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폭발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유리조각들

밤 8시 남포동 데모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이 시점에서고 기자들은 시위자들의 열기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면 데모대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회부 기자들은 이 데모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아무한테서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로 쓸 수 없는 사건은 취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됐다. 그러나 기자는 역시 기자였다. 많은 기자들이 이 날 밤을 데모 현장에서 보냈다.

취재 지시는 없었지만 이 소용돌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조직적인 취재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직업의식에 따라 그들은 현장을 지켰다. 『국제신문』편집국 간부는 데모 현장에 나가지 말라고 사진기자에게 말했으나 그들은 사진기를 옷 속에 감추고 데모대를 따라다녔다. 데모현장에서 기자들이 설 곳은 없었다. 그들은 경찰과 데모대 양쪽으로부터 배척 당하고 경멸 당했다. 그날 오후『국제신문』편집국엔 시민의 전화가 빗발치듯 들어왔다.

'오늘 데모 난 것 압니까?'
'왜 데모 기사가 안 났지요. 난 삼십년 독잔데요, 내일부터 신문 끊겠습니다.'
'이 xx야! 할복이나 해라!'
'그쪽 사정이 어렵다는 것도 압니다만 용감한 학생들 생각해서 잘해주시오!'
'학생들만 피 흘려야 합니까. 당신네들은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까?'
'우리는 끝까지 할겁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심하게 할겁니다.'
'내일은 신문에 나겠지요.'
이런 전화를 받다가 지친 내근 기자들은 전화기를 내려놓기도 했다.

취재에 가장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진기자들이었다. 데모군중 속에서 프래시를 터뜨린다는 것은 맞아죽을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기관 표시가 된 차는 투석의 표적이 됐다.

'보도도 못하는 기자는 필요 없다.'

데모대의 원한 서린 이 말에 대답할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조갑제 기자는 저녁 7시께 광복동 입구에서 길 복판에 경찰부대가 개스차를 둘러싸고 포진해 있는 것을 봤다. 길 양쪽엔 책가방을 들고 책을 낀 장발 학생들이 모여 서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괴상한 장면이었다.

학생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마냥 개스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싸움하는 것 같았다. 조기자는 저렇게 서 있다가 리더가 끝내 나서지 않으면 슬금슬금 흩어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친구와 약속한 남포동의 왜식집으로 갔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동료 기자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열린 문틈으로 최루개스가 확 들어와 눈동자를 찔렀다.

'학생이 경찰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그래도 데모는 계속되고 있어. 비참해서 못 보고 있겠더라. 도망치듯 오는 길이야.' 조기자는 또 자기의 예상이 빗나간 것을 알았다. 도대체 오늘은 몇 번이나 놀라는 건가. 그럴 때마다 몇 번이나 깨우치는 건가. 그는 더 이상 술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남포동 지하도 입구에서는 한바탕 부딪친 뒤였다. 병유리 조각, 흩어진 책들, 깨진 상점 유리. 교련복 바지를 입은 한 고등학생이 길 저쪽의 경찰을 향해 돌을 집어던졌다.

이때 조기자가 잘 아는 서부경찰서의 ㅊ경위가 그 학생을 붙들고 욕을 퍼붓고 있었다. 물론 그는 사복 차림이었다. 학생의 종아리를 몇 대 걷어찬 뒤 그는 자리를 떴다. 다른 시민들은 그가 학생의 파괴적인 행동을 언짢게 생각하는 양식 있는 시민인 줄 알았을 것이다. ㅊ경위는 데모대와 섞여 다니며 데모 참여자를 붙드는 임무를 맡았으나 시민들 속에서 그 고등학생을 끌고 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남포동과 광복동은 캄캄했다. 술집과 음식점을 뺀 거의 모든 상점이 셔터를 내렸다. 그러나 건물 옥상엔 시커먼 그림자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어른거리고 있었다. 남포동 지하도 부근의 육교 위는 구경꾼들로 꽉 차 있었다. 계단에까지 인파가 밀렸다. 불구경이 재미난다 하지만 데모 구경엔 따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것은 19년만에 처음 보는 데모가 아닌가. 찻길에 유리조각이 깔려 있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스쳐갈 때마다 유리조각들은 음산하게 번들거렸다. 부영극장 앞에서 한 쉰 살 먹은 것 같은 여자가 쇳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이놈들! 아까운 세금으로 이런 짓만 하고 있어.'

그는 아무 죄도 없는 행인이 최루개스를 마셔야 한다는 데 분통이 터져 못 견딜 지경이었다. 저쪽 찻길에서 우루루 데모대가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경찰관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추격해왔지만 겁주는 데만 그칠 뿐이었다. 한 경찰관은 데모 구경꾼들을 향해서도 사과탄을 던졌다. 어둠속의 폭발음은 살벌했다. 일부 시민들은 경찰이 공포를 쏘는 것으로 착각했다. 부산극장 앞이 갑자가 소란스러워졌다. 한 100병쯤 되는 학생들이 손뼉을 치면서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들이 '언론 자유'를 외칠 때 조기자는 어둠 속인데도 얼굴을 붉혔다. 학생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그때까지도 경찰은 나타나질 않았다. 남포동 쪽에서 '온다!'는 소리와 함께 다른 데모대의 일부가 극장 앞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자 그들도 달아났다. 그러나 금새 제일극장 앞에서 손뼉을 신호로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불 꺼진 동아아파트 한 모퉁이에선 우당탕탕 부서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을 향해서 사방의 건물에서 집중 포격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리병과 돌멩이의 포격이었다. 경찰이 물러간 뒤에도 재미 삼아 돌을 던지는 소년도 보였다.

시민 합세, 각목 난무

밤 9시 남포동 일원 어둠속의 데모는 유리병과 돌멩이, 몽둥이와 각목이 난비하는 거친 분위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데모대는 대담해졌다. 이젠 학생들만의 데모가 아니었다. 재수생·고등학생·업소종업원·무직자들이 가담했다. 일반 시민들도 합세했다. 대학생 데모를 시민들이 응원하다가, 이윽고 합류했다는 점에서 사태는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경찰도 가혹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몰리게 된 그들은 진압책보다는 자위책에 급급했다. 가을철을 맞은 남포동에는 여러 곳에 건축 공사장이 흩어져 있었다. 이곳의 자갈과 각목은 데모대의 무기로 변했다. 일부 데모대는 가로수의 버팀목도 뽑아 경찰의 몽둥이에 대항했다. 일부 시민들은 학생들을 잡아가는 경찰관들에게 고층에서 연탄재를 집어던졌다. 최루개스에 눈을 못 뜨는 데모대에게 한 아주머니는 휴지 뭉치를 수십 개 집어던졌다. 미남로터리 회전에서 참패했던 부산진경찰서 병력은 중앙동 반도호텔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밤 8시 40분경 시경 상황실로부터 부영극장 앞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서장 안연세 총경의 지휘로 100명쯤 되는 병력은 기동순찰차, 작전차 2대, 서장 승용차를 앞세우고 남포동 지하도 쪽으로 간선도로를 따라 나아갔다. 그때는 남포동 지하도 근방의 데모대가 남포파출소 습격을 끝낸 바로 뒤였다. 500명 가량의 군중은 유리병, 벽돌, 돌멩이 등을 스무 평짜리 파출소에 퍼부어 박살을 냈었다. 직원들은 유리 파편을 맞아 다쳤고 사이카도 망가졌다.

이 군중은 남포동 골목으로 일단 후퇴했다. 이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본 부산진서 한 간부가 서장에게 행진을 중지하고 응원 부대를 기다리자고 건의했다. 서장은 행진의 계속을 명령했다. 맨 앞에 선 기동순찰차(포니)와 작전차가 이때 교통 체증을 일으킨 일반 차량들 사이에 끼여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 작전차에 탔던 경찰관들은 뛰어 내렸다. 차를 둘러싸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군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돌과 유리병으로 집중 포격을 한 뒤 각목을 휘두르며 경찰을 향해 우루루 몰려왔다. 서장 차가 맨 먼저 달아났다. 김모 경장은 군중 속에 고립됐다.

'퍽!' 각목이 헬멧을 치고 나갔다. 두 번째 각목은 손등을 때렸다. 김경장은 곤봉을 놓쳐버렸다. 어깨와 등판에 사정없이 각목 세례가 떨어졌다. 김경장은 살아야겠다는 집념 하나로 버스 틈 사이로 달아났다. 동료들은 피투성이의 김경장을 병원으로 보냈다. 그는 온몸 타박상으로 전치 3주의 진단을 받았다.

김도상 형사는 경찰봉으로 날아오는 가로수 버팀목을 막다가 경찰봉을 부러뜨렸다. 그는 두 동강 난 몽둥이를 든 채 버팀목을 휘둔 젊은이에게 기합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젊은이는 기세에 눌려 주춤 물러났다. 이 틈을 놓칠세라 김형사는 잽싸게 도망쳤다. 기동순찰차(포니) 운전사는 미처 탈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습격을 받았다. 데모대는 유리창을 박살내고 각목을 쑤셔 넣어 운전사를 마구 찔러댔다.

다른 무리는 순찰차를 뒤엎으려고 꽁무니를 들썩들썩 들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운전사는 차가 기우뚱할 때 뛰어나와 길 반대편 남포파출소 쪽으로 달아났다. 길을 건너 뒤돌아보니 군중이 순찰차를 모로 세우는 게 보였다. 이 모로 세워진 순찰차 기름통에서 휘발유가 새나왔다. 데모 군중 속의 누군가가 성냥불을 당겼다. '펑!' 폭음과 함께 부산1가 1163호 포니는 불길에 휩싸였다.

작전차 불타다

작전차 운전석 경비과장 이무영 경정은 이 불길이 바로 뒤에 붙은 작전차 2대에 옮겨 붙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간부후보생 출신이며 서른 다섯의 나이로 경정이 된 이 엘리트 학사 경정은 부하 서른 명을 돌아보며 '나를 따르라'고 외친 뒤 작전차를 향해 뛰어 갔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경정은 작전차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손잡이가 뜨끈뜨끈했다. 차를 뒤로 빼려 했으나 고장이 났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군중이 작전차로 몰려와 차 위로 기어올랐다. 이무영은 운전석에 갇혀 버렸다.

데모대는 차 위에서 쿵쿵 발을 굴러댔다. 각목으로 운전석 뒷 유리창을 깨버리고 이경정을 겨냥하여 들쑤셔댔다. 어깨와 목을 각목이 찔렀다. 이경정은 운전석 양쪽 문을 걸어 잠그고 뒤통수를 감싸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이제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죽다니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면서 자기를 뒤따르지 않았던 부하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배신감을 느꼈다. 경찰관으로서 국가재산을 보호하다가 죽는 것이니 부끄럽지는 않다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데모 군중은 작전차를 뒤집어엎을 모양이었다. 꽁무니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이때 누군가가 운전석 옆창문을 두드렸다. 한 마흔 된 것 같은 사람이 외치고 있었다.
'내가 책임질 테니 나오시오!'
'정말 나를 살려주겠습니까?'
'안심하고 빨리 나와요! 차가 넘어갑니다.'
이경정은 창문을 열고 뛰어 내렸다. 그 사십대 남자가 이경정을 품으로 안다시피 하여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러면서 모자와 웃옷을 벗겼다. 러닝 셔츠 바람이 된 이경정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길 건너편으로 뛰었다. '펑!' 작전차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그는 어깨 너머로 쳐다보았다.

명령 거역한 경찰관들

부산진경찰서 소속 부산7가 1335호 작전차에서 불길이 치솟았을 때 조갑제 기자는 그곳에서 한 100미터쯤 떨어진 부영극장 앞 육교 밑에 있었다. 폭음과 함께 치솟은 불길은 30미터쯤 올라갔다. 사방이 환해졌다. 이어서 MPG최루탄을 쏘는 폭음이 빵빵 울려왔다. '우―' 데모 군중이 몰려가는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비명, 폭음, 불길이 한데 엉켰다. 그것은 한폭 역사화의 민중봉기 장면이었다.

암흑의 도심지에서 치솟은 불길은 극적인 효과를 몰고 왔다. 그것은 불과 몇 시간 전에만 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됐던 사태였다. 부산대학의 데모, 학교 울타리를 뛰어넘은 데모, 중심 시가지로의 데모 확산, 야간 데모…….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으며 구경꾼이나 참여자들을 다 같이 놀라게 한 잇따른 사태 전개는 이 순간에 와서 클라이맥스를 연출한 것이다.

'이란의 시가전이 이랬을 거다.' 조기자와 함께 데모 현장을 좇아 다니고 있던 국제신문 이철호 부국장은 말했다. 4·19를 취재했던 그는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다. 적어도 내일은 위수령이다'고 말했다. 소방차가 오기까지 작전차는 시커먼 연기와 불꽃을 내뿜으며 한 30분을 탔다. 이 불길이 데모대에게 미친 심리적 효과는 큰 것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잊게 됐다. 조금은 신들린 듯한 기분에 휩싸였고 난폭해졌다. 데모대는 불을 지를 준비를 해오지도 않았었다. 차를 뒤엎으면 기름통에서 휘발유가 새나오게 마련이란 것을 알게 됐다. 이 휘발유에 성냥불만 당기면 불을 지를 수 있다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었다. 이 요령은 빨리 전파되었다.

부산진경찰서 병력은 데모 군중의 기습으로 순찰차와 작전차가 완전히 불타고 다른 작전차는 반쯤 부서지는 참패를 당했다. 경찰관 다섯 명이 다쳤다. 더 큰 참패는 명령 계통의 붕괴였다. 이무영 경정은 뒤에 말했다.

'데모의 도덕적 정당성을 판단할 자리에 경찰은 서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데모대가 법질서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시국관에 관계없이 그때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라면 데모를 막아야 했습니다. 내가 작전차를 구하기 위해 돌격을 명령했을 때 아무도 따르지 않았던 것은 조직의 논리가 무너졌음을 뜻한 것입니다. 명령이 이행되지 않는 조직은 이미 조직이 아닙니다.'

경찰 모두가 부산진서 일부 병력처럼 극한상황에서 상관의 명령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서부경찰서 부민파출소 이기태 경장은 밤 10시 35분쯤 보수동 쪽으로 군중 200명이 파출소를 향해 몰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파출소에는 이경장과 방범대원 한 명뿐이었다. 이경장은 방범대원에게 파출소의 모든 문을 안에서 잠그게 했다. 자신은 정복의 매무새를 고쳐 단정하게 입고 정문앞에 총을 든 채 버티어 섰다. 그는 다가오는 데모 군중을 노려봤다. 데모대는 파출소 앞 10미터 앞에 멈춰 섰다. 각목·유리병·돌멩이를 들고 있었다. 유리병과 돌이 몇 개 날아왔다. 그들은 이경장의 꿋꿋한 자세에 눌려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이경장이 호소했다.
'여러분 돌아가 주십시오. 파출소는 여러분의 재산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재산을 스스로 부술 작정입니까. 꼭 그러시겠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고 하십시오!'
데모 군중은 이 연설에 감동했던지 방향을 바꿔 대학병원 쪽으로 뛰어갔다. 기동대 제1중대장 홍인표 경감은 이날 부산대학교 뒷문을 막다가 학생들이 던진 유리병과 벽돌을 손목과 가슴에 얻어맞고 전치 2주일의 부상을 당했다. 그는 계속 부대를 지휘, 광복동 일대에서 진압작전을 폈다. 오후 4시 50분께 큰딸인 세 살 박이 영주가 영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때의 상황이 경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홍경감은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는 자정까지 중구와 서구를 누리며 진압작전을 펴 데모대원 70명을 붙들었다고 하여 그 뒤 표창되었다.

언론기관에 민중의 돌팔매질

밤이 깊어감에 따라 경찰의 진압작전은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됐다. 행인과 구경꾼과 데모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압의 초점이 흐려졌다. 경찰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서성대는 시민들은 데모대로 보고 체포하겠다'고 방송을 하고 다녔다. 데모 군중보다 구경꾼이 몇 곱절 많았다. 행인들은 구경꾼보다 또 더 많았다.

그런데 데모를 하지 않을 때 시위 군중은 구경꾼과 행인 속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다. 시위 군중이 데모를 시작하면 구경꾼들은 그 뒤를 우루루 따라다녔다. 경찰의 눈에는 이 구경꾼들도 시위 군중의 일부로 비쳤다. 데모대가 흩어지면서 이 구경꾼들 속으로 달아나면 이 뒤섞인 무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우물우물 하늘만 쳐다보며 시치미를 뗐다. 데모대는 물고기요, 구경꾼들은 바다였다.

데모 군중이 경찰을 두려워하는 만큼 경찰도 그들을 겁내고 있었다. 데모대는 공격해오는 경찰과 맞붙으려고 하지 않았다. 페퍼포그와 최루탄과 곤봉 세례를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경찰이 공격하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달아났다. 앞장선 대열이 뒤돌아 서서 도망쳐오면 뒷 대열은 경찰을 보지도 않고 함께 달아났다. 시위 군중 편에서 있으면 경찰이 그렇게 무섭게 보이는 것이었다. 경찰은 시위군중의 엄청난 수자에 질려버렸다. 시위 군중이 가장 겁낸 것은 개스 지프차였다. 이 차의 운전사 박모 순경은 말했다.

'유리병과 각목을 휘두르는 군중을 향해 나갈 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속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더군요. 시위 군중이 몰려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개스를 확 뿜습니다. 앞을 가린 휜 개스가 걷힐 때 앞을 보면 군중이 몰려오던 그 자리가 갑자기 훤히 트인 것을 발견합니다. 폭탄이 터져 싹 쓸어간 자리같이 말입니다. 그래도 또 그 빈자리를 메우며 그들이 몰려올 때는 정말 겁이 납니다.'

데모 군중의 밥은 멈춰 있는 것들이었다. 파출소, 차들 사이에 꼭 끼인 작전차, 포진한 부대, 대열에서 쳐진 경찰관들도 군중의 표적이 됐다. 이럴 때 경찰이 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또 그렇게 하면 데모대와의 술래잡기 놀이가 돼 끝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날 밤 부산일보, 부산 MBC 라디도방송국 등이 데모대가 던진 돌멩이로 유리창이 부서지는 등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이 언론기관들은 유신시대하의 침묵으로 해서 돌팔매질을 당한 것이었다.

밤 데모는 통행금지 시간까지 계속됐다. 밤10시에 부평파출소가 시위군중 200명 가량이 던진 유리병과 돌로 박살이 났다. 10시 30분엔 보수파출소, 10시 50분께엔 제 1대청·흑교·중앙파출소가 습격을 받고 크게 부서졌다. 중부서장은 이들 파출소의 파괴된 시설을 재빨리 사진 찍은 다음 이튿날 아침까지 말끔히 보수하여 치욕의 상처를 시민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밤 11시 40분께 중부서 앞에 모였던 300여 군중은 영주동 쪽으로 흩어져 갔고 밤 12시까지는 부영극장과 동아아케이드 앞의 군중도 스스로 해산하여 부마사태의 첫날을 마감했다.

유신체제의 경직성을 강타한 데모

10월 16일에 불길이 오른 학생과 시민 봉기는 큰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충격의 파장은 물리적인 면보다 심리적인 면에서 심각했다. 밤 데모가 격렬했다고 하지만 사방 2평방 킬로미터 안에서 일어난 폭동에 지나지 않았다. 넓이로 쳐서 부산의 0.4퍼센트만이 데모의 영향을 받았다. 데모 참여자와 목격자는 부산 시민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시민생활도 데모로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 남포동 간선도로에 교통 체증이 생기고 광복동 일대의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았으며 행인들이 눈물을 흘린 정도였다.

부산의 다른 지역은 아주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데모 지역이 고층건물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칸막이 저쪽에서 벌어진 소동처럼 다른 지역의 평온을 깨뜨릴 만한 소리와 불길은 새나오지 않았다. 대도시 생활의 무관심은 이 사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복동이 아무리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도 서면·동래·사상·해운대 지구는 평온하기만 했다. 죽은 사람도 없었다.

부산시에 집계된 16일의 부상자는 110명. 경찰관이 95명,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18명은 중상 92명은 경상자였다. 다친 학생들과 시민들은 부산시에 신고하면 화가 미칠까 걱정하여 거의 신고를 기피했으므로 시민·학생의 실제 부상자 수는 경찰보다도 훨씬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16일 데모가 규모에 비해 극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16일 데모는 17일 아침의 어느 매스콤에도 비치지 않았다. 따라서 전국에서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 국민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데모를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인 데 있었다. 일본이나 미국처럼 데모가 일상으로 돼 있는 나라에서 이런 데모가 일어났다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일본의 나리타공항 개항 반대 데모는 부산봉기보다 훨씬 과격한 것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예사로 대했다.

유신체제는 데모결벽증에 걸려 있었다. 반유신 시위는 있어선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으로 권력층의 머리에 박혀져 있었다. 결벽증을 가진 여자가 가벼운 입맞춤을 당하고도 큰 쇼크를 받는 것처럼 유신정권은 허용 기준을 크게 넘어버린 부산 데모에 아찔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경직될 대로 경직돼 있었던 박정권은 그런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제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여유도 유연성도 없었다.

부산봉기를 역사적 사건으로 만든 것은 학생도 시민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부의 과잉반응이었다. 유신체제의 경직된 논리는 그런 과잉반응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낙서를 했다고 학생을 잡아 가둔 박정권은 부산봉기에 대해 그에 걸 맞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논리의 지배 밑에 있었던 것이다.

16일 오후 치안본부는 송제근 치안감을 급히 부산에 내려보냈다. 그는 부산시경에서 열린 야간 참모회의에 참석했다. 부산시경 보안과장 김석등 총경은 그때, 장교 출신이며 다중범죄 진압작전의 권위자인 송치안감이 이수영 시경국장을 대신할 사람으로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이 참모회의에서 송제근은 자신이 사태 진압의 책임자인 것처럼 회의를 이끌어갔다. 김총경의 짐작대로 17일 아침 정부는 이수영 국장을 대기 발령시키고 그 후임에 송제근을 임명했다.

경찰의 변명

정보부와 경찰은 부산 데모를 치밀하게 계획된 폭동으로 보았다. 방화·투석·파출소 습격·밤 데모는 유신체제에 길들여진 착하고 순한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술래잡기 식 데모가 광복동 일대의 지리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인데도 그들은 배후 조직의 조종에 의한 도시게릴라 전법으로 이해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불순세력의 부추김으로 몰아붙이려는 버릇이 발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데모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정보부쪽에서 진지하게 이뤄졌다. 정보부 부산지부 소속 직원들은 16일 오후 '시민과 함께 데모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한 경찰간부는 데모대 속에 얼굴을 잘 아는 정보부 직원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보부가 이 데모를 조종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첫날에 벌써 이번 데모의 동기를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과 조세저항으로 분석, 상부에 보고했다. 부산대학교를 관할하고 있는 동래경찰서는 이번 사태의 발생 책임을 모두 안아야 할 입장이 됐다. 경찰은 사건이 났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보다는 발생 책임을 회피하는 데 더 노력한다. 동래경찰서 정보과는 데모 발생의 책임을 총장과 교수와 캠퍼스의 지리 여건에 돌리는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 무기력하고 구심점 없는 총장의 학생지휘체제.
● 학교당국과 교수가 학생지도를 기피하고 정보수집에 비협조.
● 학생지도체제의 조직력 약화.
● 학생들이 경찰에 정보 제공 기피.
이런 점을 들어 학교 당국을 비난한 다음 이 보고서는 학생지도교수들을 전면 개편하고 책임자를 인사조치 하도록 요구했다. 학생지도에 성의가 없고 무식한 교수들은 재임용 과정에서 갈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학생상담 지도관실을 확대 개편하여 단과대학마다 지도관을 한 명씩 뽑아두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보고서는 이어서 학원 정보사찰을 더 잘하려면 유급 첩자를 많이 박아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동래경찰서는 특히 박기채 총장이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지도력이 강한 총장이 없으면 '부산대학의 안전 대책'을 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적, 모든 책임을 총장에게 덮어씌웠다. 한편으로는 경찰이 이번 데모에 대한 첩보를 미리 손에 넣고 있었으나 대학 당국과 교수들이 진압에 협조를 해주지 않아 초동진압에 실패했다고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일본 언론의 정확한 진단

동래경찰서는 17일까지도 데모 발생의 배경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데모의 주역인 정광민과 이진걸을 같은 인물로 보기도 했다. 경찰은 학생들이 15일에 선언문을 뿌려 그날 오후 10시에 도서관에 모이자고 선동한 것을 경찰로 하여금 헛다리를 짚도록 한 양동작전이었고 처음부터 치밀하게 16일이 진짜 D데이로 정해져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경찰은 16일 밤에도 정광민의 선언문을 구하지 못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학보사에 침입, 서랍을 조사했으나 정광민이 등사한 선언문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학생 가방들을 들추니 선언문 한 장이 나왔다.

동래경찰서는 데모 사진들을 뽑아 그 속에서 주역인 듯한 학생들을 가려내는데 힘썼다. 붙들려온 학생들 가운데 사진에 찍힌 학생들은 집중 신문을 받았다. 경찰이 아직 감을 못 잡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 매스콤은 데모의 성격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10월 17일치 일본 『아사히 신문』은 외신면 머리기사로 부산 데모를 보도했다.

'시민이 다수 참가'
'생활의 불만이 폭발'
'빈부 격차 시정 부르짖은 학생에 공명'이란 제목을 단 기사였다.
이 신문의 서울 특파원이 쓴 이 기사는
'이 데모가 한국정부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데모 참여자가 많다든지 파출소가 습격 당하고 순찰차가 불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다수 참여했기 때문이다'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이번 데모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의 실체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지로부터의 정보에 따르면 재수생, 서비스업 종사자, 사회 저변 노동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생활상의 불만이 학생 데모에 의해 촉발되어 폭동화한 것으로 보인다. 데모에 나타난 학생들의 주장 가운데는 국내정치문제뿐 아니라 빈부격차 해소 등 분배문제에 언급한 대목도 있어 주목된다. 정부·여당측은 김영삼 총재의 지역기반인 부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일시적 불만의 폭발로 보고 있다. 최근의 불황으로 중소기업의 도산이 잇따르고 대졸자들의 취직난도 심각하다. 더구나 시민적 자유를 일부 정지시킨 유신체제는 벌써 7년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