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셔터를 못 누르고

17일밤 12시 서부서 앞 데모대는 경찰이 사라지자 다시 엉켜 붙었다. '서부서로 가자'는 소리가 나왔다. 천 명쯤이나 되는 데모대는 서부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박기자는 '됐다!'고 무릎을 쳤다. 그는 데모대를 앞질러 서부서 앞에 먼저 도착했다. 취재차를 달아나기 쉽게 뒤로 돌려놓고 시동을 걸어놓은 채 그는 데모대를 기다렸다. 이윽고 너비12미터쯤 비탈길을 꽉 메운 시위대가 저 아래 모퉁이에서 우루루 몰려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앞장선 젊은이들은 각목·유리병을 휘두르며 뛰다시피 달려오고 있었다. 박기자는 차에서 내려 차를 방턴벽처럼 싸고돌며 기회를 기다렸다. 카메라 렌즈에 눈을 갖다 댄 그는 데모대의 일부가 서구청에 돌을 던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박기자는 적어도 시위대가 10미터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위대는 질서도 없이 어깨동무도 하지 않고 마구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길 양쪽에 붙은 사람들은 몸을 가릴 곳이 있다는 방어 심리에서 길 가운데 대열보다도 앞질러 뛰어올라왔다. 박기자는 오목렌즈처럼 굽어진 선두 대열의 속에 들게 됐다.

박기자는 셔터를 눌러 사진이 나올 수 있는 최근접거리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하나, 둘, 셋……. 박기자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말고 후닥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렌즈를 꽉 메우며 들이닥친 것은 군중이었다. 박기자는 데모대가 이렇게 빨리 접근할 줄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확―데모대가 몰려오자 박기자의 행동은 머리의 명령을 받지 않고 반사신경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시동 걸린 차 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차가 비탈길을 느린 속도로 올라가자 겁이 덜컥 나 차에서 뛰어내려 서부경찰서로 달려가 몸을 피했다. 뒤돌아보니 30명쯤의 경찰관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고함을 지르며 데모대를 향해 정면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숫자에서 절대 불리한 경찰은 '공격이 가장 좋은 방어'라는 교훈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경찰은 쳐들어가면서 사과탄을 있는 대로 다 던졌다. 그리곤 곤봉으로 닥치는 대로 데모대를 두들겨 팼다.

폭발음과 고함소리와 비명이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뒤엉켜 나오더니 조용해졌다. 데모대는 오던 길로 물러났다. 박기자는 상황실로 올라갔다. 경찰관들이 뒤따라 올라오더니 '사과탄이 동났다'고 사색이 되어 발을 굴렀다. 상황실에선 산하 파출소에 사과탄을 있는 대로 거두어 서부서로 가져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지원 병력이 5분 뒤에 서부서에 당도할 것이다'는 통보가 시경으로부터 날아왔다. 그러나 물러난 데모대가 그 전에 다시 공격을 해온다면 서부서의 함락은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데모대는 다른 길을 잡고 구덕경기장 쪽으로 진출, 구덕파출소를 때려부수었다. 박기자는 상황실에서 비로소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큰 사건이 돼버렸구나. 그런데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었다. 이게 뭐야. 사진 기자로서 현장을 보고 셔터를 못 누른 것은 말도 안 된다. 나는 사진기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나이 탓인가. 아니다, 용기가 없는 탓이다. 그때 셔터를 누르고 데모대에 맞아 죽어야 했었다. 왜 그렇게 못했나. 다섯 해 전 현대조선 폭동 사건 때는 경찰관들의 곤봉세례 속에서도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부둥켜안은 채 쓰러져 짓밟히지 않았던가…….'

박기자는 담배를 피우며 똑 같은 폭동의 현장에서 똑같이 행동할 수 없었던 까닭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부산봉기에선 사진을 찍어도 신문에 날 수 없다는 생각이 모든 사진 기자들을 조금은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꼭 찍어야겠다는 집념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박기자와 다른 대부분의 기자들은 부산데모를 취재하라는 회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있었다. 긴급조치 아래에서는 이런 기사나 사진은 실을 수 없다는 자기검열, 그것은 취재를 포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많은 기자들이 그날 현장에 나왔으나 기록자로서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행동했다. 박기자는 이런 큰 사건의 생생한 장면들을 부산의 기자들이 찍어두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때가 곧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학의 감정을 떨치고 일어나 최루개스가 자욱한 밤거리로 나섰다.

여관으로 개스 발사

조갑제 기자는 17일밤 8시께 광복동으로 나갔다. '오늘은 어려울 것이다'고 그는 생각했지만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갖고 어제의 데모 현장으로 나선 것이었다. 광복동 거리는 젊은이들로 메워져 있었다. 책가방을 낀 교련복 차림의 대학생들, 더벅머리 재수생들, 근처 상점이나 술집 종업원들인 청년들, 멋적은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다보는 대학교수들, 데모 주모자를 잡겠다는 사복 형사들이 뒤섞여 여기저기 엉켜 있었다.

군중의 수자에 견주어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초조하고 안타까운 표정의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점포 주인들에겐 문을 닫도록, 시민들에겐 집으로 돌아가도록 마이크로 권하고 돌아다녔다. 자리를 뜨는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앞장을 서고 나설 만한 용기를 그들은 갖지 못했다. 불을 당길 사람만 나타나면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겠다는 마음들이었다. 군중은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리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얄호텔에서 모임을 끝낸 사람들이 몰려나오자 아무런 까닭 없이 그쪽으로 밀려갔다. 사람이 사람을 모았다. 어떤 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면 그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또 사람들이 모였다. 무슨 일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청년들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만 따라다니며 불을 붙여줄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화의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았다.

밤 9시 30분께부터 군중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휘파람소리, 야유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군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50명쯤의 청년들이 길 복판으로 나섰다. 어깨동무를 하더니 시청을 향해 나아갔다. 어느새 군중이 그들 뒤를 구름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손뼉을 치며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은 기세를 돋구었다. 100미터 앞에는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총을 가진 백인들을 향해 오로지 머리 수자와 기세만 믿고 대어드는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그들은 도전했다. 한 30미터 접근했을 때였다.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퍼포그를 뿌리면서 지프차가 어슬렁어슬렁 굴러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경찰이 따라왔다. 그러면서 사과탄을 던졌다. 데모대의 선두는 흰 연기와 폭발음에 휩싸였다. 시위대는 무너져 내렸다. 선두부터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기자도 골목으로 달아났다. 무엇에 채여 그는 넘어졌다. 뒤따라 달아나던 사람들이 잇따라 그의 위를 덮치며 넘어졌다. 조기자는 부리나케 일어나 근처 여관으로 뛰어 들었다. 뒤따라 서너명의 시민들이 숨어들자 여관 주인은 현관문을 잠그고 안으로 사라졌다.

이때였다. 페퍼포그 분사기를 짊어진 두 경찰관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들며 현관과 복도에서 서성대는 손님들의 코앞에서 바로 개스를 뿜어댔다. 조기자는 그들이 파리약을 뿌리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닫혀진 여관 속은 안개 같은 개스로 휩싸였다. 기침, 눈물, 아우성. 잠옷 바람으로, 더러운 속옷 바람으로 투숙객들이 콜록대면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변소 옆에 붙은 세면장으로 달려갔다. 우선 눈을 물로써 씻어내야 따가운 통증이 가실 것 같았다. 그러나 세면장은 만원이었다. 조기자는 하얀 개스를 피해 변소로 들어갔다.

문을 꼭 닫았으나 개스는 문틈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조기자는 불길 사이를 지나는 기분으로 후닥닥 여관 밖으로 달아났다. 여관 바깥에선 흩어졌던 청년들이 군데군데 다시 모이고 있었다. 부산 남교회 앞에는 대학생, 재수생, 접객업소 종업원들이 뒤섞인 50명쯤의 군중이 한창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래선 안되겠다. 복수를 하자.'
'안 된다. 폭력을 써선 안 된다.'
'폭력엔 폭력으로 맞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강경론이 이겼다. 그들은 모두 빈 맥주병을 머리 위로 휘두르면서 골목을 지나 큰길 쪽 경찰 진압부대를 나갔다.

가혹해진 경찰 진압

17일 밤 부산시 중심부 밤이 깊어감에 따라. 또 시위가 폭동화함에 따라 경찰의 대응도 가혹한 면을 띠게 되었다. 대낮에는 경찰도 시민들이 지켜보는 속에서 시위자를 심하게 다룰 수가 없었다. 부산 운동권의 핵심인물인 최준영(당시 26세)은 16일 오후 미국문화원 앞 육교 위에서 시위 구경을 했다. 경찰관 네 명이 한 학생을 잡아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소리쳤다. '경찰 죽여라.' 이순간 숨을 죽이며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입을 모아 '저놈 죽여라'고 소리쳤다. 경찰관들은 이 소리에 놀란 듯 엉겁결에 학생을 놓아주었다. 이처럼 시민들의 응원은 경찰의 구타 행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달아나는 시위대의 꽁무니에 있다가 잡힌 사람, 사진 기자. 데모대가 휩쓸고 지나간 현장에서 서성대다가 데모대원으로 오인된 시민들이 뭇매를 맞았다. 동주여상 야간부 2학년 학생 서혜인은 17일반 9시 40분께 대청동 한국은행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경찰이 던진 사과탄을 얼굴 정면으로 받았다. 사과탄이 혜인의 얼굴에서 폭발, 땅콩만한 플라스틱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혜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같이 가던 친구들이 그를 침례병원으로 옮겼다. 코와 눈, 귀, 이마가 찢어져 피투성이 되고 파편도 박혀 있었다. 완치하는 데 여섯 달 걸린다는 진단을 받았다.

17일반 10시쯤 『국제신문』김정주 기자는 남포파출소 앞에 있었다. 경찰 순찰차가 지나가자 길 양쪽에서 돌멩이와 유리병이 날아왔다. 차는 때아닌 우박을 헤치며 달아났다. 이것을 보고 경찰이 데모대를 공격했다. 경찰은 달아나는 데모대를 뒤쫓았다. 꽁무니엔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된 한 중년 신사가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경찰관들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김기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그를 부축하여 이웃 음식점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식당주인이 덩달아 흥분, '선량한 시민을 왜 때리느냐'고 경찰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부영극장 앞에선 경찰관 네명이 한 학생을 질질 끌고 가다. 학생이 발버둥을 쳐 웃옷이 벗겨져 배가 드러나자 구둣발로 배를 짓밟아 완전히 뻗게 했다. 구덕운동장 앞 주택가에선 한 집주인이 봉변을 당했다. 그는 차고 문을 열고 승용차를 집어넣은 직후였다. '넌 뭐야! 빨리 집에 들어가!' 데모대를 쫓던 경찰관이 말했다. '이게 우리 집인데 무슨 소리야?' 경찰관들은 건방지게 대꾸한다고 마흔 살 가량의 시민을 개 패듯이 두들겼다. 가족들이 뛰어나와 울고불고하자 경찰관들은 비로소 그를 풀어주었다.

붙들려가 묵사발 된 사진 기자

『국제신문』사진부 김탁돈 기자는 17일 밤 카메라를 가방 속에 감추고 데모 현장으로 나갔다. 밤 10시에 그는 광복동 동양관광호텔 앞에서 데모대가 경찰과 충돌하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관 세 명이 한 시민을 붙들어 머리·허리·어깨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김기자는 경찰버스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버스 뒤에 숨어 이 폭행장면에 렌즈를 조준하는 순간 그는 뒤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전투경찰관 세 명이 건장한 김기자의 허리를 끌고 가더니 발길질을 했다.

'『국제신문』사진부 기잡니다.'
'기자면 다냐.'
'죽어버려!'
몽둥이·주먹·발길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는 카메라 가방을 안은 채 쪼그리고 앉았다. 한 경찰관이 가방과 카메라를 빼앗아갔다. 플래시와 필름은 빼앗기지 않았다. 김기자는 재빨리 플래시를 웃옷 호주머니에 필름은 오른발 양말 속에 감추었다.

그는 곧 닭차에 옮겨 태워졌다. 여기서도 한 차례 타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엔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스물여덟 명의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한 부산대학생의 가방에선 돌멩이가 수십 개 쏟아져 나왔다. 전경들은 이 학생이 뻗을 때까지 갈겼다. 이 닭차는 남포파출소로 가서 그곳에 있던 전경 서른 명을 또 태웠다. 붙들린 동아대학생 다섯 명도 탔다. 전경들은 머리를 드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몽둥이질을 또 해댔다. 한 동아대학생은 발길질을 입으로 받았다. 앞 이빨 세 개가 부려졌다. 닭차는 서대신동 쪽으로 달렸다. 경찰관들은 김기자를 비롯한 연행자들에게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박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이 차가 데모대를 잡아가는 줄 눈치 채이면 돌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대신 파출소에 차가 닿자 경찰은 이들을 내리게 했다. 이 파출소 근처에는 지친 기동대 경찰관들이 퍼져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은 데모 피의자들이 내리는 것을 보자 파출소 앞에 양쪽으로 늘어섰다. 이 인간 터널 속을 피의자들을 지나가야 했다. 주먹·발길·몽둥이 세례. 김기자는 여기서 신문기자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겠다고 판단하여 입을 꽉 다물고 두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길이 30미터 가량의 터널을 빠져나갔다. 가슴을 걷어 채여 한 번 넘어졌으나 벌떡 일어나 걸었다.

대학생들은 더 많이 얻어맞았다. 파출소 안에서 경찰관은 몽둥이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이들을 헤아렸다. 파출소에선 서부경찰소로 전화를 해보더니 이들을 모두 서부서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다시 닭차에 올라타게 된 그들은 두 번째로 인간터널을 지나가야 했다. 김기자 일행은 서부서 즉결심판자 대기실에 수용됐다.

빽빽이 피의자들이 들어차 경찰관들은 어깨를 밟고 다니며 수자를 헤고 있었다. 젊은 전경이 보호실까지 따라 들어와 몽둥이질을 하고 그것을 한 시민이 피하려다가 유리창을 박살냈다. '대원들은 나가라'고 서부서 직원이 언짢은 듯 소리쳤다. 김기자가 가만히 보니 그 직원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신경사요. 접니다.'
'어? 어떻게 된 거요.'
'어서 나오시오.'
이렇게 해서 김기자는 두시간 만에 풀려났다. 그는 얻어맞은 분노보다도 사진을 놓친 것이 안타 까와 미칠 지경이었다.

불알 터져 생식기능 장애

양복공장 종업원 안승록(당시 21세)은 17일밤 8시 20분께 부산대학병원 앞 골목에서 경찰관들에게 붙들렸다. 승록은 그때 공장에서 퇴근, 형 집으로 저녁밥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5, 6명의 경찰관들이 덮쳤다. 한 사람이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발로 차고 머리·어깨를 몽둥이로 난타했다. 승록은 그때야 자기가 시위자로 오인된 것을 알았다. 데모대는 법원 쪽에서 대학병원 쪽으로 가다가 경찰의 공격을 받고 골목으로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죄 없습니다'고 그는 끌려가면서 소리질렀다. 승록은 경찰서 보호실에 붙들려가 수용됐다. 잡혀온 시민들이 빽빽이 앉아 있었다. 경찰관들은 그들의 어깨를 밟고 다니고 있었다.

승록은 아랫배가 당겨 끙끙 앓기 시작했다. 잡힐 때 한 경찰관의 구둣발에 채인 고환의 상처 때문인 것을 알았다. 허리도 못 펼 만큼 통증은 심해갔다. 소변을 보려고 했더니 야구공만큼 자지가 부어 있었다. 오줌도 잘 나오지 않았다. 승록은 담당 경찰관에게 아파 죽겠다고 호소했다. 경찰에선 승록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 주사 두 대를 맞힌 뒤 다시 보호실에 집어넣었다.

다음날 오전 안승록은 형사계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얼마 받고 데모했나'고 형사는 캐물었다. 조사를 받고 난 뒤 안승록은 발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게 됐다. 그곳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찰은 그제야 승록을 중앙동 광산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입원한지 스무 날이 지났을 때 고환 절제수술을 받았다. 그는 성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고자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곧 발기기능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죽은 정충이 많이 섞여 나와 생식 능력에 타격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의사는 오른쪽 고환이 아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도에 있던 안승록의 아버지는 지서로부터 아들의 신원조회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아들이 무슨 큰 죄를 지은 줄 알았던 이 노인은 아들이 데모에 가담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졸도하여 이틀간 누워 있다가 지팡이를 짚고 병원으로 찾아왔다. 승록은 보호실에 있을 때 사타구니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시멘트 바닥을 흥건히 적셨는데도 경찰이 치료를 제대로 시켜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을 늦추는 바람에 생식기능이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입었다고 원망하고 있었다. 10·26사건이 나고 한 달 스무하루 만에 그는 퇴원했다.

부산 시장과 군장성이 병원으로 찾아와 22만원의 위로금을 전달하고 사과를 했다. 한편 안승록의 형은 경찰이 미리 등사하여 가져온 각서에 서명했다. 데모에 가담했으나 이를 뉘우치니 용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동생이 데모에 가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그의 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말썽이 없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이 각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말았다.

냉담해진 광복동 상인들

17일 밤에도 시민들의 가세는 계속됐다. 이날 밤 경찰에 붙들려 중부서에서 조사를 받은 시위 피의자는 91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학생은 2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25명이었다. 나머지 66명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중부경찰서에서 16일에서 18일까지 사흘간 조사한 260명의 피의자들은 부산대학생 45명, 동아대학생 5명, 다른 대학교 학생 20명, 종교인 2명, 신민당 및 통일당원 2명, 일반인 186명이었다. 이 성분 분포는 그대로 부산 시위 군중의 성분 분포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앞장을 서고 시민들이 뒤를 미는 연합전선이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큰 생산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거의 데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식품 접객업소·양복점·가구점 종사자들과 구두 닦기, 자유 노동자, 운전사들이 오히려 더 많이 가담했다. 모두 억눌려 살아온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가담으로 17일 밤의 데모가 난동의 성격을 띠게 됐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데모대의 파괴·방화·폭력 행위엔 분명한 절제의 선이 그어져 있었음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데모대는 결코 민간인들의 점포나 기물을 부수지는 않았다. 혼란을 틈탄 도둑질도 없었다. 경찰관을 납치하지도 않았고 총칼과 같은 치명적인 흉기도 쓰지 않았다. 쉽게 만들 수 있는 화염병도 나타나지 않았다.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엔 손대지 않았다.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때려부술지언정 빼앗아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 계획적이고 범죄적인 난동은 없었다. 모두가 우발적이고 폭발적인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시위대의 수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이를 막는 경찰관은 3천 명이나 됐으며 사흘간이나 야간 데모가 벌어졌는데도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데모대의 행동이 적어도 포악하지는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17일 밤의 데모 현장이 16일의 광복동·남포동에서 국제시장과 서구 및 동구로 옮겨짐에 따라 시민 호응의 양상도 조금은 바뀌었다. 영세상인·노점상·행상들이 적극적으로 데모대를 응원한 데 비해 광복동·남포동의 부유한 상인들은 16일 밤의 열광적 응원에서 돌아서서 조금 냉담해졌다. 부산대학생 최현주는 이날 밤 광복동의 다방 종업원들 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을 알았다.

최루개스에 쫓겨 어느 다방에 피해 들어갔다. 종업원은 '학생들 때문에 장사 못하겠다'고 짜증을 내면서 현주 일행을 몰아냈다. 또 다른 다방에 갔더니 '경찰관을 불러 잡아가도록 해야겠다'고 주인이 신경질을 냈다. '대중은 역시 교활하다'고 현주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갈치 아지매들'은 여전히 따뜻하게 데모대를 맞아주었다. 자갈치시장에서 현주는 청년 둘과 함께 경찰을 피해 횟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횟집을 향해 경찰은 사과탄을 던졌다. 음식점은 수라쟁이 됐다. 현주는 염치 불구하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숨었다. 길 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보니 경찰관들이 청년들을 잡아 끌어가고 있었다. 현주는 겁이 와락 나 이불을 덮어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학생! 학생! 이제 내려와요.' 식당 주인 아줌마는 현주를 부르더니 '지금 빨리 달아나라'고 했다.

압송차 문 열어주고 달아난 시민

고신대 연수과 3학년 송길원은 17일밤 7시께 대청동 미국문화원 앞에서 사복 형사 두 명에게 붙들렸다. 가까운 대청파출소로 끌려간 그는 이미 붙들려와 있던 다른 시민들과 함께 눈을 감고 엎드려 있어야 했다. 송길원은 기독교 청년단체인 SFC 회장이었다. 그 명함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불안했다. 데모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단체까지 욕을 볼까 걱정이 됐다. 그는 슬그머니 잠바 호주머니에다가 주민증과 명함을 집어넣고 내버릴 틈을 엿보았다.

파출소의 창문은 인접한 한국은행 부산지점 마당과 붙어 있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잇따라 붙들려오자 피의자들은 서 있어야 했다. 이 틈을 봐서 길원은 열린 창문 쪽으로 잠바를 내밀고 던졌다. 은행 경비원 노인이 오더니 잠바를 받아주었다. '내일 찾으러 오겠으니 좀 보관해주십시오.' 이 노인은 이미 학생들의 옷가지와 가방 따위 소지품을 많이 받아 쌓아두고 있었다.

밤 8시께 길원은 다른 피의자들과 함께 닭차에 태워졌다. 이 차는 중부경찰서로 달리다가 옛 현대극장 앞 신호대에 정지신호를 받고 멈췄다. 이때 한 대학생이 신문지를 똘똘 말아 철망 사이로 내밀고 흔들었다. 구조 요청 신호였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달려오더니 닭차의 뒷문을 바깥에서 열어 주었다. 이때야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눈치를 챈 호송 경찰관이 운전석 옆자리에서 뛰어 내렸다. 남자는 재빨리 달아났다. 그러나 아가씨는 붙들렸다. 압송중인 피의자들은 미쳐 달아날 수가 없었다. 경찰관은 영업용 택시를 잡아타고 닭차의 뒤를 따라오며 중부경찰서까지 호송했다.

17개소의 공공기관 피습

17일 밤 데모대는 열일곱 군데의 공공기관 건물을 습격하여 파괴했다. 언론기관 세 곳, 경남도청과 중부세무서, 경찰서 두 곳, 파출소 열 군데. 16일 밤에는 언론기관 한 곳, 파출소 열한 곳이 습격을 당했다. 이틀밤사이 스물 여덟 번에 걸쳐 공공기관이 파괴된 것이다. 이 가운데 일곱 군데 파출소에선 데모대가 오토바이, 자전거, 모자, 서류 따위에 불을 질렀다. 16일 밤엔 중부서 및 서부서 관내 파출소가 주로 수난을 당했다.

17일 밤엔 데모의 확산으로 동부서 관내 파출소들이 곤욕을 치렀다. 남포파출소·충무파출소·보수파출소·흑교파출소는 두서너 번씩 습격을 받았다. 데모대 가운데에는 공공기관의 습격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파출소를 지키던 경찰관의 호소로 곱게 돌아간 데모대도 있었다. 부산진서 광무파출소에선 다른 파출소들이 습격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네 유지들을 모셔와 경찰관과 함께 파출소를 지키게 하여 만약 데모대가 몰려오던 그들을 설득할 수 있게 했다.

습격 받은 언론기관은 부산문화방송·한국방송공사 부산방송국·부산일보사였다. 데모의 현장인 광복동에 자리잡은 기독교 부산방송국은 안전했다. 유신체제 아래서 이 방송국이 보여준 용기 있는 자세에서 큰 덕을 본 것이었다. 국제신문사는 부산 시경 바로 옆에 있어 데모대가 감히 습격할 수 없었다. 파출소 습격은 하나의 화풀이였다. 파출소 병력이 거의 진압 부대로 빠져나가 자체 방어 병력이 적었던 것도 습격을 부른 원인 중의 하나였다.

데모대는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오토바이를 엎어 기름이 새나오면 불을 놓는 것에 만족했다. 파출소 건물에 불을 지른 적은 없었다. 파출소의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파출소나 경찰서를 오랫동안 점거하려고 꾀하지도 않았다. 모자를 모아놓고 불태운다든지 박정희의 사진을 짓밟고 태워버리는 따위의 상징성 있는 분풀이는 더러 있었다. 포악·처참·잔인한 수법의 습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표적으로 삼은 언론기관은 그 나름대로 정확하게 선별된 것이란 평가를 기자 사회에서 받았다. 민중의 분노는 폭발적이라고 해서 결코 눈 먼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17일 밤의 기관 습격은 대체로 밤 9시 이후에 이뤄졌다. 이것은 밤이 깊어갈수록 데모대에서 대학생들의 비중이 줄어들고 비학생층이 시위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데모대가 겁이 없어지고 경찰의 대응 능력이 한계에 이른 것도 이때였다.

국제시장 일대의 시위 현장에선 밤 9시 45분 흑교파출소가 200명의 군중으로부터 습격 당한 것을 비롯 10분 뒤엔 남포파출소 안에서 데모피의자가 신문지를 모아놓고 불을 지르다가 붙들렸고 15분 뒤엔 부산 문화방속국에 100명의 군중이 몰려와 돌팔매질을 한 뒤 달아났다.

이 방송국은 16일에 이어 두 번째 습격을 당한 것이었다. 밤 10시 30분께 보수파출소가 300명의 데모대에 의해 파괴됐다. 밤 11시 15분께엔 흑교파출소에 데모대가 쳐들어와 전화선을 끊어버린 뒤 유리창 38장, 현관문 2장, 국기봉, 대통령 사진, 전화기 3대를 박살냈다. 서부서 관내에서도 밤 9시께 부민파출소가 돌팔매질을 당한 것을 신호로 서구청과 서부경찰서(9시 40분), 도청(11시 12뷴), 구덕파출소(11시 45분)가 차례로 습격 당했다.

군사령관 차도 피습되다

밤 9시 30분께 2관구 사령관 정상만 소장은 청와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데모 상황을 현장에 직접 나가 알려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비상계엄령 선포를 결정하기에 앞서 지역 관할군 사령관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정소장은 시경국장과 함께 둘러보려고 했다. 송제근 시경국장은 그러나 절정에 달한 데모진압작전을 지휘하느라고 상황실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경무과장을 자기 승용차에 태워 대신 내보냈다. 헌병 백차가 앞에서 호위하고 그 뒤를 사령관 차와 시경국장 차가 뒤따랐다. 이들이 광복동을 지나 국제시장을 거쳐 대청로에 이를 때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데모대도 번쩍번쩍 경고등을 돌리면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압도됐는지 길을 비켜주거나 숨을 죽이고 지켜볼 뿐이었다. 석 대의 차가 미국문화원 앞에 도착했을 때 교통 체증이 생겨 다른 차들과 함께 잠시 멈춰야 했다. 이때 이 부근을 지나던 300명쯤의 시위대가 이들을 향해 유리병·돌멩이를 날리기 시작했다. 각목을 휘두르면서 성난 군중이 몰려왔다. 맨 앞차에 탔던 헌병들이 뛰어내렸다. 사령관과 경무과장도 뛰쳐나와 피신했다. 이때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권총을 쏘려는 것을 사령관이 막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군중은 세 대의 차를 박살내 버렸다. 한참 뒤에 견인차가 와서 이들을 끌어냈다. 차의 지붕은 데모대원들이 올라가 쿵쿵 뛴 바람에 내려 앉아버렸다. 시동도 걸리지 않았다. 정상만 당시 소장(예편)은 최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 차가 피습 당한 것은, 군 차량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피해 정도가 심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그날 밤 서울에서 군 병력으로 사태를 진압해야 할 정도냐고 물어왔을 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뒤에 들으니 차지철 경호실장이 내가 비협조적이라고 화를 냈답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 상부에서 조사팀이 내려왔는데 제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납득을 합디다. 지금도 그 사태는 군의 투입 없이 경찰 병력만으로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