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은 협박, 김재규는 전전긍긍

그러나 이틀간의 증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형욱은 '할 말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과 깊은 인간적 고독을 절감하였다.'고 한다. 제한된 시간의 청문회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벽녘에 집에 도착하여 '커피 한 잔을 들고 서재에 들어가 창 밖의 여명을 바라보면서 회고록의 첫머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뒤에 말했다. 거의 광적으로 그의 별명인 멧돼지처럼 원고 작성 작업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6월22일의 증언은 시한폭탄 김형욱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정도였고 대 폭발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 폭발이 자폭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김형욱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형욱의 증언으로 김재규의 입장이 곤혹스럽게 됐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김재규는 부장에 취임한 직후 박동선 사건을 한 달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이것은 유신체제에 대해서 미국 정부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압력을 넣는 것이란 판단을 했다고 한다.(10·26 재판 증언) 그래서 1977년 2월 박대통령에게 체제의 완화를 건의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김재규는 친미적 성향을 띠기 시작한다. 그러나 김형욱을 이해해줄 수 없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6월 29일, 즉 김형욱의 미 의회 증언이 있은 지 1주일 뒤 손호영은 상부로부터 '김형욱을 재미 교포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공작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7월 5일 김형욱-김재규 사이의 연락담당인 백태하는 손씨에게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했다. 그는 본부에 모종의 긴급 전문을 보내 그 회답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것은 새로운 사태 발전이었다. 손씨는 이런 요지의 전보를 첬다.

'김형욱은 백태하와 유영수를 한국에 보내 타협을 하고 싶다고 함. 김은 두 사람이 한국에 가면 김재규와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음. 김은 당분간 한국 정부에 대한 비방을 중단할 뜻임. 백태하는 김형욱이 최근 자기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유영수를 중개자로 하여 일을 처리할 기미가 보인다고 함. 본관의 분석에 따르면 백은 김형욱과 그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고 유영수를 통해 김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는 듯함.'(필자 주 : 김형욱은 뒤에 이 전문에 나타난 자신의 심경변화 운운은 손씨가 그의 곤란한 입장을 만회해 보려고 꾸민 거짓 보고라고 주장했다.)

다음날 김재규는 예정된 대로 백태하가 김형욱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귀국하도록 지시했다. 그 며칠 전 김형욱은 미국 기자들에게 민병권 장관이 설득 차 온 것을 털어놓아 한국 정부를 더욱 궁지로 몰았었다. 김재규는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김형욱을 순화시키는데 미련을 두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백태하가 귀국한 뒤 정부와 김형욱의 연락을 맡게 된 것은 뉴욕의 PR회사 경영자이며 미국 시민이기도 한 유영수였다.

7월 중순, 먼저 귀국했던 백씨가 유씨에게 서울로 들어오라는 통보를 했다. 유영수의 뒷날 미 의회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한국으로 가기 전에 김형욱을 찾아갔다. 그는 김재규 등 한국 고관들이 김형욱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대해 김형욱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했다. 아울러 김형욱에게 백태하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김형욱은 그에게 불리한 기사를 쓰고 있는 모 특파원을 다른 데로 보내 달라는 암시를 했었다고 한다. 당시 김형욱은 자신을 매도하는 국내 언론에 대해 굉장히 감정이 상해 있었다.

1977년 7월 15일 그는 「내외 국민에게 드리는 특별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박대통령을 협박했다. '나는 정보전문가로서 박정희씨에 대하여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박정희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입니다. 한가지만 언급한다면 나는 박정희씨를 참된 반공주의자로 믿고 있지 않는 점입니다. '


김재규의 극진한 설득 공작

이 말은 박대통령의 사상문제를 암시한 것으로 김재규를 더욱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그 뒤 1977년 11월 29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유영수는 이즈음의 사정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프레이저 : 한국에 갔을 때 김재규씨를 만났습니까?
유영수 : 만났습니다.
프레이저 : 김형욱씨 문제를 의논했습니까?
유영수 : 그렇습니다.
프레이저 : 몇 번 만났습니까?
유영수 : 세 번 만났습니다.
프레이저 : 김재규씨는 당신에게 편지 두 장-하나는 김형욱씨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 앞으로 쓴 편지-을 주었지요?
유영수 : 그렇습니다.
프레이저 : 김재규씨가 김형욱씨에게 보낸 편지의 복사물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 끝에 보면 '더욱 상세한 이야기들은 유영수씨로부터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란 귀절이 있습니다. '상세한 내용'이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유영수 : 김씨가 그 편지를 저에게 주었을 때 저는 대단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김재규씨가 그전에 김형욱씨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김형욱씨는 미국 의회 증언에서 공개해 버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김재규씨는 김형욱씨가 미 의회나 미국 신문을 상대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상관하지 않고 김형욱 장군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측에서 그런 일을 할 사람은 김재규 부장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로 그를 존경합니다.
프레이저 : 김재규 부장이나 백태하씨가 김형욱 부장 이야기를 안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항이 있었습니까?
유영수 : 정부 고관 등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김장군(김형욱을 가리킴)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프레이저 : 김재규씨가 김형욱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압니까?
유영수 : 잘은 모르지만 김장군의 아내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김부장은 김장군의 아내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희망했다고 합니다. 김재규씨는 김형욱 장군이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의 가족까지 멀리 할 필요는 없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김부장은 그러나 김장군이 요청한, 모 특파원을 바꿔 달라는 건의는 거절했습니다.

유영수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김재규는 김형욱을 달래기 위해 극진한(?)성의를 다하고 있었다. 일본 무사도를 의식하며 살아온 김재규는 선후배 관계나 의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가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김재규는 한 번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고 그들이 곤경에 처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의 이런 성격의 행동에 규범이 없고 이해관계나 사감(私感)에 좌우되어 변덕이 심한 김형욱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김재규 같은 사람은 자신의 성의가 무시됐을 땐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면도 있다. 어쨌든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맞부딪치게 됨으로써 사태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김재규는 1977년 8월 12일에 손호영에게 지시를 내렸다. '유영수는 그 편지를 가지고 귀국할 것. 유영수가 김형욱 부인의 비행기 요금을 부담한다면 귀국 즉시 그것을 우리가 보상하겠음. 만약 김형욱 부인이 한국에 온다면 부인과 애들의 여권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음.' 그 뒤의 사태발전에 대해서 유영수는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레이저 : 당신은 8월20일에 한국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여행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유영수 김형욱부인이 김재규씨에게 전할 편지를 갖고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레이저 : 왜 안 갔지요?
유영수 : 손호영씨가 문제를 삼았습니다. 김형욱 장군 부인이 김재규씨 앞으로 쓴 편지가 자필이 아니라고 말합디다. 나는 필치가 좋은 제3자가 김부장에게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대신 쓰는 것은 김형욱씨 부인이 결정할 일이지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손씨는 그 편지를 김재규씨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했고 나의 한국행 여행도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프레이저 : 한국 정부가 김형욱 장군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유영수 : 나는 손씨의 증언이나 관련 기사도 읽고 듣고 했습니다만 김재규씨를 직접 만난 사람으로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김형욱씨가 무엇을 말했느냐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김재규 부장이 신경을 쓴 것은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 즉 김장군이 한국의 전직 고관이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김장군의 반정부 발언으로 기관의 이미지가 손상 받는 것을 김재규 부장은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김재규私信을 또 폭로한 김형욱

김형욱의 아내를 초정하여 박대통령께 남편을 대신하여 사과시킴으로써 김형욱의 입을 막아보자던 김재규의 계획은 아주 사소한 것 같아 보이는 감사 편지의 대필문제로 물거품이 됐다. 8월 16일 서울에서는 손호영에게 지시를 내렸다. '김형욱 부인의 완강한 태도는 화해할 뜻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됨. 이런 상황에서 유영수가 아무리 중재 노력을 기울여도 그 결과는 비관적임. 유영수가 김형욱 부인이 대필시킨 편지를 가져오면 의미가 없음. 따라서 유의 귀국을 중지시킬 것. 유영수의 그 동안의 노력에 감사함.'

21일에 손씨는 또 '이 문제로 더 이상 유영수와 접촉하지 말 것. 김형욱 부부가 김재규 부장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일 때만 다시 보고 할 것.' 이란 전문을 서울로부터 받았다. 그 이틀 뒤인 8월 23일 손호영은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9월 25일까지 서울 본부로 귀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유영수의 의회 증언에 따르면 이 무렵에도 손호영은 유씨를 통해 김형욱 일가로부터 여권 신청서를 받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유씨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자신은 김형욱의 편에서 손씨는 한국 정부의 편에서 이 비밀 교섭에 임했다고 증언했다. 손씨는 김형욱 설득 실패로 매우 초조해 있었다. 갑작스런 전보 발령에 그는 놀랐던 모양이다. 그는 1977년 11월 29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와 증언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귀임 명령을 받았을 때 나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김형욱과 교섭이 실패한 책임을 내가 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가족은 8월 16일부터 미국 연방 정부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손호영의 망명은 1976년 11월말에 있었던 주미 한국 대사관 1등서기관 김상근의 망명에 이어 기관 간부로서는 두 번째였다. 김씨의 망명이 신직수 부장의 해임을 가져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김재규로서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사신(私信)까지 공개해 버린 김형욱을 그래도 회유해보려고 정성을 다해 관용으로 대했는데도 실패한 데다가 그 비밀 교섭의 현지 책임자가 관계 문서까지 들고 미국에 망명했으니 김재규는 당혹감에다가 배신감까지 느꼈을 터이다. 김재규는 부장 재직시 대체로 온건론자였다. 김형욱에의 대응에서도 그랬다. 손호영의 망명으로 그의 온건한 입장은 권력층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돼 버렸다.

사나이의 위신을 귀중하게 여기는 김재규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더구나 김형욱의 미 의회 증언 뒤 유영수를 통해 김형욱에게 보낸 김재규의 세 번째 편지도 김형욱은 11월 29일 미 의회에 제출, 폭로해 버렸다. 손호영도 교섭 관계 전문들을 모조리 가져가 폭로해 버렸다. 김재규가 갖게됐던 인간적 배신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었다.

미국 하원 의원들은 김재규-김형욱의 교섭이 편지 대필이란 사소한 문제로 깨져 버린 것이 이해가 안가는 듯 유영수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편지의 내용이 문제이지 누가 썼느냐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 동양적 예의에 무지한 그들의 의문이었다. 미국 시민이 돼버려 사고방식도 상당히 미국화된 유영수도 그런 견해였다. 그러나 손호영은 제3자가 쓴 편지를 김재규 부장에게 보였을 경우 이 교섭이 그 제3자에게 누설됐다는 얘기가 되고 편지를 조작했다는 의심도 받을 수 있음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 김재규-김형욱의 교섭 과정에서 김재규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김형욱이 알고 있는 박대통령 등 고관들의 사생활이나 치부였음이 드러난다. 김형욱이 박정권을 독재정권이라 욕하는 것보다는 박대통령의 사생활에 언급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다. 김형욱의 미 의회 증언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를 가장 화나게 했던 대목은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언급이었다. 박동선 사건들에 대한 증언은 김형욱이 평소에 알고 있던 것을 말한 정도였다. 김대중 사건에 대해선 김형욱 자신이 직접 탐정으로 변해 이리저리 수집한 자료를 털어 놓았다. 그는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의 이름도 사정없이 공개했다. 그들은 모두 과거 자기의 부하였던 전 현직 간부들로서 옛 상사에게 사석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했었던 것이다.

김형욱은 1974년 2월 24일과 4월 16일 두 차례 일본에 가서 '김대중 사건 취재'를 했다. 그는 김대중을 태우고 떠났다는 혐의를 받은 공작선 용금호의 선원들이 묵었다는 오사카 도쿠야마 부두 근처의 나폴리 호텔에 투숙, 종업원들을 상대로 정보를 캘만큼 극성이었다. 이렇게 하여 수집한 정보를 재구성하고 그 나름의 해석도 붙여 그럴 듯하게 증언했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 언론이 다시 김대중 사건을 크게 취급하게 됐다.

김형욱의 증언은 그 뒤 미스터리 투성이의 이 사건에 대한 결정판인 것처럼 일말의 의문도 제기됨이 없이 일본 언론에 통용됐다. 김대중 본인도 김형욱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인 선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김형욱은 김대중 납치 사건 증언을 통해 김대중을 영웅적으로 부각시키려 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대통령이나 김재규쪽에는 그것이 또 기분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김재규, 김형욱 회고록 봉쇄 지시

한편 김재규는 첨예하게 대립된 한미관계를 푸는 방향으로 노력했다. 박대통령이 약간은 감정적으로 미국을 대하는 것을 김재규가 옆에서 여러 번 만류한 흔적이 있다. 김재규는 10·26 뒤 군사재판에서 박대통령 시해가 불가피 했던 이유의 하나로 한미관계의 악화를 들었다. 즉 한국의 안보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데 박대통령의 독재 때문에 미국의 지원이 약화되고 있어 한국의 안보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논리였다. 심지어 김재규는 박대통령의 꿈이었던 자주 국방을 잠꼬대라고 비웃기도 했다. 김재규의 후임으로 1976∼79년 사이 건설부 장관을 지냈던 신형식의 이런 증언도 있다.

'난 박대통령이 핵 개발에 대해 무서운 집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집념 때문에 결국 불의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건설부 장관을 지낼 때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미군이 철수하면서 국군에게 인계해 준 미사일은 고철 덩어리나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속품을 다 빼가서 실제로 발사가 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비밀리에 제3국에서 미사일을 한 대 구입, 우리 기술진으로 직접 이 미사일을 조립하려고 생각했다.

이런 의도로 보고하자 박대통령은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거렸다. 나는 OK한 걸로 받아들였다. 중동에 진출해 있던 모 건설회사를 통해 중동의 모 국가와 접촉했더니 그쪽에서도 응낙해 왔다. 접촉을 맡았던 건설회사를 통해20여 만 달러를 선금으로 건네주고 가까운 공해상에서 미사일을 인계인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이런 식으로 미사일을 들여오면 우리 나라가 더욱 곤란한 처지에 빠진다고 끝까지 반대해 나의 미사일 반입 계획은 저지되고 말았다.'

한·미간의 갈등속에서 김재규가 친미파로 변모해 간 과정은 여러 가지로 흥미있고 또 앞으로 연구해 볼만한 테마이기도 하다. 1979년의 어느 시점에서 김재규가 김형욱의 회고록 전문을 입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김재규는 어떤 경로를 통해 김형욱의 원고를 빼내 읽어본 다음. 이것이 정말 김형욱의 자필 원고인지를 확인하려고 했다. 이때 김재규와 김형욱 사이의 중개자로 등장한 사람은 해외에서 반정부 발언을 많이 했다가 친정부로 전향한 ㄱ씨였다. ㄱ씨는 물론 김형욱과도 가까웠고 김형욱도 ㄱ씨가 김재규의 부탁을 받고 중개인 역할을 맡고 나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150만 달러 요구한 김형욱

ㄱ씨는 1979년 9월 뉴저지의 김형욱의 집으로 초대되어가 3일간 머물면서 회고록 원고를 다 읽었다. 김형욱의 자필 원고임을 확인했다. 김형욱은 이 회고록을 쓸 때 박사월이란 가명으로 알려진 김모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김씨는 한국에 있을 때 기독교 계통의 민권운동단체에서 일했고, 1971년의 대통령 선거때는 김대중 후보쪽에서 선거운동을 한 사람으로 미국에 이민을 와 있었다. 그는 김형욱이 말하는 것을 수백 개의 테이프로 녹음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기록을 한 뒤 김형욱에게 보였고 김형욱은 그 초고를 여러 번 첨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씌어졌든 그것이 김형욱의 작품임은 부인할 수 없음을 ㄱ씨는 확인한 것이다.

ㄱ씨는 김형욱의 집에서 바로 김재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김씨가 직접 이 문제로 통화를 하도록 했다. 이런 교섭 과정을 거쳐 두 김씨 사이에는 일단 합의가 성립됐다고 한다. 김형욱의 요구사항은
150만 달러
압류중인 서울에 있는 자신의 부동산(300여 평)반환
한국 여권의 발급 등이었다.
김재규는 김형욱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였다. 교섭이 진행되는 사이 ㄱ씨는 서울과 로스앤젤레스사이를 여러 번 오갔다. 물론 김재규도 여러 번 만났다. 그때는 김재규가 아주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의 등장을 막지 못한 이후 그는 박대통령의 총애 다툼에서 차지철로부터 밀리고 있었다. 더구나 그해 8월의 YH여공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김재규는 실수를 했고 김영삼 총재 제명 작전에서도 그의 온건론은 대통령에 의해 묵살됐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출판을 기다리는 김형욱의 회고록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골치거리였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회고록속에는 김재규가 그토록 우려하던 박대통령 개인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었다. 즉 정인숙 사건과 박대통령이 여순 반란 사건에 연루된 이야기가 상세히 취급되고 있었다.

파워게임에서 밀리면서 초조해져 있던 김재규로서는 박대통령의 노기에 찬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는 예민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대응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김재규는 2년전 김형욱과의 협상에서 배신당한 쓰라린 기억도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 화풀이를 한다면 때려죽이고 싶었겠지만 김형욱은 회고록이란 무기를 갖고 있었다. 이즈음 김재규를 여러 번 만난 ㄱ씨는 김재규가 박대통령이나 차지철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차지철 그 놈이 장관까지도 치지 않습니까? 장관이 어떤 자리입니까? 두고 보십시오. 제가 그 새끼를 해치우겠습니다.' 그때마다 ㄱ씨는
'제2인자가 그런 말씀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하며 달랬다고 한다. 김재규는 또
'요사이 선배님께서 왜 반체제 운동을 하게 됐는지 이해가 갑니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김형욱처럼 박대통령과 그 정권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게 된 김재규는 박대통령에 대해 절망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김형욱의 회고록 출판을 막아야 할 입장에 있었으니 그의 심적 갈등도 대단했을 것이다.


'김형욱 그 자 혼 좀 나야겠어요'

김재규는 9월 하순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의 ㄱ씨에게 전화를 걸어 김형욱의 요구 조건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한 뒤 '여권은 뉴욕 총영사관에 맡겨놓았으니 김형욱씨가 직접 가서 찾아가도록 하라.'고 말했다. ㄱ씨는 이 내용을 김형욱에게 전달했다. 그 며칠 뒤 김형욱은 ㄱ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뉴욕 총 영사관은 치외법권 지대인데 내가 만약 여권을 찾으러 갔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총영사관의 직원 적어도 1등서기관 정도가 여권을 우리 집까지 가져다주었으면 합니다.' ㄱ씨는 이 메시지를 전화로 김재규에게 중개했다.

김재규는 이야기를 다 듣더니 잔화통에다가 화를 벌컥 냈다. '좋습니다. 지금까지 약속한 것 다 취소하겠습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니 대한민국정부를 못 믿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김형욱 그 자는 혼 좀 나야 하겠습니다.' 김형욱에 대해 참았던 김재규의 감정이 이때 폭발한 것일까. 자신의 사신을 세 차례나 공개한 김형욱이 자신이 양보할 대로 양보한 이번 교섭에서도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아 판을 깨려 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김형욱에 대해선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김재규가 '김형욱이는 혼 좀 나야 합니다.'고 말한 것은 1979년 9월 하순이었다. 김형욱 실종 뒤에 나온 회고록에는 '대한민국 만세!' 로 끝나는 서문이 실려 있다. 그가 이 서문을 쓴 것은 1979년 9월 30일로 돼 있다. 박사월은 김이 실종된 뒤 씌어진 이 회고록의 발문에서 김형욱이 출판을 꺼려 여러 번 다투었다고 쓰고 있다.

ㄱ씨는 '혼이 나야 한다'는 김재규의 분노를 김형욱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김형욱은 김재규와의 약속이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김형욱이 서문을 썼다는 다음날, 10월 1일 그는 혼자서 에어프랑스의 콩코드 여객기에 몸을 싣고 뉴욕의 케네디 공항을 떠났다. 그는 파리의 드골공항에 도착한 즉시 초호화판 호텔인 리츠에 투숙했다. 김형욱은 박대통령을 비난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경호에 신경을 썼다. 장남 존(당시 26세)은 태권도 3단, 유도 2단의 거구였다, 장남을 보디가드 삼아 꼭 데리고 다녔다. 김형욱은 파리 행에는 장남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장남은 10월 3일 취직 시험 면접을 보게 돼 있었다. 파리 행을 며칠만 늦추면 동행할 수 있었고 가족들도 그렇게 권했지만 김형욱은 듣지 않았다.


김형욱이 마지막 본 파리

김은 10월 7일 호텔을 옮겼다. 새로 투숙한 곳은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웨스트 엔드 호텔이었다. 이 3류 호텔로 옮긴 이유가 그의 실종과도 관계가 있으리란 게 일반적인 추리다. 10월 7일 오전 10시에 405호실로 들어가면서 김은 5일간 숙박 대금을 선불했다. 숙박부에는 '10월 12일 체크아웃 예정'으로 적혀 있었다.

이 호텔에 들어온 직후 김이 어떤 동양인과 함께 있었다는 목격담이 외국에서 보도됐다. 7일 오전 10시 30분쯤 호텔 여 종업원의 증언에 따르면 동양인은 김형욱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한국인으로 추정됨-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고 한다. '왜 일찍 돌아왔습니까?' 그 동양인은 '중요한 서류를 가지러 왔다.'고 했으며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다른 종업원은 김형욱이 얼마 안 있어 방을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0월 12일 호텔측에선 김형욱이 며칠 동안이나 방을 쓰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맞은 편에 있는 샹젤리제 지구 경찰서에 통보했다. 16일 김형욱의 가족-아내·장남·손아래동서-이 파리에 도착했다. 가족은 호텔에 보관된 김형욱의 소지품 가운데 두 가지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레인코트와 서류 가방이었다. 김형욱은 10월 7일 11시 30분쯤 그러니 웨스트 엔드 호텔에서 나온 직후 카지노 르 그랑세르큐에 나타나 저녁 7시까지 종일 도박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형욱의 가족은 파리에는 김형욱의 지인(知人)이 한 사람밖에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 지인은 과거 김형욱의 부하였고 60년대 초 '원충연 대령의 반혁명 미수 사건'때 처음엔 모의에 가담했다가 뒤에 자수, 정부 기관에 취직, 그때는 외무부 소속으로 파리에 주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형욱의 가족은 이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김형욱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 사람은 '런던에 출장중이었으므로 모른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혼내 주겠다'는 김재규의 말과 김형욱의 실종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가. ㄱ씨는 '김재규의 과잉충성이었다……김형욱은 파리에서 50만 달러를 먼저 받아 스위스 은행에 입금시켰다. 나머지 100만 달러를 더 받으러 갔다가……'라고 했다. 그러나 ㄱ씨는 김형욱 실종의 1차 목격자가 아니므로 그의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기엔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른다. 김형욱이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파리로 간 것은 확실하다. 그 며칠 전 김재규와 1차적 합의가 이뤄진 것도 확실하다.

이 두 확실점 사이를 연결하는 선이 바로 실종까지 연장된 것인가. 현재로선 이 의문에 대해선 심증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물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79년 9월에서 10월 사이 김재규는 굉장한 강박 심리 상황이었다. 그가 손대는 것마다 되는 것이 없었다. 박대통령의 질책, 차지철의 빈정거림과 견제가 '욱!' 하기 쉬운 그의 성격을 뒤틀어 놓고 있었다.

김대중 납치를 이후락이 '박대통령의 지시 없이 알아서 한 것' 이라고 보는 측에선 이부장이 거듭되는 박대통령의 질책(김대중의 해외 활동에 대한)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꾀를 냈으리라 말하고 있다. 김재규도 김형욱의 회고록 때문에 이씨와 비슷한 강박 심리 상황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별무리가 아닐 것이다. 10·26 뒤 김재규 변호인단에 속했던 모 변호사는 순수한 추리란 전제를 하고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의 지시없이 김형욱을 납치했다면 명예욕이 센 그로서는 굉장한 갈등이나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당시 김재규는 교체되기 직전이었는데 교체된 뒤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박대통령에 대한 배신감, 차실장에 대한 증오감, 그리고 잇따른 공작 실패로 생긴 열등감에다가 김형욱 사건으로 인한 불안감이 뒤엉켜서 10·26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운명의 그날 10월 26일 ㄱ씨가 김재규와 해외담당 책임자를 만났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글을 쓰면서 발견한 사실이지만 김재규가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그 보충서 등을 통해서 펼친 박정권 붕괴의 필연성 논리와 김형욱의 자서전에 나타난 논지가 기막히게 비슷하다는 점이다. 누구보다도 박대통령을 잘 안 두 사람이 박대통령과 그 정권에 대해선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서로의 감정은 대립했지만 박대통령에 대한 행동은 같았던 모양이다. 그해 10월에 그뿐 아니라 박대통령과 김재규 등 세 명이 다 같이 몰락을 맞아 한 시대를 마감할 줄은 김형욱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