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불씨

불씨를 키운 중부교회

부마사태란 대폭발에는 불씨가 있어야 했다. 대폭발의 파괴력에 비할 때 그 불씨는 항상 보잘것없는 법이다. 엄청난 폭발·폭풍·화염을 보고서는 그것을 일으킨 불씨가 그토록 미약하리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불씨란 것은 원래 자그마한 것이고 그 존재 가치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가는 데 있다. 그리하여 때가 오면 어떤 손에 의하여 그 불씨는 대폭발의 불쏘시개로 변하는 것이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에서 불씨를 지켜가고 있었던 곳은 중부교회였다. 이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는 최성묵 목사, 김광일·이흥록 변호사, 송기인·오수영 신부를 들 수 있었다. 실무 책임자로는 조태원, 박상도, 김형기 등이 있었다. 이들과 직접 연결된 대학생과 젊은이, 그리고 노동자들은 100명 미만이었다. 이 100명과 뜻을 함께 하며 자주 접촉을 갖는 대학생과 젊은 사회인 등 동조세력은 한 200명 쯤 됐을까. 부산의 민권운동 조직으로는 부산 도시산업선교회, 국제사면위원회 부산지부, 부산 교회인권선교협의회, 부산 기독청년협의회, 정의구현기독자회 들이 있었다. 조직의 이름은 달랐지만 구성원들은 거의 같은 사람들이었다.

중부교회는 부산 저항운동 인력의 공급처였다. 중부교회는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대학의 반체제 학생운동을 연결시키는 고리였다. 이 교회의 청년회원 30여 명은 대부분 부산대 및 동아대 학생들이거나 두 학교 졸업생 또는 제적생들이었다. 이들은 대학교 안에 민주화운동의 바람을 불어넣고 학생들의 의식화운동을 조직하기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사회의 저항운동 바람을 학원 안으로 불어넣는 송풍관이 바로 이들이었다. 중부교회 교인들 가운데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 사람은 10여 명이었다. 거개가 청년회원들.

중부교회는 민주화운동의 복덕방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지하 유인물과 갖가지 민권운동 관계 정보는 이곳을 매개로 하여 부산에 퍼졌다. 민권 강연회와 사례 발표회, 대학생들의 그룹 스터디도 여기에서 많이 이뤄졌다. 중부교회는 또 탄압 받는 저항운동가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다. 교회라는 특성이 정보 및 수사기관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방벽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최성묵 목사는 이 불안한 성역의 성주답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최종책임을 혼자서 짊어짐으로써 그의 날개 밑에 젊은이들을 감싸고돌았다.

최성묵은 그때 마흔여덟 살의 괴짜목사였다. 술과 담배를 사양하지 않았고 걸걸한 목소리는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론과 정직과 신앙보다 용기와 정열과 정의감으로 민권운동의 리더가 됐다.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의 발족 당시 핵심 멤버였던 그는 1969년 부산에 옮겨와 부산 미국문화원에서 일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문화원은 대학 서클활동의 중심이었다. 최성묵은 학생 담당으로서 그런 서클운동을 조직화하고 끌어갔다.

1974년에 그는 부산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뽑혀 미문화원을 그만두었다. 그가 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이때였다. 1974년 가을부터 75년 봄까지의 짧은 해빙기에 그는 YMCA를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광장으로 운영해갔다. 그 뒤 중부교회 중심의 저항세력을 키우는 씨를 뿌렸던 것이다. 1976년에 총무를 그만둔 최성묵은 중부교회의 전도사로 들어갔다.

중구 보수동 책방 골목에 자리잡은 중부교회의 신도수는 60명 남짓, 대학생수는 5, 6명에 지나지 않았 다. 최성묵에 이끌린 젊은이들이 중부교회로 모여들었다. 박상도도 그런 청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박상도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홀어머니는 구포 참마루교회의 사찰이었다. 그는 가성소다 제조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비를 벌어 항도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했다. 1967년에 그는 목사가 되려고 서울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갔다. 학비를 댈 수가 없어 2학년 재학중 중퇴했다. 부산에 내려온 박상도는 새한자동차회사에서 네 해 동안 일하다가 1974년에는 헌혈협회 부산지부 총무로 들어갔다. 그가 사회운동의 요령을 터득한 것은 이때였다.

그의 키는 박정희 정도였지만 키 작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다부지고 부지런했다. 1976년 1월 그는 김정광 목사가 YMCA 총무로 뽑히자 그 밑에 간사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중부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박상도는 최성묵이 총무 시절 YMCA에 뿌렸던 씨를 발아시키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YMCA에는 400명쯤의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16개 서클에 등록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의 밭이요 논이었다.

박상도는 자연스럽게 중부교회 청년회의 리더가 됐다. 1946년 생인 그는 청년회원들보다3∼10세쯤 많았다. 이 점보다도 그 특유의 '깡다구'와 집념, 붙임성이 그를 청년들의 지도자로 만든 것이었다. 최성묵과 젊은이들 사이에 박상도란 중간 보스가 생김으로써 중부교회의 민권운동은 더욱 조직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한국 민주화운동이 다 그랬던 것처럼 중부교회도 사건을 통해 다져졌고 그 활동 터전을 넓혀갔다.

최초의 사건 : 김광일 변호사의 가담

1976년 1월 초순 박상도는 중부교회 대학생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갔다. 제주 YMCA에서 마련한대학부 행군대회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행군대회에 참여했던 중부교회 대학생회 회원 3명-조태원(부산대 토목과 2학년), 김영일(부산대 지리학과 3학년), 이태성(동아대 수학과 2학년)이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붙들려갔다. 문제가 된 것은 중부교회 대학생회 편집부에서 펴낸회지 『책방골목』창간호의 글이었다. 이 회지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인사의 말」을 조태원이 썼다. 시처럼 쓴 것이었다.

너무도 잠잠하다.
무거운 침묵만이 주위를 압도한다.
아프다.
아파도 왜 때리느냐고 반항하지도 못한다.
불쌍한 사람들.
나와 너, 똑같이 힘없는 사람들.
우리 약한 힘을 한데 모아 아프다고 고함이라도 질러보자.
왜 때리느냐고 반항해보자.
달겨들어 같이 치고 박고 육탄전이라도 해보자.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우리를 때리는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왜 때리는지 그 이유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정당하게 대항해 싸울 수 있다.
이제 침묵만을 지키지 말자.
모르는 걸 배우고 아는 걸 가르쳐주자.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우리 올바른 삶을 위하여 아니 떳떳한 죽음을 위하여
힘써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시키자.
한국적이나 유신이니 따위는 말고 좀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눈으로써 이 땅의 인류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서 힘차게 전진하자.

이 글에서 문제가 된 것은 '한국적이나 유신이니 따위는 말고'였다. 정보부에선 글쓴이 뿐아니라 대학부 회장(김영일)과 이것을 회원들에게 나눠준 사람(이태성)까지 잡아갔다. 박상도는 제주도에 가서 이 세 학생을 선동했다고 집중 추궁을 당했다. 정보부에선 처음엔 이들을 풀어줄 듯 얘기하면서 교회 쪽엔 시끄럽게 굴지 말고 기다려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1976년 정월말에 구속됐다.

이 사건은 부산의 운동가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무료변론을 김광일 변호사가 맡고 나섰다. 피고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그들은 단체 방청을 했다. 면회 가기, 편지 쓰기 운동도 벌였다.

'……오후에 운동하러 나가서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교도소 뒷산에 한창 피어나 산을 물들인 진달래 무리를 보고 있노라면 봄이구나 하고 기뻐하기에 앞서 이렇게 좋은 세상을 주신 주님의 뜻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제 자신이 무척 불쌍해집니다. 이곳에 온 뒤론 주님의 말씀과 접하고 살아가는 보람에 희망과 기쁨과 용기가 충만해집니다.' 이것은 이태성이 중부교회로 보낸 답장의 일부다.

김광일(金光一) 변호사의 등장은 부산의 민권운동권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몸무게 95킬로그램의 김변호사는 이론과 조직과 자금을 제공했다. 탄압 받는 이들에게 그는 변호사란 직업을 활용하여 그들의 호민관이 되려했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는 외가에서 중학교에 다녔는데 외가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도 교회에 나갔다. 서울 법대를 졸업, 1967년에 법관이 된 그는 1973년 겨울 대구지법에서 유명한 판결을 내린다. 북한 방송을 들었다고 반공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영남대학생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모든 국민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정보를 수집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무죄 선고의 이유였다. 이 판결이 말썽을 일으키자 그는 당국으로부터 뒷조사를 당하기도 했다. 1974년 8월 31일 그는 전주지원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보복인사라고 판단한 그는 부임한 이튿날 사표를 냈다.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린 그는 그해 겨울「가롯유다 예찬론」이란 수필을 『국제신보』에 썼다가 장로로 있던 교회로부터 파문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를 민권운동권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작가 김정한(金廷漢)이었다. 그때 부산에는 엠네스티회원이 둘 있었다. 김정한과 노경규. 엠네스티 한국본부에선 주례교도소에 있는 양심수들에게 보내는 옷가지, 영치금, 책 따위를 모두 두 사람을 통해 전달했다. 70노구의 김정한은 이런 심부름을 마다 않고 해냈다. 어느 날 김정한이 김광일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광고탄압을 받던 『동아일보』에 김광일이 낸 십만 원짜리 개인광고를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김정한은 엠네스티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즉석에서 그는 승낙했다.

김광일과 최성묵 목사와의 만남은 YMCA에서 이뤄졌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 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YMCA 강당에서 열렸다. 사회를 김변호사가 맡았다. 여기서 YMCA 총무였던 최성묵을 만난 김광일은 곧 동기가 됐다. 1974년 겨울에 유신헌법 반대 개헌청원서명운동이 벌어지고 1975년 봄에 민주회복국민회의 부산지부 결성 작업이 추진될 때 김광일 변호사는 이미 그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1975년부터 신·구교의 민권운동 세력이 협조하면서 민권운동권이 조직화 되기 시작했다. 최성묵, 김광일, 임기윤(감리교 제일교회), 심응섭, 김정광 등 신교 세력과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 구교 세력이 손잡고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침묵의 계절이 시작된 그해 정의구현지독자회를 만들었다. 부산 기독청년협의회도 조직돼 기독청년운동의 새 바람이 불게됐다.

1976년에는 신·구교 연합의 부산 교회인권선교협의회가 창립됐다. 회장엔 임기윤 목사, 부회장에는 최성묵, 송기인. 1977년엔 엠네스티 부산지부가 만들어졌고 김광일이 지부장으로 뽑혔다. 그해 4월엔 부산 도시산업선교회가 창립됐고 김대중 면회기도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면회 사건의 시말

김영일·조태원·이대성은 구속된 지 여섯 달이 지난 1976년 7월에 풀려났다. 그들의 최종 형량은 김, 조 두 사람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이태성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돼버린 이들은 출소 뒤에도 중부교회에 계속 다니며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을 의식화시키는 일을 해나갔다.

1977년 4월 10일 중부교회 대학생회원인 김언곤(부산공대), 이승원(동아대 수학과)이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진주교도소로 김대중을 면회하러 갔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이들은 가방을 들고 진주교도소 앞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진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붙들려 부산 시경에 넘겨졌다.

이들은 4·19를 맞아 논문 자료를 모으기 위해 김대중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언곤은 부산대학에서 제적됐다. 죄수를 면회 갔다는 이유로 학사 처벌을 받은 것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일일 것이다. 이승원은 학교 당국에 각서만 쓰고 무사했다. 이 사건의 처리에서도 국립대학교가 더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 사건은 후유증을 남겼다.

부산 시내 대학교와 고등학교 당국에선 학생들에게 부산 YMCA와 중부교회에 출입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운동성 모임이나 예배가 있을 때는 학교 직원들이 입구에 지켜서 자기학교학생들을 잡아갔다. 이 학생들은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정보형사들까지 입구를 지키며 학생들의 신분증을 검사, 집으로 돌려보냈다. 박상도 YMCA 간사는 이런 학교에 대항하기로 했다. 학교의 부당한 처사를 조목조목 규탄하는 유인물을 2만장이나 찍어 교회 청년들을 통해 대학과 고등학교 안에 퍼뜨렸다. 이 유인물에서 박상도는 주로 대학생들의 교외활동 자유를 막는 교수들의 '양식'을 비판했다.

'YMCA와 김대중 방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세계적인 청소년단체이며 일제 때부터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온 YMCA가 어떻게 불순단체인가. 권력의 꼭두각시놀음에 급급한 일부 교수들은 내일의 일꾼들인 대학생들을 어떻게 키우겠다는 것인가.'이런 요지의 규탄문이 학원에 나돌자 경찰에선 협상을 제의했다. 경찰이 학생들의 YMCA 출입을 막지 않는 대신 박상도는 규탄문 돌리는 것을 중지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사건과 강연회의 통한 의식화

부산의 민주화운동이 그 뿌리를 내리면서 확산되어간 것은 두 갈래의 길을 통해서였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과 대응, 민권 강연회를 통한 의식화가 그것이었다. 1979년부터 부산에선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민주화를 주제로 한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 장소로는 중부교회와 YMCA 강당이 가장 많이 쓰여졌다. 그밖에 동광교회, 전포성당, 제일감리교회, 중앙성당, 영락교회, 부산진교회 등이 장소를 내주었다. 주최 단체로는 여러 운동 단체의 이름을 내세웠으나 앞장서 일하는 사람들은 같은 인물들이었다.

강연회는 기도회를 겸하는 수가 많았고 반드시 사례발표가 따랐다. 간혹 성명서도 낭독하고 지하 유인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농성도 벌였다. 말이 강연회이지 민권 강의였고 유신체제 규탄·고발 대회였다. 강연회가 거듭됨에 따라 참석자들의 수자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몇십 명에 지나지 않았던 청중은 수백 명 선으로 늘어났고 1979년 1월 15일 '김지하 문학의 밤'에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신·구교 노동절 예배' '구속된 노동자·학생을 위한 기도회' '항일문학의 밤' 'YH 사태 보고' '오원춘 사건 보고 및 기도회' '4·19 기념 강연회' 따위의 제목을 내건 강연회에는 서울의 운동가들도 자주 내려와 서울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신문에 안나는 사건들을 강연회에 나가면 알 수 있다는 호기심도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는데 큰 힘이 됐다. 박상도와 김형기는 청중 동원의 실무자였다. 그들은 주로 중부교회 대학생들을 통해 부산의 대학가에 모임을 알리는 쪽지를 뿌렸다. 메모 용지 크기의 이 쪽지에는 앞뒤로 모임의 성격과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여 사실상 지하신문의 호외역할을 했다.

부산대학교 페인팅사건 구속학생을 위한 기도회
때 : 8월 21일(월) 오후 7시
장소 : 남부교회
주최 : 대한기독교감리회 부산 남부교회

지난 7월 3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민주회복을 갈구하는 구호를 페인팅하였다 하여 구속된 본교회 교인인 이상경(사회계열 1년 학보사 기자)군과 김승영군·이희섭군을 위하여 기도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이들에게 기도와 격려를 보냅시다.
남부교회 목사 이주학


구속 노동자, 학생, 성직자 및 민주인사를 위한 연합기도회
때 : 7월 29일 하오 7시
장소 : 중부교회(보수동 책방골목)
주최 : 부산 교회인권선교협의회
부산 기독쳥년협의회
부산 지역도시산업선교회
구속학생 대책위원회
동일방직 대책위원회
동광교회 대학청년부
중부교회 대학청년부
후원 : 부산YMCA, 교회연합신보 부산지사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 땅의 노동자들은 겨레입니다. 수많은 구속학생과 성직자, 문인, 민주인사들은 민족의 횃불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성원을 보내는 일은 일하는 만큼 민족의 자유와 정의와 민주의 터전이 넓어지고 굳어질 것입니다. 다 모입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부산대학교 안에서 이런 쪽지는 중부교회 대학생부와 연결되는 스터디 그룹 회원들을 통해 뿌려졌다. 처음에는 쉰 장 정도밖에 소화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300 장이 넘게 먹혀들었다. 동아대학교 안에도 같은 방법으로 뿌려졌다. 스무 장에서 쉰 장쯤이 들어갔다. 박상도는 나중에는 부산대학생들이 하교할 때 많이 타는 18, 19번 시내버스 안에서도 이들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맨 뒷자리에서 앞으로 나오며 말없이 유인물을 한 장씩 자리에 앉은 학생 승객들에게 나눠주고 다음 정류소에서 바로 내려버리는 수법을 썼다. 대담해진 박상도는 대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광복동·남포동의 다방가에도 뿌렸다. 공장전화 박스에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놓기도 했다. 붙인 유인물은 곧 경찰에 의해 곧 뜯겨 없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들 강연회는 부산의 대학생 사회에 자극을 주었다. YMCA 강연회에 자주 나간다는 말은 의식 있는 학생이란 뜻으로 통했다. 강연회에서 자주 만나는 학생들끼리는 유대의식이 생겼다. 부마사태의 뇌관을 터뜨린 학생 중의 한 사람인 이진걸(李鎭傑)도 이런 강연회에 자주 나가 의식화된 경우다. 강연회 연사들의 면면은 함세웅, 이문영, 박형규, 문익환, 김정광, 김광일, 최성묵, 임기윤, 지학순, 김지하 어머니, 서남동, 김승훈, 한승헌, 김동길, 조세희, 한완상, 김정한, 황석영, 임헌영, 문동환 등이었다.

도시산업선교 활동의 시작

한국 노동운동의 발상지였던 부산, 그래서 오랫동안 한국노총의 주도권을 잡아왔던 부산에 도시산업선교회가 창립된 것은 1977년 4월이었다, 대도시들 가운데 가장 늦게 도산이 들어온 셈이다. 한국 기독교산업문제연구원이 1978년 3월 1일 현재 전국의 도시산업선교 실무자들(신구교)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총수는 59명. 그들 가운데 33명은 서울, 인천에 8명, 안양에 3명, 광주에 4명, 청주·구미·부산에는 2명씩, 제주에 1명 그 밖의 도시에 4명이 일하고 있었다. 신발공장, 봉제공장 등 노동집약산업이 몰려 있는 부산이 이처럼 도시산업선교의 불모지가 돼 왔던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는 부산이 보수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및 고신파의 본산으로서 이곳의 기독교계가 대체로 도시산업선교에 냉담했다.

둘째는 부산지역의 기존 노동조합운동은 도산에 알레르기 반응을 특히 많이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왔다. 섬유노조 위원장으로 있다가 뒤에 노총위원장이 된 김영태 같은 이가 그런 인물이었다. 최성묵 목사가 회장인 부산지역 특수선교회의 실무자는 박상도였다. 그는 부산의 가톨릭 노동청년회와도 손잡고 도시산업 선교의 바람을 부산의 노동계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특수선교회는 안내문에서 산업 선교의 성서적 논거와 '우리의 신조'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하느님을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선교자이다.(「마태복음 」4:23「고린도후서」6:1)

▲우리는 이 사회의 소외지역에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절망의 수렁에서 몸부림치는 민중의 신음소리를 듣는다.(「출애굽기」3:7)

▲우리는 가난한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의 해(「누가복음」4:13 18)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그들 속에서 하느님의 해방케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에 주어진 근본적인 선교 사명이라고 믿는다.(「마태복음」25)

이상과 같은 성서적인 확신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신조를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① 하느님은 오늘도 선교자를 통하여 가난하고, 억눌리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② 예수님은 그의 형태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본모습을 회복하려는 모든 인간의 움직임을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신다.
③ 성령은 이와 같은 움지임 속에서 일하시며 민중으로 하여금 저들을 사로잡고 있는 불신, 공포, 이기심, 체념, 비굴, 무관심 등 사탄의 올가미에서 자유케 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새 희망을 주신다.
④ 특수 선교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의 보내심을 받아 민중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그들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며 그들을 가난과 질병과 절망에서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해방 사업에 동참한다.
⑤ 가난한 민중은 바르고 밝은 마음으로 서로 협동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공동사회를 이룩하라고 하느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주의·이기주의·물질주의·권위주의에 사로잡혀 큰 것, 많은 것, 화려한 것을 숭배하는 현대의 낭비와 사치풍조를 부끄럽게 여기고 저들로 새 문화를 창조하는 씨알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돕는다.
⑥ 한 사회의 법이 민생운동을 보호치 않고 민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억압할 때 우리는 사람됨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억압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운동에 앞장선다.
⑦ 교회는 교회의 자원을 민중운동을 위하여 지원하며, 특히 특수 선교자를 배출 양성하는데 투자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⑧ 부산지역 특수선교회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교회의 새로운 선교 현장을 향한 관심을 촉구하며 나아가서 민중의 삶의 현장에 하느님의 의로운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임을 일깨운다.

부산의 도시산업선교활동은 세 갈래의 길을 좇아 나아갔다. 노동자 부당 처우 문제의 제기, 사례발표회를 겸한 노동문제를 주제로 한 기도회, 노동자 훈련 및 교육이 그것이다. 도산의 활동은 중부교회, 엠네스티, YMCA따위의 다른 민권 운동권과의 유기적인 협력체제 아래에서 이뤄졌다. 도산의 활동도 사건을 통해서 강화되어갔다. 부산의 도산이 1977년 11월에서 1978년 12월 사이의 한해 동안 다룬 노동자 부당 처우 문제만 해도 26건에 이르렀다.

해피 엔딩이 된 안드레상사 사건

1977년 11월 9일자 『국제신문』4면의 '지상 고발'이란 난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회사에 불만이 있으면 뒤에서 쑥덕거리지 말고 기탄 없이 털어놓고 얘기하자는 경영자의 당부에 따라 조회 시간에 사장에게 보내는 건의문을 낭독했다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학장동 안드레상사의 전 여자종업원 오순남양(26)이 9월, 10월 봉급까지 못 받고 있다고 7일 독자실에 호소해왔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집안 일을 돌보고 있다가 지난 2월 안드레상사에 들어간 오양은 지난달 14일 아침의 사원 의견 발표회 자리에서 생산과 종업원 40명을 대표하여 건의문을 낭독했다.

건의문 내용은
① 봉급 지급일의 확정
② 구타 금지 등 인격적 대우
③ 여종업원에 대한 처우개선
④ 후생 복지 향상
⑤ 법정노동시간엄수 등이었다.
오양은 이 건의문을 작성할 때 생산과 종업원들의 서명을 모두 받았다는 것이다. 건의문 낭독이 끝나자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원들은 박수를 쳐 찬성의 뜻을 표했다고 오양은 주장했다. 중간에서 퇴장한 사장 윤모씨는 그날 오양과 건의문 작성을 도와 준 이춘동씨(20)를 불러내 사표를 내라고 하더라는 것.

기탄없이 얘기하라고 할 때와 는 달리 막상 얘기를 하고 나니까 회사측은 태도를 싹 바꾸어 명예훼손 혐의로 오양을 고소하겠다더란 것이다. 강압에 못 이겨 사표를 낸 오양에게 9월, 10월분 월급도 주지 않더라는 것, 오양은 '월 3만원 안팎의 봉급을 받아가면서 성실히 일해 왔는데 종업원들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때리는 간부가 있는가 하면 여종업원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고 취사 당번까지 하게 하여 불만이 쌓여 있었던 차에 건설적인 건의를 한 것뿐이다'고 말했다.

산업선교회는 그때 일감을 찾고 있었다. 이 기사가 일감을 제공했다. 박상도는 오양을 만났다. 안드레상사가 생리수당·공휴일수당을 오양에게 주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잔업수당도 일부만 지급해왔음이 드러났다. 박상도는 더 확실한 증거를 모으기 위해 11월 17일 안드레상사 노동자 8명과오순남·이춘동을 데리고 소풍을 갈 계획을 짰다.

나들이 가서 회사 속사정을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약속대로 그들은 사상역에 모였다. 그곳엔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 간부들과 부산진서 정보과형사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붙들고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박상도와 회사 간부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경찰은 이 다툼을 말리는 것처럼 끼여들었다. 간부 경찰관들과 박상도는 부산진서 정보과장실로 가서 노동청 근로감독관을 불러놓고 협상을 벌였다. 도시산업선교회에선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내놓았다.

오순남·이춘동의 복직, 공휴일 및 국경일 수당지급, 생리수당 지급, 구타 금지 및 종업원의 인격적 대우, 9월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상된 임금을 지급할 것. 도시산업선교회에선 이 요구사항을 11월 22일까지 들어달라고 했다. 노동청은 회사에 대해 이 사건이 확대되기 전에 수습하도록 권고했다. 그 달 23일 도시산업선교회는 사장과 만나 합의에 도달했다. 오양과 이군은 복직됐다. 회사에선 법이 정한 갖가지 수당도 주기로 약속, 이를 지켰다. 인상된 임금은 11월분부터 지급했다. 또 조회 때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회사측에서 지난 일들을 털어놓고 얘기하여 상처를 아물게 했다. 이 회사에선 두 복직 노동자에 대해서도 아무런 차별 대우를 하지 않았다.

재벌 상대로 유인물 작전

해피엔딩으로 끝난 이 첫 사건을 계기로 하여 도시산업선교회의 존재가 부산 노동가에 널리 알려지자 '노동청에 가도 안 되는 것은 도산에 가면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가 된다. 퇴직금 못 받은 노동자, 산재 보상 못 받은 사람, 부당 해고된 노동자들이 잇따라 박상도를 찾아왔다. 도산은 회사가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는 유인물 배포를 통해 압력을 넣었다. 회사뿐 아니라 노동청이 도산의 규탄 대상이 되기가 일쑤였다.

저는 감전동 백일고압호스공업사에서 현장개발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하직원 12명이 1977년 7월 26일에 부당 해고된 뒤 해고수당을 못 받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회사 대표에게 건의했다가 저도 8월 20일에 사표를 냈습니다. 저에겐 퇴직금을 부당하게 적게 주므로 노동청 동래지방사무소에 호소했습니다. 근로감독관은 회사편을 들면서 긴급조치·국가보위법을 들고 나와 떠들지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위협했습니다.

저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묵인한 두 근로감독관을 근로기준법 108조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희들 억울하고 가난하며 힘없는 공원들을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실 분은 회사나 사장댁으로 전화하시거나 편지로써 이런 처사를 규탄하여 주시고 체불 임금을 주도록 종용해 주시옵기 바랍니다.
이 유인물 끝에는 회사와 사장집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저희들은 삼화고무 금사공장 근로자들입니다. 지난 4월 갑자기 회사 간부가 저희들을 불러 작업장을 옮기게 했습니다. 십여 년이나 일해온 기능공들을 막일판으로 쫓은 것입니다. 저희들 중 한 사람이 YMCA 회원이라고 하여 그 사람을 내보내려고 우리 부서 사람 전부를 현장으로 내몬 것입니다. 노동과장이라는 사람은 너희들이 산업선교회에 나가면 자손대대로 아무 일도 못할 것이며 불순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고 위협하고 깡패 40명을 동원하여 너희들은 재미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월급 봉투값 50원씩을 월급에서 공제하고 있습니다. 불량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여 동료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근로자를 착취하여 오늘의 대삼화고무를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사회여론으로 악질기업체를 응징하여 저희들의 인권과 권익을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시민, 학생 여러분, 삼화그룹의 모든 물건을 사지 맙시다.
삼화고무 피해 근로자들이 쓴 것으로 돼 있는 이 전단엔 삼화그룹의 주요 제품 이름들과 삼화의 사장 및 회장집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