선 사건은 신직수 부장의 퇴진을 결과했다. 박동선 사건 자체는 김형욱과 이후락 부장 시절에 그 씨가 뿌려졌으므로 신부장의 책임이라 할 수 없었다.

박동선의 신분이 미국의 언론에 의해 노출되자 한국 정부쪽에선 김한조란 재미동포를 새로운 로비스트로 기용했다. 김한조는 수십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아 미국내의 여론을 친정부적으로 돌려놓는 일을 맡게 됐던 것이다. '백설작전'으로 불려진 이 공작에서도 공작금의 사용처에 따른 여러 가지 말썽이 생겼다. 김한조와 서울사이의 연락을 책임지고 김한조를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은 주미 한국 대사관 1등서기관 김상근(金相根)이었다.

그는 1976년 11월에 즉시 서울로 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1월 23일 그는 27일의 대한 항공기편으로 서울로 가겠다고 보고하고 다음날 뉴욕으로 갔다. 거기서 김상근은 옛상사인 김형욱을 만났다. 김형욱은 김상근에게 망명을 권했다. 돌아가면 공작 실패를 이유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김형욱은 1973년 4월 원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구속수사를 받고 있는 동안 대만의 중화학술원에서 명예박사를 받기 위해 출국했다가 대만에서 도쿄를 경유 미국으로가 망명생활에 들어갔었다. 이틀 뒤인 11월 26일 김형욱은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 근처에 있는 홀리데이인의 커피숍에서 김상근을 만났다. 얼마 뒤 FBI요원 3명이 나타났다. 김형욱이 미리 연락을 해 놓았었다. 이렇게 하여 김상근의 미국 망명이 이뤄졌다. 그 뒤 김상근은 미국의회에 나가서 한국기관의 대미공작 등에 대해 많은 말을 하게 된다. 김형욱은『뉴욕타임즈』에 김상근의 망명을 귀띔해 주어 이 사건을 시끄럽게 보도하도록 만들었다.

김재규의 간곡한 귀국 종용 사신

신직수가 해임된 것은 이 망명사건 직후였다. 자신을 냉대한 박대통령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고 있던 김형욱은 강타를 먹인 셈이 됐다. 신임부장 김재규의 눈에는 1973년 4월부터 미국에서 사실상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김형욱이 시한폭탄처럼 보였을 것이다. 6년간이나 정보책임자로 있으면서 박정희와 박정권의 어두운 면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김형욱. 그가 한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성난 늑대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김재규로서는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보부장 취임 한달만인 1977년 1월 17일 김재규는 김형욱에게 자필편지를 보냈다.

'……각하께서는 그 친구가 돌아온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자유롭게 왕복한다면 남이 보아도 좋고 본인은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또 돌아와 일하겠다고 하면 원하는 중책도 맡기지, 하시더군요. 김상근 망명이란 불사상에서도 불구하고 김부장께서 다시 조국에 돌아왔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의의 깊은 일이겠습니까? 모든 걸 훨훨 뿌리치시고 고국에 돌아오셔서 다시 예와 같이 손과 손을 맞잡고 나라와 겨레를 위한 더욱 보람되고 값진 일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시 만날 그 날이 멀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새해에는 더욱 건승하시고 댁내에 보다 많은 행복과 기쁨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2월 17일에서도 김재규는 사신을 보냈다.
'……백의 종군한 충무공은 지금은 민족의 성웅으로서 전 동포의 추앙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필귀정을 신념으로 삼고 지금까지 지켜온 김부장의 침묵을 귀국이라는 행동으로써 깰 때가 됐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싱긋이 웃으며 김포공항의 트랩을 내리는 김부장의 그리운 모습을 생각하면서 …….' 김재규가 손에 넣고 싶어한 것은 김형욱의 침묵이었다.

이 즈음 김형욱도 조국에의 향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고국에의 향수를 자극하는' 뉴욕시내의 술집에서 술에 취한 김형욱은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부르기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고독과 비탄이 뒤범벅된 외로운 밤길'이라고 그는 술회한 적도 있다.

국내에서 거금을 빼돌린 덕분에 유유자적할 수 있는 김형욱이었다. 그 많은 여가가 그의 고민이기도 했다. 아침 5시 기상, 산책, 텔레비전 뉴스 시청, 그리고 방문객들은 맞았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하는 성미였다. 일부러 찾아와 기도하고 강론해 주는 종교인들도 있었다. 저녁에는 독서나 술집 순례.

전직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박대통령에 대한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그는 한국에 돌아갈 경우 두 개의 선택만이 가능했다.
하나는 박대통령에게 배전의 노력으로 충성하는 길이고 다른 길은 반 정부쪽에 서는 것이었다.
첫째 길은 인격파산을 의미했고, 두 번째 길은 자폭을 뜻했다. 그에게 현상 유지의 선택은 미국에 머무는 것이다. 망명 직전의 김형욱은 소외감과 불안감의 포로였다. 미국 망명 뒤 그 감정은 복수심으로 바뀌었다. 복수심을 근사하게 포장하는 데는 정의감이나 민주주의란 낱말이 필요했다.

박대통령은 미국에 들르는 고관들을 통해 여러 번 김형욱의 귀국을 종용했다. 김형욱은 미 의회에서 백두진, 정일권, 장경순, 홍조철, 김동조 등이 자기를 만나 귀국을 권유했고 멕시코 대사 자리까지 제의했었다고 밝혔었다. 김재규의 사신이 온 직후 1977년 3월엔 김종필 전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3일간 김형욱과 같이 골프를 치면서 귀국을 권했다. 이런 시도는 다 수포로 돌아갔다. 그사이 김형욱은 비수를 갈고 있었다. 뉴욕의 김재현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그는 기자회견 문안을 작성했다. 김변호사는 영문번역을 맡았다.

1977년 6월 2일 김형욱은 뉴저지의 어느 모텔에서 『뉴욕타임즈』의 아시아문제 전문기자인 리차드 헬로란과 단독회견을 가졌다. 김변호사가 통역을 맡았다. 김형욱은 이 회견에서 자기가 중정부장 시절 기용했던 박동선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고 박정권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계획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이 회견내용은 6월 8일자 신문에 1면 기사로 그 다음날에는 속보 형식으로 크게 보도됐다. 아마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김재규였을것이다. 김재규는 김형욱이 내친 김에 6월 22일에 미 하원 국제문제 위원회 즉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기로 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발 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증언시 독을 빼도록 하라'

1976년 12월 15일 손호영은 모 기관 휴스턴 주재관에서 뉴욕을 분실장으로 전보됐다. 그는 전임자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즉 박동선사건으로 미국이 시끄러우니 재미동포와의 갈등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지내라는 충고였다. 전임자는 이것이 상부의 뜻이기도 하다고 암시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김형욱과 한국 정부사이의 연락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1977년 6월 8일 손호영은 서울로부터 긴급 전문을 한 통 받았다. (이하 인용하는 전문은 미 의회에 제출된 증거물에 포함된 것임)

'6월 5일자『뉴욕타임즈』헬로란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김형욱은 박동선이 KCIA의 정보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대통령 각하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았음. 김형욱의 발언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음.
국내 언론이 6월 7일자로 이를(선택적으로)보도,
문공부 대변인이 부인 성명 발표,
정일권 국회의장도 부인 성명 발표, 귀관은 문제된 기사의 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앞일에 대처하도록 할 것'

그때 손씨는 상부로부터 김형욱과 직접 접촉은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손씨는 김형욱과 가까운 백태하(白泰夏)를 통해 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포병 장교였던 백씨는 5·16주체 세력출신으로서 김형욱 밑에서 지부장을 지냈고 미국에 건너와 살고 있었다. 백씨는 손호영에게 자신이 지금 김형욱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는 중이며 김이 미 의회에 나가 증언할 것 같다는 정보도 제공했다.

6월 11일 손호영은 또 한 통의 전문을 서울로부터 받았다. 그 요지는
'김형욱과 그의 법률고문인 김재현과의 관계를 파악할 것. 김재현이 미국 CIA나 FBI와 협조 관계인지를 알아볼 것, 김형욱이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것, 김형욱이 오는 22일의 의회증언에서 말할 내용을 입수한 즉시 김재현에게 반정부 적인 부분을 제거하도록 설득할 것' 등이었다.

6월 11일 손씨는 그날 두 번째 전문을 받았다.
'백태하를 통해 김형욱을 설득, 어느 증언에서 독(毒)을 빼도록 할 것. 이것이 실패하면 백태하로 하여금 김형욱의 약점을 미국 언론에 폭로케 한 뒤 즉시 귀국토록 할 것. 폭로 내용은 백이 김의 오랜 친구였는데, 김이 조국을 배신한 믿을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결별한다는 요지일 것. 백태하를 신경써서 관리할 것. 즉 지금이야말로 한국인으로서의 용기를 보일 때라고 독려할 것.'
백태하는 미국에 이민과 같아서 생활이 곤란하자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어 구멍가게를 낸 적이 있었다. 사위 한병기 대사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박대통령은 즉시 2만 달러를 백태하에게 보내 김형욱에게 진 빚을 갚도록 한 적도 있었다.

민병권·김형욱 밀담의 내용

그 6일 뒤인 6월 17일에 손호영은 서울로부터 중요한 연락을 받았다. 이 전문은 민병권(閔柄權)무임소장관이 6월 17일 TWA 904편으로 서울을 출발, 뉴욕 케네디 공항에 다음날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민장관의 방미 목적은 '김형욱에게 정부의 입장을 알림으로써 그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이라 했다. 이 전문은 또 '민장관의 방미는 해양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공식방문으로 주선된 것이니 만큼 보안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다음날 손씨는 또 다른 전문을 받았다. 김형욱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백태하의 귀국을 김형욱의 증언 뒤로 연기하고 김형욱의 증언의 순화시키는데 백씨가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라는 내용이었다.

1977년 6월 19일 오전 민병권 장관은 뉴욕에서 김형욱에게 세 차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백태하도 중간에서 열심히 뛰어 그날 오후 5시 민장관이 김형욱의 집을 찾아가 고향 및 군의 후배인 김을 만나기로 약속이 성립됐다. 미 의회 증언이 3일 뒤로 다가와 있을 무렵이었다. 박대통령의 특별 부탁을 받고 간 민장관으로서는 다급했을 것이다. 1977년 6월 20일 오후에 손씨는 서울로 장문의 긴급보고를 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민장관은 19일 오후 4∼9시 30분 사이에 알파인 골프 하우스에서 김형욱을 만났음. 참석자는 7명 : 민장관, 김형욱 부부, 유영수(김형욱의 보좌역) 부부, 백태하 부부.

1. 김형욱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음.
가. 한국에 있을 동안 박정권 측에서 나를 아주 냉대했다. 집을 수색했다. 나를 체포하려는 기미가 보여서 미국으로 달아난 것이다.
나. 미국에서도 모두가 나를 멀리했다.
다. 처와 아들의 여권을 신청했더니 거절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하라는 것은 잡아넣겠다는 의 도가 아닌가.
라. 미국의 기관들은 나로부터 정보를 빼내려고 애썼고 프레이저는 2년 전부터 청문회에 나오도록 계속 요청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었다.
마. 서울의 신문들에 난 나에 대한 비방 보도에 유감이 많다.
바. 그들(언론)은 확인도 하지 않고 나를 반역자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결심을 촉발시켰다.

2. 김형욱은 이어서 고향 선배인 민장관이 일부러 뉴욕까지 온데 대해 감사했음. 그리고 두 개 질문을 했음.
가. 나에 대한 대통령 각하의 감정은 어떠한가?
나. 나에 대한 요구 사항은 ?

3. 민장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음.
가. 대통령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는데 매우 불쾌해 했다. '과연 그가 이럴 수가 있을까?' 라면서 지금도 당신이 그런 일을 했다고는 믿으려 하지 않고 있고 유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감정을 감안할 때 만약 당신이 대통령각하께 편지를 써서 과거의 행동을 사과하고 앞으로는 반국가적인 언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각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나. 이런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거북하다면 첫째 청문회에 나기지 말 것, 둘째 제3국으로 가서 당분간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 첫째 요구를 들어주기 어렵다면 출석을 2주간만 연기해달라. 청문회에 다시 나가더라도 국가 원수에 대한 언급만은 일체 피해 달라. 그렇게 하면 미국 수사기관의 기분도 크게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4. 김형욱은 위와 같은 선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았다.
김 : 그렇게 하면 나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민 : 조국을 배반하는 것보다는 낫지.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의 제의대로 증언한다면 당신이 전에 말한 내용과는 다르지 않나 하는 질문이 나올거야. 그때는 이렇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 '사석에서 술에 취해서 그런 소리를 했는데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증거가 확실한 것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과거에 당신이 이야기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언급할 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

김 : 민선배께서 오늘 나와 만나 이야기한 결과를 보고할 때는 이렇게 해주세요(김형욱은 전보 내용을 스스로 초안 잡아 민장관에게 읽어 주었음) '그가 고의적으로 나를 피하는 바람에 어제는 면담이 되지 않았음. 그러나 오늘 선후배 관계로서 면담이 이뤄짐. 김형욱은 자신에 대한 비방에 굉장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음. 그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나 계속 노력하겠음.'

민 :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야. 자 이제 어떻게 할까.

김 : 다시 만나요.(김형욱은 민장관을 20일이나 12일에 집으로 초대하여 아내가 장만한 냉면을 대접하겠다도 했음.)

5. 민장관의 소감
가. 면담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나. 김형욱은 청문회에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출석을 연기하는 방법은 있다.
다. 자기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묻고, 선배인 나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6. 백태하는 민장관을 호텔로 모신 뒤 김형욱의 집으로 다시 가서 청문회에서 읽을 성명서 가운데서 독소 조항을 빼도록 설득했음.

7. 마지막에 김형욱은 자신이 박대통령 각하를 비난한 것은 자신이 카터 대통령을 비난했으므로 박대통령도 마찬가지로 결심했던 것이라고 말했음. 6월 18일 민병권 장관이 도착 즉시 김형욱에게 전화를 하니 김형욱은 한국 정부가 가장 적당한 분을 보낸 것 같다고 말하면서 밤늦게 호텔로 찾아가겠다고 했음. 만약 민장관이 집으로 찾아오면 경비원들에 의해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음. 그러나 김은 호텔에 나타나지 않았음.

'제3국으로 못 갑니다.'

두 번째 면담은 6월 20일 오후 6∼10시 사이 뉴저지주에 있는 김형욱의 집에서 이뤄졌다. 손호영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 두 번째 면담에는 민장관, 김형욱, 백태하, 유영수(PR회사 경영) 등 4명이 참석했음. 민장관은 제3국으로 갈 것, 청문회 출석을 연기할 것, 증언 내용 중 '독소 조항'을 제거할 것 등을 요청했음. 김은 이 요구사항을 전부 거절했음. 다만 선배인 민장관의 입장을 생각하여 '독소조항'의 제거문제는 신중하게 고려하겠다고 약속함.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음.

김 : 한국정부는 한미관계가 어렵게 된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정부의 고관들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보고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파티를 열면 미국인들은 오지도 않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면 카드만 받고 선물을 돌려줄 정도입니다. 한국 외교관들은 이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정부의 정책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군 철수문제에 대해 박대통령은 '철수하고 싶으면 하라'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1975년에 난 박동선 사건을 수사하는 미국 정부기관에 가서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왜 미국인들이 문선명이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 지지 데모를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PR회사 사장인 유열수씨와 함께 22일로 예정된 의회 증언의 초고를 준비했습니다.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요. (유씨는 고의로 일을 늦추려고 애쓰고 있음. 그렇게 되면 청문회 출석이 자동 연기됨)

민 : 어제의 이야기를 계속하겠는데 제3국으로 갈 수 없나?

김 : 갈 수 없습니다.

민 : 그러면 증언을 해야 할텐데 좀 더 연기할 수 없나?

김 : 나 스스로 연기하기는 어려워요.

민 : 그러면 증언하더라고 국가 원수에 관련된 부분은 빼고 하도록 하지.

김 : 선배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지요.

민 : 그렇게 결심했다면 대통령각하께 편지를 써야 하네.

김 : 뭐라고 쓰죠?

민 : 이런 취지로 쓰도록. '제가 신문에 말한 것으로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국과 각하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김 : 대통령이 나를 박대한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추가하지요.

민 : 자네가 그런 걸 안 쓰더라도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만 쓰면 지나간 오해는 만족스럽게 풀릴 거야.

김 : 내가 의회에 나가서 읽을 내용을 유영수씨와 함께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일(21일) 정오에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할 때 편지를 드리지요.

유영수 : 출석 연기 문제가 편지보다 더 시급하지 않으세요.

백태하 : 민장관에게 선물을 하나 드려야지요

김 : (갑자기 외면하면서 )대통령이 편지를 안 보냈는데 왜 내가 편지를 써야 합니까? 왜 정부 대변인을 시켜 나를 용공분자라고 부릅니까? 나를 반역자라고까지 했어요. 반역자가 도대체 뭡니까? (그는 입에 거품을 품었으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음.)청문회에서 발표할 성명서 작성을 아직 끝내지 못했으니 그 일부터 해야겠어요.

2. 백태하가 제3국으로 갈 경우의 경비문제를 꺼냈더니 민장관은 김형욱의 의견을 물었음. 김은 제3국 행을 거절했음.

3. 유영수는 김의 성명서에서 독을 많이 뺐으나 아직도 각하와의 관계에 금이 갈 정도의 내용이 더러 남아 있다고 함. 민장관이 강력하게 김이 대통령께 편지를 쓰도록 요구하자 김은 계속 그러면 미국 의회에 나가 민장관이 자신을 달래러 온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말했음. 12일 오전 7시에 민장관·백태하·유영수와 다시 만나기로 했음. 그러나 절망적임.

도화선에 불붙은 시한폭탄

6월 21일 아침 민병권 장관 일행은 약속대로 김형욱 집에 갔다. 그러나 그 15분 전 김형욱은 워싱턴으로 출발해 버렸다. 김형욱은 '만나보았자 서로가 괴롭고 나의 결심은 이미 확고 부동할 뿐만 아니라 민병권씨는 갖은 방법으로 나를 설득할 것이 예상되므로 일찍이 집을 떠났다.'고 20여 일 뒤의 성명에서 밝혔다. 그는 또 '민씨를 탓하기에 앞서 무지무지한 독재 사회에서는 순순한 인간 관계마저 이다지도 무참하게 유린되고 그저 모두가 믿지 않고 증오하는 만인 대 만인의 불신사회가 돼버리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 덧붙였다.

21일 워싱턴 교외의 모텔에서 지내면서 증언에 대비하여 원고를 검토한 그는 22일 미 하원 국제기구 소위원회에 증인으로 나타났다. 그는 의원들과의 문답에 앞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박정희씨 개인에게 설사 인간억인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자가 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이르렀다.'면서 자신이 증언대에 선 입장을 밝혔다. 묘하게도 김형욱의 이 말과 꼭 같은 말을 2년 뒤 김재규가 하게 된다. 10·26 뒤 시해사건 군사 법정에서였다.

김형욱은 공화당 정권의 실상, 유신독재 성립 과정과 그 영향, 김대중 납치 사건과 박동선 사건 등의 소제목에 따라 성명서를 낭독해 갔다. 전직 정보책임자로서 신랄하면서도 권위 있는 폭로였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개인적 스캔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계획에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한반도로부터의 핵무기 철수에 대해선 찬성한다고 했다.

김형욱은 박대통령이 고관들을 보내 자신의 귀국을 종용한 사실도 밝혔지만 민병권이 온 사실에 대해선 이때는 말하지 않았다. 이어서 장시간 문답이 진행됐다. 이 자리는 김형욱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무대인 것 같았다. 5·16이후 어느 누구도 이처럼 지독하게 또 증거를 들이대면서 박대통령에게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 박대통령과 그 측근으로부터 받았던 냉대로 응어리진 원한을 그는 다 쏟아놓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