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부 무능 준열히 꾸짖어

25일 정오 청와대 박진환 농촌담당 특보는 여느 때처럼 청와대 경호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본관에서 그를 찾는 전화가 왔다. 박대통령이 부른다는 것이었다.
'좀처럼 낮에 부르는 일이 없는 분인데……' 하면서 박특보는 혹시 개각을 하는데 자기보고 뭘 맡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상상했다. 박대통령은 식당에서 김계원 실장, 김용식 주미대사, 최광수 의전수석 비서관과 함께 스테이크를 들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박특보에게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더 먹으라고 권하곤 동석자들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박박사 고향이 마산인데,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박특보는 며칠 전 마산에 사는 친척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민심이 떠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국민들이 새마을운동에도 옛날처럼 열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방 관리들이 올리는 새마을 관계 보고나 통계도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뭔가 헛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고약한 일인데.'
'12월초에 장충체육관에서 열 새마을지도자 대회도 박수만 요란하지 김이 빠질 것 같습니다.' 박특보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박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것 참. 부산 광복동에서 파출소에 불을 질렀는데, 옆에 있던 반티이(함지박) 장수들이 손뼉을 쳤다는 거야. 그렇다고 그 아줌마를 좌익이라고 할 수 있어? 평소에 그 파출소에서 노점 아주머니들을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랬겠어. 역시 이것은 정당이나 정치에 맡겨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야.'

말을 끝맺자 박대통령은 벌떡 일어섰는데, 박특보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 같았다. 비서관이 '회의 시간이 다 됐다'고 대통령에게 알렸다. 박대통령의 근본적으로 정치에 기인한 부마사태를 정치로서가 아니라 행정으로 해결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정치가로서 그의 한계였다.

25일 오후 청와대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오후 2∼4시 사이 안보회의가 열렸다. 대통령, 총리, 부총리, 외무, 법무, 내무, 국방, 보사, 문공장관과 청와대에서 김계원, 서종철, 신직수, 유혁인, 고건, 임방현, 정보부에서 김재규, 현홍주가 참석했다. 현국장이 부마사태에 대한 총괄적인 보고를 했다(현국장은 10월 22일에 대통령에게 1차 보고를 했었다). 원인 분석 중에 '장기집권 운운' 하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박대통령은
'정부의 실정보다는 김영삼이의 영향이 더 크다'고 코멘트를 했다.
보고가 끝나자 박대통령은 준열하게 꾸짖었다.

'이번 부마사태에 대해 정보부와 내무부 등 정보기관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사전에 정보활동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큰 소요로 확대된 것이다. 이번 사태는 ①사전 정보활동의 부족, ②초동단계 진압의 실패, ③일선 공무원들의 안일한 대(對)국민 자세에서 기인한 만큼 각 기관은 이의 시정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라.'

한편 10월 22∼25일 사이 김계원 비서실장은 이미 전면개각을 위한 인선작업에 착수, 친한 사람들로부터 인물들을 추천 받고 있었다. 김실장이 박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인선작업을 진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박대통령이 정보부장 등 권력 핵심부의 교체를 계획하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정보부장에는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과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가 거론되고 있었고 강창성 당시 해운항만청장과 조병규(趙炳奎) 당시 유정회의원의 입각도 거의 확실해진 상태였다. 차지철은 10월 24∼25일께엔 친한 사람들에게 '이번에 정보부장을 바꾸겠어!' 하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박대통령, 최상의 기분

26일 새벽 2시 박종규 집
잠자리에서 박종규는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시계를 봤다. 새벽 2시였다. 수화기를 드니 대통령이었다.
'자네 어제 낮에 나한테 한 말이 틀림없지? 아침에 삽교천에 가는데 돌아와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세.' 대통령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26일 오전 청와대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자기도 참석하고 싶다는 뜻을 경호실에 알려왔다. 이날엔 삽교천 행사 이외에 김재규의 업무와 관계가 있는 시설의 준공식도 있을 예정이었다. 차지철은 매정하게 김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것이 이날 김재규에겐 첫 번째의 기분 나쁜 일이었을 것이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부산·마산을 다녀온 박승규(朴升圭) 민정수석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계엄군의 강경책이 민심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김실장은 '내일 대통령께 보고할 때 차실장의 월권 행위에 대한 보고도 같이 하라'고 지시했다. 김실장은 얼마 전 박대통령에게 '정치문제에 청와대가 직접 손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완곡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금방 알아듣고 '차실장은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알아서 할 것이다'고 했었다. 김실장은 김재규가 차의 견제를 받는 바람에 부하들로부터도 '왜 우리가 할 일을 못 찾아먹느냐'는 반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를 도와주고 싶어했다.

10·26 뒤 군사재판정에서 김계원은 차실장의 월권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다.
'정치문제에 대해 대통령을 직접 보좌하는 청와대 근무자 이외에는 정치에 개입치 말아야 하나 차실장은 정치에 비교적 깊이 개입했습니다. 또 군 관계에 있어서도 지휘계통을 문란 시킬 위험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것을 저는 월권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차실장을 보내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만 박대통령 각하께 건의하여 대통령이 직접 차실장에게 주의를 주시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편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이날 새벽을 기해 시내에 배치했던 군 병력을 주둔지로 철수시켰다. 계엄사령부는 평온한 시내 분위기의 지속을 당부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불길한 징조, 노루의 횡사

26일 오전 삽교천
김계원 실장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한 대통령을 수행했다. 대통령 전용차에 동승한 김실장에게 박대통령은, '노모님의 병세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김실장이 병세가 좋지 않다고 했더니, 대통령은 '내일과 모레 고향에 내려가 자당님을 모십시오. 이틀간 찾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정각 박대통령은 헬리콥터 편으로 당진에 도착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서는 이희일 농수산부장관의 경과 보고에 이어 박대통령의 치사가 있었다. 이날 치사를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들은 사람들 중엔 '대통령의 목소리 같지 않다'고 느낀 이들이 많았다.

단상 행사를 마친 뒤 박대통령은 준공 테이프를 끊었다. 이 마을 최고령자인 83세의 이길순 노인을 나오게 하여 같이 끊었다. 이노인이 당황하자 대통령은
'하나, 둘, 셋 하면 자르십시오'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테이프를 자르고 배수갑문 스위치를 눌렀다. 용트림하듯 쏟아져나가는 불줄기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방조제 위의 포장도로를 시주한 뒤 삽교호 기념탑 제막식에 참석, 제막용 줄을 잡아당겼다. 기념탑에 씌워진 커튼이 반밖에 걷히지 않는 '사고'가 났다. 기념탑 주변 평야에 야적된 볏단을 바라보던 박대통령은 뒤를 좇는 관계 관 및 출입기자들에게 '물이 괸 논은 벼를 다발로 묶어 십자형으로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걸쳐 말리면 습기가 완전히 제거되어서 벼이삭도 잘 건조된다'고 설명해주기도 했다.

박대통령이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러 내려올 때 이용한 3대의 헬리콥터가 도로에 대기하고 있었다. 비서실장·경호실장과 함께 1호 헬리콥터에 오른 박대통령은 헬기가 시동을 걸고 준비를 하는 동안 앉은자리에서 먼 들판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헬기가 이륙하기 직전 고개를 돌려서 좀 떨어져 대기하고 있던 출입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국내외 출장 등 갖가지 공식 행차에 그림자같이 수행하며 대통령의 동정을 취재 보도하던 수행기자와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이처럼 말없는 속에 이뤄졌다. 박대통령은 헬리콥터 편으로 인근에 도착, 최근 완공된 한 통신시설의 준공 테이프를 끊고 내부 시설을 돌아본 뒤 건물 앞뜰에서 기념식수를 했다.

26일 정오 도고온천
박대통령은 통신시설을 둘러본 뒤 점심을 들기 위해 헬기편으로 도고온천 관광호텔로 향했다. 헬기가 내릴 때 두 번째 '사고'가 났다. 이 호텔에서 사육하는 노루가 프로펠러 소리에 놀라 뛰다가 무엇인가에 부딪쳐 즉사한 것이었다. 이날 박대통령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언제나 농촌에만 나서면 신이 나고 힘이 펄펄 솟는 사람이었다.

1973년 11월 광주의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후세에 너의 조상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의 조상은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서 알뜰하게 일한 바로 저 마을의 농민이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자'는 즉석 연설을 한 사람이었다.

이 대회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내장사의 숙소에서 그날의 감격을 [새마을 노래]의 제4절 작사로 푼 사람이었다. 음악과를 나온 둘째 딸과 함께 피아노를 치면서 [나의 조국]을 작사 작곡한 사람이었다. [나의 조국] 가사를 직접 지어 노산 이은상에게 교열을 부탁했더니, 노산은 빨갛게 고쳐 가지고 돌려주었다.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식의 가사는 고루하고 궁상맞게 들리니 정의와 자유라는 낱말을 많이 쓰는 게 좋겠다는 의견까지 달았다.

박대통령은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한 뒤 자신의 고집대로 해 버렸다. 1974년 8월 16일 새벽 육여사의 빈소를 지키고 있는 장관들에게 '국민장이라고 해서 모든 장관들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수원 새마을 연수원에 입교하도록 된 장관들은 예정대로 들어가라'고 당부한 사람이 박대통령이었다. 도고호텔에서 점심을 들면서 박대통령은 7일 전에 있었던 이광요 수상과의 대화를 소개했다.
'이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선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 안 된다는 거야.'

서울 상공 한 바퀴 돌며……

26일 오후 2시 아산만 도고호텔을 떠난 헬리콥터 1번기는 박대통령을 태우고 아산만 상공으로 향했다. 대변인 등 청와대 참모들이 탄2번기는 1번기로부터 '먼저 통과, 서울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경호원이 탄 3번기는 기체 고장으로 이륙이 약간 지체됐다. 이것은 이날의 세 번째 '사고'였다. 박대통령의 1번기는 제2종합제철 후보지로 거론되던 아산만 상공에서, 또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던 충무공의 현충사 상공에서 한참 머물러 있다가 서울로 향했다. 박대통령의 공중 시찰 때문이었다. 청와대엔 2번기가 먼저 착륙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1번기를 기다렸으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기다렸다. 이때 박대통령은 1번기로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6·25의 폐허 위에서 솟아나 그의 시대에 세계적 대도시가 된, 콘크리트 정글의 모습을 그는 마지막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26일 오후 청와대
한참만에 청와대에 착륙한 1번기에서 박대통령은 내리면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아주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계속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오후 5시 조금 넘어 임방현 대변인은 국민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퇴근 채비를 하고 있는데, 박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연두 기자회견 준비는 어떻게 돼가나?'라고 물었다. '이미 착수했습니다'고 했더니 대통령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참 잘했어. '아주 잘했어'라고 칭찬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살의의 탄생

26일 오후 정보부장실
10월 26일 점심 때 김재규 부장은 박준규 공화당 의장을 궁정동의 부장 사무실로 초대, 식사를 같이 했다. 김부장은 부산사태 직후인 10월 18일에 부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그는 시민이 학생과 합세, 폭동으로 번진 가장 큰 원인이 조세 저항이라고 말했다.

'제가 몇 시간 동안 광복동에 서서 왜 여기서 대규모 시위가 터졌는지 지형을 관찰했었습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2시 김재규는 며칠 전 귀국한 장성 출신 재미동포 이모씨를 남산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씨는 김형욱의 자서전이 안 나오도록 김재규와 김형욱 사이에서 교섭을 중계해준 사람이었다. 10분간 계속된 면담에서 김부장은 초조해 보였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오후 4시쯤 김재규는 집무실에서 차지철의 전화를 받았다.
'오후 6시부터 궁정동에서 '대행사'를 갖는다'는 전갈이었다. 김계원 실장은 오후 4시 30분쯤 차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6시에 각하를 모시고 만찬을 하게 되니 6시전까지 부장한테 가시오.'

김계원의 사무실에는 유정회의 최영희(崔榮喜) 의원이 와 있었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던 것이다. 궁정동의 정보부장 공관 옆 식당에선 한 달에 열 번쯤의 만찬이 있어왔는데, '대행사'란 여자 2명과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이 참석하는 모임을 이르는 말이었다. 궁정동 행사는 보안 유지를 위해 이후락 부장 때부터 시작했고 신직수 부장 때부터 본격화됐다. 50명의 정보부 경비병이 배치돼 있었다. 정보부 경비병은 외곽 경호, 대통령을 수행하는 청와대 경호원은 내부경호를 책임졌다.

차의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15분쯤 있다가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의 부장 집무실로 오라'고 했다. 김은 이어 김정섭 제2차장보에게 '5시 30분까지 궁정동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김재규는 대통령과의 만찬이 있는 줄 알면서 정총장을 겹치기로 초대했다. 그것은 바로 '살의의 탄생'이었다. 결행 뒤 육군참모총장의 힘을 빌겠다는 계산의 실천이었다.

차의 전화를 받은 그가 정승화 총장에게 전화를 걸기까지의 15분 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추리만 가능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이날 박대통령의 기분은 최상이었는데, 김재규의 기분은 최악이었다는 점이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에게 26일까지 마무리짓겠다고 약속했던 '신민당 당직자 사퇴 및 정대행 출범 공작'은 전날에 완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황낙주·최형우의 설득이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당직 백지화 운동을 벌이던 비주류 ㄱ, ㅅ의원까지도 갑자기 김영삼 총재지지 쪽으로 돌아버렸다.

이런 급변은 24일에 공화당이 신민당 의원직 사퇴서를 일괄 반려할 방침을 밝힌 것과도 유관했다. 이것은 여당측도 김영삼 체제를 인정한다는 인상을 주어 신민당에서의 김총재 입장이 강화됐던 것이다.

김재규는 '공화당의 발표가 대(對)신민당 공작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화를 냈고 김차장보는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에게 이 불만을 전달했다. 어쨌든 김재규는 또다시 실패함으로써 대통령을 볼 면목이 없게 된 것이었다. 김재규는 이때쯤 김치열 법무가 정보부장 후임 물망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본인은 재판정에서 시종 몰랐다고 했으나 부마사태 이후 청와대 주변에선 개각설과 정보부장 교체설이 파다했었다.

실제로 김계원 실장은 여권내의 친한 사람들과 만나며 정보부장 후임자 추천과 이에 대한 인물평을 모으고 있었다. 당시 내무장관 구자춘도 정보보장 후임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관리하에서 '해치울 수 있는'기회는 그날이 마지막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부산사태의 현장 시찰에서 민심이 박정권에서 떠났다는 판단을 했고 그런 생각은 그에게 용기를 더해주었을 터이다.

그의 법정 진술대로 유신의 심장만 쏘면 정권은 저절로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다가 차실장에 대한 증오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더구나 이날 아침엔 자신의 대통령 수행 제의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명예롭게 죽을 명분의 발견

좌절·분노·소외·초조가 뒤범벅된 이런 감정의 바탕에는 그의 인격을 형성해온 사생관이 깔려 있었다.

'내 목숨을 독재와 맞바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명분은 달리 없었다. 치욕적으로 쫓겨나갈 것이 확실한 그 시점에서 그런 명분은 유혹이었다. 김은 모든 걸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보부장이란 막강한 자리에서 척 내려다볼 때 김재규는 사후 조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 추정의 근거로 당시 서울 주변의 군부대 지휘관들의 인맥을 드는 분석들이 있다.

계엄사령부의 '12·12사태 조사 발표문'에 따르면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었다고 한다. 군복무를 통해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웠고 3군단과 경북 출신 재경 장성 모임을 인수인계한 인연도 있었다. 정병주(鄭炳宙) 특전사령관은 김재규의 안동농림 후배였고 매월 정기적으로 금품을 받는 등 추종관계에 있었다.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은 김재규 정보부장 밑에서 제1차정보 겸 제 2차장으로 일한 심복이었고, 김의 추천으로 육군참모차장과 3군사령관의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 주변의 군부대 지휘관으로 이런 심복들이 있기 때문에 구태여 사전 모의를 같이 하지 않아도 박대통령과 차실장만 제거하고 계엄령을 선포,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면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대권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김재규였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측근이 되고서도 늘 회의했던 사람이었다. 유교적인 도덕관을 지닌 그는 대통령에 충성하면서도
'이래선 안 되는데……' 란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때로는 굴욕감을 느끼고 때로는 분노했던 이가 김재규였다.

철저하게 충성하지도 철저하게 부패하지도 못했던 김재규는 1979년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통령에 대해 실망, 절망, 끝내는 증오까지 하게 되었다.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대통령에게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최후까지 정의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굴욕감이나 증오심만으로는 총알이 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1979년에 들어서 김재규는 서서히 대통령에 대해 절망해가면서 모반의 마음을 키워갔고, 끝내는 개인의 정분을 끊을 수 있을 만한 폭발력까지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지철, 저놈이……'

5∼6시 궁정동
김재규는 오후 5시 조금 지나서 궁정동에 도착,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금고에서 7연발 웰터 권총을 꺼내 노리쇠를 전진 후퇴시켜 고장 유무를 확인한 뒤 서가 뒤에 숨겼다. 5시 10분쯤 김계원 비서실장이 왔다. 궁정동엔 비서실장도 비서를 대동치 못하며, 식당에는 직접 들어갈 수가 없고, 반드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부장 사무실로 가야한다. 김계원은 김재규의 사무실에서 그를 위로했다. 김부장이 이 며칠간 야당 공작에 애를 썼으나 실패한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정보부장을 지냈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정치요.'
'사회의 공기가 얼마나 험악한지 실장님은 모르실 겁니다. 계엄 선포로 며칠은 조용하지만 얼마나 가겠습니까.'
'왜 그렇게 약하오. 우리 정부가 오늘내일 쓰러질 것도 아닌데 왜 겁이 나서 그러오?'
'차실장 저놈이 무슨 일만 있으면 야당 의원 한 두명의 이야기만 듣고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만 해서 각하의 판단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오늘 그 친구를 해치우겠습니다.'
대강 이런 이야기가 사무실과 정원에서 오갔다.

김재규가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는 말을 했다는 데 대해서 김계원은 법정에서 부인했다. '해치우겠다'는 말도 그전에 여러번 들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식당으로 가는 도중 '오늘 갑자기 웬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김계원은 '나도 몰라요. 삽교천 제방공사 준공식에 참석, 먼 거리를 여행하신 후라 피로하여 일찍 쉬실 줄 알았는데……' 라고 답했다.

'나도 갑자기 연락을 받았는데, 그전에 정총장을 초대해놓았습니다.' 이 대화로 보아 갑작스런 궁정동 만찬은 차실장이 박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것임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부마사태로 심기가 불편하던 대통령이 농촌바람을 쐬고 기분이 좋아지자 여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각하도 포함됩니까?'

저녁 6∼7시
박대통령과 차지철이 도착한 것은 6시 5분께. 나동 만찬장의 자리 배열은 직사각형 식탁의 한쪽에 박대통령이 혼자 앉고, 그 맞은편에 김재규와 김계원, 차실장은 김재규의 왼쪽 측면에 떨어져 앉았다. 상 밑이 패어 발을 아래로 걸치고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박대통령은 앉자마자 부산사태와 관련, 국내 치안에 별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고, 김재규는 평온하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삽교천 이야기, 신민당 공작 실패, 정보부의 무능, 김영삼 구속 문제 등으로 화제가 전개 됐다. 박대통령은 김재규를 공박하고 차지철은 이에 가세하는 형편이 됐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기가 딱했다고 한다. 그래서
'삽교천 공사가 잘됐습디다'
'충청도 농촌이 아릅답습디다'
'김부장이 이래도 칵테일을 잘합니다' 식으로 화제를 억지로 바꾸려고 했다.
뒷날 김계원은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김재규가 앞마당에서 저와 이야기할 때 시해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는 생각지 않습니다. 만찬이 시작된 후 40∼50분 동안 얘기가 오갔는데, 이때 김재규 피고인이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몰려 있어 갑자기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이 방과 붙은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관들과 함께 앉아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여가수 심수봉양도 '누구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었다. 6시 50분쯤 여가수와 여대생이 들어와 박대통령의 양쪽에 앉았다. TV 7시 뉴스에 삽교천 준공식이 나오면서 대화는 잠시 중단됐다.

저녁 7∼7시 40분

저녁 7시에 의전과장 박선호는 한숨을 돌리고 나동(棟)의 식당 옆방인 대기실에서 청와대 경호처장 정인형, 부처장 안재송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대행사가 있는 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 이었다.

이날도 예고 없이 오후 4시 25분쯤 차실장으로부터 직접 대행사 예정을 통보 받고는 여가수와 여대생을 황급히 내자호텔과 플라자호텔로 불러냈다. 박선호는 오후 5시 20분쯤 플라자호텔에서 여대생 신재순양을 만나 차에 싣고, 10분 뒤에는 내자호텔에 들러 가수 심수봉양을 만났다.

그런데 심양이 갖고 온 기타 줄이 고장나 이것을 바꿔 끼우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다. 6시 20분쯤 두 여자는 대통령 경호관들이 있는 대기실에 들어가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양은 태능 사격장에서 자주 만나 안면이 있는 안재송 부처장에게 인사를 했다. 6시 50분쯤 박선호는 두 여자를 차실장에게 인계한 뒤, 대기실에 남아 두 경호관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정처장과는 해병대의 동기생이며 올림픽 사격선수인 안부처장은 해병대 후배였다. 박선호는 해병대 대령으로 제대한 뒤 김재규(당시 차장) 덕분으로 정보부 총무과장까지 지냈으나 신직수 부장 시절 모종 사건에 관련, 1975년에 해임됐었다. 윤활유회사를 경영하다가 1978년 11월에 다시 김재규에게 불려가 의전과장이 됐다. 김재규는 박이 김천중학교에 다닐 때 체육교사였다는 사제지간의 인연도 있었다.

박의 전임자는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에 걸려 그만두었으니 박선호는 기묘한 인연으로 운명적인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다. 박은 여자 조달에 신경을 무척 써야 하는데다가 격무에 지쳐 한 달쯤 전엔 김재규에게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꺼낸 적도 있었다. '여자 관계로 보안상 제가 그만두어야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김부장은 '자네가 그만두면 이곳을 어떻게 하나'고 말렸다. 김재규도 '몸도 약하고 해서 박대통령이 그만두라고 했으면 좋겠다. 우리 같이 시골에서 낚시나 하고 장기도 두고 하면서 놀자'라는 말을 하곤 했다.

업무의 성격상 기독교 신자인 그의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이 많았고, 사후 수습에 골치를 썩인 적도 많았다. 애써 여자를 골라오면 경호실에서 퇴짜를 놓는 일도 잦아 친구인 정인형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골라라'면서 가볍게 다투기도 했다. 이날 박선호는 웃옷 속주머니에 20만원씩이 든 봉투 2개를 넣어두고 있었다.

7시 15분쯤 만찬장에서 음식을 나르는 남효주 사무관이 박에게 오더니 '부장님이 나오신 지 5분이나 됐는데 모르고 있느냐'고 했다. 놀란 박과장은 플래시를 비추면서 본관 쪽으로 갔다. 김재규가 박흥주 대령(수행비서관)을 데리고 나오고 있었다. 김은 구관 침실 뒤쪽 잔디밭에서 '둘 다 모여!' 라고 했다.

김재규가 만찬장에서 슬며시 바깥으로 나온 것은 그 5분쯤 전이었다. 이때 그의 울분은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 있었다. 그는 나동 식당 건물을 나와 부장 집무실이 있는 별채의 본관으로 갔다. 그곳엔 별도의 식당이 있었다. 여기서 한 40분전에 도착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들른 김재규는 '각하와 식사중이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는 2층의 집무실에 갔다. 서가 뒤에 올려놓은 서독제 웰터 35구경 7연발 권총을 바지 뒷 호주머니에 넣었다. 김재규가 집무실을 나서는 것을 비서실에 앉아 있던 박흥주 대령이 목격, 뒤를 따랐다. 김부장이 권총을 뒷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이 와 있는 것은 긴급한 명령을 받으러 온 것이라고 짐작,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은 갖고 있었다.

김부장은 구관 앞 잔디밭에서 박대령과 박선호를 가까이 오게 한 뒤 바지 뒷 호주머니를 툭 쳐 권총을 가졌다는 시늉을 한 뒤,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잘못되면 너희들이나 나나 다 죽는 거야. 오늘 나는 방에서 해치우겠다. 너희들은 경호원을 맡으라'고 했다.
'군참모총장과 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돼 있겠지.'
박선호는 부마사태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참모총장까지 와 있는 걸로 미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각하도 포함됩니까?'
'응.'
'오늘은 안됩니다.'
박선호는 친구 정인형 생각이 나서 이 거사를 미루고 싶었다. 정처장은 군 동기생의 부탁을 잘 들어주어 친구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안돼! 오늘 안 하면 보안이 누설돼서 안돼.'
'각하 경호원이 오늘은 7명이나 됩니다. 다음으로 미루죠.' 이것은 박선호의 거짓말이었다. 그날 경호원은 4명뿐이었다.
'안돼. 똑똑한 놈 3명만 데리고 와.'
이때 박선호는 이 일을 왜 박흥주 대령에게 시키지 않느냐고 속으로 원망했다고 한다.
'알았습니다. 30분간 여유를 주십시오,'
'30분전엔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돼!'

김재규가 15분 가량 술자리를 비운 사이 김계원은 초조했다. 호스트역을 해야 할 김부장이 침울한 데다가 자주 자리를 떴기 때문이었다. 김재규가 7시 25분쯤 다시 술자리에 들어왔을 때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김부장도 양복 상의를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