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수리론의 내막

= 15일 오후 공화당사

이진걸이 실의에 빠져 해운대 백사장을 거닐고 있을 때 서울 남산에 있는 공화당사 의장실에는 매주 한 번씩 있는 공화·유정 합동조정회의가 열렸다. 당시 유정회 대변인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정재호(鄭在虎)는 지금 이렇게 증언한다.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가 사회를 보았는데 상기된 표정으로 개구일성 '오늘은 야당의원들의 사퇴서 처리 문제(필자 주 :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제명에 항의, 10월 13일에 사퇴서를 국회에 냈었다)로 의제를 압축해서 이야기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발언을 하자'고 했다. 마주보고 앉은 순서에 따라 발언이 진행됐다. 구태회(공화당 정책위의장)→한태연(유정회 정책위의장)→김용태(정무장관)→고재필(정무장관)→최영희(유정회 총무)→신형식(공화당 사무총장)→오유방(공화당 대변인) 등등의 차례로 발언이 이어졌다. 탁구공 치듯이 발언이 오가면서 내용도 강경으로 치달았다. 거의 전부가 사퇴서의 선별수리를 주장했다. '가지 몇 개만 자르면 된다'는 얘기도 나왔다.

나에게 발언 차례가 왔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때의 말들을 기억한다. '지금 우리가 현미경으로 신민당을 들여다보듯 주류·비주류를 식별하려고 하는데 대세의 흐름을 놓치고 있다. 국민이 선택한 사람을 우리가 선별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나는 반대다' 박준규 의장서리는 놀란 듯 '정대변인은 『조선일보』고십에 난 것이 진심인가, 지금이 진심인가' 라고 했다. 나는 '반대'를 거듭 확인했다. 김용호 부총무도 약간 애매한 말투였지만 반대론을 폈다.

박의장서리는 토의 결과를 공화, 유정 두 대변인이 문안을 통일하여 발표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선별수리를 주장하는 강경론이 압도적이었다는 발표를 기자들에게 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12대 1.5라는 표현을 썼다. 강경론 12명에 온건론은 나와 김부총무 두 명이란 것을 그런 식으로 암시했는데 김부총무의 소신이 애매하여 0.5로 매긴 것이었다. 당시 나는 대변인이란 직책 때문에 악역을 맡아야 했다. 뒤에는 선별수리론이 부산·마산시민들을 격앙시켰다 하여 욕을 많이 먹었는데 실상은 그렇게 됐었다.'

당시 공화당 의장서리 박준규도 나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 김재규 부장이 강력히 부탁을 해서 일부 당직자들의 반발을 꺾고 선별수리 방침을 결정한 것이었지요. 김부장은 대(對)야 압력용으로 필요하니 선별수리 방침을 발표해 달라고 강권해 왔었습니다.'

정광민 등사에 열중하다

= 1979년 10월 15일 정오께

정광민은 학교에 당도했다. 단박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이진걸의 격문을 읽고 도서관 앞에 모였던 학생들은 하나씩 흩어지고 있었다. 정광민은 같은과 황헌규와 경영과 3학년 박준석을 만났다. 세 학생은 학교 매점으로 갔다. 정광민은 '이젠 우리가 나설 때다'고 말을 꺼냈다. 정광민은 이 말을 하고 나니 오전 내내 답답하던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두 친구도 찬동하는 듯했다. 세 사람은 선언문 인쇄방법부터 의논했다. 그들은 등사판을 살 돈을 갖지 못했다. 친구들로부터 빌어야 할 판이었다.

광민은 김종세 생각이 났다. 이런 일에는 꽤 경험이 있을 것 같은 종세를 만나러 도서관으로 다시 올라갔다. 김종세는 정광민에게 등사기를 구해 주는 대신 등사판을 못 구할 때 최후 수단으로 이용해보라고 가는 철망을 이용한 간이 등사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정광민은 내일 열 시에 결행한다고 일러주었다. 광민, 헌규, 준석 이 세 사람의 가장 큰 당면 과제는 용기도 아니고 데모 이후의 처벌도 아니었다. 등사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오후 다섯 시쯤 황헌규는 집에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렸다. 광민과 준석 둘은 등사기를 찾아 나섰다. 광민은 동급생 전도걸을 생각해냈다. 그의 아버지는 국민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줄판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전도걸은 정광민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안경을 쓰고 한쪽 귀의 청력이 약한 도걸은 자신을 따뜻하게 이해해 주는 광민과 잘 어울렸다. 학급에선 두 사람이 단짝으로 통했다.

연산동의 도걸이 집에 찾아간 두 사람은 도걸에게 행동 계획을 설명하고 줄판을 빌었다. 두 사람이 나오려는데 도걸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그의 어머니가 걱정스런 눈초리로 '저녁도 안 먹고 어디 가느냐' 고 말렸다. 전도걸은 무척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세 음모자는 등사기를 구하러 준석의 친구를 찾아 나섰다. 부곡동의 전정욱은 부산대학 지질학과 3학년이었다. 그는 얘기를 다 듣고 성공을 빈다면서 등사기와 등사잉크를 건네주었다. 세 학생이 택시로 정광민의 집에 도착했을 때 텔레비전에선 저녁 일곱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 15일 밤·16일 새벽 정광민의 다락방

광민은 라면 세 봉지를 사 끓여 두 친구와 나눠 먹었다. 그리곤 2,200원을 꺼내 8절지 시험지 400장과 원지 석 장 및 줄필을 사왔다. 광민은 엿새 전에 써둔 선언문 초안을 찾아내 원지에 옮겨 썼다. 장광민은 등사판을 밀어본 경험이 없었다. 잉크가 골고루 묻지 않은데다가 롤러를 서툴게 밀어 등사는 엉망이 됐다. 글자를 해독할 수는 있는 것은 전체의 5분의 1도 안됐다. 태반은 글자 모양도 알 수 없었다. 정광민은 나중에 수사를 받을 때 이 엉망진창의 선언문을 보고 원안을 기억으로 되살려 새로 써내야 했다.

몇 번이고 다시 밀고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밤 10시쯤 광민은 앞마당으로 내려와 긴장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혔다. 그들이 작업을 시작한 곳은 반 평짜리 다락방이었다. 정광민은 부모가 관광여행길에 올라 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학교 6년 생인 여동생만 있다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셋방살이하는 사람이 알면 골치 아프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셋방살이하는 남씨란 사람은 그러나 광민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단박 눈치를 챘다. 마당에 나온 광민을 붙들고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광민은 걱정할 것 없다면서 다락방으로 다시 기어올라갔다.

전도걸과 박준석은 이때 바둑을 두고 있었다. 정광민이 들어오자 박준석은
'어젯밤에도 집에 안 들어갔는데 오늘은 돌아가야겠다' 고 일어섰다.
전도걸도 따라 일어섰다.
'임마 너까지 가면 광민이 혼자 어떻게 해!'
준석이는 도걸에게 의리 없는 친구라는 눈총을 주면서 원망했다. 정광민도 '올 때는 도와주러 온 것 아닌가' 고 불평했다. 기어코 가겠다고 전도걸은 마당까지 따라 나섰다. 정광민은 전도걸을 두 번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자칫하다간 주먹다짐이 벌어질 형세였다.

'좋다. 문제가 생기면 나는 이곳에 없었던 걸로 해다오.'
도걸이 꺾인 것이다. 준석을 보낸 두 친구는 다시 등사에 들어갔다. 새벽 4시까지 광민은 롤러를 밀고 도걸은 종이를 끄집어내는 식으로 선언문 200장을 등사했다. 광민의 교련복 바지는 서커먼 등사 잉크투성이가 됐다. 광민과 도걸은 잉크 묻은 손을 씼었다.

둘은 다락방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고 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두 시간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일어났다. 전도걸은 집으로 가면서 '데모할 때 꼭 가겠다' 고 싱긋 웃어 보였다. 정광민은 가방에 선언문 300장을 접어 넣고 집을 나와 아침 8시에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는 역사와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선언문 전문

정광민이 쓴 선언문의 전문은 이러했다.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 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위하고 한국의 장래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 보게나. 특히 고도 성장 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 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용이 그들의 기업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기 보다는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 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 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했던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 임금 외의 값싼 상품 공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저임금을 지불하고서도 그것이 과연 전체 국민의 후생을 증대시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극심한 소득 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 보라! 그 부조리는 영세한 서민층에게 물질적 빈곤만을 강요하였을 뿐아니라 따사로운 일요일 한 낮에 화목하게 모여 담소할 만한 시간도 없이 그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전 가족이 마치 전쟁을 하듯이 공사장을 전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가정이 있으며 무슨 윤리가 깃들 수 있겠는가!

이러고도 정권의 아부배들은 현실을 왜곡한 채 독재자의 통치력을 입이 닳도록 찬양할 수 있겠는가! 난 앞의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자, 공리를 앞세우는 사회풍토보다는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내세우는 졸렬한 사회상, 이런 불합리하고 불전건한 사회에서 예술이며 전반적 문화수준이 향상될 리 없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물질·정신 양면으로 낙후된 후진국이라는 누명을 덮어쓴 채 강대국에 질질 끌려 다니는 초라한 민족의 모습. 그러나 우리는 좌절할 수는 없다. 점진적으로 이런 문제를 개선해 나가야하는 것이다.

비단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 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급변하는 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만든 법이라고 하지만 교묘한 미명하에 가면을 덮어쓰고 국민을 능욕하는 술책이며 다수 선량한 지식인 내지 모든 우국지사에게는 유사시 총이며 칼인 것이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의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에 있는가. 비록 이성이 진리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너와 내가 추구하는 진리와 자유는 이성적 결단에 의해서만 획득되어지는 것이며 이성은 현 존재로 하여금 모험을 하게 하지만 투기를 시키지 않으며 현존재로 하여금 소모시킬지언정 낭비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 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사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폐정개혁안>
1. 유신헌법철폐
2. 안정성장정책과 공평한 소득 분배
3. 학원사찰중지
4. 학도호국단폐지
5. 언론·집회·결사의 완전한 자유 보장
6. YH사건에서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7. 전국민에 대한 정치적 보복 중지

모든 효원인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선언문의 문장은 조리가 없으나 자극적이며, 정광민의 가족 체험을 그대로 옮긴 듯한 대목도 있다. 선언문에 나타난 그의 생각은 많은 경제과 학생들이 가졌던 후진국 경제론과 통하고 있다. 정광민도 이진걸처럼 특정한 정치적 사건을 예로 들지 않았고 어떤 정당을 편드는 내용도 담지 않았다. 선언문의 분석으로는 정광민은 박정권의 경제정책과 권력구조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과 YH 사건이후에 잇따라 터진 말기적인 정치 탄압의 자극을 동기로 하여 행동한 것 같다.

감 못 잡은 경찰

정광민의 행동은 이진걸보다도 더 비조직적이었다. 이진걸처럼 격문을 나눠줄 인맥도 갖지 못했다. 똑똑한 동지도 없었다. 광민은 전도걸 이외에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학생운동의 경험을 가진 친구는 더더구나 없었다. 기껏 김종세에게 학생들을 도서관 앞에 모아 달라고 부탁해 놓은 것이 유일한 사전 포석이었다. 용기는 있으나 너무 순진하고 끈기는 있으나 치밀하지 못한 정광민은 자기 스타일대로 일을 해 나갔다. 그것은 내키는 대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때의 부산대학교에 대한 정보공작의 밀도로 미뤄 학급 단위 이상의 조직적 시위는 애당초 될 일이 아니었다. 학생회 조직을 통해 데모를 벌이던 낭만의 시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학교의 호국단 간부 학생들은 그때 선수단 독려란 명목으로 대전에서 열리고 있었던 전국 체전 시찰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진걸의 실패가 있었는데도 바로 그 다음날 정광민이 두 번째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건이 소수 그룹의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정보망에는 이런 송사리들은 잘 걸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부산대학을 관할하는 동래경찰서는 10·16 사건 뒤 다분히 자기 변명을 꾀한 보고서 -「부대 학원소요 사태현황」을 펴냈다. 서른두 쪽으로 된 이 보고서에서 경찰은 이진걸이 격문을 뿌리기 사흘 전에 특수 정보를 손에 넣었었다고 주장했다.

10월 12일 오후 7시께 부산대학교 신정문 앞 정류장에서 법대 배지를 단 두 미남형 학생이 버스에 탔다.
'낭독은 누가 하지?'
'아무도 없으면 내가 하지 .'
두 사람의 대화를 뒷자리에서 듣고 있던 어떤 학생이 다음날 밤 아홉 시께 경찰에 첩보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동래경찰서 학원담당 여모 경사는 부대 정보공작의 팀장인 정보1과 2계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경찰은 14일에 상담관실에서 학생과장 이충걸 교수와 상담관실 홍준섭 실장을 불러 이 첩보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학교에선 단과 대학의 학생과장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는 데 그치고 중요한 곳에는 사람을 내보내지 않아 이진걸의 격문 뿌림을 막지 못했다고 이 보고서는 사건 발생의 책임을 학교에 떠넘겼다.

경찰이 얻었다는 첩보는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첩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뜬소문처럼 경찰이나 상담관실에 들어와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었다. 경찰이 이진걸 편으로부터 기습을 당했다는 것은 격문이 뿌려진 15일 밤 늦게까지도 이진걸을 용의선상에 올려놓지도 않았다는 사실로도 입증되고 있다. 경찰은 이런 문제가 생기면 일단 데모 전과자나 요주의 학생들의 짓으로 보고 그들의 움직임을 뒤쫓는 버릇이 있다. 이진걸은 이름 없는 투사였으므로 경찰의 1차 수사대상에는 끼지도 않았던 것이다.

부산대학내 정보의 백과사전격인 장전파출소장 김의관 경위는 15일 오후 5시쯤 생각에 골몰하면서 옛 정문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저런 격문을 뿌릴만한 학생들은 손바닥 보듯 환히 알고 있는 그였지만 오늘 체크해본 바로는 뚜렷한 혐의점을 누구한테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부산 공전학생으로부터 데모 제의를 받았다가 거절 자술서를 쓴 적이 있는 정광민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오후에 상대 학생에게 부탁하여 총대를 시켜 정광민의 동태를 알아보게 했다.

돌아온 대답은 정광민은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총대가 속임수 보고를 했던 것이다. 동래경찰서는 그날 일단 윤명학 등 두 학생을 격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 소재 수사에 들어갔다. 법대 4년생인 윤명학은 버스 안에서 '아무도 안 읽으려면 내가 읽겠다'고 말한 문제 학생으로 지목됐고 공대 기계과 학생 김모군은 평소 불순한 언동을 하고 다닌다고 찍혀 있던 차였다. 김의관은 그러나 이 두 학생은 이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사 100여 명 잠복

생각에 잠겨 캠퍼스에서 파출소 쪽으로 터벅터벅 내려오는 김의관의 등뒤에서 '형요! 교수가 저를 보자는데 괜찮겠습니까? ' 라고 한 학생이 물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부산대학교 출신인 김경위를 형이라고 부르는 학생들은 많았기 때문에 그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하! 지도교수들이 자기 학급의 문제 학생들을 점검하기 시작했구나. 김의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뭐 잘못한 것 없으면 괜찮겠지' 아주 의례적인 대답을 내뱉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 학생과 헤어지자 김의관은 갑자기 학생이 수상쩍게 생각들었다. 다음날 아침 김의관은 학교로 올라가 문제 학생 카드를 뒤지기 시작했다. 달걀처럼 살찐 얼굴의 어제 그 학생 사진을 찾았다.

'김종세, 수학과 3년, 지난 4·19때 도서관 앞에서 '공부만 많이 하면 최고냐'고 다른 학생들을 선동한 적이 있음. 기러기회 회장을 지냈고 YMCA에 출입이 잦음. 기독교회 청년회원……'

김의관은 무릎을 쳤다. 이놈이다! 어제 도서관 근처에서 얼쩡거렸고 틀림없이 격문사건과 관계가 있을 게다. 그는 김종세를 찾아 다녔다. 이진걸의 격문이 뿌려진 15일 오후 부산대학교는 모든 직원들에게 비상 근무령을 내렸다. 두 명씩 조를 만들어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도서관, 시계탑, 식당, 학생회관들을 돌게 했다. '학생들이 순찰을 눈치챌 수 있도록 거리낌없이 행동하라.' 고 학교 당국은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학교에서도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도서관 직원 강태원은 캠퍼스를 한바퀴 돌아도 아무런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또 불발로 끝나는구나고 그는 생각했다.

이진걸의 격문 사건을 놓고 학교와 정보기관은 실랑이를 벌였다. 경찰은 학교당국이 문교부에 사태보고를 올리는 데만 정신을 앗겨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격분했다. 학교에서 이 사건은 외부 불순 분자가 들어와 뿌리고 간 것이라고 판단하자 경찰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억지라고 비난했다. 모 기관의 학원담당 조정관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앉았다가 문교부가 서울의 본부에 통보, 본부에서 부산지부로 불호령이 떨어져서야 사건을 알고 당황하기도 했다. 교수들은 그들대로 자기 학과생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

김종세의 지도교수는 16일 등교한 종세를 불러 교수방에 가두어 버렸다. 종세는 경찰이 그를 찾아 야단인 것도 모르고 교수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16일 아침 부산대학에 파견돼 있던 경찰은 전날의 비상근무체제를 풀지 않고 경계에 임했다. 간부 경찰관 네 명과 부하 경찰관 105명을 사복차림으로 아홉 군데에 배치했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두 곳의 정문과 도서관 앞엔 스무 명씩 깔아 특히 신경을 썼다. 데모 참여 학생을 기소했을 때 공소 유지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녹음과 촬영 임무를 띤 네 명의 전문 직원도 배치했다.

뛰어든 불덩어리

16일 오전 9시 30분 부산대 경제과 강의실
10월 16일 오전 9시 10분 정광민은 상대 앞 벤치에 앉았다. 준석이와 만날 시간이었다. 마침 벤치 앞으로 동급생인 박병근과 박희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광민은 그들을 불러 세워 '조금 있다가 교실로 뛰어 들테니 분위기를 좀 잡아 달라' 고 부탁했다. 준석이는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정광민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상대 206호 강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첫째 시간 수업이 끝나 둘째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경영과 2학년 학생들 가운데 그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1학년때 친하게 지냈던 엄태언에게 정광민은 선언문 마흔 장쯤을 슬며시 건네주면서 빨리 나눠주라고 눈짓을 했다. 복도에서 정광민은 또 무역과 2학년 이성식을 만나 선언문 석 장을 주었다.
'무역과를 부탁한다'
'한 번 해볼께'

306호 강의실에는 경제과 2학년생 마흔 명쯤이 첫째시간인 화페금융론 강의가 일찍 끝나 앉은 채 중간 시험에 대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광민은 뒷문을 통해 뛰어들어왔다. 희곤과 병근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광민이 들어오는 것과 때맞춰 '우-'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다른 학생들도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 정광민은 가방에서 선언문을 꺼내 책상들을 돌면서 나눠주었다. 그는 이제 흥분 상태에 빠졌다. 나중에 자신이 교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 내지를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성모는 광민이 강단으로 뛰어 올라 두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다른 곳과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뛰어 나갑시다.'
'나가자!'

마흔 명의 학생들은 우루루 몰려나갔다. 주저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1970년대를 살아온 젊은이들의 가슴마다에 쌓여 있었던 분노와 증오심, 1979년에 터져 자빠진 독재 권력의 갖가지 말기 증상, 그것이 조성한 발화 환경, 하루 전 이진걸의 실패가 가져온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뒤엉켜 인화물질을 이루었고, 그 한복판으로 정광민이란 불덩어리가 뛰어든 것이었다. 분노의 응어리는 폭발했다. 팽팽하게 부풀어있는 풍선에 광민은 바늘을 찌른 셈이었다.

그 에너지가 다 빠져 나갈 때까지 사태는 자연법칙에 따라 물리적 운동으로 전개될 것이었다. 박현호, 여성모, 이덕만, 전도걸 등등 경제과 2학년생들은 누군가가 불을 당겨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경제과 뿐 아니라 상대가, 공대가, 부산대학교 전체가 그런 기다림속에 있었다. 경제과 2학년 학생들은 경영과206호실을 지나치며 합류를 호소했다. 경영과 학생들도 엄태언으로부터 선언문을 받아 책상 위에 놓고 지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뛰쳐나왔다. 무역과, 회계학과 학생들도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가 한 덩어리가 됐다. 306, 206호 강의실이 들어있는 인문사회학관 건물앞 에서는 100명쯤의 사람덩어리가 뭉쳐졌다. 광민은 선언문 뒷면에 검은 사인펜으로 '자유'라고 휘갈겨 썼다. 속이 텅빈 가방은 옆에 있던 하창우에게 맡기곤 이 '자유'를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앞장을 섰다. 여성모의 눈에는 광민이 고고를 추는 것 같았다. 흥에 겨워 어깨까지 흔들어 가면서 광민은 빠른 걸음으로 학생들을 상대 앞까지 이끌어 갔다.

이곳에서 노래가 터져 나왔다. 부산 데모의 주제가가 된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에서 '통일'을 '자유'로 대치시켜 부른 노래였다. 상대에서 미라보 다리를 지나 그들은 도서관으로 나갔다. 앞장선 광민을 하창우와 안병민은 호위하듯 양쪽에서 끼고 수시로 도움말을 해 주었다. 중간 시험을 앞두고 도서관 앞에는 천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앞뜰의 잔디와 벤치에도 200명쯤이 흩어져 있었다. 데모대는 계단을 올라가 도서관 잔디밭에 들어갔다.

'모두 일어나자'
간간히 이런 고함 소리가 데모대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선구자」, 교가, 애국가를 계속 불렀다.
금정산 기슭에 새벽별 닦아노니
하늘도 넓어지고 포부도 높아져라
진리와 이상으로 불타는 젊은 학도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

전율로 부른 교가

1956년 그때 문리대학장이던 극작가 한효동이 작사, 박태준이 작곡한 부대교가는 학생들이 그렇게 즐겨 부르는 편은 못 됐다. 그러나 잔디밭에서 교가를 합창할 때 많은 학생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거렸다. 무역과 김창수는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란 대목을 부를 땐 등에 소름이 끼치면서 온몸과 가슴의 감동이 전율 속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박기채 총장, 이충걸 학생처장, 신태곤 상대 학장, 오종석 상대 교무과장이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달려온 것은 이때였다. 총장은 정광민의 어깨를 툭툭 치며 타이르듯 '이제 그만 내려가라' 고 했다. 오교수는 광민의 허리띠를 붙들고 뒤로 끌어냈다. 큰 나무 밑으로 끌고 간 오교수는
'이것까지는 내가 책임진다. 학장실로 가자'
광민은 말을 바로 받았다.
'이젠 어쩔수 없습니다. 2, 3년 살 각오를 하겠습니다. 끝까지 하겠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대열로 돌아왔다.

상대 앞에서 100명으로 시작됐던 데모대는 잔디밭에서 300명쯤으로 불었다. 도서관 안에 있던 학생들도 성탄절 아침의 성가대처럼 「봉선화」「선구자」를 우렁차게 불러대는 동료들을 찾아 한두 명씩 뛰어나오고 있었다. 주저하면서 구경만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도서관 앞에 있는 공대 교실 옥상과 베란다에는 학생 수백 명이 올라가 구경했다.

형사들의 체포작전이 휘발유 끼얹은 듯

= 16일 오전 10시 부산대 도서관 앞
데모대는 도서관 앞에 서서 10분쯤 노래만 계속 했다. 김창수는 이러다간 노래만 부르다가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힘차게 시작된 시위가 모멘텀을 잃고 흐지부지 될 것만 같았다. 노래만 부를 뿐 아무도 지휘를 하려 들지 않았다. 아침 여덟시께부터 사복을 입고 도서관 앞에 배치돼 있던 부산진 경찰서 소속 이성희 형사는 서서히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스무 명의 잠복형사들은 사태가 너무 빠르게 전개돼 가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학생 데모는 초동단계에서 깬다는 것이 원칙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깨고 들어갈 만할 틈이 전연 보이지 않았다. 몇몇 형사들은 학생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학생! 이러면 안돼!' 라고 말려 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서면 근방의 소매치기 소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30세의 이성희 형사는 김성수 형사의 팔을 툭치며 '이제 깨어 버리자' 고 속삭였다. 그때 정광민은 준석으로부터 선언문을 한 장 받아들고 도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열람실을 돌아다니며 아직도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우리 일어납시다.' 고 소리쳤다. 광민이 다시 잔디밭으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두 형사는 학생들을 헤집고 광민을 향해 뛰쳐 들어갔다.

목표지점에서 도착하여 이형사가 광민의 멱살을 잡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학생들에게 둘러 싸여졌다. 김창수는 한 형사의 뒷덜미를 붙들고 늘어졌다. 누군가가 면도칼이 아니면 만년필촉 같은 날카로운 쇠붙이로 이형사의 손바닥을 그었다. 학생들은 우루루 달려들어 욕설을 퍼부으며 두 형사를 차고 밟고 했다. 잔디밭 가장자리로 몰린 두 형사는 그만 높이 3미터의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창우는 두 형사와 뒤엉켜 같이 굴렀다. 이 바람에 엉덩이를 다쳤다.

두 형사가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자 한 이 체포 시도는 노래만 부르고 있던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꺼져가던 열기에 휘발유를 부은 꼴이 됐다. 학생들은 비로소 외부의 위협을 느끼게 됐다. 교수들의 설득과는 질이 다른 대결의 때가 왔음을 알았다. 두 형사의 행동으로 자극 받은 구경꾼 학생들도 한꺼번에 데모 대열에 끼여들었다. 도서관 안에서도 학생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형사의 기습은 시위대열을 300에서 1천명으로 불어나게 했다. 저절로 다섯줄의 어깨동무 대열이 이뤄졌다. 대열은 계단을 내려가 상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꿈틀꿈틀하는 용의 몸뚱아리처럼 대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뒤늦게 달려온 학생들이 잇따라 이 흐름에 말려 들어갔다. 여학생들도 끼여들었다. 데모에는 소극적이게 마련인 복학생과 4학년 학생, 심지어 대학원생들까지 합류했다. 몇몇 교수들은 대열과 같이 뛰면서 학생들을 잡아당겼으나 오히려 학생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대열은 아스팔트 산책로를 따라 상대를 지나 신관을 한바퀴 돌고 스탠드를 가로질러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데모 대열은 이젠 2천명쯤으로 불었다.

'유신'
'철페'
처음으로 구호가 터져 나왔다. 시위 대열은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다. 교련 수업을 받고 있던 ROTC 학생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데모 대열은 신정문을 향해 나갔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철문 바깥엔 스파르타 병정들처럼 방패와 방석모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농구골대를 밀고와 신정문에 이르는 비탈길로 굴렸으나 쇠문은 끄떡도 안 했다. 보도에 깔린 붉은 보판을 깨어 경찰 대열에 집어던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사진 서클 소속의 한 학생은 데모 광경을 찍으려다가 봉변을 당했다.

학생들은 정보형사로 착각 카메라를 빼앗아 필름을 빼버렸다. 그러나 촬영을 맡은 두 형사는 옥상에서 망원렌즈로 데모 주동자와 앞장선 학생들을 모조리 찍어대고 있었다. 도서관 앞에서 진압에 실패한 사복 형사대 100명은 이때 신정문과 구정문에 다시 집결, 학생들의 외부 진출을 막으려는 제1차 저지선을 폈다.

블랙 마리아의 추격

= 16일 오전 10시 15분 부산대 신정문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학생들이 데모에 끼여든 것은 아니었다. 운동장에서 스크럼을 짜고 돌고 있는 2, 3천명의 학생들을 스탠드나 교실에서 구경하고 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들은 데모의 열기에 아직 충분히 데워지지 않아서 또는 한사코 말리는 교수들에 못 이겨 대열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중간시험 공부가 더 급하다고 생각했거나 데모 뒤의 보복이 두려워 행동을 결정 못 짓고 엉거주춤한 채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많은 방관자들을 참여자로 몰아 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전 10시 15분께 신정문 바깥에서 동래경찰서장은 진압부대의 캠퍼스 돌격을 명령했다. 이 명령은 관할서장의 재량권에 속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학생 데모 진압 제1원칙은 데모를 그 발생의 첫 단계에서 원천적으로 분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장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 결정을 내렸다. 맨 앞장을 선 것은 페퍼포그를 뿌리는 검은 지프차였다. '블랙 마리아' 란 별명이 붙은 이 차는 하얀 개스를 내뿜으면서 교정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탱크 위를 따르는 보병들처럼.

학생 대열은 매운 개스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재치기를 터뜨리고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그들은 우루루 물러났다. 운동장으로 교내도로로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대항했다. 시계탑 밑의 보도에 깔린 보판을 빼내 가스차에 던졌다. 유리창에 철망이 쳐져 있어 보판을 맞고도 끄떡도 않자 보판을 깨어 조각으로 만들어 던지기도 했다. 잘못 던져 앞의 학생이 얻어맞는 수도 생겼다.

학생들이 대항하자 경찰은 MPG 최루탄 발사기를 쏘고 사과탄을 던졌다. 사과탄은 수류탄처럼 생긴 최루탄으로 던지면 3초 뒤에 공중에서 터지도록 된 것이다. 흰 개스 최루탄의 폭음, 학생들의 고함 소리로 캠퍼스는 삽시간에 작은 전장으로 바뀌었다. 이때 캠퍼스로 들어온 경찰은 585명이었다. 데모대를 완전히 해산시키기에는 모자라는 병력이었지만 학생들을 자극하여 거대한 분노의 덩어리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블랙 마리아는 운동장으로 들어가 달아나는 학생들을 뒤쫓았다. 너무나 집요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구경하고 있던 지질학과 이만규는 '저러다간 학생들이 차에 깔려 죽겠다'고 소리치며 데모대열로 뛰어들었다.

달아나는 어느 학생이 갈 지자를 그리며 블랙 마리아의 추적을 뿌리치려고 해도 지프차는 스탠드 바로 밑까지 깔아 죽일 듯 그 학생을 몰아갔고 학생들은 야유를 보냈다. 사학과 졸업반인 최현주는 '이럴 수가 없다'고 치를 떨었다. 최의 학급은 운동장에서 우우 하는 함성이 터져 나올 때까지 수업을 받고 있었다. 교수가 바깥에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하자고 했으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매운 최루개스는 학생들을 행동으로 몰아세웠다.
'지금이 공부할때냐?'
학생들은 교수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몰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