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점화

사이렌소리와 함께 '모입시다!'

1979년 9월 17일 낮 12시 30분께 부산시 남구 대연동 부산공업전문대학 학생들은 점심시간을 맞았다. 교내 식당으로 가거나 가져온 도시락을 잔디밭에서 까먹으려고 운동장으로 학생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는 사이렌이 울려왔다. 민방위 훈련 때 울리는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리듬의 사이렌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한꺼번에 눈길이 쏠렸다. 한 안경 낀 학생이 게시판 슬라브 지붕 위에 올라가 휴대용 메가폰으로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이 학생은 '모입시다.'고 외쳐댔다.

같은 시간에 한 키 큰 학생은 학생들이 몰려나오는 강의실을 돌면서 8절지 인쇄물을 뿌리고 있었다. 학생들 500명 가량이 게시판 앞으로 우루루 달려갔다. 안경 잡이 학생은 선언문을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계과 2년 신홍석으로 밝혀진 이 학생은 격렬한 내용을 담은 선언문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자신이 수백 명의 학생들 앞에서 어릿광대 놀음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길은 어리둥절,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도 그의 뜨거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았다.

그는 가슴속의 열기를 학생들에게 도저히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감의 광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선언문을 다 읽기도 전에 몸집 좋은 체육교수가 뛰어 올라왔다.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듯 힘센 교수는 홍석을 끼고 교무실로 끌고 갔다. 도중에서 그 교수가 홍석을 차고 때리자 비로소 학생들 속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때리지 마라!' '때리지 마라!' 선언문을 뿌리고 있던 서석권은 이제야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함성은 곧 침묵하고 말았다.

부산공업전문대학 선언문 사건의 주인공 셋은 그렇게 풍족하지는 못한 집안 출신이었다. 신홍석의 아버지는 외항 선원이었다. 서석권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갔고 김맹규의 아버지는 파출소 차석이었다. 김맹규는 1977년 서울대학교 자연 계열에 합격, 재학중 학교 안에서 반독재 인쇄물을 돌렸다고 해서 출학을 당했었다. 순경 집안에 인물났다고 이웃에서도 경사를 만난 듯 기뻐했던 것도 한때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 실망하여 아들을 '집안의 원수다'고 푸념하는 신세가 됐다. 김맹규는 1978년에 다시 부산공업전문대학 토목과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선 김맹규의 과거를 몰랐기 때문에 우수한 성적을 보인 그를 받아들였다.

세 청년은 전문대학의 강의가 너무나 기술인력양성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데 실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그들은 이름 없는 이념서클을 하나 만들었다. 열다섯 명의 학생들이 이 모임에 들었다. 매주 금요일 오후에 잔디밭 벤치에 둘러앉아 토론회와 세미나를 가졌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읽었던 책을 놓고 주로 토론을 폈다『역사란 무엇인가』『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같은 책들이 이들의 교과서였다.

이들은 1979년 여름 방학 때는 아무도 없는 잔디밭에서 연극을 했다. 맹규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극본으로 만들었다. 한시간 동안 연극을 하고 난 뒤 회원들의 한결같은 소감은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사회관은 아직 정리돼 있지는 않았으나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에 비해 제값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느꼈다. 세 학생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그들이 닦고 갈아온 문제 의식에 비춰 당연한 귀결이었다. 신홍석은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가장 경멸했다'고 뒷날 말했다.

그들은 유신체제 아래에선 그런 종류의 행동 계획을 치밀하게 짜려다간 중간에 들통이 나게 마련이란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셋이서만 계획을 짜갔다. 선언문의 초안은 맹규가 썼다. 등사기와 줄판은 서석권이 부산 천주교교구청에서 빌어왔다. 1979년 9월 6일 토요일 밤에 그들은 등사준비를 끝냈다. 다음날 그들은 아무도 없는 토목과 수리실험실에 모였다. 선언문은 미리 원지에 써왔었다. 맹규는 그때는 줄판을 못 구해 합판 조각을 밑에 받치고 글을 썼기 때문에 등사를 해도 글이 알아 볼 수 없게 나왔다. 김맹규는 이 원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줄판을 받쳐 원지를 쓴 다음 등사기에 걸었다. 200장을 찍어내는데 성공했다.

세 명은 9월 13일 다시 수리실험실에 모여 이번엔 16절지로 선언문의 요약 부분을 400장쯤 등사했다. 세 학생은 이젠 동지들을 모으는데 발벗고 나섰다. 9월 11일 신홍석은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부산대학교 경제과 2년 정광민(鄭光敏)을 부산역에서 우연히 만났다. 둘은 이런 일에는 협조하기로 평소 이야기가 돼 있었다.

'광민아 부산대학은 너가 책임져라. 같이 일어나자'
'우리 학교는 아직 멀었다. 분위기가 충분히 익지 않아 자신이 없다' 광민은 거절했다. 홍석은 뒤돌아서 헤어지면서
'유신대학 놈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고 중얼거렸다. 세 학생은 서클회원들에겐 계획을 설명하여 일이 터지면 다른 학생들을 설득하여 행동에 나서도록 일러두었다.

9월 15일 김맹규가 교수들에게 붙들려 갔다. 정보가 샌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선 맹규 이외의 다른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캐내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선 맹규를 김해의 절간에 보내 학생들과 격리시켰다. 9월 16일 홍석과 석권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다른 학생들과 모임을 갖고 행동의 계획을 의논했다. 이 자리에서 맹규의 격리사실이 알려졌다. 학생들은 서둘렀다. 행동도 못해보고 모든 것이 들통날 것만 같았다.

이래서 9월 17일 점심시간이 행동시간으로 결정됐던 것이다. 학교에선 김맹규, 서석권, 신홍석 등 세 주모 학생을 붙들었으나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경찰에 이들을 넘겼다. 닷새 뒤 이들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하여 부산 남부경찰서에 구속됐다.

뇌관이 된 경제과 2학년생들

친구 신홍석으로부터 '유신대학생 놈아! 잘먹고 잘 살아라'는 욕을 들은 정광민은 부산대학교 경제과 2학년생이었다. 경제과 2학년생 76명은 부산공전 사건 한달 뒤 정광민과 함께 폭발하여 부마사태의 기폭제가 된다. 1979년의 부산대학교 경제과 2학년생 그룹은 70년대에 이 대학에서 이어져온 문제의식의 연마작업이 이룩한 결정체였다.

계열별 모집이 시작된 이후 2학년 때 경제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거의가 사회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이 들이었다. 이 학급의 총대 이덕만이 1979년 1학기초에 학비감면 대상자를 조사했더니 대상 기준에 들어가는 가난한 학생들이 40명이나 됐다. 반이 넘는 학생들이 가정교사로 학비를 대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론 경제학에 앞서 피부경제학을 체험한 것이었다.

이 학급에는 군에서 제대하여 1979년에 복학한 학생들이 일곱 있었다. 이들 예비역 학생들은 나이가 서너 살 적은 동생 또래의 다른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예비역 학생들은 학급을 뒤에서 밀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일구어 나가는 리더구실을 다했다. 형식면에선 선배 대우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내용면에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학급의 지도층을 형성했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박현호(그때 26세)는 안경을 낀 차분한 성격을 지닌 학생. 그는 1974년 입학 그해 가을에 반유신 데모를 경험했다. 1974년과 75년에 현호는 정신적인 방황을 계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함안 경찰서에서 경장으로 일하다가 간경화증에 걸려 휴직하고 집에 누워 있었다. 말단 순경의 월급으로는 약값마저 제대로 댈 수가 없었다. 현호는 가정교사로 자기 학비를 댈 수 있었으나 공부에는 정신을 모을 수가 없었다. 2학년 1학기에 그는 시험을 포기했다.

복학 뒤 박현호는 새 사람이 됐다. 세 해 동안의 군대 생활은 그에게 강인한 현실 감각을 주었고 소녀 같은 감상주의를 씻어주었다. 현호는 다른 복학생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그가 팀장을 맡았다. 10여명의 회원은 주로 비판적인 경제 이론서와 사회과학 책들을 교재로 삼고 캠퍼스에 모여 토론을 벌였다.

고려대학 조용범 교수의 『후진국경제론』,돕, 바란, 스위지의 진보적인 경제 이론서 ,갈브레이스와 뮈르달이 쓴 후진국 경제 발전론 관계책, 『민족경제론』등 박현채의 저작들을 그들은 많이 읽고 토론했다. 외국자본과 국내 독점 자본의 결탁, 정치 권력과 독점자본의 악수, 농촌 경제의 희생을 딛고 일어난 도시 공업 경제의 취약점 등등 그들은 한국경제의 어두운 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그들은 경제사적인 접근 방법으로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의 파악하려 했다. 경직된 틀 속에 한국경제를 억지로 집어넣으려 한 점에서 도식적이고 피상적인 수밖에 없었다. 한국 경제의 찬란한 성과만 선전되던 그때에는 그것이 당연한 반작용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경제과 2학년생들이 감동적이란 낱말로 표현하곤 했던 강의는 상대 정동현 교수의 경제사와 법대 이대우 전임강사의 국민윤리 과목이었다. 경제과 2학년 지도교수이기도 한 정교수는 경제과 2학년 학생들이 돕이나 바란의 저작을 읽고 있는데 놀랐다고 했다. 경제학과 교수들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들을 학생들이 갖고 다니며 읽고 있었으니……그는 몇 가지 의문을 가졌다.

그들이 과연 저 원서를 읽는가. 읽는다면 이론을 이해하는가 저 책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는가. 저 책들이 왜 많이 팔리는가. 부산대학교 앞에 있는 ㄷ서림에서 복사 해적판으로 이 책들을 찍어 팔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는 학생들이 돕과 같은 학자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학교 강의에서는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도 경제사 강의의 경우 마르크스-레닌주의 거의 생략하고 지나갔다.

학생들은 근대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 체계를 이해하고 판단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학생들은 공산주의 경제 이론을 알기에 앞서 그 비판론을 먼저 흡수해야 했다. 정교수는 돕과 같은 학자들의 이론을 학생들이 배우려고 애쓰는 것을 이해는 할 수 있었으나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경제과 2학년 학급에서 여성모는 최연장자였다. 나이 서른의 이 복학생은 '올에이'학점을 받고 있었다. 여성모도 박현호처럼 방황과 고민 속에서 20대를 보냈다. 그의 가정은 아버지가 경남의 어느 군 농협조합장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첫 번 투표에서 그의 아버지는 당선에 필요한 3분의 2선에 한 표가 모자라 낙선했다. 두 번째 투표에선 과반수표를 얻은 사람이 뽑히게 돼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상대방에게 한 표차로 떨어졌다. 여성모는 아버지와 가정이 한 해 동안 이 선거에 말려들어 말할 수 없이 고통을 겪는 것을 봤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가정의 이 풍파에 휩쓸렸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성모는 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는 회사에 취직했다. 회사를 바꿔가며 떠돌아다니다가 보니 어느 새 그는 기피자가 돼 있었다. 1974년에 그는 기피자 자수기간에 자수하여 입대했다. 여성모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은 군대 생활의 고생이었다. 그는 공병대에 들어갔다. 블록 공장에 배속됐다 '줄빠따' '원산폭격' '팬티 바람 집합' 따위 기합속에서 그는 몸으로 때우는 성실성을 익혔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

공병대에는 주로 농촌 출신의 학력 낮은 사병들이 많았다. 성모는 처음에는 무지막지하게만 보이던 이들이 사귈수록 정이 가는 순수한 사람들이란 것을 알았다. 그들로부터 성모는 인간다움의 참뜻을 배웠다. 성모는 대학 재학 중 입대한 젊은이들이 공병대에서 일하면서 그 가혹한 환경에 짓눌려 '고문관'이 돼버리는 것도 보았다. 성모는 졸병 생활에서 '훌륭한 지도자는 말단으로 있을 때의 생각을 지도자가 됐을 때 실천하는 사람이다'는 교훈을 터득했다.

졸병 때 그는 고참대신 보초를 서주고 고참에게 세수물을 떠주며 이불을 깔아 주어야 했다. 내무반장이 되자 여성모는 자기 할 일을 졸병에게 넘기지 않고 스스로 해냈다. 나쁜 전통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끊어질 수 있음을 그는 증명했다. 졸병이 여성모가 고마워서 몰래 따뜻한 세수물을 떠놓고 가기도 했다.

이런 여성모와 박현호가 중심이 된 스터디 그룹은 농담이 나올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은 모두 '돈은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여성모는 무엇보다도 '특권층 사람이 하루 저녁에 날려보내는 돈만 있으면 경제과 2학년생들과 같은 수십 명의 머리 좋은 가난한 학생들이 아르바이트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미워했다. 이 스터디 그룹이 중심이 돼 1979년 5월에 경제과 2학년생들은 '한국 농촌 경제의 문제점'이란 제목으로 그들만의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보수적인 농민의 자율적인 깨우침과 밑으로 부터의 개혁이 중요하다.'
'설사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제 발전은 순리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곧 농촌 경제의 발전에 따른 민족 자본 축적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공업 경제의 발전이 순서대로 진행돼야 하는데 이것이 거꾸로 되고 있는 점이 한국경제의 큰 문제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높은 교육 수준과 역사 발전 단계로 미뤄 지금과 같은 경제발전은 저절로 이룩됐을 것이다.'
'인간다운 삶은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이 조화될 때만 얻을 수 있다'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광민의 죄책감

정광민의 집. 바다쪽으로 향한 들창문을 통해 푸른 빛깔의 가을햇살이 방안으로 쏟아져들고 있었다. 부산항이 앞마당처럼 내려다보이는 남구 우암동 고지대. 그의 가족이 16년째 살고 있는 20평 짜리 슬레이트 집은 성냥곽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불량 주택들 속에서는 돋보일 만큼 컸다. 아침에 창문을 열 때마다 가슴과 눈동자 속으로 확 밀려오는 바다, 소금기 그리고 햇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집이었다.

그는 '오늘은 점심때쯤 등교해서 시험 범위나 알아오면 된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여느 때처럼 벌떡 일어나기가 싫었다. 노부모는 새벽 일찍 계원들과 함께 설악산 관광길로 떠났다. 형은 회사로, 집안엔 여동생만 남아 있었다. 회사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일곱 해 전 정년 퇴직한 정광민의 아버지는 일흔을 앞에 두고도 화물 자동차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한 달에 20만원을 벌기 위해 새벽 6시에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에게 그는 항상 죄송했다. 그가 미안하게 느끼고 있던 게 하나 더 있었다.

한달 전, 그의 고교 동창 신홍석(부산 공업전문대학기계과 2학년)이 데모계획을 짜고 있는데 부산대학교를 움직여달라고 부탁했었다. 정광민은 딱 거절했다. 그럴 시기가 아니란 이유를 내세웠다. 며칠 뒤 정광민은 동래경찰서에 불려갔다.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을 때 비로소 그는 친구가 일을 저질렀음을 알았다. 신홍석은 경찰에 붙들려와 정광민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사실까지 털어놓은 뒤였다. 정광민은 부산공전 시위사건과 관련되어 동래경찰서에서 자술서를 쓰고 나왔다. 그때 느꼈던 친구에 대한 죄책감이 늘 그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역사의 큰손을 움직이기에는 정광민만큼 걸맞지 않은 청년도 드물었다. 그는 재치나 예술적인 재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고 드물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때는 내뱉듯이 짧게 폭발적으로 했다. 검붉은 얼굴에는 어글어글한 두 눈동자가 어떤 열기를 뿜으며 박혀 있었다. 170센티미터의 키에 건장한 몸집을 가졌지만 운동에는 도무지 취미도 재능도 없었다. 정광민은 옷차림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장 즐기는 차림은 검은 색으로 물들인 군용 작업복에다가 고무신. 부모가 '거지같은 복장 좀 집어 치우라'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로 작정을 한 정광민은 사진 잘 안 찍기로도 이름이 났다. 그가 구속돼 있을 때 기자들이 그의 집을 뒤져 찾아낸 것은 대학입시원서에 붙이고 남은 증명사진 뿐이었다. 정광민은 책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친구도 많지 않은 그는 책들과의 대화에 빠져 들었다. 그의 이 독서편력은 부산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그의 아버지는 6 25때 월남한 사람이었다. 정광민의 성장지인 우암동 일대는 부두, 철길, 석탄 화차, 군용 기름통 더미, 판자집이 많은 곳이다. 그야말로 서민들속에서 그는 아주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마쳤다. 1977년 1월 그는 경북대학교 영문과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그때 정광민은 외교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1977년엔 집에 있는 시간보다 독서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만큼 재수에 땀을 흘렸다. 뛰어난 지능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침에 도시락을 두 개 싸가지고 나가 오직 끈기로 참고서와 싸웠다. 1978년에 부산대학교에 합격하자 그는 시험공부에서 해방된 에너지를 책읽기에 돌렸다.

『백범일지』『소유의 역사』 『뜻으로 본 한국 역사』『변혁시대의 한국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등등……그는 매주 한 권 꼴로 책을 바꿔갔다. 경제과 2학년이 되면서 그의 사고방식은 다른 동급생들과 같이 박정권을 권력과 독점재벌의 결탁으로 본 쪽으로 굳어갔다. 특히 도시공업경제에 희생된 농촌 경제의 문제에 대해 그는 관심을 기울였다. 경제와 2학년 과회에서 마련한 '한국농업의 문제-구조적 문제점과 농산물 유통과정의 문제점'이란 세미나에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어 그를 우직한 학생으로만 여기고 있었던 친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즈음 정광민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새 그의 목표는 외교관에서 기자나 소설가로 바뀌어 있었다. 『부대신문』수습기자 시험에 응시, 낙방한 뒤에도 그는 단편 소설을 여러 편 썼다가 찢어버리는 습작을 거듭했다. 그가 가장 존경한 작가는 김정한이었다.

노 작가의 굳은 지조이외에도 김정한이 부산토박이고 부대교수 출신이란 점에서 친근감을 느꼈다. 김정한의 '나의 문학 나의 인생'이란 강의를 들은 뒤부터는 이 주름살 투성이의 영감에게 더욱 애정을 느끼게 됐다. 「모래톱 이야기」「인간단지」같은 작품을 읽고서 그는 김정한의 작품과 실제 삶이 이룬 놀라운 일치에 감동했다. 최남선과 이광수에 대한 경멸로 해서 김정한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깊어갔다.

무슨 대책이라도 있나요?

정광민은 1979년 여름 방학을 틈타 어느 문학 잡지의 신인문학상모집에 보낼 단편 소설을 썼다. 200자원고지 70장 길이의 이 소설 제목은 '저것은, 저것이 공'이란 불경의 한 구절이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두 어머니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하고 있다. 낳은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 '나'는 갈등을 '라니'라는 순박한 처녀를 통해 잊으려고 한다. '라니'는 나의 잃어버린 반쪽이다. 동시에 '라니'는 '나'의 인격 형성에 있어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기도 했다. 정광민은 1979년 9월에 이 환상적인 단편 소설을 완성하여 잡지사에 보냈으나 좋은 소식은 없었다.

정광민의 아버지는 이북 피난민 특유의 끈질긴 생활력을 갖고 있었다. 낙천적인 이 60대 노인은 제분회사 경비원 자리에서 정년퇴직하고도 용달차 운전사로 뛰고 있었다. 정광민은 1979년 봄에는 고등학생 5,6명을 모아 가정교사를 하여 돈이 모이면 몽땅 책을 사곤 했으나 넉 달만에 그만두었다. 1979년 4월 19일 정광민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학교 뒤편 금정산성에 올라갔다. 독한 동동주를 실컷 들이켠 정광민은 오후 늦게 학교로 내려왔다. 울적한 마음을 풀 수가 없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그는 벌겋게 된 얼굴로 씩씩댔다. 어디에서 한지를 구해 왔다. 정광민은 검은 매직펜으로 내갈겼다.

'4·19-19주년'
이것을 들고 그는 학교 도서관 안을 한바퀴 돌았다. 학생 수백 명이 공부하고 있다가 이 엉뚱한 1인 데모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정광민이 바깥으로 나오자 100명도 넘을 듯한 학생들이 따라나와 '무슨 일이냐' 고 웅성댔다. 정광민은 미친 듯 '알고 지냅시다.'고 소리쳤다.
'우리 알고 지냅시다.'
정광민에게 손을 내미는 학생이 있었다. 도톰하게 살찐 손을 가진 이 귀염성 있는 얼굴의 학생은 '나는 김종셉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 다음날 정광민은 학생 상담관실에 불려가 경위서를 썼다.

1979년 9월이 됐다. 여름 방학을 마치고 캠퍼스에 돌아온 학생들은 술렁이는 분위기를 느끼게 됐다. 복학생으로 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것 같은 낯선 사나이들이 할 일 없이 교정에서 서성대서가 아니었다. 방학 동안에 일어난 YH사건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치 권력과 독점 자본의 결합이란 도식적인 관점에서 박정권을 보아온 그들은 YH사건을 그들의 평소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로 보았다. 도시산업선교회를 일방적으로 규탄하는 일부 언론의 작태는 정부의 탄압 이상으로 그들을 흥분시켜 가고 있었다. 경제과 2학년 총대인 이덕만은 대학신문기자로 일하다가 지나친 학교 당국의 간섭을 참지 못해 사표를 던지고 나온 학생이었다. 그는 어느 날 학급 회의를 소집했다.

몇몇 학생들이 '중간 시험 전에 여학생들과 미팅을 한 번 갖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날 모임은 미팅 찬반론으로 갈렸다. 이덕만은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일을 벌이면 욕을 먹는다'고 미팅 반대편에 섰다. 이 학급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복학생들도 점잖게 반대론을 폈다 콸콸한 어느 학생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런 착상을 하는 사람은 바로 학원가의 범법자' 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학급 분위기가 이상하게 격앙돼 갔다. 모두가 억눌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감정이 미팅 얘기를 끄집어 낸 학생들에게 쏟아졌다. 이때 정광민이 일어나 화난 표정으로 냅다 소리쳤다.

'그러면 무슨 대책이라도 있습니까? '총대를 공박하는 듯한 이 말에서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란 뜻이 담겨져 있었다. 갑자기 강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이 학급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성모는 그때가 폭발 직전의 분위기였다고 뒤에 말했다. 정광민은 그 한마디만 던지고 앉아 버렸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마음속으로 '과연 나는 행동할 수 있는가 '라고 자기의 용기를 점검해 볼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이때의 집단적인 명상은 한달 뒤의 결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많은 학생들은 이 순간 이미 마음속에서 데모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진걸과 두 친구

이진걸(李鎭傑)의 별명은 곰이었다. 곰처럼 살이 찌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윈편이었다. 이 별명은 그의 곰 같은 성격에서 생긴 것이었다.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은 입술, 치뜨면 남을 멈칫하게 만드는 눈매, 컬컬한 목소리, 그러나 가끔씩 웃을 때는 황소 웃음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이웃에서는 앞과 밑만 바라보며 꼿꼿이 걸어가는 착실한 학생으로만 이진걸을 기억했다. 그의 아버지는 동생이 경영하는 작은 공장에서 상무로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말이 상무지 큰 기업체의 말단 사원정도의 수입밖에 없었다. 이진걸은 한때 가정교사를 하여 책 살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용하면서도 뒷힘이 세어 보이는 이진걸은 부산 동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학생이었다. 1977년 그는 부산 공대 기계과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는 달라져갔다. '동녘회'란 모임이 이때 부산대학교 안에서 만들어졌다. 동고등학교 출신의 남학생들과 동여고를 나온 여학생들이 순수한 친목모임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한 해쯤은 그런 성격의 서클로 활동했다. 이 모임의 성격을 바꾼 것도 1978년의 4·19선언문 사건이었다. '동녘회'회원 이성동이 주모자로 구속되면서 이 모임은 이념서클로 바뀌게 됐다.

모임의 주제는 미팅이나 놀러 다니는 일 따위에서 자유와 평등의 문제쪽으로 바뀌었다. 매주 한 번씩 그들은 서클 파크의 벤치에 모여 앉아 토론회를 가졌다. 장준하, 한완상, 백기완, 함석헌의 책들을 읽고 주제 발표를 한 뒤 토론을 벌이는 식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문제가 가장 자주 등장하는 테마였다. 이진걸은 고교 동기생인 부산 상대 학생 문보현을 통해 이상경, 이호철, 이상록 등 의식있는 학생들과도 자주 만나게 됐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상록, 이호철, 김종세는 그때 부산대학교 안의 의식화 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부산대학교와 바깥의 민주화세력을 잇는 끈이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이진걸은 YMCA강당에서 있었던 반정부 색깔이 짙은 강연회에도 두서너 번 나갔다.

이진걸은 1978년 겨울 서면의 한 책방에서 황선용을 만난다. 황선용은 서면서림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진걸은 황선용과 금새 친해졌다. 황선용은 가난한 집안에 외로운 학창 생활을 보냈다. 부산 금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시험에 낙방했다. 재수를 하고 있을 때 왼쪽 허벅지뼈의 3분의 1쯤이 썩었다. 이 썩은 뼈 대신 쇠판을 이어 붙이는 수술을 받고 그는 3년 동안 병상에 누워지내야 했다. 집안을 돕기 위해 친척이 경영하는 책방에 취직한 것은 1976년이었다. 친구가 별로 많지 않았던 황선용은 책이란 부담 없는 친구와 사귀게 됐다. 여기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남성철도 알게 됐다. 황선용은 이진걸에게 남성철을 소개했다.

세 사람은 자주 만났다. 그럴 때마다 현실 문제에 대한 비슷한 인식을 확인해 갔다. 세 사람은 우리나라의 권력 구조를 독점매판자본과 독재권력의 악수로 이해했다. 셋은 책을 통해서 익힌 현실 비판의식을 현실의 체험 속에서 검증해 보려고 애썼다. 민주화 운동가들의 재판에 자주 방청을 갔다. 신동엽, 황명걸, 김지하 등의 금시(禁詩)를 마흔 부 등사하여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진걸은 1979년에 들어서면서 전공 과목의 공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현실 비판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데 시간을 보냈다.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든다고 가정교사를 그만둘 정도였다. 이진걸은 황선용이를 만나면 '3학년을 그대로 넘기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여관에서 선언문 등사

그는 차츰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서는 갑갑해서 못 배길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문제를 일으켜 퇴학되면 공장 노동자로 일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일단 대학을 물러나면 화이트 칼러적인 직업을 단념하겠다고 작심했다. 1979년 9월 초순 이진걸은 언젠가는 쓸 선언문 초안을 만들었다. 이진걸은 선언문 초안을 완성한 며칠 뒤 서면 서림에서 황선용과 남성철의 만나 '한 번 일어나자'고 제의 했다.

둘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황선용은 '내년 4·19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나 이진걸의 열의가 너무나 굳은 것을 보고 두 친구는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해 버렸다. 이진걸은 며칠 뒤 이호철에게 계획을 털어 놓았다. 이호철은 자기도 사람을 구하고 있는 중인데 당장은 어렵겠다고 했다. 이진걸은 '동녘회'의 후배들을 동원할까 생각했다. 후배들을 퇴학의 길로 몰아 세우는 것은 선배의 입장에서 못할 일이란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10월 초순 세 음모자는 결행 날짜를 10월15일로 정했다. 13일은 토요일이었고 '동녁회'가 서클 파크로 모이는 날이었다. 이진걸은 10명쯤의 후배들을 불러놓고 당부했다.

'이것은 절대로 강요가 아니다. 너희들에게 피해도 안 줄 생각이다. 부탁할 것은 오는 15일 아침 7시쯤 이곳에 모여다오.'
선언문 등사 준비는 다돼 있었다. 황선용이 등사기를 가져왔다. 이진걸은 8절지 크기의 시험지 1천장을 사왔다. 남성철은 원지·잉크·출판을 가져왔다. 세 청년이 이렇게 해서 서면 서림에 모인 것은 10월 13일 밤 10시께였다. 여기서 세 사람은 시위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다시 검토해 보았다. 이진걸은 좋게 보아야 4, 50퍼센트라고 말했다. '실패해도 소금 구실은 할 것이다'고 세 사람은 서로를 위로했다. 황선용은 그때 왼쪽 허벅지의 골수염 수술자리가 도져서 재수술하기로 날짜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황선용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면 틀림없이 감옥으로 갈텐데 이런 몸으로는 견딜 수 없다고 걱정했다.

남성철과 이진걸은 '모든 것은 우리 둘이서 한 것으로 얘기하겠다.'고 안심시켰다. 남성철은 그날 낮 예비군 훈련을 받았는데 온 몸에 열이 나는 등 앓고 있었다. 남성철은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오늘밤만은 네가 이진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황선용을 설득했다. 황선용은 승낙, 남성철은 집으로 돌아갔다. 황성용과 이진걸은 등사기를 짊어지고 이날 밤 11시쯤 부산진구 전포동에 위치한 보림여관에 들었다. 미리 보아 둔 여관이 아니라 깨끗하게 보였기에 무턱대고 들어간 것이었다. 숙박부에는 적당히 지어낸 이름을 써넣었다.

선언문은 원지에다가 이틀 전에 써두었었다. 여관방에서 등사가 시작됐다. 처음 300장쯤은 잉크가 제대로 묻지 않아 못 쓰게 됐으나 나중에는 제대로 등사가 되었다. 900장쯤의 등사가 끝났을 땐 14일 새벽 4시께였다. 둘은 서면서림에 선언문을 맡기고 헤어졌다. 헤어질 때 황선용은 이진걸에게 몇 가지 충고를 했다. 부산대학교 신정문의 오른쪽 주택가로 내려가 시민들과 합세할 것, 교수들이 물리적으로 데모를 막으려 할 때는 폭력으로 대항할 것,

이진걸은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한 뒤 정오쯤 남성철을 만났다. 그리고는 둘이서 전포동 강남 여인숙에 들어갔다. 등사기구를 갖고 들어갔다. 오후 5시까지 둘은 할 일 없어 여관 방안에서 낮잠만 잤다. 이것은 황선용을 빼주기 위한 행동으로서 남성철이 이진걸과 함께 이 여관에서 등사를 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쇼였다. 경찰에 잡혀갈 때는 이날의 행동을 데모 모의로 속여 진술하기로 했던 것이다. 숙박부에 이름도 써넣으려 했으나 여관에는 숙박부를 내놓지 않았다.

이진걸은 여관에서 나와 친구 박모군으로부터 가방을 빌어 그것은 자기가 갖고, 자기 가방을 남성철에게 주었다. 남성철을 부산대학생인 것처럼 위장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은 선언문을 반씩 나눠 가방 안에 넣었다. 다음날(15일) 아침 7시 30분에 부산대학교 시계탑 밑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실패함으로써 성공

10월15일 오전 부산대
15일은 쾌청한 가을날이었다. 간밤에 이진걸은 꿈도 안 꾸고 깊게 잤다. 개운한 머리와 약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는 운명을 향해 나아갔다. 남성철은 약속대로 시계탑 밑에서 가방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걸은 남성철을 공대 2호관 앞에 남겨두고 미라보 다리를 건너 서클 파크로 갔다. '동녘회'의 후배 열 명이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걸은 선언문을 한 장씩 나눠주었다.

오전 10시에 도서관 앞으로 나오도록 당부한 뒤 내려오는데 고등학교 선배와 마주쳤다. 선언문 덩어리를 주면서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진걸은 남성철을 데리고 도서관 앞으로 갔다. 시험공부를 하러오는 학생들이 모여들 때가 됐는데 거의 보이지 않았다. 9시 40분까지 두 사람은 도서관 앞에서 기다렸다.

선언문에 적힌 도서관 앞 집결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앞으로 20분밖에 안 남았다. 이때 이진걸은 아주 기계적인 계산을 했다. 20분 동안 선언문을 뿌리면 그 선언문을 읽은 학생들이 10시까지는 도서관 앞으로 몰려 들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이진걸은 본관, 남성철은 도서관을 맡기로 했다. 이진걸은 본관 3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문리대, 법대, 사범대 강의실을 돌면서 그는 선언문을 나눠주었다. 그는 강의 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 앞으로 나가 강의용 탁자 위에 선언문을 뭉터기로 놓고 말없이 빠져 나오곤 했다.

1층 어느 강의실에는 맨 뒷구석에 있는 학생에게 30장 가량을 주면서 '이것 돌립시다. '고 부탁했다. 그 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눈치를 채고 앞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본관에서 이진걸은 상대로 뛰었다. 1층 강의실에 20장쯤을 던져주고 뒷문을 거쳐 벤치로 갔더니 학생 60명 가량이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진걸은 정신없이 선언문을 나눠줬다.

휴게실로 내려오니 시험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자들을 차지하여 꽉 앉아 있었다. 이진걸은 두 학생의 탁자 위에 선언문을 얹어두고 나와 운동장 스탠드로 달렸다. 그 날은 학군단의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때마침 교관이 없었다. 그는 스탠드에 앉아 있는 학군단 학생들에게 50장 가량을 주면서 옆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본관 잔디에서 10여장을 뿌린 그는 10시 직전 도서관에 당도했다. 이진걸은 지금쯤 도서관은 남성철이 뿌린 선언문으로 술렁이고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달려왔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당황한 이진걸은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남성철은 그때야 열람실에 선언문을 나눠주려고 가방을 열고 있었다. 이진걸은 선언문 반 뭉터기를 빼앗다시피 하여 갖고 내려와 1층 열람실의 학생들에게 돌렸다. 학생들을 동원하는데 돕겠다고 사흘 전에 약속했던 이호철과 김종세가 다가오더니 이진걸의 등을 툭툭 치면서 선언문 한 장씩을 받아갔다. 이진걸은 두 번째로 2층으로 올라가 행동이 느린 남성철로부터 또 선언문을 받아 내려와 1층에서 돌렸다.


'이제 무슨 반응이 있을 때가 됐다.'
이렇게 생각한 이진걸이 도서관 앞에 나섰을 때는 10시 20분께였다. 잔디 벤치에는 '동녘회'의 후배 학생들만이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진걸은 본관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도 학생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진걸과 남성철은 '일이 틀렸다.' 고 생각했다. 둘은 터벅터벅 옛 정문을 지나 학교 밖으로 나왔다. 길가 술집에 둘은 들어갔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 술집 변소에 남성철은 남은 선언문을 뭉터기로 처박아 넣어 버렸다.

패잔병 꼴이 된 남성철과 이진걸은 술집을 나와 서면으로 갔다. 어느 다방에서 황선용을 불러냈다. 황선용은 '유신대학인데 제대로 되겠느냐?'고 비꼬는 말투로 둘을 위로했다. 셋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변소에 나머지 선언문을 구겨 넣어 버렸다. 황선용은 1만 9천 원을 꺼내 남성철에게 주면서 둘이서 갈라 쓰라고 했다. 셋이 헤어진 것은 오후 2시께.

이진걸이 집에 당도하니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벌써 이진걸의 친구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진걸은 '오늘 잡혀 갈 것이다.'고 믿었다. 그는 판매가 금지된 책들과 선언문과 갖가지 보고서 및 동아투위 소식들을 묶어 쌌다. 그리 곤 부산대학교 앞에 있는 태백산맥 서점 주인 노승일에게 이 '불온문서'를 맡겼다. 후배가 와서 찾아갈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이진걸은 이날 오후 해운대 백사장으로 갔다. 바다는 가을 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모래에 반사된 햇볕은 뜨겁게 살갗에 부딪쳐갔다. 그는 전화로 남성철을 다시 불러냈다. 둘은 백사장을 거닐면서 앞으로의 행동을 의논했다. 잡혀갈 때까지는 모른 척 지내기로 했다. 그날 오후 부산대학교 부근의 술집에는 유달리 학생들이 많이 붐볐다. 탁자를 치며 울분을 터뜨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느 놈이 선언문만 뿌려 놓고 자기만 빠져 달아났을까. 속았다. 속았어!'

이들은 리더의 출연을 기다리며 도서관 앞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끝내 배신감을 맛보며 발길을 술집으로 돌린 학생들이었다. 이진걸은 실패함으로써 성공했다. 이진걸의 실패는 학생들에게 울분과 안타까움을 심어 주었다. 그와 함께 내일은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 주었다. 많은 부산대학생들은 내일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놓고 있었다. 이진걸의 가장 큰 역할은 부산대학생들의 가슴마다에 쌓여 있던 인화물질을 기대감과 울분으로 바싹 건조시킨 점이었다. 학생들은 웅크리고 기다렸다. 인화물질에 불씨를 던질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