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의 행복했던 20일

그때 정외영은 사학과 후배를 만났다
'언니! 어제 이상한 편지를 받았어요. 글쎄 이것이 들어 있지 않겠어요'
정외영은 후배가 내민 그 선언문을 받아보면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리벙벙해졌다.
'그렇다. 이것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구나.'
그들은 선언문을 뿌리는 것과 동시에 우편으로 보낸 선언문이 학생들에게(학교로) 배달되어 타이밍의 일치로 분위기가 고조됨으로써 데모가 터지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다.

이 우편물들은 예상보다 하루 먼저 부산대학교에 배달되었던 것이다. 의식 있는 학생들을 골라 보낸 것이었지만 어떤 학생들은 뒷일을 걱정하여 선언문을 학생지도관실에 가져가 신고를 했다. 연락을 받은 경찰은 다음날인 4월 19일 아침 캠퍼스 안에 수 십명의 사복형사들을 풀었다. 이성동과 전중근은 경찰이 쳐두고 기다리던 그 덫에 걸려 버린 것이었다.

정외영은 본관으로 갔다. 그때 2층에서 한떼의 사람들이 계단으로 우루루 밀려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성동과 전중근이었다. 56명의 형사들이 두 학생을 옆에서 끼고 대기중인 세단차에 태웠다. 정외영은 이때 수갑을 찬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정외영은 '뒷일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의 눈인사를 던졌다. 이성동과 정중근도 그 메시지를 확인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외영은 서연자와 함께 어느 교회 신도집으로 몸을 숨겼다. 서연자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자수를 결심했다. ㄷ교회 김모 목사가 경찰서 간부들과 협상을 벌였다. 서연자의 아버지가 상이용사란 사실도 이때는 도움이 됐다. 구속시키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은 뒤 4월 21일 서연자는 동래경찰서에 자수했다.

정외영은 달아나기로 했다. 중부교회의 집사로부터 만원을 얻어 정외영은 작은 가방을 들고 고속버스편으로 서울로 향했다. 4월 22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어느 목사집에 들어가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부산의 어머니는 몇 차례 서울로 와서 정외영을 만나 부산소식과 용돈을 전해 주고 내려갔다.

1978년 7월 정외영은 반유신 운동에 앞장서 온 교회 친구의 소개로 이번에는 충청도로 내려갔다. 보성군 진죽마을에서 정외영은 언니 뻘되는 중학교 여교사의 하숙방에서 함께 지내게 됐다. 이곳에서 정외영은 행복한 20일을 보냈다. 낮에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논밭에 나가 일을 거들어 주었다. 밤에는 냇가에서 멱을 감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 위에 누워 은하수의 별들을 헤어보았다.

이 여교사는 정외영의 사정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정외영은 8월 초순 전주로 내려갔다. 기독교 장로회 청년연합회가 마련한 전국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회는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이 대회의 폐막을 앞둔 하루 전날(16일) 청년들사이엔 '오늘저녁에 무엇이 있을 것이다'는 말이 나돌았다. 정외영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숙소인 전주교대 부속국민학교 부근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 7시 중앙교회에서 모이도록 돼 있어 청년들은 식사 뒤 삼삼오오 떼를 지어 전주역을 지나 교회로 걸었다. 이때 갑자기 앞서가던 젊은이들이 어깨동무를 했다. 뒤따라오던 청년 신도들은 머뭇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줄을 서서 스크럼을 짜라!'고 고함을 질렀다. 정외영은 이 고함이 절대자의 명령인 것처럼 들렸다. 정외영은 다리를 저는 한 청년과 어깨동무를 하게 됐다.

전주에서 데모하다가 붙들리다

데모대로 변한 청년들은 교회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유신 철폐하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오! 자유」라는 노래도 불렀다. 교회 앞까지 당도한 데모대는 다시 뒤로 돌아 시내로 달렸다. 한 15분 동안 경찰관들은 보이지도 않았고 데모대는 마음대로 거리를 누볐다. 행인들중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시내 버스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잘한다' '힘내라' 고 소리치는 시민도 많았다. 정외영은 흥분했다. 시민들의 환호하는 표정이 그의 눈동자를 향해 클로즈업 됐다. 몸과 마음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교회와 전주역 사이 큰길을 몇 번이나 오가며 그들은 외치고 노래했다. 경잘이 도착한 것은 정외영이 교회앞에서 되돌아 나올때였다. 경찰은 뒤에서 밀었다.

'중앙을 꺾어라'

경찰은 대열의 한복판으로 달려 들어와 양쪽으로 갈라붙였다. 정외영은 다른 100명 쯤의 학생들과 함께 길가의 큰 책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경찰도 따라 들어왔다. 격투가 벌어졌다. 경찰의 곤봉에 데모대는 화분을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정외영은 안경을 벗어 던지고 바깥으로 달아났다. 그를 쫓으려던 경찰관을 다른 데모대원이 밀어 쓰러뜨렸다. 경찰관들은 이 사람을 추적하여 붙들어 차에 태웠다. 한 여학생은 머리채를 휘어잡힌 뒤 한 5미터쯤 끌려간 뒤 버스에 태워졌다. 정외영도 경찰의 포위망에 갇혀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고 붙들렸다. 이날 전주 경찰서가 붙든 시위자는 모두 97명이었다. 경찰서에서 정외영은 데모 주동자들이 취조실에서 고문을 받으며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을 들어야 했다.

경찰에선 잡혀온 데모대원들의 지문을 찍게 하고 그들에 대한 신원 조회를 주거지 경찰서로 긴급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정외영은 이미 동래경찰서가 전국에 수배한 사람임이 드러났다. 동래경찰서 김의관 경위가 다음날 정외영을 데려가기 위해 전주에 왔다. 정외영과 부산 출신 데모대원 셋은 경찰서 차를 타고 청년회원들이 데모 탄압에 항의, 농성을 펴고 있던 남부교회 앞을 지나 부산으로 향했다. 1978년 8월 24일 정외영은 긴급조치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그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징역 5년을 구형했던 검사는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정외영은 그해 11월 3일 풀려났다.

서연자는 세 가지 고통과 갈등과 실망을 경험했다. 두 다리 못쓰는 그의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딸의 행동이 자기 생각과 너무나 다른데서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생각 차이가 너무 커 대화의 단절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딸이 학교에서 제적당하는 것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되겠다고 생각했다. 서연자도 감방에 가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캠퍼스에서 추방돼 잔디밭과 벤치와 친구들로부터 멀어지는 것만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적만은 피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서연자는 학교로부터의 질책을 참았다.

상담관실 사람이 '다 큰 아이들이 여관에서 함께 무엇를 하고 있었느냐'고 모욕을 주어도 그는 참았다. 반성문을 써서 냈더니 그 직원은 대뜸 '너의 아버지가 대신 쓴 것이 아닌가'고 따졌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학생처의 학생 사찰 담당자는 서연자가 티셔츠 바람으로 그를 찾아오자 반성이 어느 정도 됐는지 알고 싶다면서 질문을 던졌다. '최성묵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나?' '훌륭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넌 아직 반성이 덜 됐군. 최목사를 잡아 죽이고 싶어야 비로소 반성이 됐다고 볼 수 있어' 학생처 어느 교수는 서연자의 티셔츠가 속옷같이 보인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근 한달동안 학교와 집을 오갔다. 학교에선 서연자의 아버지에게 '당신이 지도를 잘하면 제적을 안 시킬 수 있다'고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1978년 6월 14일 제적 통보가 서연자에게 날아 왔다. 아버지가 더 원통해 하였다.

정외영 보다 먼저 기소된 세 피고인의 재판과정에서 부산의 많은 반유신 인사들이 피고인들을 격려하고 도왔다. 1978년 5월 23일 엠네스티 부산지부는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에 지원을 요청, 변호사 선임료 10만원을 지원받았다. 김광일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았다. 재판은 빨리 진행됐다. 1978년 7월 15일 많은 중부교회 신도 및 부산대학생들이 경찰의 방청 제한조치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에 끼여들어 이성동과 전중근이 징역 5년, 서연자가 징역 3년을 구형 받는 것을 지켜봤다. 7월 31일 선거공판에서 이성동과 전중근은 징역 1년, 서연자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피고인들은 핳소했으나 기각됐다.

이진걸의 격분

1978년 부산대 4·19학원자율화선언문 사건은 부산의 민주화운동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원 바깥의 조직과 학원내 조직의 접촉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중부교회에서 배양된 종자가 부산대학에 뿌려진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캠퍼스 안팎의 운동이 뚜렷한 연결을 갖게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역사적인 부마사태의 도화선이 됐다는 점이다. 이 사건으로 이성동이 구속되자 그의 고등학교 후배 이진걸은 격분한다. 그는 이 격분을 저항에너지로 바꿔나가면서 자신의 의식을 단련하고 그가 이끌던 동문회를 이념서클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선언문 사건은 부산대학교 안에 이진걸이란 시한폭탄을 장치한 것이었다.

이 폭탄이 터질 때 부마사태는 점화됐던 것이다. 민권운동가들은 방청과 변론을 통해 선언문 사건을 크게 부각시켰다.

'정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민주 시민 여러분! 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학원에서 쫓겨나고 감옥에서 독방 신세를 져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민주회복과 학원의 자율화를 외치고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외친 사실 때문에 재판정에 서야 하는 저 장한 모습을 다 함께 지켜봅시다.'

이런 전단이 버스안과 다방에 뿌려졌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붙여졌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손에 집어주고 모른 척 가버리기도 했다. 전단을 시중에 뿌린 것은 이 사건 때가 처음이었다. 중부교회와 평소 관계를 갖고 있지 않던 부산대생들이 2, 3백 명씩이나 떼지어 방청하러 온 것도 처음이었다.

부산대생들이 관계된 것으로 1976년 1월의 중부교회 청년회지 『책방골목』사건이 있었지만 이것은 중부교회에 한정된 사건이었고 문제가 된 구절도 부산대생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언문 사건의 현장은 부산대학교와 재학생들이었다. 주모자들은 중부교회 교인이기에 앞서 부산대생들이었고 그들이 외친 것도 부산대학생들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다 '남의 사건' 이 아닌 '우리의 사건'으로 인식되면서 이것은 부산대학교 학생운동사의 한 전환점이 된다.

작은 교회의 세 청년들

부산시 동래구 연산동의 남부교회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교회로 통하고 있었다. 목사까지 쳐서 신도가 10명. 그 가운데 목사 가족이 네 명 끼여 있었다. 목사 이주학씨(1916년생).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번쩍이는 눈빛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얘기를 나눌 때의 그는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소탈하다. 감리교 신학대학을 나온 그는 고향인 충남에서 목사로 일하다가 1968년 부산으로 내려왔다. 감리교 목사 파송제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남부민동의 빈민촌에 범일교회를 세워 운영하다가 곧 연산동으로 옮겼다.

그는 감사헌금이나 십일조 헌금을 받지 않는 교회를 세웠다. 설교도 원탁을 둘러싸고 교인들이 앉은 상태에서 하기 때문에 대화나 토론에 더 가까웠다. 그는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박사나 목사들이 학위나 목사 임명을 받을 때 입는 가운을 미싱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그의 30년간 변함없는 밥벌이 수단이었다. 그는 결코 대쪽같이 고지식하기만 하고 완고한 목사는 아니었다. 젊은이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막걸리 파티도 벌이고 아들에겐 아버지로서보다는 선배로서 얘기했다. 아들에게 그는 결코 명령을 내리는 법이 없었고 자신의 의견만 제시할 뿐이었다.

그의 셋째 아들은 이희섭. 197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폐결핵에 걸려 대학교 입시도 포기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이희섭은 대연중학교에 다닐 때 정광민이란 말없는 친구와 같은 반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 친구와 그때는 그렇게 다정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두 청년은 곧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을 확인할 터였다. 이희섭은 1978년에 친구 둘에게 전도하여 아버지 교회로 나오게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상경은 그때 부산대학 사회계열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형 이상석은 부산대학교에서 데모를 주동했다가 군으로 쫓겨간 학생이었다. 김승영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대입검정고시에 합격 수험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희섭, 김승영, 이상경 셋은 완전히 뜻이 맞았다. 그들은 맹렬하게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주로 경제사상과 역사와 사회 및 문학서적을 읽었다.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조용범의 『후진국 경제론』,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발달사연구』,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김정한의 『인간단지』, 김수영, 김지하, 조태일, 이성부의 시 따위.

그들은 이런 책들을 읽고 그때마다 토론을 했다. 이런 토론을 거치면서 그들의 현실인식은 어렴풋하게 나마 어떤 틀을 갖게 됐다. 농업구조의 발전이 앞서지 않는 공업구조의 발전은 허구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한국의 경제가 그런 구조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국내 자본이 축적되고 농업구조가 발전될 기회는 두 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정치적 이유로 해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그들은 배웠다. 첫 번째 기회는 해방후의 토지 개혁, 두 번째는 5·16뒤의 농촌고리채 정리.

민족자본의 축적이 약했기 때문이 우리 경제는 공업발전을 지향하면서 자연히 외국 자본을 무리하게 끌어들이게 됐다. 이 차관을 갚기 위해선 농민과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의 생각은 이처럼 단순 명쾌한 것이었다. 이희섭 등이 그때 국내에선 신좌익 계열의 경제학자들로 분류되고 있던 바란, 돕, 스위지의 저서를 읽었다는 것은 주목할 값어치가 있다. 부산데모에 앞장섰던 학생들의 공통 독서과목이 이 세 경제학자들의 책이었다. 그들은 번역된 책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판으로 베껴진 원서를 읽었다. 그들은 한국경제를 보는 눈은 대체로 이 세 학자들의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희섭은 아버지와 책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셈이다. 그는 아버지의 생활태도와 사상을 존경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정의로운 행동이 자주 불의에 부딪쳐 깨어지는 것을 그는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보아왔었다. 심지어 그의 가족은 하루에 두끼밖에 못 먹는 생활도 경험했었다. 1978년 6월에 접어들자 이들 세 젊은이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조바심을 갖게 됐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세 사람의 마음속에서 동시에 싹텄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그들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언론의 무기력이 도대체 국민들을 노리개로 여기는 것 같아 화가 치민 것도 그런 생각을 갖게 한 요인이 됐다. 그들이 그동안 토론하다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의 축적이 그들을 행동을 향해 밀어붙인 것이었다.

반정부 낙서하고 구속돼

그들은 7월 1일 교회에서 모여 행동 계획을 짰다. 사건이 들통이 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었으나 그것에 대해선 생각 않기로 했다. 이 일의 계획에 따라 그들은 서면 자동차부속상 골목에서 분사식으로 페인트칠을 하는 깡통을 하나 샀다. 이것은 두 홉짜리로서 에프킬러 통처럼 생긴 것이었고 누르면 페인트 액체가 뿌려져 나오게 돼 있었다. 셋은 또 200미터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는 워키토키 두개를 구했다. 1978년 7월 3일 저녁 세 청년은 교회에서 모여 저녁을 먹었다. 밤 10시 30분 그들은 택시를 타고 부산대학교로 향했다. 신정문앞에서 내려 개울을 따라 난 좁은 길을 지나 그들은 11시께 야구장 백네트 뒤편에 있는 철조망을 뚫고 학교로 들어갔다.

달은 구름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김승영은 백네트 뒤편에서 이희섭은 스탠드 본부석 뒤에서 워키토키를 들고 망을 봤다. 두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이상경은 분사기로 써 내려갔다. 백네트의 하단부 시멘트에 그는 '박정희 물러가라' '유신 철폐하라'고 초록색 페인트로 큼직하게 휘갈겼다. 글자 하나의 키가 오십센티미터, 글귀의 길이가 8미터나 됐다. 이 구호는 신정문을 지나 강의실로 걸어 들어가는 학생들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씌어진 것이다. 이상경은 다시 스탠드 본부석의 벽면에도 더 큰 글씨로 같은 구호를 휘갈겨 썼다 '교련반대'란 구호를 보탰다. 글을 다 쓰는 데는 15분쯤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얼씬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셋은 밤 1시 직전 교회로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6시께 부산대학교 앞 장전파출소장 김의관은 여느때처럼 부산대학교 교정을 순찰하고 있었다. 불온 유인물이나 낙서가 학생들의 눈에 들어가기 전에 발견하여 제거하기 위한 순찰이었다. 그는 박대통령을 비웃는 듯한 이 낙서를 발견하자 멍하니 있었다. 두 다리에 힘이 쫙 빠져나가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동래경찰서 정보과는 수사본부를 파출소에 차리고 범인을 찾아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때는 학기말시험을 치고 있을 때였다. 먼저 7월 3일과 4일에 시험을 치지 않은 학생들의 이름을 뽑아 조사했다. 성과가 없었다. 학생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다. 한 여학생이 그 낙서를 봤다고 얘기하고 다닌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 학생을 불러 따졌다. 그 여학생은 다른 학생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 학생도 또 다른 학생에게 들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의 진원을 찾아 내려갔다. 열다섯 명째의 학생이 '그날 아침 수험공부를 하러 일찍 학교에 나왔는데 그때 본 것이다'고 했다. 이 첫 목격자도 조사했으나 아무런 혐의점을 들춰낼 수 없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보름쯤 끈질기게 추적하여 7월말에 끝내 부산대 1년생 이상경을 붙드는 데 성공했다.

이상경은 붙들려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오른쪽 고막이 터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김승영과 이희섭의 이름을 댔다. 김승영은 집에서 이틀 뒤 붙들렸다. 이희섭은 이상경이 붙들려갔다는 소식을 상경의 친구로부터 전해 듣고는 서울로 달아났다. 아버지한테는 '무슨 일이 있어 좀 숨어있다가 오겠다'고 만 얘기했다. 아버지도 더 이상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희섭은 친지들의 집을 떠돌며 열흘쯤 있다가 돈이 떨어져 부산으로 내려왔다. 희섭은 부산에서 부산대학생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 6시께 서면의 은다방에서 둘은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친구는 보이지 않고 친구 어머니가 대신 나와 있었다. 친구 어머니와 얘기하고 있을 때 형사들이 희섭을 붙들었다. 희섭은 경찰에서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다. 이상경과 김승명이 경찰에는 이야기할 것은 모두 털어 놓았기에 희섭으로부터 더 이상 빼낼 이야깃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8월 2일 세 청년은 주례교도소 미결수 독방으로 넘어갔다.

감방 속의 단식투쟁

희섭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진단서를 붙여 불구속 기소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독방에 들어가서 며칠동안 희섭은 열이 나고 식욕이 떨어져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차츰 감방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건강을 되찾게 됐다. 그는 사식을 거절하고 관식만 먹었다. 아버지는 한 주일에 서너 번씩 면회를 왔다. 함께 기도를 해주고 책을 넣어주었다. 아무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 검사는 '유신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되풀이하곤 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싫어하는가'
'모든 역사를 통해 제도는 우수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이 잘 산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법제사는 우수했지만 민중사는 불행했습니다. '

재판정에는 교수들의 만류에도 굽히지 않고 중부교회 대학생 신도들과 부산의 운동권 인사들이 수 십명씩 나와 세 청년을 응원했다. 1978년 10월 26일 부산지법에서 있은 최후 진술에 이희섭은 '당신네들의 방법에서 맞춰 우리도 계속 같은 방법으로 투쟁할 것이다'고 말했다. 구형은 셋 모두에게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이었다. 선고는 징역 1년 6개월에 자격정지 1년 6개월로 낮춰졌다. 그들은 고등법원에서도 같은 형량으로 선고되자 상고를 포기했다. 1979년 2월 5일의 일이었다.

포기하고 나니 이희섭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규칙적인 생활로 그는 눈에 뜨이게 건강해졌다. 이젠 독서를 할 때였다. 그는 독서계획을 짰다. 나무 젓가락을 깎아 연필을 대용, 교도소에서 내준 건빵의 상표 종이에 읽을 책 목록을 적었다. 희섭은 독서계획을 착실히 실천에 옮겼다.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따위 주로 해방신학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희섭이 들어 있었던 4동에는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된 학생 30명 쯤이 있었다. 경북대학교 학생들도 1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1978년 10월의 데모와 관련됐다고 해서 구속됐었다.

경북대학생 김병호는 1979년 1월 4일 아침 몸이 아파 점호때 누워있었다. 간수가 일어나라고 고함을 질렀다. 김병호는 '아픈데 왜 이러느냐'고 짜증을 냈다. 화가 치민 간수는 병호의 팔을 뒤로 젖혀 수갑을 채우고 묶은 뒤 골방으로 데리고 가 실컷 두들겨 팼다. 병호는 어찌나 맞았던지 정신 이상 증세를 일으켜 부산대학 병원에서 정신감정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병호가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은 학생들 사이에 쫙 퍼졌다. 학생들은 간수의 행동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이희섭은 단식 시작 이틀과 사흘 째가 가장 참기 어려웠다. 환상이 보이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는 「환난과 핍박중에서 성도는 자유 얻었네」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배고픔을 참았다. 학생들의 단식 투쟁이 계속되자 다른 정치범들도 가담했다.

단식을 하고 있는 사람은 80명으로 늘어났다. 간수들은 이들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학생들은 폭력 간수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식구통으로 들이미는 구수한 밥과 국 냄새를 애써 외면하며 단식을 계속하는데는 보통 이상의 의지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단식투쟁 대열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단식이 시작된 지 이레하고도 두끼가 지난 뒤 드디어 간수들이 손을 들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공식 사과를 한 교도소에선 곧 이들 학생들을 분산 수용시켜 집단행동이 어렵도록 만들었다. 이희섭과 김승영은 1979년 5월 12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상경은 정부에서 요구한 각서를 끝내 거부했다가 1979년 7월 17일에 풀렸다. 이희섭이 꼭하고 싶었는데 못한 말이 있었다.
'판사님! 당신은 양심에 따라 선고를 하고 그 자리를 물러날 용기 정도는 가져야 할 것 아닙니까? 물러나도 변호사를 해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동아대학교의 사정

1979년 4월 19일 동아대학교 일어과 2학년 김해수(23)는 과 학생들과 함께 마음 내키지 않는 산업시찰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하루 전에 학교 당국이 3박 4일간의 학생부담 산업시찰 여행을 각과에 지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4·19를 잊게 하자는 술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도교수에게 '나는 4·19의 뜻을 알기 때문에 집에서 자숙하고 있겠습니다.'고 말했다. 교수는 같이 가자고 명령하듯 졸랐다. 해수가 집에 돌아오니 부모는 언제 알았는지 '눈치 보일 것 없이 여행 다녀 오려므나'고 타일렀다.

해수네들은 태운 관광버스가 대구로 가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오늘이 4·19열아홉 돌이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그제서야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날이 4·19임을 알아차리는 것같았다. 김해수는 이런 꼴을 보고 가슴이 답답했다. 4·19 날에 이렇게 놀아야 하는데 대해 아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풍토가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1978년에 그가 동아대학교에 들어와 느낀 것은 학교당국이 학문보다 운동경기에 더 욕심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씨름, 유도, 레슬링, 야구, 축구부는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레슬링의 양정모나 권투 플라이급의 세계 챔피언 박찬희는 둘 다 동아대학생이었다. 일부 학생들은 '동아야구대학'이라 부르면서 학교당국의 운동경기 집착을 비꼬기도 했다. 학교에선 딴 지방에서 경기가 열리면 수십 대의 버스를 동원, 학생들을 데리고 가 응원을 하게 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런 열성적 뒷받침은 학생들이 강당을 빌어 합창대회, 보컬그룹 경연대회, 미팅 따위를 하려고 할 때나 교련검열 준비를 할 때도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이 세미나를 열고 서클끼리의 모임을 갖거나 농촌 봉사를 하려 할 때는 반응을 보이기가 일쑤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중부교회에 나갔다. 1976년에 『책방골목』사건으로 동아대학 수학과 1학년 이태성이 구속되고 1977년 4월에 진주교도소 김대중 면담기도 사건으로 동아대 수학과 3학년 이승원이 곤욕을 치렀을 때 김해수는 동아대학이 살아있다고 느꼈으나 막상 입학해 보니 그런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던 것이다. 김해수는 1978년 3월 선배 몇 명과 함께 '동아 독서회'를 조직 서클로 등록시켰다. 스물 몇 명의 학생이 모임에 들어왔다. 주로 경제, 역사, 문학 책들을 읽고 매주 한 번씩 모여 토론을 벌였다. 그때 동아대학 안에서 등록된 이념서클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김해수는 또 김형기의 권유에 따라 서울의 KSCF모임에도 자주 참석했다. 서울에 한 번씩 갔다 올때마다 그는 부산의 학생들이 너무나 감각이 무디다고 탄식하게 됐다. 많은 동아대 학생들은 이웃의 문제보다도 자신의 취직문제가 더 급한 것 같았다. 강연회에 나가는 것을 시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학생도 많은 듯했다. 해수는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을 끌어 모으려고 했다. 그는 이승원과 함께 열 명쯤의 동지 학생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들은 독서회에서 이 두 사람이 뽑은 학생들, 개별적인 설득 작업을 통해 얻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독서회와 별도의 스터디 그룹이 됐다. 중부교회를 거쳐오는 잦가지 반유신 유인물들이 이들 손으로 학교 안에 뿌려졌다. 인권재판 소식들도 이들 손으로 학생들에게 건네졌다. 한 번에 쉰 장쯤 소화됐다. 1978년에 동아독서회는 몇 가지 사건을 일으켰다.

농촌 봉사 갔다가 경찰에 신고돼

여름방학 때 그들은 고성으로 농촌 봉사를 떠났다. 낮엔 농민들의 일손을 거들이주는 일을 했다. 그들의 진짜 봉사는 밤일이었다. 그들은 마을의 집집마다 찾아다녔다. 농협의 부정, 군청의 횡포, 농민들의 억울한 사정들을 캐기 시작했다, 반상회에 끼여들어 농민들의 불편을 적어오기도 했다. 이들의 조사활동을 농민들은 경계심을 가지고 받아 들였다. 물음엔 입을 다물었다. 달갑지 않은 봉사 활동으로 보는 농민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에선 동아대학교에 알렸다. 5박 6일로 예정했던 봉사활동이 끝나기 이틀 전에 학교 지도과에서 그들을 데리러 왔다.

학교에 알리지 않고 남녀 대학생이 섞여갔다는 것이 꼬투리로 잡혔다. 그들은 호된 꾸중을 들었다. 서클을 해체시키겠다는 협박도 들어야 했다. 모두가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는 시말서를 썼다. 농촌 문제를 그 현장에서 체험해 보자는 것이 이들의 뜻이었으나 그들은 학원사찰의 체험을 했을 뿐이었다. 그해 1978년 8월 해수는 기장 청년회의 전주대회에 참석, 반유신 데모를 벌였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정외영, 조퇴원, 김명준과 함께 그는 부산으로 압송돼와 서부경찰서로 넘겨졌다. 이곳에서 나흘간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선 자꾸 부산대학 4·19 선언문사건과 해수를 관련시키려 했다. 각서를 쓰고 나온 해수는 학교의 지도과에 불려가 또 괴로운 신문을 받았다. 그는 이제 학교와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살게 됐다. 전과자처럼 무슨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는 지도과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의 집으로 서부서, 중부서, 정보형사들이 뻔질나게 찾아오고 전화를 걸어왔다. 통장과 반장도 그의 행동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동아 독서회는 사학과 ㅅ교수를 모시고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이 「우리의 소원은 자유」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또 문제가 됐다. 이 ㅅ교수는 해수가 존경하는 두 교수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교수들을 불신했다. 다른 학생들도 교수로부터 학문 이외의 가르침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뿌리깊은 불신 관계를 심은 것은 지도과였다. 지도과 직원들은 지도 교수들을 지휘, 학생들을 감독케 했다. 학생들의 눈에는 지도과 직원이 더 높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한번은 동아 독서회가 학내 서클들끼리의 수평적인 연합운동을 꾀한 적이 있었다. 우선 서클대항 야구나 배구등 친목 운동경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나고 그 다음에는 강연회를 함께 주최하는 식으로 이 운동을 확대시키기로 했다. 그 일 단계 작업으로 한 서클과 배구 대회를 갖기로 하고 지도교수의 승인을 받았다. 상대 서클의 지도교수는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도장을 안 찍어 주었다. 이것을 지도과에서 알고는 또 해수네들을 불러 족쳤다. 물론 연합운동의 꿈은 깨졌다.

동아대학생들은 반유신 인사의 강연회나 인권 재판 방청에 나갈 때마다 지도과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해수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선거법위반 사건재판에 방청 나갔다가 방청석에 미리 앉아 있던 지도과 직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곳에선 모른척 하던 그 직원은 방청온 동아대학생들 이름을 모두 적어두었다가 학교로 돌아간 뒤 그들을 하나씩 불렀다.

'느낀바를 말하라'
'누가 시켜 갔나'
'왜 가게 됐나'
경찰 신문조의 조사였다. 해수네들은 학교당국이 학생들을 상대로 '우민정책'을 펴고 있다고 봤다. 그들은 여기에 맞서 학훈단 및 학보사 보이코트 운동을 폈다. 학훈단은 캠퍼스에 딱딱한 군대 분위기를 가져와 자유로와야 할 대학교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보사는 학교당국의 앵무새로 변해 사회의 매스콤보다 더욱 힘이 빠졌다고 그들은 보았다. 그래서 이 두 단체에 들지 않도록 개별적인 설득 작업을 펴기도 했다.

호박과 가위

부마사태 이전의 부산의 대학 분위기를 엿보게 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더 소개한다.

동아대 학보사 기자 이상용(법학과 4년)은 1976년 4월 16일치 『동아대학보』에 김상배(법학과4년)와 함께수필을 썼다. 신입생과 재학생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식의 기획 수필이었다. 이 수필속에서 두 사람은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학도호국단이 생긴 대학의 분위기를 냉정하게 그렸다. 긴급조치가 나쁘다는 표현은 한마디도 쓰지 않았고 다만 객관적 사실로 기록했을 뿐이었다.

신문이 찍혀 나와 나눠지기 전에 학보사 주간인 박모 교수가 이 수필을 읽고 펄쩍 뛰었다. 그는 총장에게 신문을 들고 뛰어갔다. 신문을 나눠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설사 문제가 될 만한 글이라 해도 페기 처분하고 다시 찍으면 수습될 일이었다. 그러나 두 학생은 제적이란 선고가 내려졌다. 이상용은 학교에서 쫓겨난 다음 부산시에서 펴내는 부산시보사 기자로 들어갔다가 『뿌리깊은 나무』편집부로 옮겨 기자가 됐다.

1979년 5월 신민당 정당 대회를 앞둔 어느 날『국제신문』에서 수습중에 있던 정원영기자는 모교인 부산대학교 앞에서 술에 취해 친구인 부산대학생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총재에 이철승이가 된다'
'아니다. 김영삼이 역전승 할 것이다'
정기자는 집으로 돌아가던 부산대 사대부속고등학교 학생들 몇명을 붙들고
'야, 너희들은 누가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오더니 수상하다면서 정기자와 그의 친구를 교무실로 데리고 가려했다. '기자다'고 해도 이 교사는 믿지 않으려 했다.

그 교사는 학교로 들어가더니 10여명의 동료 교사들을 데리고 나와 두 젊은이를 질질 끌고 교무실로 납치해 갔다. 아직 프레스 카드를 갖고 있지 않았던 정기자는 꼼짝없이 '고등학생을 선동하는 불순분자'로 몰려 버렀다. 손찌검까지 하려는 교사들도 있었다. 한 30분 후에 신분이 확인돼 풀려나긴 했지만 정기자는 자신이나 교사들이 서글퍼지기만 했다. 이 사건도 동래서 부산대학교 담당형사에게 체크됐다. 동래서는 중요정보로 취급하여 부산시경 정보과장에게 바로 보고했다. 이 사실을 안『국제신문』시경 출입기자는 정보과장에게 해명하여 그 보고서를 묵살하도록 했다.

부산대학생들은 학생시위 예방 부서인 학생지도 상담관실을 '학내정보부'라 부르기도 했다. 홍준섭실장을 정보부에서 파견된 직원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상담관실에선 장학생 선발 및 취직 추천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것을 문제학생들에게 미끼로 던지기도 했다. 1979년초 '문제학생' 고호석은 홍실장에게 불려갔다. 여느때와는 달리 홍실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요즘 공부한다고 욕보지?'라고 위로했다. 그리고는 5만원을 내놓았다. 부담감 없이 받으라고 말한 그는 영수증을 고호석으로부터 받았다. 호석은 '다음에는 10만원 주이소'라고 농담을 하면서 돈을 받아갔다. 그가 그 뒤 더욱 학생운동에 열을 올린 것은 물론이었다.

정보기관에서는 부산대학교 안에 독자적인 정보망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생상담관실과 경찰에 완전히 의존했다. 학도호국단 창설이전엔 학원담당 정보부 조정관이 학생들 사이에 정보망을 깔아두는 일이 있었으나 대학 내 상담관실의 학내사찰기능이 강화되면서 그럴 필요성이 줄어들자 독자적 정보망은 사라져 버렸다. 공작비도 줄었다. 정보기관 안에서도 '우리의 권위는 경찰도 학교도 모르는 결정적인 정보를 빼내는 데서 생기는 것인데 너무 경찰과 학교에 의존하고 있다'고 위험성을 지적하곤 했다. 부마사태로 이 허점이 드러날 것이었다.

1979년 봄부터 부산대학생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어느 공대학생이 서울의 어느 여대생이름으로 부쳐진 소포를 받았는데 그 속에 썩은 호박이 들어 있드라는 것이다.

'부산대학생들은 썩은 호박과 같다'는 뜻을 전해 주려고 누군가고 이런 장난을 했으리라고 학생들은 쑤군댔다. 학도호국단 간부 앞으로 서울에서 편지가 왔는데 남자의 성기와 가위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는 얘기도 퍼졌다. '그렇게 비굴하게 놀 바에야 그것을 잘라 버려라'는 뜻으로 풀이가 됐다.

부산대학교 안에 있는 운동권조직에서 학생들의 의식을 깨우쳐 주려고 일부러 이런 말들을 만들어 퍼뜨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효과는 백퍼센트였다. 많은 부산대학생들은 여학생들까지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비웃는다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가슴속에 쌓인 수치감과 열등감은 폭약으로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