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의 시내 풍경

부산 데모가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17일 아침 분명해졌다. 부산진경찰서에 붙들려온 데모 피의자들 서른한 명 가운데 학생은 열 명도 안됐다. 공부를 하고 있다가 아버지로부터 데모 소식을 듣고 집을 뛰쳐나온 재수생, 서울에서 부산으로 출장 왔다가 데모대에 휩쓸려 구호를 외친 회사 직원도 있었다. 부산대 경제학과 정동현 교수는 17일 오전 10시께 부산진역 옆에 있는 버스정류소로 나갔다. 교수들은 등교하는 부산대학생들을 찾아내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부산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학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 오늘 수업 없다. 집으로 돌아가게!' 두 학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정교수는 무안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언성을 높였다. '자네들이 교수 말 안 들으면 누가 듣겠나.' 그러면서 정교수는 한 학생의 팔을 잡았다. '쓸데없어요. 내버려두세요.' 학생은 교수의 팔을 뿌리쳤다. 정교수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하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했으나 학생과 시비를 벌이다가는 더 큰 창피를 당할 것 같아 꾹 참기로 했다.

어제의 데모로 학생들이 격앙돼 있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제지간이 이렇게 되다니, 정교수는 한참 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교수는 또 다른 부산대학생이 정류소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부산대학생이면 할말이 있다.'
'아저씨가 형삽니까 교숩니까?'
'형사는 아니다.'
'그러면 소속을 대십시오. 그래야 저도 소속을 대겠습니다,'
'상대 교수다.'
'예, 저는 법학과×××입니다.'
학생은 군대식으로 대답했다.

부산대학교는 17일 상오 휴업령을 내리고 교직원들을 시내버스 정류소로 보내 등교하려는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많은 교직원들이 정교수처럼 학생들로부터 들이 받혔다. 17일 오전 9시께 부산대학교 옛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휴업령으로 학교 안에 못 들어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버스정류소 빈터에 주저앉았다. 1천 명쯤이 모였다. 교직원들이 나와 수업이 없으니 돌아가 달라고 사정을 했다. 경찰관들은 멀찌감치 서서 그들을 감시했다.

학생들은 이런 저런 농담을 해가면서 귀가 종용을 못 들은 체 계속 앉아 있었다. 학생들은 들고일어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으나 전날의 정광민과 같은 지휘자가 나타나지 않고, 박기채 총장까지 나와서 간곡히 설득, 일단 귀가했다. 오전 10시쯤 서면로터리에 학생들이 모일 것 같다는 첩보가 경찰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면로터리에선 별다른 움직임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오전 10시 43분쯤 한 택시 운전사가 데모 학생들이 옛 조방 자리에 모일예정이라는 제보를 경찰에 해왔으나 거짓으로 밝혀졌다.

부산시경의 3천 병력은 이날 아침 일상 업무를 중단하고 출동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부산진경찰서 진압부대는 동래온천장에 포진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쯤부터 부산대 앞 정류소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200여 명이 갑자기 데모대로 변했다. 그들은 온천장 삼거리 쪽으로 밀고 나갔다. 그곳에는 부산진서 진압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골목으로 피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경찰은 학생들이 되돌아 나오는 것을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붙들어갔다.

교련복 차림으로 데모한 동아대학생들

17일 낮 동아대학교

김해수와 같은 많은 동아대 학생들이 전날 밤 광복동과 남포동에서 부산대학생들과 함께 휩쓸려 다니며 짜릿한 감동을 맛보았다. 이들은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던 학생들에게도 그들의 감동을 전해주었다. 낮 11시 30분쯤부터 본관 계단 밑 잔디밭에는 학생들이 모여 앉기 시작했다. 수업이 없던 학생들, 특히 정외과 2학년생들이 많았다. 정외과 간사 강명규는 이때 잔디밭에 있다가 지도교수에게 불려가 집으로 보내졌다. 나중에 그는 학생들의 집결을 주동했다는 혐의를 덮어쓰고 구속됐다.

학생들이 불어나자 교수들이 나섰다. '너희들 여기서 무엇들 하느냐?' 교수들의 질책은 앉아만 있던 학생들에게 좋은 표적을 제공했다. '우우.' 학생들은 교수들을 놀렸다. 함성과 박수로써 그들은 스스로 기세를 돋구었다. 데모를 하려고 모인 게 아니라 가슴에 가득 찬 울분을 짐승처럼 '우우' 하며 울부짖기 위해 모여 앉은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500명으로 늘어났다. 아직 리더는 나타나지 않았고 구호도 없었다.

관할 서부경찰서는 낮 12시 20분께 캠퍼스에 꽂아두었던 정보과 형사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영도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3개 소대 병력을 차에 태워 외곽에 대기시켰다. 낮 1시에 신순기 교무처장이 방송을 했다. '여러분의 지금까지의 행동은 학교에서 책임진다. 즉시 강의실로 들어가 주길 바란다.' 다섯째 수업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잔디밭에 있던 학생들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 거의 다 강의실로 들어갔다. 시위 같지도 않은 시위는 이것으로 끝난 것 같았다.

이날 정법대 2학년 학생 150명은 다섯째, 여섯째 시간에 운동장에서 교련 수업을 받게 돼 있었다. 139강의실엔 정법대 법학과 2학년생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련을 받을 수 있느냐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수업은 안 받더라도 강의는 받아놓자.'
실속 차리려는 어느 학생의 말에 김모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교련 수업 받으려면 받고 안 받으려면 나가자!' 유모군이 이 말을 받았다.
'나는 안 받겠다.' 유모군의 이말은 '나는 데모를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유형! 주동하려면 하고 않으려면 마시오!' 강의실 앞에서 한 학생이 외친 이 말이 신호가 됐다. 수십 명의 학생들은 집단 감전된 사람들처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은 교련복 차림으로 몰려나갔다. 그들은 옆 강의실의 문을 꽝꽝 찼다. 놀란 교수가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때가 어느 땐데 강의를 하고 있소?'

그들은 어깨동무를 한 채 본관 계단을 뛰어 내려가 운동장으로 향했다. 정외과 2학년생들이 잔디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합세했다. 이때 어느 교수가 맨 앞에 선 학생을 잡아당겼다. 학생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몇 학생들은 교수에게 붙들려 가는 학생을 잡아당겼다. 교수는 붙든 학생에게 되려 달려가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놈들을 잡아가라!' 교수는 고함을 쳤으나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200명으로 불어난 학생들은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이때 교내에 들어와 대기하고 있던 기동대 3개 소대가 페퍼포그를 쏘는 지프차를 앞세우고 사과탄을 던지며 쳐 올라왔다. 어깨동무를 한 학생들은 쫓기면서 도서관을 거쳐 본관계단으로 뛰어올라 달아났다. 이들을 구경하고 있던 2천명의 학생들도 최루개스를 피해 흩어졌다. 일부 학생들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구덕 수원지 쪽으로 계곡을 타고 달아났다. 경찰은 학생들이 흩어지자 병력을 뒤로 물리고 정문을 닫아버렸다. 이때 서부서 상황실엔 하단에 있는 공대 1학년생 200명이 버스를 타고 시내 쪽으로 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경찰은 공대생들이 본교의 데모대와 합류하기 위해 본교로 갈 것 같다고 판단, 본교의 정문과 후문을 봉쇄하고 4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흩어졌던 학생들은 잔디밭에 모여 애국가, [봉선화] [통일의 노래]를 불러댔다. 아직 구호는 나오지 않았다. 동아대학생들은 교내에선 이날 구호를 한번도 외치지 않았다. 이것이 부산대학교와 다른 점이었다. 학교당국에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경찰은 서너 명씩 나누어 띄엄띄엄 교문을 나서게 했다. 물론 교문 바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이 나가고 있는 동안에도 도서관 앞과 강의실에선 수백 명의 학생들이 남아 노래를 부르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김해수네들은 교문 바깥에 나오자 이대로 가만 두면 끝나버릴 것 같아 소문을 퍼뜨리기로 했다.
'저녁 6시에 남포동에서 모인다!'
'부영극장에서 [챔프](영화) 보자!'
소문은 쫙 퍼졌다. 동아대학생들은 데모의 시간 약속을 한 것이었다.

팽팽한 침묵 속에서 '야!'

17일 낮 광복동 일원 중부경찰서 경찰관들은, 17일 낮에는 사람들이 모이거나 웅성거리는 데 대해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17일 오전 8시 30분에 경찰서로 한 시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지금 보수동 개다리 근방에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데모를 하려는 모양입니다.' 흑교 및 보수파출소에 비상이 걸렸다. 경찰관들이 현장으로 뛰어나갔다. 그곳은 조용하기만 했다.

낮 12시 35분께 남포파출소에서 중부서로 첩보가 올라왔다. 낮 12시쯤 제일극장 앞 초원 양과점에 모인 너댓 명의 학생들이 나누는 얘기를 엿들었 더니 '연대장이 12시까지 이곳으로 오기로 했는데 안 나타난다'고 하더란 것이다.

이 첩보도 데모와는 관계없는 대화로 밝혀졌다. 오후 1시 5분께 부산 시경 정보과는 오후 2시에 부영극장 앞에 학생들이 집결하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 중부경찰서에 통보했다. 중부경찰서는 부영극장 앞에서 모이는 학생들이 있으면 까닭을 묻지 말고 다 잡아들이도록 지시했다. 2시부터 3시 사이에 29명의 부산대학생들이 붙들려왔다.

오후 3시 45분께, 옛 시민관 자리의 꽃밭에 80명쯤의 학생들이 앉아서 가을 햇볕을 받아가며 담소하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경찰은 긴장했다. 오후 4시 20분께, 동아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빠져나가 경찰 병력도 물러나고 있을 때 국제신문 앞 버스정류소에서는 동아대학생들이 무더기로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육교를 건너 광복동으로 밀고 들어갔다. 화단에 앉아 기다리던 학생들도 그 흐름에 섞여들었다. 뚜렷한 군중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국제신문 앞 정류장에서, 남포동 정류장에서, 대청로 정류장에서 학생들의 물결은 모두 광복동과 국제시장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16일 소문 없이 데모에 적극적으로 끼여들었던 고려신학생들은 오후 2시께 벌써 광복동거리로 나와 있었다. 그들은 정상 등교를 했으나 어제의 데모 얘기로 기분이 들떠 수업을 받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일부 교수들도 강의할 마음이 나지 않아 강의를 포기, 정오가 되자 학생들은 하나둘씩 학교를 나섰다. 그들은 광복동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을 제지하는 임무를 띠고 교수들도 몰려들었다.
'너희들 무슨 과 학생들이지?'
'우린 미팅 나왔어요. 내 파트너 어디 갔지?'
'쇼하지 마!'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는가 하면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한다는 말이 '야, 이거 데모 안하면 못 보겠는데…….'

이날 오후 광복동·남포동·국제시장엔 동아대·고신대학생들 이외에도 부산대학생들이 이틀째 집결하고 있었다. 부산대생들 가운데 더러는 어제의 중노동으로도 아직 가슴속 울분을 다 터뜨리지 못해 이날 또 거리로 나왔던 것이다. 이날 오후 광복동 일대는 젊은 인파로 술렁이기만 할 뿐 조용히 넘어갈 것 같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저 모였을 뿐 뚜렷한 시위 계획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그들은 골목골목에 주저앉거나 왔다갔다했다. 경찰도 외곽의 요소마다 진압 부대를 배치, 학생들의 눈치만 보았다.

17일 저녁 남포동 대낮에는 데모를 시작할 용기가 아무에게도 나지 않았다. 오후 6시까지 광복동 일대는 젊은 물결 속에서 팽팽한 긴장, 그리고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둘째날 밤의 축제, 그 막이 오른 것은 저녁 6시 30분 남포동 거리에서였다. 옛 남포극장 앞에 모여 있던 400명쯤의 군중이 '야!' 하는 부르짖음을 신호로 갑자기 두 갈래로 쫙 갈라졌다. 한 갈래는 구호를 외치며 광복동으로, 다른 갈래는 충무동로터리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거의 동시에 연쇄적으로 데모가 터졌다. 광복동에서 서성대고 있던 학생 300명쯤은 국제시장을 지나 부평파출소 쪽으로 뛰었다.

충무동로터리 쪽으로 가다가 경찰에 쫓긴 학생들은 국제시장 쪽과 부영극장 쪽으로 흩어졌다. 부영극장 앞에 모인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국제시장 밀가루 골목과 부평파출소 주변에 몰려 있던 군중도 목청을 드높여 애국가를 불렀다. 저녁 7시 20분께, 보수동파출소 앞에서 100명쯤의 젊은이들이 각목을 휘두르며 대청로를 따라 대청 제1파출소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파출소 앞에서 이들은 경찰의 공격을 받아 15명이 붙들렸다. 나머지는 용두산공원으로 도망쳤다.

'셔터가 안 눌러집니다!'

17일 밤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17일 밤의 주무대가 되고 있었다. 국제시장은 광복동과 남포동 거리보다도 오히려 더 좋은 데모 환경을 갖고 있었다. 가로 세로로 바둑판처럼 수십 개의 블록으로 구획된 국제시장은 외치고 달아나고 숨는 데는 안성마춤이었다. 국제시장을 가로세로로 꿰뚫는 길엔 밤만 되면 행상과 노점이 들어찬다. 이들은 경찰의 진압 활동에 장애물이 됐고 데모대에겐 응원 부대가 됐다.

이튿날 밤엔 광복동·남포동의 상가가 거의 셔터를 내리고 장사를 포기했으나 국제시장의 영세상인들은 점포문을 활짝 열어두고 피신해 들어오는 데모 대원을 받아주었다. 밀가루골목·먹자골목·포목상골목·청바지골목의 영세상인들은 계산에 빠른 광복동 상인들과는 달리 우직한 정의감으로 데모군중을 도왔다. 진열품을 와르르 무너뜨리며 학생들이 피해 들어와도, 먹자판을 뒤집어엎으며 데모 군중이 달아나도 그들은 '잘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동아일보』부산지사 박문두(朴文斗) 기자는 16일에 데모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다. 그는 정병주 부부 실종 사건을 취재한다고 북부경찰서에 있다가 데모 소식을 들었다. 다른 기자들처럼 그도 어차피 신문에 나올 수 없는 것인데 취재해봐야 무엇하겠느냐고 생각하여 취재를 포기했다. 데모가 엄청난 기세로 번진 것을 뒤늦게 안 그는 불안해졌다. 16일 밤 그는 카메라를 잠바 속에 숨기고 데모 현장에 나왔다. 플래시를 터뜨렸다간 봉변을 당할 것 같은 분위기에 눌려 그는 플래시 없이 몇 장면을 찍었다. 현상해보니 도저히 신문에 쓸 수 없는 사진이 돼 있었다.

17일 저녁 박기자는 다시 시위 현장에 나왔다. 오후 5시 국제시장에 그는 나타났다. 동아대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남녀간 짝을 이루며 데이트족을 가장했으나 책가방과 핸드백을 든 그들은 대학생의 모습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들은 행상으로부터 떡볶기를 사먹거나 먹자골목에서 가락국수 파티를 즐기고, 소주를 걸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의 데모 신호는 손뼉치기, 한 학생이 손뼉을 딱딱 치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쫙 모여들었다. 금새 50명쯤의 집단이 생겼다. 이들이 구호를 외치며 달려나가자 꽁무니엔 젊은이들이 잇따라 붙기 시작, 순식간에 2,3백 명으로 불었다. 손뼉치기에서 어깨동무가 짜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1분도 안 되는 것 같았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나오던 고등학생들 한 무리도 교련복 차림으로 데모에 가담했다. 이들 30명쯤은 책가방을 분식 센터에 맡기더니 데모대의 선두로 뛰어들었다. 그날 밤 이 고등학생들은 항상 앞장을 서 뛰어다녔다. 데모대는 경찰이 공격하면 달아나거나 흩어져버렸다. 금방 하늘만 멀뚱멀뚱 쳐다보는 산보객으로 변한 대학생들을 경찰은 바로 옆에 두고도 잡지 못했다. '뛰면 데모대, 서 있으면 선량한 행인'이었다.

경찰은 국제시장의 미로 속으로 병력을 들여보내는 것은 늪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국제시장 속의 데모대가 바깥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힘을 쏟았다. 국제시장의 주위, 곧 미국문화원·창선파출소·국제시장 네거리·보수파출소 앞에 소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 데모의 불티가 퍼뜨려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다. 박기자는 미국 문화원 아랫길에서 데모대 꽁무니를 따라다니다가 기회를 잡고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의 불빛에 놀란 젊은이 다섯 명이 그를 붙잡고 군중 속으로 끌고 갔다.

'뭐야?'
'『동아일보』사진부 기자다.'
'신문에도 못 내는 사진 뭣하러 찍나?'
'『동아일보』 요즘 형편없어.'
'그래도 『동아일보』인데 놓아주자.'
'필름은 뺏아야 한다.'
그들이 의논을 하는 사이 박기자를 잡은 손이 풀리자 그는 후닥닥 뛰어 달아났다. '『동아일보』라는 간판이 나를 살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밤 9시께 회사로 돌아왔다. 답답한 가슴을 가눌 수 없어 그는 서울의 본사 사진부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현장을 보고도 셔터가 안 눌러집니다.'
'역사적인 현장인데 꼭 찍어야지요. 그러나 몸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으니 요령껏 최선을 다하세요.'
박기자는 이를 악물고 다시 국제시장으로 돌아갔다.

완월동 사창가, 사상 최초의 휴업

국제시장 속의 데모대는 외곽을 지키던 경찰이 다른 데모대를 막느라고 병력을 옮기는 틈을 타 바깥으로 자주 빠져나가 서구와 동구로 데모를 확산시켰다. 국제시장은 17일 밤 데모의 인력공급 센터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날 밤 가장 먼저 습격을 당한 것은 충무동 로터리에 있는 서부경찰서 충무파출소였다. 옛 남포극장 자리에서 출발한 데모대는 부영극장 부근에서 한 차례 경찰의 공격을 받았으나 그 주력은 신민당 서·동구 지구당사 앞을 지나 저녁 7시 40분께 충무파출소를 덮쳤다.

이 파출소는 16일 밤 10시 50분께 에도 습격을 받았었다. 그때 데모대는 사이카를 뒤엎고 불을 지르고 전화기·거울·유리창을 마구 부수었다. 열 몇 명이나 되는 경찰관들은 달아나거나 다른 곳에 출동 가고 없었고 그들이 남긴 모자 열 개만 남아 있었다. 데모대는 이 모자를 한데 모아 불태워버렸다. 전날의 피습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충무파출소는 또 한번 박살이 나버렸다. 몽둥이와 돌멩이로 얻어맞은 파출소는 유리조각과 흩날리는 서류로 뒤덮였다. 서부서는 2개 소대 병력을 급히 충무파출소로 보냈다.

400명쯤의 군중은 완월동, 오성동, 초장동 등 세 방향으로 쫙 흩어졌다. 경찰은 이들을 집요하게 쫓으며 사과탄을 던지고 페퍼포그를 쏘아댔다. 완월동 사창가에도 고춧가루처럼 매운 페퍼포그의 안개가 몰려왔다. 유리방 속에 울긋불긋한 한복을 입고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나란히 앉아 손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던 창녀들은 코를 싸매고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1,500명이나 되는 이들 창녀는 장사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동양 최대의 유곽이 문을 닫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부산민중봉기가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에 큰 자극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데모대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한 한 번뿐이었다. 17일 밤 9시께 충무동로터리 쪽으로 몰려가던 수백명의 데모대는 김영삼의 출신구인 신민당 서·동구 지구당사 앞에 멈춰 섰다. 4층 당사 사무실에서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자 데모대는 서른 살 가량의 리더가 선창하는데 따라 '김영삼! 김영삼!'이라고 몇 번 외친 다음 충무파출소 쪽으로 뛰어갔다.

위기일발의 동부경찰서

국제시장에서 밤 8시께 경찰 포위망을 뚫고 나온 200명의 시위대는 메리놀병원 앞 고갯길로 치달았다. 제2대청파출소를 지나칠 땐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 25장을 모두 부수고 전투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어서 과격한 젊은이들이 쳐들어가 방범 오토바이를 길 한복판으로 끌어내 동댕이를 쳤다. 새나온 휘발유에 성냥을 그었다.

펑―불길이 치솟는 것을 뒤로하고 데모대는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군단처럼 고갯길을 넘어갔다. 이 원정 데모대는 가장 용감하고 과격한 그룹이었다. 대학생들보다는 식품접객업소 종업원들과 일반인들이 더 많이 섞인 집단이었다. 이 시위대는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을 흡수하여 눈사람처럼 커지면서 파죽지세로 동부경찰서 관내를 결딴냈다. 이들은 영주동 육교 앞에서 초량 뒷길로 꺾었다. 8시 20분께, 제1초량파출소, 8분쯤 뒤에는 제2초량파출소를 박살냈다. 기물을 부수고 사이카는 불질렀다. 이들은 달리다시피 하여 국제시장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고관파출소로 쳐들어갔다.

그때 이 시위대는 원정출발 때보다 다섯 배나 불어 1천 명 가량에 달했다. 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관파출소를 으깨어버렸다. 경찰관들은 2층 숙직실·화장실·책상 밑으로 숨어들었다. 데모 군중은 전화선도 끊어 버렸다. 성난 군중은 다시 동부경찰서로 달려갔다. 이때가 밤 8시 55분. 시위대는 너비 35미터의 간선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부서와 맞섰다. 부산진역 앞을 차지한 그들은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쳤다. 4·19때 기관총알을 쏘아댔던 이 경찰서를 향해 군중은 유리병과 돌멩이를 팔매질했다.

그때 동부서 안에는 직원50명만 남아 지키고 있었다. 머리 수자에 있어서 턱도 없는 열세에 몰린 경찰관들은 부지런히 사과탄을 시위대에게 던졌다. '막강 동부서'라고 외쳐댔다. 저녁 반주에 얼얼해 있던 이모, 조모 두 순경은 안전핀을 뽑은 사과탄을 들고 '형님 먼저' '아무 먼저' 하다가 경찰서 안에서 사과탄을 터뜨려 동료 직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군중은 사과탄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칫하다간 군중이 경찰서로 몰려들어 점거할 것만 같았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구조 요청을 받은 제2기동대의 3개 소대 병력이 작전차를 타고 달려온 것이다. 이들은 군중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KBS도 함락 직전

시위대는 남쪽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경찰은 추격은 하지 않고 동부서 자체 방어에 들어갔다. 쫓겨난 군중은 동부서에 300미터쯤 떨어진 KBS 부산방송국을 덮쳤다. 그때 보도국 당직 기자는 중부서 흑교파출소 피습 장면을 취재하고 있던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여기 데모대가 우리 방송국을 습격하러 가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직 기자는 전화기를 놓자마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구호를 들었다. 그는 너무 빨리 닥친 데모대에 놀랄 겨를도 없이 건물 안의 전등을 모두 끄도록 시켰다. 그는 전화로 경찰을 불러 구원을 요청했다.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 직원들이 앞다투어 달아나는 것도 내려다보였다.

마침내 유리병과 돌멩이 포격이 시작됐다. 우당탕탕, 와지끈, 유리창이 깨지고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군중이 구름처럼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경비원은 꽃밭에 엎드려 몸을 숨겼다. 그들은 마당에 세워둔 TV중계차를 각목으로 때려 박살을 냈다. 건물 안으로 난입하면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가 생길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군인들이 쳐들어온다'고 한 시위자가 소리질렀다.

동부서 쪽에서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타고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데모 군중은 혼비백산했다. 앞을 다투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 군인들은 계엄령 선포에 대비, 시내로 배치되고 있었지 데모 군중을 쫓으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이 우연의 일치가 KBS를 구했던 셈이다. 세 시간에 걸쳐 여섯 곳의 파출소와 경찰서 및 방송국을 습격하여 수백 장의 유리창을 부수고 사이카 여섯 대를 불태운 이 원정 데모대는 여기서 완전히 사그라져 버렸다.

법원은 습격 안해

밤 9시 30분께 국제시장에 돌아온 박기자는 데모대가 사나와진 것을 느꼈다. 데모대의 구성원이 크게 바뀌어 있었다. 학생층은 줄고 비학생층이 데모대를 휘어잡고 있는 듯했다. 데모대는 몽둥이와 유리병을 휘두르며 셔터를 내린 시장 점포 앞의 차양대를 두들겨 부수기도 했다. 박기자는 택시에서 내린 대학생 모습의 네 청년이 'KBS를 부수고 오는 길이다'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다. 이들은 동구 원정 데모대에 끼여 한바탕 뛰었는데도 울분이 다 안 풀렸는지 다시 국제시장에 돌아온 것이었다. 국제시장을 꽉 메웠던 데모대는 포위망을 뚫고 대청로로 한 가닥씩 뛰어나가고 있었다.

이날 국제시장 안에서 데모를 이끌었던 동아대학생들 중엔 서구 대신동 쪽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데모를 하게 됐다. 9시에서 10시 사이에 국제시장을 탈출한 데모대는 대청로를 따라 부산지방법원 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일부는 좌회전하여 대학병원 쪽으로, 대부분은 오른쪽으로 꺾어 경남 도청쪽으로 달렸다. 시위대의 교차로가 된 부산지방법원 앞으로는 이틀간 수십 차례 데모 군중이 지나다녔으나 법원은 한번도 습격 당하지는 않았다. 민중은 아직 사법부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데모대는 부용동로터리를 거쳐 밤9시 45분께 서부서 앞을 지나가며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다. 경찰이 데모대 열 명을 붙들어 흩어버리자 이들은 대신로터리에서 다시 모여 오른쪽으로 행진, 동신대동에서 시위를 벌인 뒤 다시 중구 쪽으로 내려와 흑교파출소를 습격했다.

이때 박기자는 다시 회사 사무실에 돌아와 있었다. 또 서울의 사진부장 집에 전화를 걸어 울먹이는 소리로 하소연을 했다. 사진부장에게 얘기를 해봤자 시위대가 그를 잘 봐줄 리가 없다, 그래도 박기자는 조금 전 국제시장에 다시 나갔을 때 이미 이 데모가 '큰 사건이 되겠다'는 예감을 강하게 느꼈었다. 이것은 그때 데모 현장에 있었던 거의 모든 기자들의 공통된 예감이었다.

기자들의 직업적 본능이 역사적 대사건의 냄새를 맡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박기자는 아직 사진 한 장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또 차를 몰아 현장으로 나갔다. 어둠속의 대청로는 시가전을 치룬 거리 같았다. 유리조각, 돌멩이, 각목 등이 어지럽게 깔려 있었다. 양쪽 상가와 주택가는 문을 꼭꼭 처닫고 전등불을 꺼버려 암흑천지였다. 박기자는 데모대가 도청 쪽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뒤쫓아갔다. 마주치는 시내버스의 유리창은 모두가 박살이 나 있었다. 도청의 게시판과 경비실도 돌과 각목 세례를 받고 크게 부서져 있었다.

부용로터리엔 차와 인파가 뒤엉켜 있었다. 통금시간이 다가오자 집으로 돌아가려는 데모대는 시내버스를 멈추게 했다. 문을 열지 않고 달아나는 시내버스에 돌을 던지고 각목으로 승강문을 부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버스 창문에 매달려가는 청년도 있었다. 이때 경찰의 데모 진압부대가 개스차를 앞세우고 이들을 덮쳤다. 경찰은 건성으로 데모대를 흩어버리곤 돌아갔다. 경찰도 지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