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봉기'로 본 김재규

19∼20일 정보부장 공관

부산에 다녀온 직후의 김재규를 가장 가까이 에서 관찰했던 사람은 김봉태였다. 김재규 아내의 여동생 남편으로서 의사인 김봉태는 퇴근 뒤엔 거의 매일 남산 기슭의 정보부장 공관으로 손윗 동서를 찾아갔다. 김재규 부부와 저녁을 먹으면서 가끔 충고를 하기도 했다. 김재규가 부임 뒤 지은 공관은 호화판이었다. 여기에 초대된 적이 있었던 박찬현 당시 문교장관은 '청와대보다도 더 으리으리해 놀랐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퇴근이 빨랐다. 1주일에 다섯 번쯤은 저녁 7∼8시에 귀가, 김봉태와 저녁을 함께 할 정도였다.

'김주장의 부부간 금술은 참 좋았습니다. 간이 나빠져 술을 마시지 않게 된 그분은 붓글씨, 바둑(10급), 골프(핸디 16), 테니스 등 취미를 즐기곤 했습니다. 정보부장이 되고 부터는 '전임 부장들이 어떻게 술 마실 시간이 났는지 모르겠다'면서 보고서를 한아름씩 갖고 퇴근, 밤늦도록 읽더구면요. 부산사태 시찰에서 돌아온 다음날인가, 저녁식사 때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민란이면 반란 아닙니까?'
김재규는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고 꾸짖더니
'그렇지, 그건 민중봉기야, 민중봉기'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날부터 김재규의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고 한다. 식탁에서도 말이 없었고 굳은 표정으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도 피했다. 저녁식사 뒤에는 여느 때처럼 잡담도 하지 않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김재규는 군단장 시절부터 일기를 쓰고 있었다. 일기장이 수십 권이나 됐다. 이 일기장이 남아 있었다면 그의 이즈음 심경이 밝혀질 터인데, 10·26다음날 가족들이 그걸 태워버렸다고 한다.

김재규는 이즈음에도 낮에 시간을 내어 내연의 관계인 장정이(張貞伊)여인 집을 찾아가곤 했다. 장여인도 부산에 갔다 온 직후 김의 태도가 확 달라져 표정이 굳어 있더라고 했다. 서울 강동구 출신의 통일민주당 김동규 의원(당시 상공부 차관보)은 이런 증언을 한다.

'19일인가, 20일인가 날짜는 확실하지 않은데 궁정동 사건 1주일 전쯤 공관으로 김부장을 찾아갔습니다. 같은 김녕김씨이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그분이 종친회 회장일 때, 내가 부회장을 지낸 인연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부장은 부산사태 이야기를 하면서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더니 차지철이가 옆에서 강경한 발언을 해 앞날이 걱정스럽다고 하더군요.'

김재규는 10월 24일 당시 공화당 의원 이후락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처럼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락은 그때 '신민당을 해치우겠다'는 뜻으로 들었는데 10·26뒤에 비로소 그 말이 다른 뜻이었음을 깨닫게 됐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김재규가 가장 존경했던 이종찬 장군(당시 유정회 의원)도 이 무렵 김을 찾아가 '유정회 의원을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김재규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사정하더란 것이다. 김재규가 부산에서 돌아와 청와대 보고를 한 뒤 심경 변화를 일으켰음은 여러 측근의 증언으로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마산에 위수령

19∼20일 청와대

박대통령은 19일 오후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의 예방을 받았다. 이수상은 16일에 내한했었다. 박대통령은 이수상에게 우리 농촌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농촌'이야말로 박대통령의 보람이며 자랑거리였다. 이수상은 '농민의 생활 수준이 대단히 높은데 놀랐다'고 답했다. 대접견실에서 훈장 수여와 기념 촬영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재로 옮겨 요담에 들어갔다. 창가에는 가을 양광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날 박대통령은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이수상과 뜻이 통했던 것이다.

그해 6월에 한국에 온 카터 대통령과의 거북한 만남과는 대조적인 대면이었다. 두 사람 다 공산주의자와 싸워가면서 아시아의 후진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도약시키는 데 성공한 국가 지도자인만큼 서로의 고뇌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날 저녁에 베풀어진 리셉션 및 만찬에서 이광요 수상은 답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성공과 경제 번영은 대한민국 국민과 그 지도자들의 자질이 어떠한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징표이며 한국이 공업·농업 분야에서 이룩한 발전은 다양하고 뚜렷하다. 이와 같은 발전은 첫째, 능력 있고 추진력이 강한 국민과 둘째, 확고한 지도력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그들의 관심과 정력을 대중매체로부터 각광을 받고 여론조사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데 소모하고, 다른 지도자들은 일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 박대통령 각하가 바로 눈앞의 현실에 집착하는 분이였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밤에도 마산시내에선 격렬한 폭동이 이틀째 계속됐다. 박대통령은 이 위기를 회피하지 않았다. 6·3사태, 1·21사태, 3선개헌,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신 선포, 김대중 납치사건, 1·2차 오일쇼크, 문세광 저격 사건, 박동선 사건 등 파란만장한 위기의 산맥들을 강철같은 의지력으로 넘어온 그였다. 박대통령은 두 번이나 직접 부산지구 계엄사령관 박찬긍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산은 당신의 책임 구역이 아니지만, 현지 부대장과 의논하여, 자네의 책임 지역으로 생각하고 도와주라'고 말했다. 박장군은 부산에 내려온 공수특전사 2개 여단중 1개 여단을 마산으로 급파했다. 마산에 위수령이 발동된 것은 그 뒤인 20일 정오였다.

마산지역 사단장 조옥식 소장은 '경남지사의 요청에 의해 국방장관의 승인을 얻어 마산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한다'고 했다. 위수령은 그 지역 행정책임자의 요청에 의해서 내려지게 돼 있지만, 김성주(金聖柱) 당시 경남지사는 병력을 요청한 사실이 없었다. 모든 실제 행동은 청와대 주변의 권력 핵심에서 이뤄졌고, 발표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신속한 강경 진압책과 함께 시국수습 방안의 연구를 직접지시 했다.

20일께엔 공화당 신형식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시국수습에 관한 당 의원들의 의견을 수집 보고하라. 발언 내용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내가 질테니 정확한 보고를 올려라'고 명령했다. 정보부 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행정 조직, 그리고 차지철의 사적인 정보기관 등 정권의 모든 촉각은 부마사태의 원인 규명과 그 대응 수립 쪽으로 풀 가동되기 시작했다.

소년의 울분

10월 20일 밤 9시 서면

부산시민들을 마구 패는 군인들에 대해 다방의 주방장 김석만(18)은 순진하게 그 불만을 표현했다. 포항 출신인 이 소년은 1979년 10월 20일밤 8시 50분께 서면의 부산진 세무서 앞길에서 계엄군 옆으로 지나가다가 아무 까닭도 없이 불려가 얻어맞았다. 김군은 서면로터리의 동국빌딩 앞길을 지날 때 이번엔 민간인 두명이 군인들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았다. 이 두 민간인은 택시를 서로 먼저 타려고 다투다가 군인들에게 붙들려가 폭행을 당했다.

김석만은 화가 치밀었다. 동국빌딩 계단을 쫓아 올라가 5층 옥상에 있던 음료수 공병 3개를 집어 길바닥으로 던졌다. 김석만은 누구를 겨냥하여 던진 것이 아니라 화를 풀려고 아무 데나 던진 것이었다.

공병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공수부대 소령이 즉시 근처의 경비부대 40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이 '불순 건물' 안으로 쳐들어갔다. 이 5층 건물 안엔 사무실이 많이 있었다. 한 사무실 안에선 여섯 명의 아가씨들이 계엄군 위문 바자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 있던 24명의 시민들을 모두 지하실로 몰아넣고 무릎을 꿇리고 두손을 머리 뒤로 붙이게 했다.

이 젊은 소령은 부산진 경찰서 수사과장과 형사계형사들을 호출했다. 이소령은 아버지 뻘되는 서동백 수사과장을 이끌고 건물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플라스크, 비커, 약품병 따위 실험 기구가 많은 공해대책 회사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소령은 여기서 흥분하고 말았다. '사제 폭탄을 만드는 비밀공장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기고만장해하였다. 30년 동안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서과장은 '이 장교가 돌았구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소령은 '비밀 폭탄공장'을 샅샅이 수색케 했다. 자신의 추리를 뒷받침 할 아무단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지하실로 몰아넣은 민간인들을 족쳤다. 김석만은 자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 견뎌 '내가 했다'고 나섰다. 소령은 부산진서 상황실에 있던 여단 임시지휘본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여단장에게 보고했다. 여단장은 소령의 흥분된 보고를 차분히 듣더니 싱긋 웃으며 '그것은 경찰에 넘겨 조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서과장은 소령과 준장은 역시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서로 넘겨지자 24명의 민간인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몰았다. 경찰은 이들 중 김석만과 김광호라는 대학생만 붙들어두고 나머지는 풀어주었다. 경찰은 김석만을 야간 주거침입 및 상해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형사들도 소년에게 동정을 했지만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은근히 기각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형사와 기자들은 다 같이 혀를 찼다.

김광호는 군인들에게 잡힐 때 동인시집『반시』(反詩)를 갖고 있었다. 경찰은 시집의 이름이 도발적이라고 생각했다. 1978년 1월25일자로 문공부에 출판물로 등록된 책이란 것은 알았으나 경찰들은 군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경찰은 이 시집의 불온성 여부 감정을 부산 동부교육구청 문창도 관리과장에게 맡겼다. 문과장은 시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시 감정서'를 써주었다.

'……어떻게 이런 내용이 책이 시판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불온한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한국의 현실에서는 자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여가가 있다면 좀더 건전한 책을 읽었으면 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감정서를 받고 형사들은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할지 망설였다. 감정서의 내용이 이 책을 불온으로 모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서동백 과장이 결단을 내려 김광호를 풀어주었다.

20일 오전 서면

20일 아침 서면로터리 근처의 육교 위에 삐라 한 장이 뿌려진 것을 부전 2동 직원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동아대학교 만만세. 박정권 몰아내자. 박정권은 엉터리 방송, 엉터리 신문, 엉터리말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군인, 학생, 국민들은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다 같이 힘을 합쳐…….'

계엄령이 해결한 언론계의 고민

부산 시위는 언론계 종사자들에게 충격·분노·수치감을 함께 던져주었다. 16일 데모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이 큰 사건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알려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안달이 났다. 민중의 돌팔매질을 당한 언론이었지만 한 조각 양심은 남아 있었다. 문제는 용기와 행동이었다.
'편집국 회의를 열어 기자들의 전체 결의로 이 사건을 보도하자.'
'호외를 내자.'
'어젯밤에 광복동·남포동 거리가 유리조각과 나무토막으로 뒤범벅돼 몇 시간이나 교통 체증이 있었고 주민들은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개스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라고 써 간접으로라도 이 사건을 알리자.'

별별 얘기가 다 나왔으나 언론계 내부에는 애당초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조직된 세력이나 집단적인 용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17일 아침 편집국 회의를 소집하거나 적어도 간부들끼리라도 보도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한 언론기관은 없었다. 구체적인 취재 계획을 세우거나 기록으로라도 남겨 놓자고 한곳도 없었다.

모두가 자학하면서 스스로를 포기하고 비웃으며 이 경천동지의 대사건을 모른 척했다. 10월 유신 여덟 돌이란 사실은 충실하게 알리면서 수월하게 그 날치 신문을 만들었다. 17일 오후 5시께 『국제신문』 편집국장은 부산 정보부 언론담당조정관으로부터 '구내무장관 회견 기사는 1단 이상 취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편집자는 이 기사의 제목으로 3호 고딕활자를 썼다. 편집의 상식을 부수면서 그는 오기를 부린 것이다. 편집국장은 이 오기를 대장에서 발견, 공장으로 달려가 편집자 몰래 3호 제목을 5호 활자로 바꿔버렸다. 그래 놓고 속이 편치 않았던지 술을 잔뜩 마신 그는 '내일은 회사에 나오지 않겠으니 부국장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갔다.

계엄령 선포는 언론계의 이 고민을 일단 풀어주었다. '전화에 의한 단수 조정'은 사라지고 언론통제는 군의 검열로 일원화됐다. 이 기사를 실어야 하느냐, 몇 단으로 다룰 것인가, 신문에 난 뒤 귀찮게 굴 것 아닌가 등등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검열관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작디작은 언론 자유를 갖고 이놈을 어떻게 말썽 없이 써먹느냐로 고민하던 언론계는 그 작은 자유마저 송두리째 뺏긴 날 절대자와 같은 군 검열관에게 귀의함으로써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유와 불안과 갈등으로부터의 도피는 굴종과 의사 결정의 포기를 뜻했지만 '군이 검열하는데 우린들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기댈 언덕이 있었던 것이다. 포기함으로써 편안해진 것이었다.

출근을 않겠다던 『국제신문』편집국장은 계엄령이 선포되자 회사에 나왔다. 전날 밤의 고민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정보부에서 전화 안 걸려와 살 것 같다. 이제부터는 일찍 집에 돌아가 책을 읽어야겠다'고 즐거워했다. 계엄령 아래서의 언론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국제신문』편집부 김영훈 기자였다. 그는 '계엄령 때문에 신문이 살게 됐다'고 잘라 말했다.

계엄령 선포로 부산 데모가 정부 발표문을 통해서나마 그런 대로 알려지게 됐기 때문이었다. 모든 결정을 검열에 내맡기면 되기 때문에 '알아서 길'필요도 없어졌다. 싣는다, 못 싣는다, 줄여라, 키우자…… 편집국장과 기자 사이에 날마다 되풀이돼온 승강이도 없어지게 됐다.

김기자는 정보부의 언론통제 기준보다도 우리나라 언론의 자체 통제기준이 더 비겁한 것이었다고 믿어왔다. 검열을 군인들에게 맡김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도할 수 있을 것이란 김기자의 예측은 불행하게도 적중됐다. 이것은 솥뚜껑보고도 놀라는 한국 언론이 정부가 요구하는 선보다도 훨씬 밑도는 수준의 사실보도를 해왔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였다. 1970년대 언론의 무기력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검열지침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일 공고 제2호를 발표, 보도 검열 요령을 알렸다.

가. 검열 장소 : 부산시 공보실(뒤에 상황실로 바뀜).
나. 검열관 : 계엄사 언론출판 검열관.
다. 검열 시간 : 석간 오전 8∼10시, 조간 오후 2∼10시. 방송 및 통신 수시, 주·월간 잡지 및 기타 간행물 오후 1∼3시.
라. 요령 ①신문은 가인쇄 2부 제출.
②방송 및 통신은 원고 1부 제출.
③그 밖의 간행물은 견본 2부 제출.
마. 보도 지침 다음과 같은 사항은 보도 할 수 없다.
①비상계엄에 관계하여 목적을 부당하게 선동하는 내용.
②국민 여론 및 감정을 자극 보도하는 사항.
③치안 확보에 유해로운 사항.
④군 기밀에 저촉되는 사항.
⑤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사항.
⑥공식 발표하지 않은 일체의 계엄 업무 사항.
⑦그밖에 국가이익에 반하는 사항.
⑧부산지역 언론기관 이외의 모든 언론기관에서도 당해 지역에 관한 보도 시는 계엄사령관의
사건 검열을 받는다.

『동아일보』의 최선

첫날 검열은 보안사 부산 분실 요원들의 손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며칠 뒤부터는 소령급 정훈장교들이 검열 실무를 맡았다. 이들은 보안대파견관(준위)의 통제를 받았다. 검열하에서 언론은 두 갈래 길을 걸었다. 검열하지만 최선을 다해 알려야 할 것을 알리겠다는 언론기관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민중을 반역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10월 18일 『동아일보』는 1면에 치안본부의 데모사건 발표문과는 별도로 부산지사에서 보낸 데모 기사를 실었다. 데모의 발단부터 공공기관 습격 상황까지 데모 개요가 200자 원고지 4장분으로 실려 있었다. '유신 철폐' '독재타도'란 구호를 외쳤다는 내용까지 실렸다. 다른 언론기관이 모두 치안본부 발표문만으로 부산사태를 소개한 것에 견준다면 크게 돋보이는 기사였다. 이런 기사가 검열에 통과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동아일보 부산지사에서는 이 기사를 통과시키기 위해 꾀를 냈다. 문제의 기사원고를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계엄에 협조적인 내용의 긴 기사 원고를 얹었다. 검열관은 읽어내려 가다가 그 원고뭉치가 모두 그런 내용인줄 알고 통과 도장을 찍어버렸던 것이다. 이 기사가 서울 가두 판매 판에 나왔을 때에야 군 당국에선 비로소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았다. 그러나 신문사에 따질 수는 없었다. 일단 검열을 통과시킨 뒤의 책임은 검열관이 질 일이었다. 군에선 '독재타도' '유신철폐'란 글귀만 빼달라고 동아일보에 사정했다.

이런 수법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이용됐다. '항도 부산에 평온이 다시 찾아왔다. 지난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소란' 속의 소용돌이를 겪었던 시민들은 다시 정상을 회복한 18일 이른 아침부터 '소요는 무질서와 손실만을 가져올 뿐'이라며 어지럽혀진 도로를 청소하기에 바빴다.…… 광복동의 ㅈ음식점 종업원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한국일보』)

계엄군에선 부산 시위를 탓하는 기사를 쓰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유신체제에 길들여진 기자의 정신이 위와 같은 기사를 쓰도록 했을 뿐이었다. 검열로 취재기자들은 훨씬 편해졌다. 첫째 이유는 골치 아픈 기사는 이젠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둘째는 특종이 거의 불가능해짐으로써 경쟁심이 무디어진 것이었다.

검열실은 언론기관별로 갈라져 있지 않았다. 트인 방에서 여러 매스콤 기관이 함께 검열을 받게 됐다. 따라서 상대 언론의 기사나 대장을 넘겨볼 수 있어 자기편의 빠진 기사나 상대방의 특종 기사를 알 수 있게 됐다. 조판 이전에 상대지의 특종을 베껴 넣을 수도 있게 된 것이었다.

외신기자의 비웃음

부산 기자들은 외신기자들을 조심하라는 지시를 회사로부터 받고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수십명이나 되는 외국 기자들이 부산으로 내려왔다. 미국의 어느 텔레비전 기자는 무비 카메라로 계엄군을 찍다가 붙들려가기도 했다. 그는 곧 풀려났지만 부산 실정에 어두운 외국 기자들은 취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낯선 지방에 취재하러 갔을 때 기자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현직 기자들을 상대로 취재하는 것이다. 이 원칙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통용됐다.

많은 외국 기자들이 부산기자들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어느 날 저녁 『뉴욕 타임즈』도쿄 지국장인 스톡스 기자가『국제신문』편집국을 찾아왔다. 그는 이 신문의 이모 논설위원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가져와 이위원을 찾았으나 퇴근한 것을 알고 편집국에 들러 기자를 찾은 것이다. 편집국 기자들은 거추장스러운 사람이 왔다는 눈초리로 세계 대신문의 이름난 기자를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못 본척하는 분위기를 접하자 스톡스 기자는 멋적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적당히 얘기하며 돌려보내라'는 지시를 받은 사회부 김정주 기자가 그를 의자에 앉힌 뒤 이쪽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운동화를 신고 티셔츠를 입은 스톡스 기자는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사회부 조갑제 기자는 스톡스 기자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경멸이라고 생각했다.

부마사태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이즈음, 곧 부산시위에서 박대통령 피살까지의 열흘동안 기자들 사이에서 부마사태의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가까운 기일 안에 신문에 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역사의 기록으로서 정리해두고 후배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기자들이 있었다. 기자들이 하루하루의 정보 메모를 적어 사회부장에게 내도록 한 신문사도 있었다.

조갑제 기자는 부산봉기에서 기자 생활의 새로운 지평을 발견했다. 그는 '내가 기자 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갖고 기자 생활을 아홉 해째하고 있었다. '특히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하도록 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부산사태가 터지자 그는 ' 이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라고 하느님이나를 기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해버렸다.

조기자는 기자란 직업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택하든지 서울의 언론기관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가졌었다.

첫 번째는 1974년 8월에 그가 한국기자협외에서 주는 한국기자상(취재보도 부문)을 받았을 때였다. 기자 생활 4년만에 이 영광을 차지한 그는 이것을 뛸판으로 이용, 서울의 신문사로 가려고 했다. 조기자는 그때 이미 석유개발과 문화재 발굴 취재에서 여러 번 전국적인 특종을 하여 이름을 내고 있었는데 기자상 수상작품은 중금속 오염 문제의 보도였다.

조기자는 중금속 오염 문제를 다루면서 부산수산대학 원종훈 교수의 전국 해안 수산물의 오염도 조사자료를 기사화한 적이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돼 수산대학 학장이 사표를 냈다. 문교부는 '앞으로 공해와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관계 부처와 협의하라'는 유명한 지시를 내렸었다.

조기자는 그러나 1974년 가을에 전국 언론기관에 번진 언론자유 투쟁의 불길에 휩쓸려 자신의 문제는 잊어버렸다. 그는 『국제신문』언론자유대책위원회의 간사로 일했다. 『밝힘』이란 지하신문을 내면서 이 위원회는 활발하게 움직여 그때『국제신문』의 보도자세에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 기자가 특종을 잇따라 터뜨리고 취재에 정열을 쏟는 동안엔 다른 문제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법이다.

조기자는 1975년 1월엔 부산대학 미술 실기문제가 사전 누설된 것을 보도, 재시험을 치도록 만들었다. 부산대학의 의과대학 일부 교수들이 돈들 받고 박사학위 논문을 대신 써준 사건도 석달 동안 취재하여 기사를 썼다. 이 기사는 사회면 머리에 들어갔다가 대장에서 빠져버렸다. 분통이 터진 그는 싣지 못한 기사를 사내 지하신문에 실어 동료 기자들에게 뿌렸다.

1975년과 1976년은 조기자가 석유개발 취재에 힘을 쏟은 해였다. 제6광구 시추, 포항 석유 발견을 취재했다. 1976년초 그는 서울의 어느 통신사로부터 문화부 기자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때도 조기자는 자신의 신상문제엔 관심을 쏟지 않을 만큼 바빠 있었다. 그는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세상은 포항 석유 발견으로 들떠 있었다. 조기자는 그런 세상에 찬물을 끼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포항 석유 경제성 없다'로 직장 잃고

그는 포항 석유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정보부가 주관한 이 포항 석유개발이 박정희라는 개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려고 기술과 과학의 틀을 깨고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빗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상을 모르는 언론은 환상에 가까운 기대감만 대중에게 심고 있었다. 조기자는 그가 갖고 있던 비공개 석유개발 자료를 정리,. [한국의 석유개발―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란 논문을 냈다. 11만 원을 들여 200부를 찍은 그는 아내를 시켜 전국의 연구기관·관계 교수·언론기관에 부치게 했다.

이 논문이 말썽이 됐다. 일본『산케이신문』서울지사의 이나바 특파원은 이 논문을 따서 기사로 썼다. 1976년 6월6일『산케이신문』외신면 머리에 '포항 석유는 경제성이 없는 것 같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조기자는 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정보부에선 석유 시추 관계자료를 외국 언론기관에 보낸 것은 정보 유출이 아닌 가고 따졌다. 정보부에선 서울로부터의 지시라면서 논문을 받은 쪽에 편지를 쓰라고 했다. 내용에 잘못된 점이 있어 회수한다는 뜻의 편지를 그는 썼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정보부 직원들이 직접 문제의 논문들을 거두고 다녔다.

이 사건이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정보부에선 국제신문사에 '조기자로부터 사표를 받으라'는 압력을 넣었다. 회사에서는 '조기자를 글 안쓰는 부서로 보낼 테니 사표만은 안 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거절했다. 1976년 6월 30일 조기자는 사표를 냈다. '직장은 바꿀지 모르지만 결코 직업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부터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던 그는 펜을 잃지는 않았지만 지면을 상실했다.

그는 허전한 마음으로 1주일쯤 경주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앞일을 생각했다. 조기자의 아내도 국제신문사 조사부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장 생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조기자는 글을 실어줄 신문 지면을 잃었지만 어쨌든 기자로 남아 있기로 작정했다.

『월간중앙』에서 평론가상 작품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다. 그는 여름에 부산에 있는 열두 곳의 동족 부락을 찾아다니며 동족집단이 급격한 도시화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가를 조사했다. [동족 부락의 변모]란 그의 논문은 입선작으로 뽑혔다. 조기자는 그의 글이 신문 아닌 잡지에 실린 것을 특별한 감회로 다시 읽었다. 그는 계속 글을 썼다. 울산 장생포의 고래잡이 얘기를 다룬[고래 등에 노을지다] [북양개척 10년]이 잇따라 『월간 중앙』에 실렸다.

재벌의 내부에서 목격한 것들

글은 네 가지 즐거움을 그에게 주었다. 자료를 모을 때, 성실한 인간상과 새로운 자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글을 쓸 때의 집중과 몰입이 주는 즐거움. 그것이 잡지에 실려 인쇄된 활자를 읽을 때에 다시 맛보는 기쁨. 그리고 원고료를 받았을 때의 흐뭇함.

1976년 9월 조기자는 서울의 어느 통신사에서 중견 외신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읽고 시험을 쳤다. 합격했다. 그러나 언제 알았는지 정보부에서 통신사로 연락이 왔다. 받아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른 회사는 좋다, 그러나 언론기관은 단념하라'는 통보를 그는 받았다.

1976년 12월 그는 국제상사 간부사원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이 신발공장의 기획실 계장으로 취직했다. 그는 곧 회사 중역, 특히 사장의 총애를 받게 됐다. 사장의 연설문을 잘 써준 것이 그런 계기가 됐다. 회사 안에서 그의 관심은 저절로 노동자 문제에 쏠리게 됐다. 2만명이 일하는 공장에서 그는 취재의 보고를 발견한 셈이었다. 그는 국제상사가 보잘것없는 신발공장에서 출발하여 손꼽는 재벌로 성장한 역사를 쓰고 싶었다. 그런 성장이 성실하고 순한 노장들의 피와 땀을 딛고서 이뤄졌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성장 뒤에서 침몰해간 수많은 노동자들의 얘기를 건져 올리고 싶었다. 국제상사에서는 공장에 불이 나면 회사가 잘된다는 우스개 같은 말이 떠돌고 있었다. 60여명이 불타죽은 1960년의 큰 불, 20여명이 숨진 1974년 여름의 불. 이런 화재, 숨막히는 작업환경, 긴 노동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노동자들의 역사와 성장 일로를 치달아온 경영자의 세계를 대조시켜나감으로써 한국 재벌의 탄생과정을 그 내부에서 해부해보겠다는 것이 그의 욕심이었다.

조계장은 밤늦게까지 공장에 남아 야간 노동자들과 얘기를 나눴다. 카본 블랙을 고무에 배합시키는 일을 하는 노동자는 눈동자의 흰자위만 내놓고 온통 검둥이였다. 그는 '사장님에게 얘기해서 환풍기를 하나 달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카본 블랙이 살갗에 박혀 일을 끝내고 목욕을 한 시간씩 해도 검댕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만나는 노동자들마다 원한과 좌절과 경영자의 배신을 얘기했다. 현장노동자들과 사무실 근무 직원들 사이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불신의 강이 가로놓여 있음도 알았다.

그는 경영의 부도덕성과 엘리트의 좌절을 목격했다.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젊은이들이 재벌의 메카니즘에 짓눌려 윤리적 판단 기능을 잃은 한낱 도구로 변해버리는 비극을 보았다. 탈세 회계학과 경영자에 대한 개인숭배가 판을 치는 속에서 조계장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사장의 '보살핌'으로 해외여행을 한 달쯤하고 돌아온 그에게 어느 날 정보부 언론담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사람과는 석유논문 사건 이후 친해진 사이였다.

'당신 사건은 우리 회사에서도 잊어버렸다. 정보부장이 바뀌고 간부이동이 있어 당신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러니 신문사로 복직하고 싶으면 해보라.' 추방 열 여섯 달 만에 그는 신문사로 돌아왔다. 국제상사에선 '앞이 창창한데……' 라면서 말렸으나 그의 선택은 요지부동이었다. 신문사에 돌아와서 두 번째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도 또 펜과 지면을 주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런 의문 속에서 조갑제 기자는 부마사태와 만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