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일 오전 10시 30분 부산대 본관
교내 보도를 통해 본관 정문쪽으로 경찰들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뒷걸음쳐 온 학생들은 본관 1층 주변에 몰려섰다.
'모두 본관으로 들어가라!'
경찰은 경고방송과 동시에 최루탄을 쏘았다. 2,3층의 유리창이 최루탄을 맞고 박살이 났다. 유리조각이 좌르르 우박처럼 떨어졌다. 학생들은 본관으로 피해 들어가 창문을 통해 경찰에 욕을 퍼부었다.
'창가에 서지 말라'
경찰의 두 번째 최루탄 세례가 유리창으로 날아왔다. 와장창와장창, 곳곳에서 창문이 깨지고 복도는 최루개스로 뒤덮였다. 최현주는 캠퍼스란 성역이 겁탈당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결혼을 두달 앞둔 사학과 졸업반 김원산은 데모에는 애당초 별관심이 없었다. 군대에 갔다왔고 나이도 스물여덟 이라 학원 자유의 문제보다는 졸업후의 취직문제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도 캠퍼스가 초록빛깔의 집단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 없었다. 그 분노는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도 데모대열을 향해 뛰었다. 많은 교수들도 모멸감을 느꼈다. 몇분 전 까지만 해도 '너희들이 무얼 아느냐'고 데모하는 제자들을 꾸짖고 있었던 교수들은 이젠 학생들과 마음속에서 같은 편이 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들을 말리는 교수들에게 별다른 존경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패의 학생들은 구경하고 서 있던 음악과의 어느 교수를 끌어들였다. 같이 팔짱을 낀 한 학생은 '선생님 같이 데모합시다. '면서 끌고 갔다. 이 교수는 '이거 왜 이래'라고 소리쳤지만 학생들과 같이 뛰는 꼴이 됐다. 얼마쯤 끌고 가던 학생들은 교수를 풀어주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공대의 어느 교수는 신정문을 가로막고 서서 학생들에게 해산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얼굴을 잘 아는 학생이 데모대 속에 보이자 그를 잡으러 들어갔다. 학생들은 욕설을 하면서 교수를 밀어내 버렸다. 경찰의 캠퍼스돌격은 방관하던 학생들을 참여자로 참여자를 더 용기있는 시위자들로 만들었다. 그것은 부산대학교 학생과 교수들을 한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이 교정진압작전이후에는 막는 쪽과 외치는 쪽이 있을 뿐이었다. 방관자의 설 땅을 없애버린 것은 바로 경찰이었다.

무너진 블록담을 뚫고

경찰의 진압작전은 잠시 성공하는 듯했다. 정문까지 진출했던 데모 학생들은 본관쪽으로 패주했다. 경찰진압부대는 보도를 따라 캠퍼스를 한바퀴 돌면서 학생들을 뿔뿔이 흩어버렸다. 경찰은 운동장에 재집결했다. 10여명의 경찰관이 팔과 다리에 돌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사기는 왕성한 편이었다. 경찰은 무릎위로는 거의 완전무장을 했기 때문에 날아 온돌을 맞고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낮게 날아온 돌조각들이 무릎 밑을 때릴때는 별수없이 당해야 했다.

학생들은 경찰이 일단 운동장으로 물러나자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문창회관앞에 선 700명 남짓한 무리가 모였다. 이 무리는 구정문쪽으로 행진했다. 구정문은 신정문에는 남쪽으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나갔다. 체육관·도서관·본관에 몸을 피했던 학생들이 다시 쏟아져 나와 이 대열에 합세했다. 이때 경제과의 어느 학생은 본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데모대열을 구경하고 있는 마지막 방관자들에게 외쳤다.
'역사를 두려워하라!'
이 구호는 아마 부산 데모를 통해 나온 모든 구호 가운데 가장 수준 높고 준엄한 것이었으리라.

대열이 구정문으로 꺾이는 모퉁이를 돌 때 옆에 붙은 공대 강의실에서 공대생들이 무더기로 뛰어나와 합류했다. 이제 천명이 넘게 불어난 사람의 무리는 비탈길을 무서운 관성으로 휩쓸며 내려갔다. 경찰은 부산대학교의 지형이 데모 진압에 크게 불리하다는 점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 캠퍼스는 산기슭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위쪽에서 모였다가 아래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도서관 잔디밭에 학생들이 모였을 때 사복 형사들은 이를 해산시켜 보려 했으나 잔디밭이 그들의 배치장소보다도 3미터쯤 높은 곳에 있어 공격이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포기했었다.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으로 쏟아져 내릴 때에도 인파의 관성에 질려 적극적으로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정문의 향해 쏟아져 내려간 학생들은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수위실에 돌을 던져 박살을 내고 그 옆에 붙은 블록담을 공격했다. 블록담에 쳐진 철망을 걷어내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발길질을 하자 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학교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100명쯤의 기동경찰대와 맞닥뜨렸다. 구정문 앞에는 가게가 있고 이 가게 앞에는 빈 음료수 병이 쌓여 있었다. 학생들은 너도나도 이 빈 병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버스의 앞 창문이 산산조각났다. 경찰은 이 기세에 눌려 주춤했다. 학생들은 무너진 구정문쪽 블록담 사이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300명 남짓한 학생들이 주택가 골목사이로 빠져 온천장쪽으로 뛰어갔다.

구정문 바깥에 있던 경찰이 정신을 차리고 갈라진 틈을 메꾸어 학생들을 다시 학교 안으로 밀어붙이는 사이 신정문 바깥으로 일단 물러났던 다른 진압병력은 다시 본관쪽으로 쳐들어갔다. 구정문쪽으로 몰리는 학생대열의 꼬리를 끊어버리려는 작전이었다. MPG 최루탄과 사과탄이 학생들 머리 위에서 폭음과 함께 터졌다. 전투경찰의 돌격 함성소리와 가을의 높푸른 하늘을 가르는 곤봉질이 한차례 지나갔다. 흩어지는 학생들,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가'도서관 앞에서 다시 모이자!'고 소리쳤다. 이것은 마음과 마음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달됐다. 부산 데모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북새통속에서 순간 순간의 합의와 전달이 기막히게 재빨리 또 합당하게 이루어진 점이다.

우왕좌왕하던 학생들의 물결은 어느새 도서관 앞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경찰의 데모대 진압이 학생들의 행동 리듬을 깨뜨리는 것이었다면 그 목적은 아직도 달성되지 못했다. 경찰의 공격으로 두 번 해산 당하고 수십명이 붙들려 갔지만 학생들은 세 번째로 재집결한 것이었다.

= 16일 오전 11시 부대 도서관 앞

정광민은 신정문 앞에서 최루개스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을 쏟으며 도서관 쪽으로 맨 먼저 물러났었다. 그는 시청각 교실로 들어가 잠시 숨을 돌리려 했다. 시청각 교실에는 그때까지도 바깥의 소용돌이를 외면한 학생 몇 명이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광민은 구정문쪽에서 울려온 함성을 듣고 다시 도서관을 뛰쳐나와 아래쪽으로 치달았다. 정광민은 구정문에서 쫓겨 신정문으로 왔다가 도서관으로 재집결한 학생인파에 휩쓸렸다. 오전 11시쯤 도서관 앞에는 2천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다. 들어설 자리가 없어 다른 학생들은 근처의 캠퍼스에 흩어져 다음 순간의 전개를 기다렸다.

정광민 피신길에 오르다

첫 번째 도서관 앞 모임이 부마사태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면 이 두 번째 도서관 앞 모임은 집단의식을 통한 자기최면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 의식은 수백 명의 사복형사와 교수들, 그리고 정보형사들의 카메라 렌즈 앞에서 올려졌다. 무역과 김창수가 학생들을 모두 앉도록 했다. 선언문 낭독이 있어야 할 차례였다. 정광민은 자기가 쓴 선언문을 꺼내 읽으려 했다. 그러나 80퍼센트쯤은 희미하게 등사돼 아예 글자를 알아 볼수가 없었다. 광민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박현호가 전날 받았던 이진걸의 선언문을 건네주었다.

정광민은 '우리는 학원내 일체의 외부세력을 배격한다……'는 선언문을 우렁찬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럴 때 상대 학생 10명쯤이 일어나 그를 둘러쌌다. 정광민에 게 고개를 밑으로 꺾고 읽으라고 했다. 광민의 얼굴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막아 주기 위해서였다. 광민이 선언문의 첫 단락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 속으로 들어온 것은 도서관 옥상에서 그를 겨냥하고 있는 카메라 렌즈였다. 광민의 뒤를 이어 김창수가 선언문을 받아 계속 읽어 내려갔다. 낭독이 끝난 뒤 잠시 휴식. 이때 한 학생이 앞으로 나와 데모할 때 주의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자.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냐. 상점이나 학교 기물을 부수지 말자. 모두 우리가 낸 세금이다. 행인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질서를 지켜 시위를 하자'

정광민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앞에 나섰다. 구호를 선창했다. 수천 명이 이를 받아 복창했다. 금정산의 암벽에 함성이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유신헌법을 철페하라!'
'학원사찰을 중지하라!'
'구속학생 석방하라!'
'긴급조치위반자를 석방하라!'
'YH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을 엄단하라!'
'국민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중지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구호제창이 끝나자 학생들은 데모의 목표지점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온천장으로 가자. 아니 부산역까지 나가야 한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정광민은 같은 학과 친구들에게 끌리다시피 하여 도서관 뒤쪽으로 빠져 나왔다. 윤종수는 3천원을 주면서 '이제 너 할 일은 끝났다. 친구집에 가서 숨어 있으라.'고 했다. 희곤이를 비롯한 네 친구는 광민이를 번쩍 들어 뒷담으로 넘겨보냈다. '건투를 빈다. 고성에 가거든 우리 집에 전화하라'고 희곤이가 당부했다.

정광민은 반쉐터와 교련바지 차림이었다. 반쉐터는 담을 넘기 전 친구(엄태언)로부터 빌어 입은 것이었다. 정광민은 누군가가 자기를 뒤쫓아 올 것만 같았다. 골목을 따라서 일부러 먼길을 돌아 온천장쪽으로 뛰었다. 속옷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도중에 그는 학생들의 구호 외치는 함성을 가깝게 들었다. 구정문으로 먼저 뛰쳐나갔던 학생들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농구 골대로 빗장 걸고

학생들은 목적지를 놓고 도서관 앞에서 토론을 벌였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우선 학교를 뚫고 나가기로 했다. 여덟줄로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곤 비탈길을 따라 무너져 내리듯 운동장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들이 가방을 든 채 뛰었다. 여학생은 콜라와 사이다를 한아름 사 가지고 와 대열과 나란히 뛰면서 친면도 없는 남학생들에 나눠주었다.

경찰은 이제 이번 데모가 옛날의 그 어떤 학생 데모와도 다른 성격을 띠어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기 시작했다. 가장 큰 특징은 놀라운 자발성이었다. 졸업반 학생과 여학생까지 스스로 끼여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체면치레로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실랑이를 벌여 자중지란이 생기고 여기에서 데모의 김이 새버리는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과 교수들이 서로 상대편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쇼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캠퍼스에 있었던 학생들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이 대열에 끼여들었다. 전에 없던 높은 참여율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두 번이나 깨어져 흩어졌다가도 세 번이나 다시 뭉쳐 더 거센 도전을 해 왔다. 학생들의 상기된 얼굴은 신념으로 빛났고 장난 삼아 데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날 데모에 참여한 학생들의 거의 전부가 한 번도 데모경험을 갖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위는 이처럼 순수하게 용기있게 줄기차게 하는 것이었다. 자발성과 순수한 용기, 이것이 이날 데모의 가장 뚜렷한 성격이었다.

시위 대열은 운동장에서 한바퀴를 돌았다. 앞장선 학생들은 사진을 찍히지 않으려고 고개를 떨군 채 땅바닥을 향해 냅다 구호를 외쳐댔다. 몇몇 학생들은 농구골대를 밀고 왔다. 신정문으로 이어지는 비탈진 보도 위에 이 골대를 올려놓고 영차영차 밀어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골대는 철문에 꽝 부딪혔으나 닫힌 철문은 끄떡도 않았다. 이때 시위 대열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운동장 북쪽의 사대부속 고등학교 담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담에는 셔터식 철문이 달려 있었다. 학생들이 밀어붙이자 문이 떨어져 나갔다. 이곳으로 서로 먼저 나가려고 학생들이 엉겨 붙었다.

이때 누군가가 '질서유지'라고 구호를 선창했다. '질서' '유지' 어느새 합창으로 변했고 학생들은 질서를 되찾았다. 부속고등학교는 대학 운동장보다 낮은 곳에 있었다. 교사 2층 복도를 우루루 지나간 데모 학생들은 1층으로 내려와 고등학교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고등학교 교사들은 수업중인 학생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고등학교 정문너머로 경찰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학생 수십 명은 이때 농구골대를 밀고 나가 쇠문 안쪽에 밀어붙여 놓았다. 경찰은 차를 몰아 정문을 돌파해 들어오려 했다. 그러나 지프차에 밀려 쇠 빗장은 휘어졌지만 농구골대는 끄떡도 않아 잠시 경찰 진입을 늦출 수 있었다. 귀중한 시간을 번 학생들은 사대부고의 북쪽 담을 넘고 사잇문을 지나 주택가로 몰려 나갔다. 천명쯤이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부곡동 산업도로 쪽으로 질주해 갔다. 여학생들은 한참 달려가다가 지쳐 뒤로 처지기도 했다.

= 16일 정오 부산 대학

한편 경찰이 뒤늦게 사대부고 담을 봉쇄하자 미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학생들 2천명 가량은 어깨동무를 한 채 대학 운동장을 계속 맴돌았다. 정오께 박기채 총장이 스탠드 본부석에 모습을 나타났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차분한 음성으로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일으킨 일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은 북괴의 위협이 드세어지고 국제정세는 매우 어려운 때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학생 모두의 뜻이 아닙니다. 일부 학생들의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사태는 사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자제해 주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인류공영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가 이렇게 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심히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곧 교실로 돌아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연설을 끝내자 총장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교수들도 학생들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더 이상 데모를 지켜볼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는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하나 둘씩 사라졌다. 경찰도 교내시위대에 더 이상 자극을 주면 바깥으로 진출하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몰고 올 것 같아 진압부대를 일단 정문 밖으로 물렸다. 학생들은 30분쯤 더 운동장을 맴돌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쯤 해서 한시간 반쯤 전에 구정문을 뚫고 온천장을 거쳐 사직동 원예 고등학교까지 진출, 시위를 했던 학생들 일부가 캠퍼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부산역에서 모이자!

학생들은 다시 행동방향을 가다듬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아무런 반응없이 운동장만 맴도는 것이 싱거워질때가 됐던 것이다. 한 학생이 아스팔트 보도위에 백묵으로 휘갈겨썼다.
'부산역으로 !'
오후2시에 부산역에서 만나자는 말이 나돌았다. 이것은 책임 있는 학생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었다. 주동조직에서 퍼뜨린 말도 아니었다. 이 말은 전달하는 조직적인 코뮤니케이션 수단도 없었다. 그러나 2시에 부산역에서 재집결한다는 말은 삽시간에 학생들 사이로 쫙 퍼졌다. 모두가 그것을 믿고 따랐다. 낮 1시께부터 학생들은 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학보사 편집국장 이만규는 밀물같다는 생각을 했다. 말도 없이, 지도자도 없이 인파는 아주 자연스럽게 캠퍼스를 쫙 빠져나가고 있었다. 두 곳의 정문을 통해 학생들의 물결은 바깥으로 바깥으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경찰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구나'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정문을 나서는데 굳이 말릴 까닭을 찾을 수 없었다. 학교 당국에서도 오후에 수업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경찰의 행동에 큰 모순점이 숨어 있음을 그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설사 눈치챘다해도 달리 행동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찰은 불과 한시간 전 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교문밖으로 나오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아 보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천 명의 학생들이 당당하게 교문을 나서고 있었고 이를 막을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앞의 경우엔 학생들이 시위대열을 이루고 '바깥에 나가려는 것은 이런 시위를 하겠다는 뜻이다'고 선전포고한 상태였다. 그래서 경찰은 이 '현행범들'을 한사코 막아야 했다. 뒤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평화스럽게 교문을 나서긴 하지만 일단교문바깥에 나간 뒤에는 한판벌이겠다는 '계획범'의 행동이었다. 경찰은 자기들에게 도발을 하지 않고 교문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경찰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경찰의 행동은 현재 학생 행동에만 좌우되는 숙명적인 것이었다. 이 관계는 부산사태를 통해 계속될 터였다.

경찰은 곧 학생들이 가는 곳이 부산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앳돼 보이는 이성희 형사는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부산역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공중전화 박스 옆에선 어떤 학생이'우리는 했다. 너희들은 무엇 하느냐'고 소리치는 것도 엿들었다. 이 정보는 부산시경에 즉시 보고됐다. 동아대학교를 비롯한 다른 대학에도 경찰의 비상망이 쳐졌다. 학생들이 캠퍼스를 빠져 나간 뒤에 박기채 총장은 교수들을 강당에 모았다. '인류 역사 시작이래로 젊은이들은 항상 과격한 행동을 해 왔습니다. 우리는 면학분위기를 되살리는 데 최선을 다합시다.' 그는 짤막한 당부의 말을 던지고 강당을 나가버렸다. 박총장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고 뒤에 말했다.

진압 경찰관들의 애환

경찰이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데모를 발생단계에서 진압하지 못한 것은 결코 훈련부족이나 게으름에서 비롯된 일은 아니었다. 9월부터 부산경찰은 부산대학을 몇 겹으로 포위해 놓고 있었다. 9개 일선 경찰서에서 뽑혀진 경찰관 100명쯤은 사복차림으로 항상 대학교 안팎에서 서성거렸다. 이들의 일선지휘본부는 부산대 신정문 앞의 장전동사무소 2층이었다. 동래경찰서 정보1과 2계장이 눌러 앉아 지휘를 맡았다.

이곳에 뽑혀온 경찰관들은 스스로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을 비웃기도 했다. 이곳에 파견 나와 있을 동안에는 적어도 월급으로만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월급이외 수입을 보장받고 있는 형사나 아무리 혹사를 당하더라고 한 달에 10만원의 용돈이 생기는 어느 파출소의 차석은 하루식대 1,500원을 받아 부산대학교를 맴도는 신세가 됐다.

젊은 경찰관들 가운데엔 캠퍼스 안에 들어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부산대 학생가운데엔 전투경찰출신 복교생이 많았다. 그들은 전투경찰생활 때 알았던 형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양복을 입고 학교에 나타나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인사 뒤에 양쪽은 금세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됐다. 어색한 웃음과 농담을 뒤로하고 총총히 헤어지는 두 사람은 다음엔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빌게되는 것이었다.

캠퍼스에 배치된 사복 경찰관들의 임무는 초동진압이었다. 정보수집 임무는 정보형사들이 따로 맡고 있었으므로 사복들은 하루내내 언제 터질지 기약이 없는 데모를 기다리며 어슬렁거려야 했다. 이성희 형사는 잔디밭에 누워 잠자는 것이 일이었다. 어느 날 오후 1학년쯤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옆에 오더니 수줍은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내일이 미팅날인데 파트너가 되어주시겠어요?'
이 순진한 아가씨는 이 형사를 복학생정도로 알았음이 틀림없었다.
'내가 학생으로 보여요?'
이형사는 장난스레 물었다. 얼굴이 빨개진 여학생은,
'그러면 선생님입니까? '
'아직 조교수밖에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형사는 울상이 된 아가씨가 다시 말을 걸어오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파출소에서 이곳에 뽑혀온 이모 순경은 근 한달 간을 밀가루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느라고 고생을 했다.

불온문서 수색조로 편성된 그는 아침 여섯시까지 대학교에 도착해야했다.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캠퍼스 안팎을 샅샅이 뒤져야 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밤에 뿌려지는 격문이나 낙서가 학생들의 눈길에 닿기 전에 찾아내 없애버리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이순경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가기가 일쑤였다. 일당이 날아가도 별수 없었다. 1,500원이란 일당으론 300원 짜리 우동이나 짜장면으로 만족하야 했다.

경찰 고위층은 '학생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는 경찰관은 엄벌한다'고 지시해 두고 있었다. 경찰관들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면서 무사히 세월을 보내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들은 사명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부산시경은 데모진압전문부대로서 4개 기동대를 설치운영하고 있었다. 한 기동대는 150명 안팎의 전투경찰관과 15,6명의 행정담당 일반경찰관들로 조직돼있었다. 거의가 20대인 이들은 먹고 잘 때를 빼면 데모진압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반 이상이 대학 재학중 입대한 젊은이들이었다. 이 정예진압부대이외에 아홉 개 일선경찰서는 다중범죄 진압부대를 자체적으로 편성하여 한 주일에 한 번이상씩 강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데모진압 장비 백과

부산경찰이 갖추고 있는 데모진압장비는 일부 낡은 것도 있었지만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페퍼포그를 내뿜는 장치를 갖춘 갖가지 화학개스차만도 열몇 대나 됐다. 장갑개스차는 그중에서도 가장 성능이 뛰어난 이탈리아제였다.
엔진 : 6기통(보조엔진은 4기통)
무게 : 7t
차체 : 2.3㎜철판
앞창문 : 방탄용
승무인원 : 7명
가스탱크용량 : 45리터
물탱크용량 : 500리터
보조장치 : 고성능마이크, 사이렌, 경고등, 서치라이트, 물뿌리개
타이어 : 총탄을 맞아도 시속 80㎞로 갈 수 있음

이 개스차는 데모군중에게 가까이가서 페퍼포그나 물을 퍼붓는 것을 장기로 하고 있었다. 페퍼포그는 60미터, 물은 40미터까지 뿌릴 수 있었고 90초 동안 500리터의 물을 뿌릴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 개스자를 사용하여 물에 색소를 풀어 뿌리면 데모가담자를 나중에 가려낼 수도 있었다. 이 장갑개스차는 페퍼포그의 확산범위가 넓고 장갑으로 돼 있어 위압감을 주며 날아온 돌을 맞고도 끄떡 않기 때문에 데모진압장비로는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이었다. 이차는 기동대에만 있었다.

장갑개스차 다음으로 진압능력이 뛰어난 것은 큰 개스차. 타이탄 트럭을 고쳐 만든것이었다. 무게 2t에 승무인원 다섯, 고성능확성기가 달려있다. 유압모터로 개스탱크에서 액화개스를 끌어올려 이를 가열하여 기체로 만든 뒤 총구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분사구를 통해 이 개스를 내뿜게 돼 있었다. 30리터 짜리 개스 탱크가 가득차면 70분 가량 계속해서 페퍼포그를 뿜어댈 수 있다. 6기통짜리 지프차를 고쳐 만든 작은 개스차는 부산의 일선경찰서마다 한 대씩 배치돼 있었다. 20리터짜리 개스탱크로 50분가량 페퍼포그를 쏘아댈 수 있다. 승무인원은 넷. 이 지프차는 무게가 1,400킬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데모군중에게 휩싸였을 땐 뒤집어지기 쉽다.

경찰서에는 이밖에 작전차로 불리는 병력수송 및 검거자 압송용 트럭이 한 대씩 있었고 병력 수송용 버스가 있는 경찰서도 있었다. 경찰서에선 차가 모자랄 때는 관내의 기업체통근버스를 빌어 쓰기도 했다. 부산의 데모진압에 가장 요긴하게 쓰여진 것은 짊어지고 다닐 수 있는 페퍼포그 분사기. 이 장비는 방역 소독용 분무기와 흡사한 것이다. 경찰관이 짊어지고 데모대 속으로 돌진하여 페퍼포그를 뿜을 수 있게 돼 있다. 이 분사기는 극동방제 주식회사란 방역용 구제조회사에서 만든 것. 분사기의 무게는 9킬로그램이지만 개스탱크에 3.8리터의 액화개스를 채우면 12킬로그램이 된다. 이것으로 페퍼포그를 뿜으면 10미터쯤 나가는데 한 번 채우면 15분 가량 뿜을 수 있다.

하나 단점은 1리터짜리 석유탱크와 점화장치가 달려 있어 폭발할 위험을 안고 있으며 사전조작이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미제 개스분사기는 국산보다도 3킬로그램이나 가볍고 최루개스를 뿜을 수 있는 시간은 5분 더 길다. 최루탄은 손으로 던지는 사과탄과 총으로 쏘는 MPG100이 있었다. MPG탄은 엠피지100이란 소총으로 쏜다. 무게 3,5킬로그램, 길이 205센티미터의 단발탄 통부착식 총이다.

40도 방향으로 쏘면 90미터, 35도에선 58미터, 45도에선 80미터쯤 날아간다. 길이 16센티미터, 무게 470그램의 원통모양 MPG탄을 소총 앞 구멍에 꽂은 다음 M1총알과 비슷한 크기의 추진탄을 넣고 당기면 추진탄이 밀어내는 힘으로 MPG탄이 날아가게 돼 있다. 추진탄은 다섯 발을 잇따라 쏠수 있으나MPG탄은 한발씩 바꿔야 한다. 이 MPG탄은 쏠 때는 수평발사를 해선 안 된다. 사람이 맞으면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지만 크게 다치기 때문이다.

MPG탄의 껍질은 플라스틱으로서 폭발과 함께 잔잔한 가루로 변해 흩어진다. 경찰은 이 최루탄이 발사된 뒤 2초나 5초 뒤에 데모군중의 머리위에서 터지도록 시한침을 조정하도록 경찰관들을 교육했다. 이 최루탄이 터졌을 때 최루가스는 반지름 5미터에 걸쳐 퍼진다고 교본에는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그 영향이 훨씬 넓게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MPG탄의 효과는 사과탄의 네곱 가량이다. 사과탄은 170그램 짜리 플라스틱제 사과다. 안전핀을 뽑고 던지면 3초 뒤에 폭발한다. 데모 군중의 머리 위 2미터 공중에서 터지면 가장 효과가 좋다. 손안에서 터져도 가벼운 화상을 입을 정도다.

경찰의 진압요령

당시 한국 경찰의 데모 진압 전술은 '다중범죄는 최초 상황에서 진압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찰은 데모의 발생 자체를 미리 막으려는 정보수집 공작과 일단 데모가 터졌을 때는 그것이 번지기 전에 꺼 버린다는 초동진압 작전에 주력했다. 한때 경찰은 데모가 학교 바깥으로 퍼져 나오지 않는 한 교내데모는 방관하는 방침을 세웠던 적도 있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독재의 길을 치달으면서 경찰의 대응은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권위를 옹호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게 되었다. 경찰은 초동진압을 절대명제로 내세우게 됐다.

긴급조치 9호 이후 경찰은 반유신 격문이나 벽보, 그리고 구호는 어떤 사람의 귀와 눈에도 들어가선 안된다는 태도를 지켜왔다. 부산대학을 지키는 장전파출소 경찰관들은 새벽부터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격문이나 벽보와 낙서를 찾아내어 없애버리는 것을 일로 삼고 있었다.

경찰의 데모진압 전술은 초동진압, 시가지진압, 입체진압의 3단계로 나눠져 있었다.

초동진압전술은 화학탄을 쓰지 않고 데모발생 단계에서 불씨를 꺼버리는 방법이다. 병력을 데모대 속으로 집어넣어 데모 대열을 여러조각으로 갈라버리고 이 조각들을 공격, 각개격파하는 전술이었다.
시가지 진압전술은 데모대가 거리로 뛰쳐 나왔을 때 적용된다. 찻길을 막아 차가 지나다니지 못하게 한 뒤 시민들을 데모대로부터 떼어내고 데모대열을 분단한 다음 골목으로 몰아넣고 주모자들을 붙드는 전술이다.
입체 진압전술은 폭도로 변한 데모대에게 적용된다. 데모군중에게 해산을 당부한다. 그리곤 MPG탄 유효사거리까지 데모대열에 가까이 간 다음 MPG탄을 쏘아 기세를 꺾는다. 2단계에선 가스차가 데모군중에 30미터쯤 접근하여 페퍼포그와 물을 뿌린다. 데모 군중이 무너지면 짊어지고 다니는 개스분사기를 앞세워 군중 속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경찰이 『다중범죄진압교범』에서 밝힌 데모진압 경찰의 기본자세는 '집단범죄에 가담하는 군중은 우리의 형제로 일시적인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분별없는 생각에서 집단행동을 한 군중이므로 슬기롭게 진압하는 정신자세를 가져야한다'라고 표현되고 있다.

첫째, 데모군중은 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데모 행위자에 대하여 과격한 행동으로 피해를 주어선 절대 안된다.
둘째, 데모 행위자는 범법자다. 법을 다스리고 집행하는 경찰관은 데모를 슬기롭게 진압해야 한다.
셋째, 데모 군중은 조직적인 훈련이 돼 있지 않다. 따라서 고도의 교육 훈련을 받은 우리 경찰관과 대항할 수 없는 집단이다.
넷째, 데모 행위자는 집단으로 되었을 때 허세를 부린다. 데모대는 재빨리 해산시켜 집단세력을 깨뜨려야한다.
다섯째, 데모 군중은 자극을 받으면 흥분한다. 데모 군중에게 자극을 주지 말라.

경찰의 안전 진압수칙은 또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때리지 말 것
감정섞인 말을 하지 말고 대꾸하지 말 것
흩어져 달아나는 사람을 뒤쫓지 말 것
개인 행동하지 말고 부대단위로 행동할 것
데모 군중과 개별 접전을 하지 말 것
경찰봉을 쓸 때는 상대편의 어깨 아래를 때릴 것
집안으로 개스탄이나 개스를 던지거나 쏘지 말 것
개스탄은 안 터질 것에 대비하여 동시에 세발 이상을 던질 것
경찰은 데모 진압의 성패는 데모 발생 뒤 최초의 5분 사이에 달려 있다고 강조해 왔다.

초동 진압 작전의 실패 이유 분석

부대 데모에서 경찰은 최초의 5분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16일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여 100명 남짓한 사복형사들을 캠퍼스에 깔아 놓았는데도 데모 학생들이 상대 앞에서 도서관까지 몰려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도서관 앞에는 두 형사가 조직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무모한 공격을 하는 바람에 학생들의 분노만 거세게 만들었다.

경찰이 부산대 데모를 초동 단계에서 눌러버릴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상대에서 도서관 앞까지 100명 가량이 행진해 올 때였다. 형사들이 재빨리 이들에게 달려들어 대열을 흩어 버렸다면 연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부산·마산 시민봉기도 없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이 재빨리 데모 발생에 대응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지휘 체계가 엉망이었고 무전장비가 미약했다. 데모대를 보고도 아무도 지휘를 하려 들지 않았다.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형사들을 신속히 모을 수 있는 갖고 다니는 무전기도 없었다. 모든 사복형사들이 데모 발생 단계에서는 멍하니 구경만 할 뿐이었다. 이성희·김성수 두 형사가 데모대 속으로 뛰어든 것도 명령을 받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자기 임무를 다하지 않은데 대한 울분과 책임감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둘째,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찰관들이 거의 없었다. 데모대를 도서관까지 오게 함으로써 첫 번째 진압 기회를 놓친 경찰은 도서관 앞에 학생들이 모였을 때 이들을 깰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이때도 지휘 계통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데다가 사복 형사들은 꼬리만 뺐다. 이성희 형사는 '아무도 지휘를 하지 않아 답답해서 내가 나섰다.'고 했다. 도서관 앞에 데모대가 당도하는 순간 100명이나 되는 힘센 사복형사들이 한꺼번에 덮쳤더라면 초도 진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찰의 훈련 교범에 따르면 데모 학생들은 범법자들이다. 경찰관들이 강도나 도둑 등 범법자에게 느끼는 적개심이나 잡아야겠다는 사명감을 이때 갖고 있었다면 설사 지휘 계통이 마비돼 있었다 해도 주모 학생 체포 행동에 적극 나서야 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경찰관들의 진압 행동 자체의 정당성에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신 자세에서 나타난 경찰의 문제점은 데모가 학교 안에서 도심지로 번져감에 따라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터였다. 경찰은 숫자에서만 학생들에게 진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서도 졌던 것이다.

전술적면에서도 경찰은 초동 진압 작전에서 실패했다. 경찰은 초동진압 단계에선 화학탄을 쓰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시가지에서 데모가 폭동으로 변했을 때 비로소 입체 작전을 통해 개스차와 최루탄을 사용토록 경찰의 『다중범죄진압교범』은 가르치고 있었다. 경찰이 신정문을 거쳐 장갑개스차와 진압병력을 집어넣은 것은 데모 발생 35분 뒤였다. 35분 동안 초동 진압 작전을 포기하고 있던 경찰은 갑자기 입체 진압 작전으로 나온 것이다.

경찰은 학교에 들어오자 마자 페퍼포그를 내뿜고 최루탄을 사용했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병력진입 보다도 최루탄과 페퍼포그에 대해 더 화가 났다고 했다. 이진걸은 '페퍼포그를 마셔 눈물과 콧물을 쏟고 기침을 캑캑하니까 저절로 화가 치밀더라'고 했다. 본관 앞에까지 개스차가 올라와 페퍼포그를 뿜어댄 것은 많은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가졌던 학원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갸냘픈 기대마저 여지없이 깨뜨리는 것이었다.

페퍼포그와 최루탄은 많은 학생들로부터 동물적인 분노와 용기를 끌어낸 셈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맹수의 약만 올려놓고 그냥 물러나 버렸다. 경찰이 불씨가 꺼진 것을 확인도 않고 일단 병력을 철수한 것은 학생들의 돌파작전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학생들이 두 번째 세 번째로 모여 구정문과 부속고등학교 담을 넘어 경찰 저지선을 돌파할 때는 경찰 병력이 분산돼 제대로 막을 수도 없었다.

경찰은 진압의 타이밍을 놓침으로써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된 것이다. 경찰이 다른 지원 병력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학교 바깥을 봉쇄한 채 학교 안의 시위를 잠시 지켜보고 있었더라면 제풀에 기세가 꺾였을 지도 모른다. 상부로부터의 문책을 의식한 나머지 너무 조급하게 나선 것이 불티를 사방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빚게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