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구타로 뇌수술 받기도

정부가 계엄령 선포 직후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공수단과 해병대를 긴급 투입한 것은 부산사태를 철저하게 진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잉대응이었다. 파리를 잡는 데 도끼를 휘두른 꼴이었다. 현지의 군 지휘관은 위수령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고, 경찰 병력만으로도 사태 장악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비상계엄령에다가 특수부대 투입이란 고단위의 진통제가 투여된 것이었다.

특수부대는 적과의 싸움에서도 가장 위험성이 높은 특수한 전투 목적에 쓰여야 할 부대이고 훈련도 그런 식으로 받아왔다. 이런 부대가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 애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부대의 성격상 과격한 진압은 예정된 것이었고, 이로 인한 민간과 군대 사이의 감정은 대한민국 존립의 절대명제인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나쁜 것이었다.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충돌에서 비롯된 광주사태의 원인은 부마사태 때부터 배태됐다고 볼 수 있다.

계엄령이 내려진 18일 이날 밤 데모는 군인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군복에 대항하는 것은 국가에 대적하는 것이며 따라서 적으로 간주하라'는 평소 생각에 따라 행동했다. 부산사태에서 부산시가 집계한 일반 시민과 학생 부상자들 65명(자진 신고 기준)가운데 11명이 중상으로 분류되었다. 그들 가운데 다섯 명은 18일 밤에 군인과 경찰로부터 얻어맞아 뻗은 이들이었다. 65명중 37명이 18일 밤 시청 부근에서 군인들에게 두들겨 맞아 크게 다친 사람들이었다. 데모에 가담하지 않은 시민들인데도 구타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동래구 동상동 신희철(회사원·당시 37세)은 18일 밤 8시 50분께 서구 충무동 상륙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좌상과 뇌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봉생 신경외과에서 뇌수술까지 받았다. 동래구 장전동에 사는 김재룡은 기동대 경찰관들에게 남도학원 앞에서 뭇매를 맞고 두부파열 및 전신타박상을 입었다.

부산지구 당감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당시 32세)은 계엄령 첫날인 10월18일 밤 9시 30분께 서면 태화극장 앞 택시 타는 곳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버렸다.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병진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구둣발로 얼마나 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병원을 찾았다. 한독병원에서는 간단한 응급치료만 시켜주고 자가용에 태워 당감동 한태일 신경외과로 옮겨다 주었다.

진단을 해보니 앞 이빨 다섯 개가 부려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수술을 받았다. 그는 분쇄골절 된 부분을 잘라내는 수술과 그 자리에 플라스틱을 대신 끼우는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광복동에서 카메라점을 경영하는 강영복(31)은 아내 유시연(28)과 함께 18일 밤 8시께 시청앞 버스정류소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군인들이 줄을 서라고 했다. 시민들이 머뭇머뭇 줄을 만드는데 갑자기 한 군인이 행동이 느린 강영복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피를 흘리며 그는 쓰려졌다. 유시연은 남편에게 달려가 감싸며 '왜 이러느냐'고 군인에게 대들었다. 이 여자에게도 발길질과 주먹질이 시작됐다. 두 사람이 길바닥에 엉켜 쓰러지자 그 군인은 물러났다. 강영복은 전우식 외과에서 머리에 여섯 바늘을 꿰매는 치료를 받았다.

칠성음료주식회사에 다니는 최홍일(25)은 그날 밤 8시께 동료직원 네 명과 함께 영도다리를 걸어서 시청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리자 군인들이 길을 막고 인도에서 줄을 서서 차례로 걸어가라고 했다. 시민들은 시키는 대로 줄을 서서 시청을 지나 버스정류소 쪽으로 갔다. 상공회의소 앞 육교 밑에서 그들은 군인들에게 붙들렸다. 영도다리 쪽의 군인들이 보내주어서 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길바닥에 끓여 앉혀졌다. 군인들은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머리·어깨부터 때리기 시작했다.

최홍일은 얼른 안경을 벗어 호주머니에 넣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숙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군인의 무릎이 그의 안경 낀 얼굴을 강타했다. 왼쪽 안경알이 깨어지면서 유리조각이 눈 밑에 박혔다. 비명을 질렀지만 곤봉세례는 사정없이 그들의 머리와 허리에 쏟아져 내렸다.

공수부대에서 쓰는 곤봉은 야간 전투에 쓰도록 만든 것으로서 경찰관의 그것보다 훨씬 길며 조금 휘어 있어 아라비아의 환도처럼 생긴 것이었다. 이 몽둥이로 얻어맞은 최홍일 등은 모두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놓아주자 대어들 생각도 못하고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싸 잡고 광산병원으로 뛰어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경찰관도 뭇매 맞고

18일 밤에 부산사태에서 계엄군에게 두들겨 맞은 시민들은 수백 명에 이를 것이다. 이런 사태는 20일까지 계속됐으나 가장 심한 것은 18일 밤이었다. 광복동 부근에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거나 젊어 보이는 남자들 중에서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천천히 걸으면 빨리 안 간다고 붙들려갔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 수상하다고 붙들려갔다. 오십대쯤 되는 시민이라야 마음놓고 요소요소를 지키는 군인들 앞을 지나갈 수 있었다. 첫날(18일)엔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는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다음날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길바닥에 끓어 앉혀져 몽둥이질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는 버릇을 익혀야 했다. 구타를 말리려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경찰관들도 안전하지 못했다. 동부경찰서 ㄱ경위는 두형사와 함께 남포동에 나왔다가 공수부대 군인 두명 이 한 시민을 개머리판과 발길질로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았다. ㄱ경위는 불끈 화가 치밀었다. 몇째 동생 나이밖에 안 되는 그 군인들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넌 뭐야?'
'경찰관이다.' ㄱ경위는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이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오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경찰 같은 것 쓸데없어. 이 새끼들 조져!'
이 명령이 떨어지자 근처에 배치돼 있던 공수부대 사병들 10여명이 몰려와 세 경찰관을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갔다. 주먹과 발길이 어지럽게 오갔다. ㄱ경위는 전치 2주의 상처, 형사 한 명은 고막을 다쳤다. 그들은 어디 항의할 데도 없어 꾹 참기만 했다.

군인들의 마구잡이 폭행은 데모대가 모일 수 있는 틈을 아예 주지 않으려는 작전으로 풀이됐다. 이른바 위력 시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행동은 아무 목적도 없는 감정적인 가혹행위로 변질됐다. 경찰의 가혹행위는 일제경찰에서 배워온 기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범죄 사실을 캐낸다는 계산된 목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지만 뒤에 남을 만한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젊은 군인들의 폭행은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으로 돼 있다.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는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

군인들에게 맞아 다친 시민들의 80퍼센트 이상이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구타의 강도와 피해자의 머리수를 생각할 때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다친 시민들의 진단 병명을 늘어놓으면 군인들이 어떻게 두들겨 팼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자파열(남부민2동 김종열),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파열상, 후두부열창, 안면열창, 안면부내부열창, 전신타박상, 뇌경막손상…….

이 나라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느끼고 있는 친근감은 체험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쉰 살 밑의 거의 모든 남자들이 군대생활을 경험했다.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아픔과 사랑을 가져보지 못한 부모들은 드물다. 어른들에게 젊은 사병들은 아들이요 형이요 아우였다. 경찰이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보아온 국민들은 군인들에게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군을 절대로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언덕이었던 것이다. 4·19때 군이 국민의 편에 서거나 적어도 중립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확인시켜준 기억이 부산 시민들에게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던 때였다.

이런 희망을 산산조각으로 만든 일부 군인들의 폭행 사태는 아물기 어려운 상처와 배신감을 그들에게 심어주었다. 광주사태 때 정부는 부마사태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초장에 투입했다. 부산에서와 똑같은 구타가 대낮에 벌어졌다. 이것을 보다 못한 시민들이 동물적 분노심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 광주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국민을 떠난 군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두 사태는 뼈저린 교훈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빗발 친 시민들의 항의 전화

언론기관과 시청 및 계엄사령부 민원실엔 군인들의 폭행사태를 고발하고 항의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이런 전화를 받는 기자들은 시민들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무력감과 굴욕감에 빠졌다. 신문사에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매스콤이 이를 보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울분을 그런 식으로라도 하소연해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누르러지는 모양이었다. 광주사태 때는 경상도 군인들이 와서 살상을 한다는 말이 퍼졌는데, 부마사태 때는 전라도 군인들이 구타에 동원되었다는 말이 시중에 퍼졌다. 이 말의 진위는 젖혀두고,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가혹행위를 시민들은 그런 식으로라도 설명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죽을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부산시는 마침내 군인들에게 얻어맞아 다친 시민들을 무료 치료해주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 사실을 매스콤을 통해 알릴 수도 없었다. 반상회나 통반조직을 통해 부상자를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에선 데모 때 다친 사람들도 신고를 해주면 아무런 처벌을 않고 무료로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거의 모든 시민들은 이것이 데모 가담자를 찾아내려는 방법이라고 오해하여 신고를 꺼렸다.

부산시가 발표한 부상자 통계에 따르면 16∼19일 사이 197명이 다쳤다. 그중 132명이 경찰관으로 67퍼센트였다. 일반 시민은 28.4퍼센트인 56명, 정작 시위의 주류였던 학생은 9명뿐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경찰 부상자의 88퍼센트인 117명은 16일과 17일의 데모 진압에서 다쳤다. 이에 대해 시민과 학생 부상자와 66퍼센트인 42명이 계엄군이 주둔한 18일 이후에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적어도 공식 통계로는 데모를 할 때보다도 데모를 하지 않을 때 더 많은 시민들이 군인과 경찰관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16일에 다친 학생과 시민은 15명, 17일엔 8명이었는데 계엄군이 들어온 첫날인 18일엔 38명이나 다친 것이다. 다친 시민과 학생들 가운데 남자는 62명, 여자는 3명, 나이별로는 20대가 41명, 30대가 12명, 10대 5명, 40대 5명, 60대 2명이었다. 경찰관들은 거의가 데모대가 던진 돌이나 유리병, 또는 각목에 맞아 다쳤다. 중상이 18명, 나머지는 모두 경상으로 발표됐다.

경찰 부상자들 가운데엔 경남도경에서 도우러 나왔던 14명도 끼여 있었다. 경찰관들이 가장 많이 다친 날은 기습을 당한 16일로서 85명이 다쳤다. 그들이 싸움 채비를 강화한 17일엔 데모는 더 거세었는데도 22명만 다쳤다.

데모 첫날에 다친 경찰관들은 거의가 방패를 가져가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가장 크게 다친 경찰관들은 제1기동대의 문정규 순경(25). 16일 오전 11시께 부산대학교 앞에서 돌에 맞아 안면찰과상을 당했고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파편이 왼쪽 발꿈치 위 종아리에 박혀 전치 5주의 중상을 당한 것이다. 경찰은 문순경의 종아리에서 뽑은 파편을 감정했다. 이 감정 결과 이 파편은 길이 1센티미터 가량, 구리로 만든 것으로 밝혀져 한때 사제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아닌가 하여 경찰을 긴장시켰다.

사냥용 산탄 총알은 물체에 부딪치면 모양이 바뀌는데 문제의 이 파편은 그런 자취가 없고 사냥용 산탄 총알은 납인데 대해 이것은 구리로서 사제총이라면 단발식으로 3미터쯤 앞에서 쏜 것이라고 경찰은 분석, 사제총에 대한 수사를 일선 경찰서에 지시하기도 했었다. 경찰에 따르면 문제의 파편은 문순경의 목 긴 구두를 뚫고 들어와 박혔다는 것이었다. 끝내 이 파편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고 10·26을 맞았다.

부산시는 경찰 부상자는 물론이고 학생과 시민 부상자들까지 무료로 치료시켜줬다. 아무 병원에서나 치료를 받게 한 뒤 그 병원에 의료보험수가로 쳐서 시에서 치료비를 내준 것이다. 박대통령 살해사건 뒤에 군과 시 당국은 시민과 학생들을 위문하고 10만원에서 20만원까지의 위문금도 주어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시장, 보사국장, 군장성들이 직접 억울한 환자들을 찾아다녔다.

'불 꺼! 샤타 내려!'

18일밤 마산 불종로

김재규가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에게 부산사태를 보고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마산의 중심부 불종거리 주변은 투석·함성·비명·화염의 도가니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후 5시를 지나 마산 시내로 진출한 경남대학생 약200명은 오후 7시쯤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정문 쪽으로 몰려갔다. 노동자들의 합세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퇴근한 뒤였다. 그들은 다시 불종 네거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경남대학생 장정욱은 데모대에 앞장서 네거리를 향해 뛰어 돌아오다가 깜짝 놀랐다. 어둑한 네거리에 수천 군중들이 뒤엉켜 웅성웅성 대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윤곽만 잡혀 사람들의 덩어리로만 느껴졌다. 군중을 향해 학생들이 달려오자 구호와 박수가 터졌다. 군중 속으로 돌입한 학생들은 이 사람 덩어리에 폭발력을 불어넣었다. 군중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기 시작했다.

'불 꺼!'
'샤타 내려!'
'공화당사를 작살내자!'는 고함소리와 함께 엄청난 인파는 오동동 유흥가를 거쳐 수출자유지역 정문 앞을 지나 공화당사 쪽으로 달렸다. 시내 상점들과 자동차들까지도 소등, 캄캄해졌다. 오동동 개울다리 목에서 경찰부대를 만났다. 군중은 경찰 트럭을 개울 밑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상가 건물의 2층에 있는 공화당 지구당 사무실에 쳐들어간 군중은 집기와 유리창을 박살냈다.

이어서 이웃한 양덕파출소가 습격을 당해 경찰관들은 파출소를 비우고 달아났다. 군중은 대통령의 사진을 찢었으나 태극기는 떼어내 높이 치켜들고 기세를 돋구었다. 몽둥이를 든 20대 청년들이 앞장을 서는 가운데 군중은 산호동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북마산, 오동동 파출소엔 돌멩이 포격을 퍼부었다. 경남신문과 마산문화방송에도 돌을 던졌다. 남성동파출소를 2시간쯤 점령하기도 했다.

머리수에서 워낙 열세인 경찰은 난폭해진 수천 수만 군중을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다. 마산사태는 처음부터 데모의 차원을 벗어나 폭동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암흑천지로 변한 불종로 일대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수라장이 됐다. 경찰 병력이 증원되면서 반격이 시작된 건 밤 9시께 였다. 마산 데모대에선 학생들의 비중이 부산처럼 크지 못했다. 대부분은 일반 시민, 특히 요식업소 종업원을 비롯한 군소업소들의 종업원들이 많았다.

그래서 마산의 데모대는 더 과격해졌고 경찰의 난폭한 대응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마산에서 경찰이 연행한 시위 혐의자들은 505명이었다. 마산보다 인구가 여섯 곱이나 많은 부산에선 체포 시위 혐의자가 1,058명이었던 것과 견주면 상대적으로 마산데모가 격렬했음이 드러난다. 마산엔 경찰서가 한 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 피의자들은 밀집 수용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콩나물 시루가 된 보호실

18일밤 마산경찰서

김효영 소년(16)은 부산시 영도구 신선동에서 홀어머니 김명애(53)와 함께 어렵게 살았다. 막내인 그는 신선중학교를 졸업하고도 돈이 없어 고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소년이 취직한곳은 마산시 중성동의 중국음식점 제훈반점. 10월 18일밤 10시께. 마산시가를 쓸고 있는 데모에 겁이 와락 난 그는 어머니 품속을 생각하며 귀가 길을 서둘러 마산역으로 가고 있었다. 탱크가 역 앞을 지나갔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뒤에서 '서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김군은 '설마 나보고 지르는 소리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계속 걸어갔다.

그때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이 달려오더니 소년을 나꿔챘다. 팔을 뒤로 젖히고 꺾더니 빗물 괸 땅바닥에 떼기장을 쳤다. 그는 기절해버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수십 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닭차'에 실려 경찰서로 붙들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빗물에 섞인 피가 핏물로 변해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에 핏물이 들어갔다. 마산경찰서. 여기선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 입구 양쪽으로 경찰관 수십명이 늘어서 있었다. 붙들어온 사람들이 이 터널 속을 빠져 경찰서로 들어가야 했다. 터널 속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효영은 앞서 가던 스무살 가량의 한 처녀가 몽둥이로 종아리를 얻어맞고 퍽 쓰러지는 것을 봤다. 쓰러진 그 처녀에게 경찰관들은 발길질을 해댔다.

한 40평밖에 되지 않은 보호실에 수백 명이 수용됐다. 앉을 면적이 생기지 않았다. 피의자들은 18일에서 21일까지 콩나물처럼 서서 지냈다. 벽 쪽에 붙어 선 사람들이 그래도 편했다. 잘 때 기댈 수가 있었으니까. 나머지는 서서 졸았다. 누울 수 있는 자리가 한 군데 있었다. 긴 나무의자 밑에 들어가면 누울 수 있었다.

긴 의자 위엔 얻어맞아 다리를 다친 처녀 등 부상자 10명이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남자·여자 구별도 없이 뒤섞여 있었다. 여자라고 잘 봐줄 수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가장 큰 고통은 변소에 갈 때였다. 뒤편에 변소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사람 속을 헤칠 수가 없어 철망벽을 원숭이처럼 타고 가야 했다. 여자들은 선 채 오줌을 싸기도 했다.

왜 하필 부마에서 터졌나?

마산으로 불티가 튀었다는 소식이 서울의 권력 핵심에 전해졌을 때, 그것은 단순한 충격이 아닌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이었던 권숙정(權肅正·전중앙국립도서관장)은
'마산 학생들은 등하교길에 하루에 두 번 씩 의거탑 앞을 지나다닌다. 자연스럽게 3·15를 우리 도시의 자랑으로 여기게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그 생각이 마산사태 같은 결단의 시기에 서니까 본능적으로 되살아나 행동을 재촉하더라'
고 했다. 이것은 부마사태가 왜 하필 두 도시에서 터졌느냐 하는데 대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두 항구도시는 전통성이 약한 상공업 위주의 도시였다. 상인과 노동자가 주류인 서민계층은 특히 경기에 민감하고 소득 격차에 불만이 많을 소지를 안고 있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기인한 경기 침체와 부가가치세의 무리한 실시, 1978년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등에서 드러난 부의 분배 문제들, YH사건과 도시산업선교회의 문제 등 주로 경제적 사건들이 서민계층의 반정부 불만도를 전반적으로 고조시켰다. 부마사태의 바닥에 깔린 일반 원인은 이런 경제문제였음이 계엄사의 여론 조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뇌관 구실을 한 부산대학과 경남대학의 주모 학생들도 거의가 경제과 학생들이었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울분을 가장 큰 문제의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마산의 경우, 수출 자유단지의 저임금 현상은 학생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교육을 시켰다. 여기에 특수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김영삼 총재 제명 파동이었다. 더구나 부산에 기반을 가진 김영삼이었다. 그의 제명은 경제적 불만에다가 정치적 불만을 더해 불만의 공감대로 학생과 시민을 묶어놓은 역할을 했다.

이 공감대가 인(因)이었다면 도화선 역할을 한 정광민, 정인권군은 연(緣)이었다. 아무리 인화물질이 깔려 있어도 어떤 의지력이 불을 당기지 않으면 인연, 즉 폭발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두 정군은 '욱!' 하는 심정으로 불을 당겼고, 그 불은 공감대를 타고 시민 쪽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분노의 단순 표현인 그 '욱!'의 배경엔 오랜 기간의 방황과 의식화 과정이 있었다.

두 정군의 의식화에 영향을 준 것을 70년대 후반부터 확산된 민주화운동이었다. 부마사태는 겉으로는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필연의 기반 위에 선 우연, 즉 '필연적 우연'임이 확실해진다. 그런 뜻에서 부마사태는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모순의 집약적 폭발이었던 것이다.

연행자 처리 지침

부산과 마산 경찰이 붙들어간 데모 관련 피의자들은 모두 1,563명(부산 1,058명, 마산 505명)이었다. 경찰은 이들을 A,B,C급으로 갈랐다. A급은 데모에 앞장서거나 주동한 사람과 공공건물을 파괴한 사람, 이들에겐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정했다. B급은 데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 즉심에 돌리기로 했다. C급은 소극적으로 데모에 가담했거나 무턱대고 따라다닌 사람, 이들은 훈계 방면키로 했다. 계엄사 합동수사반은 A,B,C급으로 나눠진 피의자들에 대해 법 적용을 다음과 같이 하라고 경찰에 지침을 내려보냈다.

㉠1979년 10월 16일 오후 6시 이전에 학생 신분으로 교내외 데모에 가담한 학생은 긴급조치 9호 위반, 민간인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처리.

㉡10월 16일 오후 6시부터 10월 17일 밤 12시까지 부산 시내에서 다중과 합세, 데모에 가담한 학생과 민간인 가운데 투석, 방화, 폭행 따위의 행위로 공공건물 및 기물 따위의 파괴에 가담한 자는 소요죄, 그리고 행위는 없었으나 단순히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한 자는 형법 116조의 다중불해산죄 적용.

㉢10월 18일 0시 이후 데모 가담 학생 및 일반인들 가운데 투석·방화·폭행으로 공공건물 및 기물을 부순 자는 소요 및 포고령 위반, 구호를 외친 데모 가담자는 다중불해산죄 및 포고령 위반, 단순 데모 가담자는 포고령 위반 적용.

㉣C급 해당자는 정보부 직원과 조정하여 즉심 또는 훈방처리. 합동수사반은 진술조서 작성 및 증거를 만드는 요령에 대한 지침도 내렸다.

곧 16일 오후 6시 이후의 가두 데모 참여자에 대해선 먼저 그때의 데모 상황을 관할 경찰서 경비·정보과와 협조 상세히 베껴 실황조사서(사진 붙임)를 만든다.
두 번째, 피의자의 진술과 데모 상황(군중 수자, 데모 모습 따위)이 일치되도록 진술조서를 만든다.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경찰서끼리 협조하여 한꺼번에 모아 처리한다.

세 번째,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및 다중불해산죄 해당사건은 부산지검 제204호실 검사 김택수의 지휘를 받아 구속·불구속을 결정한다. 그 밖의 소요죄 및 계엄법 포고령 위반 혐의자는 합동수사반의 조정을 받아 부산지구 계엄보통군법회의에 돌려 처리한다.

계엄사의 이런 처리 기준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정광민이었다. 그는 부산 데모의 가장 중요한 주모자였음에도 16일 오후 6시 이전에만 데모에 참여한 뒤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만 구속돼 민재로 돌려졌다. 반대로 종범에 지나지 않은 전도걸은 16일 오후 6시 이후에도 데모대에 끼여 있었다가 소요죄로 몰려 군재로 넘어가 정광민이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난 넉 달 뒤 고등 군재에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던 것이다.

계엄사는 검사를 거친 긴급조치 9호 위반 및 다중불해산죄 혐의자는 민재로, 합동수사반을 거친 소요죄 및 포고령 위반 혐의자는 군재로 넘겼던 것이다. 이것은 계엄법 제 16조가 비상계엄지역 안에 있어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도록 규정한 스물 다섯 가지 죄목 중에 소요죄 등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옥외 집회 또는 시위를 하려는 사람은 48시간 이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를 하도록 돼 있고 해돋이 이전, 해넘이 이후엔 누구든지 옥외 집회나 시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중불해산죄는 '폭행, 협박 또는 손괴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다중이 집합하여 그를 단속할 권한 있는 공무원으로부터 세 번 이상의 해산명령을 받고 해산하지 않는 죄'이다.

억울한 피의자들 많아

데모 현장에서 경찰에 붙들린 이들은 행동이 뜬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경찰은 데모대 속에 들어가 시위자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경찰의 공격을 받고 대열이 흩어지면서 뒤편에 처지는 사람들이 많이 붙들려 갔다. 이들은 데모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구경 삼아 따라다니다가 잡혀가곤 했다. 수자가 많고 절도 있게 행동한 데모대엔 경찰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해 붙잡히는 시위자도 적었다.

정보부의 어느 조정관은 창선파출소에 있다가 경찰이 잡아온 데모 피의자들을 여럿 만났는데 '불쌍해서 모두 풀어주고 싶더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최루개스 때문에 기침을 하면서 경찰에 욕설을 퍼붓다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박수를 치다가 잡혀온 시민들이 거의 전부더라는 말이었다.

택시 운전사 김영배(26)는 16일 밤 8시께 광복동에서 차를 세워두고 데모구경을 하다가 진압 경찰관과 부딪쳐 넘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 경찰관에게 불평을 했는데 그 경찰관은 김영배를 데모꾼으로 몰아 끌고 갔다. 그는 즉심에 돌려졌으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선원인 이대수는 술에 취해 17일 저녁 6시께 충무동에서 데모 군중을 구경하며 비틀거리다가 붙들려갔다. 19일밤에 외출나온 어느 상선 선원 아홉 명은 떼지어 다니다가 군인들에게 몽땅 붙들려갔다. 이 배는 출항시간을 늦춰야 했다.

경찰은 데모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행인들까지 붙들어갔다. 데모대가 경찰에 쫓겨 흩어진 현장에 우연히 나타난 시민들은 데모대로 몰려 진압 경찰에게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기가 일쑤였다. 이럴 때는 경찰도 피해의식과 보복심에 불타고 있었다. 눈에 뜨이는 시민들은 모두 데모대로 보였고, 붙들면 두들겨놓고 보았다. 다른 지방에서 부산으로 출장 왔던 회사원들 가운데는 신바람이 나서 가담했다가 붙들린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한국일보』광고부 사원인 홍성관(21). 그는 부산에 출장 왔다가 데모를 목격, 젊은 혈기를 못 참아 뛰어 들었다. 16일 낮 2시 30분께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밤엔 경찰차가 불타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제1대 청파파출소엔 돌을 집어 던졌다. 밤 10시께엔 자신이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다른 데모대와 함께 부산일보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냈다.

밤 10시 30분께엔 부산문화방송에 쳐들어가려다가 경찰에 쫓겨났다. 밤 11시 50분께엔 부평동 제일식당에서 다른 젊은이에게 데모 가담을 선동하다가 붙들렸다.(피의자 신문조서 내용) 이밖에 최금구(회사원·34)는 17일 새벽 1시 10분까지 데모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다가 통행금지 위반 혐의로 붙들려 즉심에서 구류 5일 선고를 받았다.

792명을 훈계 방면

부산 및 마산 경찰은 연행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792명을 훈계 방면했다. 이들은 거의 전부가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즉심에 돌린 사람들은 42퍼센트인 651명. 부산에서 잡힌 데모 혐의자들 가운데 훈방된 것은 47퍼센트인 471명이었는데 대해 마산에선 총연행자의 60퍼센트인 321명이 훈방됐다. 마산 경찰이 시민들을 더 무리하게 잡아갔다는 얘기다. 부산 연행자들 가운데 학생은 38퍼센트인 397명, 62퍼센트가 일반 시민들이었다. 이것은 많은 연행자들이 억울하게 끌려왔다는 점을 계산에 넣는다 해도 부산사태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곧 학생들이 불지른 부산 데모는 더 많은 시민들의 가담으로 민중봉기로 변했던 것이다. 즉심 판사들은 대학생과 노동자를 차별해서 구류 처분을 매겼다. 대학생들은 같은 죄목인데도 노동자들보다도 3∼5일씩 짧은 구류 선고를 받았다. 똑같은 나이의, 똑같은 범죄라도 학생은 불구속되고 공장 노동자는 구속되는 예가 허다하다.

우리나라의 판·검사들이 대체로 노동자를 홀대하고 학생에겐 관용을 베푸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사회의 선도가 가장 필요한 청소년 노동자가 고등학생보다도 더 엄한 대우를 받는 일이 많다. 데모 피의자의 처리에서도 같은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구류 처분을 받고 유치장 생활을 한 젊은이들은 괴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열띤 토론도 벌이며 1970년대의 젊음이 공유해야 했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 들였던 자신들의 용기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뜻을 같이하고 고통을 나눠 갖는 데서 우러나오는 동지애를 그들은 체험했다. 어떤 학생들은 노동자들보다도 편한 대우를 받는 자신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은 이제부터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더욱 깊은 애정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경찰서 유치장속의 정신병자

고신대생 송길원은 17일 밤 중부서 보호실에 갇혔다. 송길원 일행이 보호실에 들어가자 먼저 잡혀와 있던 시민들이 박수로 이들을 맞아주었다. 헛소리를 하는 정신병자도 잡혀와 있었다. 이날 밤은 부산했다. 연거푸 비상벨이 울리고 경찰관들이 급해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데모대가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러 온다는 소문이 보호실에까지 전파돼왔다. 그들은 비상벨이 울려 경찰관들이 다른 데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보호실 문을 부수고 탈출한 것을 의논하기도 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 새벽부터 분위기가 싹 바꿔졌다. 무자비한 고문 선풍이 불었다.

송길원은 통닭구이, 고춧가루 탄 물 먹이기, 손가락 사이에 송곳 끼워 비틀기 따위 다채로운 종류의 가혹행위를 당했다. 경찰은 송길원에게 불지른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그는 집에서 휘발유를 가져와 뿌렸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화끈해진 형사는 이 사실을 수사과장에게 서장에게 보고했던 모양이었다. 수사 간부가 직접 면담하겠다고 길원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길원은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했다고 말했다. 화가 치민 수사 간부는 형사를 불러 심하게 나무랐다.

이 형사는 분풀이를 길원에게 했다. 옷을 벗기고 몽둥이질을 하고 원산폭격을 시켰다. 옆방에선 같이 잡혔던 신학과 3학년 조충일이 신문을 받고 있었는데 얻어맞고 울부짖는 비명이 들렸다. 송길원은 두 다리의 무릎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허벅지를 밟는 고문을 가장 무서워했다. 뼈까지 그 고통이 퍼져 가는 것 같았다. 보호실엔 변소가 없었다. 캐비넷 안에 대변 덩어리를 집어넣는 피의자도 있었다. 장발에 피가 뒤엉겨 귀신같은 몰골을 한 젊은이도 있었다. 송길원은 구류 10일 선고를 받았다. 송길원이 들어간 유치장 방엔 정신병자가 들어 있었다.

'호는 설여, 이름은 정해영,'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한 스물 여섯 살의 이 청년은 유치장의 귀염둥이이자 노리개가 됐다. 짧은 영어회화도 그는 곧잘 했으며 노래를 특히 잘 불렀다. 그의 18번은 [맹진사댁 셋째 딸]이었다. 그는 밤중에 가끔 간수를 깨웠다. 눈을 부비며 짜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간수에게 그는 '노래 신청 받습니다'고 애교를 떨었다.

성냥개비로 삼각형을 만들어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YX를 복잡하게 쓴 수식을 풀겠다고 머리를 싸매곤 하던 정해영은 어째서 데모 피의자로 잡혀와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피의자들은 친척이 넣어준 사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혼자만 배를 주리고 있는 모습은 처량하기만 했다.

'아저씨, 배가 고픕니다. 김밥 하나 주이소.' 송길원은 이 정신병자가 어떻게 판사의 구류 선고를 받게 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형사들은 대학생에겐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학생이 아닌 피의자에겐 '학생도 아닌 것이 무슨 데모를 한다고……' 비웃어가면서 두들겨 패기도 했다. 송길원은 정신병자를 구류 처분한 판사나 이런 형사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출감 전날 밤 송길원이 들어 있던 유치장 9호실에선 이별을 아쉬워하는 파티가 열렸다. 초대 가수는 정해영이었다.

파티가 끝난 뒤 그는 말했다. '나는 어디로 가지?' 광복동의 어느 안경점 종업원이 '나하고 같이 일하자. 주인에게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정해영은 자존심이 강한 정신병자였다. 길원과 오목을 자주 두었는데 한번지면 이길 때까지 계속 시합을 요청해왔다. 그래도 끝내 못 이기자 '당신은 대학을 다닌 사람이니까'라고 서운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송길원이 유치장을 나오던 날 아침에도 정해영은 자기의 러닝 셔츠를 벗어 물걸레로 만들어 변소청소를 하고 있었다. 길원은 '설여, 잘 있어' 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돌아서 나오는 눈엔 이슬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