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사와 고문

미리 결정된 수사 결론

부산봉기에 대한 수사의 결론은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내려졌다. 박대통령은 '지각없는 일부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불순분자들'이 난폭한 행동으로 사회를 혼란시켰다고 계엄령 선포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에서 밝혔다. 치안본부는 '우발적인 군중 시위행동이 아닌 조직적인 폭거'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수사의 목표는 민중의 시위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고 학생과 민중을 뒤에서 조종한 배후 조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는 세 갈래로 진행됐다. 부산 및 동아대학생 데모의 주역들에 대한 수사는 동래경찰서와 영도 경찰서가 각각 맡았다. 시내에서 불 들린 시위 혐의자들은 아홉 개 경찰서에 흩어져 수사를 받았다. 수사 당국이 배후 세력으로 점찍은 재야 저항운동 인사들은 계엄사 합동수사반에서 중앙정보부 주관 아래 조사를 받았다. 일선 경찰서는 수사 과정에서 중요한 피의자를 발견하면 합수반에 넘겨 그곳에서 정밀 조사를 받도록 했다. 부산대학생 데모의 주동자에 대한 수사를 맡은 동래경찰서는 부산 데모의 동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집안이 가난하고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의 문제의식과 학원사찰·언론탄압·장기집권에 대한 현실 불만이 합쳐졌다.

둘째, 최근에 일어난 서울대·경북대·계명대학교의 시위에 자극을 받았다.

셋째, 1974년 10월의 구속학생 석방요구 시위 이후 한번도 데모를 하지 못했다는 수치감이 쌓여왔다.

넷째, 태백산맥 서점 주인 노승일, 중부교회 최성묵 목사, 김광일 변호사, 김영일, 김형기 등의 반체제 인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동래경찰서는 17일 오후 늦게까지도 이 데모의 리더들에 대해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정동현 교수는 17일 한 정보형사로부터 '정광민이 이번 사건에 깊게 개입된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광민이 깊게 개입된 정도가 아니라 바로 도화선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경찰의 상황판단이 어두운 데 놀랐다.

이때까지 이진걸의 이름은 수사선상에 오르지도 않고 있었다. 전과가 있는 학생들을 중심적으로 사찰해 왔던 경찰의 정보망은 독불장군 같은 신인의 출현을 예기치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사태는 치밀한 조직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찰은 한 개인이 히로이즘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눈이 맑지 못했다.

이진걸 체포되다

경찰의 눈을 가렸던 안개는 17일 오후 3시 30분께 김종세가 붙들림으로써 걷히기 시작했다. 김종세가 10월 10일 법대 2학년 신재식으로부터 데모 때 사람들을 모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 사실, 13일엔 이호철로부터 이진걸을 소개받은 사실, 15일엔 광민에게 간이 등사법을 가르쳐준 사실이 신문과정에서 드러났다. 이호철은 18일 새벽 5시께 집에서 붙들렸다. 이진걸은 이틀 동안 데모 현장을 누비느라고 자신의 걱정도 잊어버렸다.

19일 그는 거제동에 있는 삼촌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침에 동래서 정보과장이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은 라이온즈클럽의 총무를 지낸 적이 있어 정보과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 정보과장은 이진걸을 보내 달라고 했다. 경찰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삼촌이 머뭇거리는 사이 독촉 전화가 뻔질나게 걸려왔다. 이진걸은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그는 진해의 이모 집으로 갔다. 이모부는 진해경찰서 정보과 형사였다. 이진걸은 시치미를 떼고 놀러온 것처럼 행세했다.

점심을 먹고 부산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오빠! 조금 전에 서클 후배된다는 학생이 꼭 전할 말이 있다면서 전화를 걸어왔어요.' 이진걸은 후배 이름을 물었다. 동생이 댄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진걸은 경찰이 자기를 찾으려고 건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기가 이곳으로 온 사실도 이미 경찰은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달아날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어라, 그는 자포자기의 마음에 빠져 이모 집에 머물렀다. 탕탕탕. 문 두드리는 소리. 이진걸은 단잠에서 깨어났다. 20일 새벽 0시 40분께였다. 경찰 백차의 경보등이 번쩍번쩍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모부가 문을 열어주자 집안으로 들이닥친 형사 세명은 진걸의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도망자 정광민의 행복한 하루

혼자 학교 뒷담을 뛰어 넘고 달아난 정광민은 16일 낮 1시께 범천동 시외버스 주차장에 도착했다. 빵과 우유로 허기를 채운 그는 마산행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가 김해를 지나자 추수를 앞둔 황금들판이 광민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몇 시간 전에 광민이 벌여놓은 싸움판과 사뭇 딴판인 목가적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광민은 불안감을 잊을 수 없었다. 눈을 붙이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산에 광민이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30분께 였다. 그는 곧장 고성행 버스에 올랐다. 고성읍에서는 다시 구만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구만리에 내린 것은 어둑해지고 있던 저녁 6시께였다.

그는 쉽게 친구 재구의 집을 찾았다. 지난 여름 방학 때 놀로 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재구 엄마는 예고 없이 찾아온 아들의 친구를 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정광민은 '놀러온 김에 들렀다'고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재구 누나가 아무래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이 광민은 '데모가 터져 피해왔다'고 털어놓았다. '재구는 걱정없습니다'고 안심을 시켰다. 쉰살 된 재구 엄마는 '마음 푹 놓고 묵었다가 가라' 면서 방을 하나 비워주었다. 다음날(17일) 아침 광민은 재구 가족과 함께 논으로 나갔다. 베어둔 나락의 묶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광민은 화창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다가 보니 걱정도 잠시 잊었다. 농촌에서 먹는 점심도 별미였다. 갈치찌개 반찬과 삶은 고구마의 맛이 그저 그만이었다. 재구 엄마는 단감과 밤알도 깍아 주었다. 오후에도 광민은 추수를 도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안방에 모여 앉아 함께 감을 깎았다.

재구 엄마와 누나와 광민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눴다. 광민이 폐를 끼쳐 미안하다고 했더니 재구 엄마는 '한번만 그런 소리를 하면 쫓아버리겠다'고 고함을 지르며 웃었다. 재구 집에서 둘째 밤을 지내고 일어난 광민은 아침 8시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광민은 뒤통수를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한참 멍해졌다. 17일 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내무장관의 회견이 보도되면서 데모가 확대된 것은 알았으나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빚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광민은 자기의 작은 행동과 비상계엄령 선포 사이의 인과관계를 따져 보려 했으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자기가 '공적 제1호'가 됐다는 점이었다. 그는 재구 가족에게 화를 미치지 않게 하려고 이 집을 떠나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경찰은 이미 재구의 고향집을 광민이 숨을 곳으로 지목, 형사들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을 먹고 그는 재구 엄마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재구의 형 옷을 얻어 입고 노자돈까지 받은 광민은 재구 가족들을 뒤로하고 마산으로 향했다. 마산에 닿은 것은 18일 오후 2시쯤. 그는 『경남매일신문』을 사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광민은 돈이 떨어진 마당에서 아무래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 부산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외버스 편으로 부산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조방터 부근에 사는 친구 이모군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로부터 부산 데모의 진상을 속속들이 들었다. 광민은 한 3년 옥살이할 각오를 했다. 저녁밥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질 않았다.

광민은 밤10시쯤 친구 집을 나섰다. 정광민은 우암동의 자기 마을로 갔다. 그러나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친구들이 자주 모이는 김모군의 방으로 갔다. 김모군은 군에 입대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아들 방을 친구들에게 빌려주어 언제든지 와서 놀게 하고 있었다. 그 방에선 친구인 네 청년이 모여 바둑을 두고 있었다. 광민이 들어가니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그는 집에 형사들이 와서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광민, 교수 설득으로 자수

친구들은 집에 가지 말고 이곳에서 자라고 권유했다. 정광민은 잠이 들었다. 다음날인 19일 아침밥을 얻어먹은 그는 서면으로 고모(高某)양집을 찾아갔다. 고양은 부산대학 어문계열 1학년이었다. 광민이 가깝게 알고 지내는 오직 하나뿐인 여학생이었다. 고양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광민을 맞았다. 광민은 애써 화제를 바꾸려 했다. 한두 시간 둘은 문학을 얘기했다. 광민은 나오면서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다. 광민은 이것이 감옥 바깥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광민은 낮 1시에 부산역으로 갔다. 곳곳에 집총자세로 버티고 있는 얼룩무늬의 공수부대 사병들이 바로 자기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불안해지면서 한편으론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용기와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정광민은 16일 새벽에 전도걸과 헤어질 때 19일 낮 1시께 부산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전도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정광민은 도걸이 붙들려갔다고 믿었다. 그는 다시 친구 최모군의 집으로 갔다. 오후 5시쯤. 구봉성당 뒤쪽에 있는 4수생 최군의 집에선 광민이 이번 데모를 주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군의 누나는 광민에게 달아나라고 권했다.

광민은 그날 밤을 그곳에서 보냈다. 광민은 주민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최군의 누나는 주민증 대신 신분증명에 쓸 수 있는 광민의 병적확인서를 떼가지고 왔다. 그리곤 광민이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닐 것에 대비하여 담요, 속옷, 치약, 칫솔, 수건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주었다.

이 누나로부터 노자돈을 만 원까지 얻은 광민은 밤거리로 나왔다. 이리저리 걸어다녀 봤으나 잠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주인 없는 포장마차 술집 안에 들어가 잘까도 생각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광민은 우암동의 한 친구집에 전화를 걸었다.

'큰일 났다. 너의 집에 형사들이 찾아와 야단이다.'
'그건 그렇고 어디 잠잘 데 없을까?'
'글세…….'
광민은 씁씁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광민은 서대신동에 있는 신태곤 상대 학생과장 집 생각이 났다. 부산공전 사건 직후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밤 8시께 문을 두드르니 교수가 나왔다.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광민을 불러들이더니 커피를 마시게 하고 한참 침묵을 지켰다.
'기분 같아선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다만……. 너를 아주 멋있는 놈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이렇게 나를 배신하다니…….'
정광민은 부산공전 신홍석과 관련된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 학생과장에게 앞으로는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던 일을 기억해냈다. 신교수는 광민에게 그동안 겪었던 교수들의 수모를 얘기해주었다.

광민이 안 잡히면 경제과 2학년생 모두가 경찰에 붙들려가야 할 판이라고 그는 말하면서 자수를 하라고 말했다. 광민은 교수 집을 찾아올 때는 자수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신교수는 끈질기게 광민을 설득했다. 경찰에 고문을 않도록 특별히 부탁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광민은 자기 때문에 급우들이 고역을 치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고맙게 자기를 밀어주던 그들이 혼자 달아난 자기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겠는가. 광민은 결단을 내렸다.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교수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신교수는 학생지도관실의 홍실장에게 자수 문제를 의논했다. 신교수는 광민을 데리고 동래경찰서 정보과장실로 들어갔다.

'너가 광민인가?'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한 수사관이 그들을 맞았다. 과장은 반장을 불러 진술조서를 받도록 지시했다. 신교수는 몇 번이고 과장에게 '광민을 잘 부탁합니다'고 부탁한 뒤 광민에게 3천 원을 주고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기도 떠나갔다. 문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곤 했다. 광민을 맡은 정보과 형사는 부산공전 사건 때도 광민을 조사했던 신모 형사였다. 첫날 밤 광민은 사무실 책상 위에서 이불을 덮고 잠에 들었다.

절망의 늪 속에서 가혹한 신문

이진걸과 정광민 같은 시위 주동자에게는 10·26까지의 며칠간이 가장 암담한 기간이었다. 그들은 끝이 안 보이는 까마득한 터널로 들어온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젊어서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겠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들의 절망과는 대조적으로 수사관들은 스스럼없이 가혹한 신문을 할 수 있었다.

계엄령하에서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이 가능하고 골치 아픈 기자들은 검열로써 침묵시킬 수 있다. 이진걸은 두 차례 통닭구이 고문을 받으면서 여덟 번 물을 먹었다.
'너가 한 짓이 아니다. 누군가가 조종한 놈이 있다. 신민당인가. 남민전인가, 중부교회냐.'
이진걸은 없는 배후를 만들어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황선용을 빼주려고 했던 계획은 손쉽게 들통이 났다.

경찰은 이진걸의 등사판을 보관하고 있던 박정일(부산의대 본과 1학년)을 붙들어두었다가 이진걸이 잡히자 함께 여관으로 끌고 다니며 현장검증을 하여 황선용의 공동모의 부분을 밝혀냈다. 이진걸은 보안사령부 부산 분실에 설치된 합동수사반에 넘겨져 배후 조사를 이틀간 더 받았다. YMCA 강당에서 열린 반체제 인사의 강연회에 두 번 간 적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그를 중부교회 최성묵 목사와 김광일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재야세력에 연결시킬 수 있는 자료였다.

합수단에서 이진걸로부터 진술 조서를 받은 부산진서 정모형사는 이진걸의 당당한 진술 태도와 굽히지 않는 주장과 성실한 성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뒤에 말했다. 정형사는 진걸의 필체와 선언문의 필체가 다른 것 같아 선언문을 다시 써보게 했다. 이진걸은 한자도 틀리지 않고 선언문의 전문을 썼다. 진걸의 조사에서 남성철과 황선용이 드러났다.

진걸로부터 선언문을 받아 뿌린 동고등학교 후배들도 붙들렸다. 태백산맥서점 주인 노승일과 남사당주점 주인 조미화양도 잡혀왔다. 노승일은 17일에 부산대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여고생의 배가 찢어졌는데도 경찰관들이 계속 두들겨패더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이제 경찰은 김종세·이호철·이진걸·남성철·황선용·노승일을 한 조직 계열로 묶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황선용의 투신자살 미수

황선용은 16일 정오께 부산대학교 앞 태백산맥서점에 놀러갔다가 전투경찰관들이 정문 앞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터졌구나.'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면 틀림없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집에 있던 지하유인물을 모두 불태웠다. 용공 서적은 절대로 아니지만 오해될 수 있는 책도 불태워버렸다.

친구들의 이름을 쓴 수첩도 없애버렸다. 교도소에 들어갈 것에 대비하여 교도소에 넣을 책들의 목록을 만들어 사촌동생에게 맡겨 두었다. 황선용은 10월 18일에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에게 당장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졸랐다. 경찰의 손이 닿기 전에 수술을 받고 드러누워 버려야 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지금 상태에서는 수술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남성철에 이어 황선용은 10월 22일 밤 서면서림에서 붙들려 동래경찰서로 끌려갔다. 고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후 세력을 대라고 했지만 황선용은 할말이 없었다. 최성묵 목사와 언제 만났느냐, 양서조합에 들었느냐, 배후 세력으로부터 돈을 얼마 받았느냐……, 목 비틀기, 팔 뒤로 젖히기, 물 먹이기가 계속됐다. 황선용은 수술을 앞둔 골수염 환자라고 했으나 형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24일 오후 황선용은 동래경찰서 3층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고 난 뒤 1층 보호실로 끌려가고 있었다. 3층 계단을 걸어내려 2층 복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복도 끝이 바깥의 가을 하늘과 환하게 통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그 터널의 끝을 향해 뛰고 있었다. 감시 책임을 맡았던 형사는 벙벙한 상태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황선용은 아래로 몸을 날렸다. 머리를 밑으로 하고서. 그래야만 쉽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몸은 높이 3미터쯤에 걸쳐져 있던 전기줄에 걸렸다. 몸이 덜컹 한 바퀴 돌면서 그는 땅에 떨어졌다. 오른쪽 어깨가 먼저 닿았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역사는 끝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황선용은 새 역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음을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황선용은 어깨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골수염을 앓고 있었던 다리도 무사했다.

정광민, 물 고문으로 기절·입원

경찰이 이진걸 계열로 지목하여 붙들어간 부산대학생들은 거의가 동고등학교 출신과 공대 학생들이었다. 정광민 계열로 지목된 학생들은 대부분 경제과 2학년생 등 상대 학생들이었다. 경제과 2학년 박현호는 10월 23일 집에서 동래경찰서 형사들에게 붙들려갔다.

정광민이 선언문을 읽을 때 그는 자기가 갖고 있던 이진걸의 선언문을 건네주었었다. 이것이 죄가 된 것이었다. 정광민이 달아날 때 바꿔 입을 옷을 주었던 엄태언, 정광민의 가방을 받아 갖고 다녔던 하창우, 15일에 정광민과 식당에서 선언문 등사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결론 없이 헤어졌던 황헌규도 붙들려가 조사를 받은 뒤 즉심에 돌려져 5일에서 10일까지의 구류를 살았다.

정광민은 자수한 다음날(20일) 밤 10시께 보호실에서 형사들에게 불려나갔다. 검은 안대로 그의 눈이 가려졌다. 형사들은 그를 끌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밤바람이 그를 스치며 지나갔다. 한쪽이 트인 복도인 것 같았다. 광민은 형사들에게 끌려 다니다 보니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취조실에서 그는 물을 먹이는 통닭구이 고문을 세 번 당했다.

물 고문을 당할 때는 광민은 숨을 가득 들이켜 허파를 미리 공기로 채워놓았다. 그들은 거꾸로 매달고 콧구멍 속으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2분쯤 지나자 허파에 비축된 공기도 소진되고 그는 정신을 아득하게 잃어갔다. 의식을 잃을락 말락할 때 형사들은 광민을 풀어주었다. 광민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고픈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광민은 경찰의 신문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전도걸과 함께 선언문을 등사한 사실, 도망다닌 경위, 배후 관계가 없다는 것 따위. 그러나 경찰은 배후 조종자를 대라고 끈질기게 다그쳤다. '너의 아버지는 고정 간첩이지'라고 묻기도 했다. 이 말에 광민은 악이 받쳤다. 공산당이 싫어 죽음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온 사람을 간첩으로 몰다니. 광민은 의식이 아득해지는 속에서도 이 비열한 형사에 대한 증오로써 고통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정광민은 세 번째 '수도공사'를 당하고는 뻗어버렸다. 팔다리에 경련이 오더니 뻗뻗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질린 것이 고문 형사였다.

그들은 광민을 가까운 대동병원으로 옮겼다. 포도당 주사를 맞고 광민은 새벽에 정신을 차렸다. '이제 괜찮은가 보구나.' 근심스런 표정으로 광민을 지켜보던 두 형사는 반갑게 광민의 회복을 맞았다. 그 뒤 광민은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광민은 보호실에서 처음으로 이진걸을 만났다. 둘은 곧 친해졌다. 정광민은 보호실에 있던 경영과 3학년 권영일이 시멘트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쓰러지는 것을 봤다. 경찰은 권영일이 간질병을 앓고 있어 발작한 것이라고 발뺌했으나, 광민은 집요한 신문을 못이겨 자살하려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민전 관련수사

황성권은 경찰이 불순분자로 몰기에 가장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부산 학생이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이었다. 더구나 그는 서울에서 여러 차례 시위를 주동한 활동가임이 밝혀졌다. 1978년 6월 26일 밤의 광화문 시위, 그 달 29일 저녁의 YMCA회관 앞 시위에 황군은 가담했다는 것이다. 마산이 고향이라 부산에 이어 터진 마산 데모와도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경찰은 생각했다. 황성권의 16일 광복동 데모대 지휘는 일사불란했고 구호도 가장 적극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경찰은 데모대 속에 자기의 선동꾼을 심어둔 것으로도 추측했다.

중부경찰서 정보과는 황성권을 수사과 112수사대에 넘겼다. 112수사대는 소매치기나 특수한 강력 범죄를 다루는 형사반이다. 요원들은 고참형사들. 112수사대장은 부산시경 안에서도 이름을 날린 민완 형사였다. 효주양 첫 번째 유괴 사건을 해결하여 경위로 특진한 그는 신문을 기술적으로 잘하는 사람으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황성권을 맡은 형사 다섯 명은 호텔 수사를 시작했다.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않게끔 수사를 해야 할 때 경찰은 곧잘 호텔방을 빈다. 목욕탕은 고문 시설로는 뺄 수 없는 것이고 여간 비명을 질러도 바깥으로 새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새부산호텔과 반도호텔을 끌려다니며 황성권은 문초를 당했다고 한다.

'배후 세력을 대라.'
'누가 너를 이곳으로 보냈느냐?'
이것밖에는 묻지 않았다. 다른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형사들은 성권을 고문에 걸었다고 한다. 엎드려 눕게 해놓고 등에 걸터앉아 목을 비틀고 팔을 뒤로 치켜올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물도 먹였다는 것이다. 고통을 참다못해 그는 '박아무개를 잘 안다'고 말했다.

박양은 부산사태전에 남민전 요원으로 발표됐었는데 성권은 이 여자와 몇 번 만난 적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남민전이란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형사들은 흥분했다. 중부서는 시경을 통해 치안본부로 남민전 용의자 체포 사실을 즉시 보고했다. 다른 공안 수사기관에는 알리지 않았다.

치안 본부가 생색을 낸 뒤 뒤늦게 이 소식을 통보받은 모 기관은 당황했다. 기선을 경찰에 빼앗긴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중부경찰서는 축제 분위기가 됐다. 형사들 사이에 특진 경쟁이 벌어졌다. 성권을 잡아온 형사에게 특진의 기회가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성권의 남민전 관련 사실을 밝혀낸 112수사대 형사들이 특진돼야 하는 가로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모 기관 부산 지부의 왕모수사관은 성권을 합동수사단으로 데려갔다. 형사들은 왕수사관이 경찰서장의 양해도 없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멋대로 데려갔다고 원망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왕과 황(성권)의 대결이 시작됐다. '너가 죽어야 내가 산다'' 몸무게가 100킬로르램도 넘을 것 같은 왕수사관은 이렇게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이다. 엎드려 눕게 한 뒤 팔을 뒤로 머리까지 치켜올리는 고문을 했다. 성권은 고문 그 자체보다도 고문을 기다리는 순간순간이 더욱 두려웠다. 눈을 가린 채 다음엔 어떤 종목의 고문이 닥쳐올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순간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고무신으로 뺨을 때리거나 물을 먹이고 목을 비트는 그 순간은 오히려 몸의 고통만 있어 견디기가 쉬웠다. 그런 고문은 오히려 성권의 악만 키워주었다. 성권은 왕을 골려주고픈 마음이 생겨 얻어맞으면서 껄걸 웃어젖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왕수사관은 숨을 씩씩 몰아쉬며 성권을 두들겨 팼으나 성권의 얼굴로부터 경멸의 웃음을 지우지는 못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원대한 꿈을 키워온 사람이다. 당신은 날 때릴 자격이 없다.' 성권은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다. 며칠 뒤, 서울에서 남민전 전문가들이 내려왔다. 남민전 사건을 취급했던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황성권을 신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