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탕! 탕!

이날 '대행사' 만찬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들은, 당시 생존자들의 법정 증언을 종합할 때 대강 이러했다.

박정희 : 신민당 공작은 어떻소?

김재규 : 공화당이 발표했기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필자 주 : 당직자 사표)를 내겠다고 한 친구들도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암만해도 당분간 정대행 출범이 어렵겠습니다. 주류들이 강경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박정희 : (공화당 간부들이 못마땅하다는 말을 함).

차지철 :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김재규 : (속으로 '자식 여전히 지랄이구나'고 생각).

박정희 : 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라 가지고 야단이야. 오늘 삽교천에 가보았더니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식당 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수리 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이 계획한 일인데도 괜히 개각이니 뭐니, 국회의장을 사퇴시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중앙정보부는 수고는 많이 하는 줄 알지만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부마사태 사진을 보니까 깡패들만 보이는데 다른 사진을 가져와 봐.

저녁 6시 50분쯤 심·신양이 술자리에 들어갔다. 저녁 7시 뉴스시간에 삽교천 방조에 준공식이 방영되었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육성 연설을 그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다. 박대통령 등이 뉴스를 보고 있는 사이 김재규는 슬그머니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과장을 불러 결행준비를 지시하고 들어왔던 것이다.

7시 20분께 삽교천관련 뉴스가 끝나자 대통령은 TV를 끄게 했다. 심수봉양은 대기실로 가서 기타를 들고 왔다. 들어오면서 보니 김재규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심양은 [그때 그 사람]과 [눈물 젖은 두만강]을 먼저 부른 뒤 차지철을 지명했다. 차실장은 [도라지]와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

김재규가 몰리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김계원은
'각하, 차실장이 저런 노래도 다 부릅니다'고 농담을 했다. 차실장에 이어서 신양이 심양의 기타반주에 맞추어 [사랑해 당신을]을 부르기 시작했다. 7시 35분쯤 주방의 남효주가 이 자리로 들어와 김재규에게 귓속말로 '과장님이 뵙자고 합니다'고 했다. 김부장이 옆방으로 나가니 박선호는 '준비 끝났습니다'고 했다. 김재규는 술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김이 앉자 이야기는 다시 정치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박정희 : 미국의 브라운 장관이 오기 전에 김영삼이를 구속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 국방장관 회의고 뭐고 볼 것 없이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이야. 미국놈은 범법해도 처벌 안하나.

김재규 : 김영삼은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국회에서 제명이 된 걸로 처벌했다고 국민들이 봅니다. 같은 것으로 두 번 처벌하는 인상을 줍니다.

박정희 : 중앙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당신네는 (신민당 의원) 비행 조사서만 움켜쥐고 있으면 무엇 하나. 딱딱 입건해야지.

김재규 : 알겠습니다. 정치는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차지철 : 신민당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한 놈도 없습니다. 언론을 타고 반정부적인 놈들의 선동에서 그러는 거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어요.

김재규 : (오른쪽에 앉아 있던 김계원을 오른손으로 툭 치면서)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차실장을 쳐다보며)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탕!', 권총 한발 발사)

차지철 : 김부장, 왜 이래, 왜 이래.

박정희 : 무슨 짓들이야!

김재규 : (일어서면서 박대통령 향해서 한 발 발사).

차 속의 세 저격수

박선호는 7시 15분께 김부장의 결행 준비 지시를 받자마자 경비원 대기실에서 잡담하고 있던 중정 경비원 이기주에게, '리볼버 권총을 한 자루 갖고 오고, 너도 M15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나오라'고 연락했다. 이기주는 기관단총을 웃옷(양복) 안에 감추고 박과장을 따라 만찬장이 있는 신관 쪽으로 갔다. 나동 앞에서 박과장은 '유성옥이 총을 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실제로 총을 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공기 권총 쏘는 것은 봤습니다. 육군 중사 출신입니다.'
박과장은 '무장시켜 데리고 오라'고 했다. 경비원 대기실에 있던 유성옥은 리볼버 권총을 차고 따라갔다.

나동 앞의 정원에서 이, 유, 두 사람은 선 채로 박과장의 지시를 받았다. 이기주는 경비원 중에서 유일한 해병대 출신이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생각으로 해병대 대령 출신인 박과장을 충직하게 따랐다. 유는 박과장의 관용차 운전사였다. 박과장은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을 부른 셈이다. 박과장은 '주방 뒤에 있다가 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뛰어들어가 경호원들을 한쪽으로 몰아붙여라'고 했다.

'경호관들이 총을 쏘면 어떻게 합니까?' 경비원 이기주는 겁이 덜컥 나서 물었다고 했다(법정 진술).
'같이 쏴! 사살해도 좋다!'
박과장은 '잘하면 한몫 볼 것이다'고 덧붙였다.
이기주는 '처음 지시를 받고는 겁이 나서 도망이라도 갈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해병출신이고 과장님도 해병 출신으로서 나를 신임하는데 어떻게 거역하겠느냐'고 생각하여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법정 진술).

이기주는 또 '평소에 정보부장이 경호실장 밑에서 꿀리고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제2차장보와 육군참모총장도 별채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차경호실장을 사살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유성옥도 '과장 지시에 불응하면 나중에 나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고 했다(법정 증언).

유성옥은 박과장 전용차인 제미니를 나동 후문 쪽으로 몰고가 대기 시켰다. 한편 박흥주 대령은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뒤 주차장으로 가서 김재규 전용차에 놓아둔 가방에서 독일제 웨슨 38구경 9연발 권총을 꺼내 차고 별채의 화장실로 들어가, 평소에는 안 피우는 담배를 피워 물고 고민에 빠졌다. 7시 30분쯤 박대령은 나동 쪽으로 가다가 박선호 과장을 만났다. '나는 어디로 가야지?'
박과장이 관리 책임을 맡고 잇는 궁정동 안이기에 박대령이 할 일은 뚜렷하지가 않았다.
박과장은 '주방 옆으로 가라'고 했다. 어슴프레 차가 보였다. 박대령은 유성옥이 타고 있는 제미니 차의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얼마 있으니 이기주가 뒷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박대령은 '경호원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이기주는 '3∼4명 됩니다. 주방 안에서 술 마시고 있습니다'고 했다.

'우리 같이 살자!'

박선호는 김부장에게 '준비완료'를 알린 뒤 마침 화장실에 갔다 오는 안재송을 따라 대기실로 돌아와 입구 쪽 소파에 앉았다. 정, 안, 두 경호원은 맞은편 의자에서 땅콩을 까먹으면서 AFKN TV를 보고 있었다. 박선호는 재판정에서

'궁정동 식당에는 경비원이 20∼30명이나 있고 수류탄과 기관총까지 있어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었다. 내가 대기실을 맡은 것은, 다른 사람을 보냈을 경우 그냥 쏘아버릴 것 같아서였다. ……수사할 때 수사관이 나보고 바보라고 했다. 김부장을 쏘거나 밀고했으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배신했으면 김부장은 마음 아팠을 것이다. 신의가 중요하다. 신의가 없으면 상관은 죽은 상관이다'고 이때의 심경을 말했다.

7시 40분쯤, '탕!' 첫 총성이 울렸다.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것이다. 이 순간 대기실의 세 사람, 박·정·안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또 '탕!' 김재규가 일어나면서 대통령을 쏜 것이다. 박선호는 재빨리 38구경 권총을 뽑았다. 정·안 두 경호원을 겨누며 소리쳤다.
'우리 같이 살자!'
정처장이 권총을 뽑으려고 했다.
'꼼짝 마라. 움직이면 쏜다.'
박선호가 경고하자 정처장은 한순간 포기하는 표정이었다.
'같이 살자.'
박이 재차 소리쳤다. 안과 정의 눈이 마주쳤다.
안재송은 번개같이 몸을 일으키며 총을 뽑아 들었다.
'탕!'
박선호가 안을 향해 발사했다.
안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정처장의 손도 권총으로 갔다.
'탕!''탕!'
박선호는 뒷걸음질치면서 두 방을 쏘았다. 정처장이 쓰러졌다. 그 순간 박선호는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박선호가 당했을 것이다. 박이 '같이 살자'며 총을 겨누고 있었던 순간은 불과 15초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박선호가 바깥에 나갔을 땐 암흑이었다. '탕!' 소리를 합선 스파이크인 줄 알고 지하실의 배전공이 전원을 꺼버린 것이었다. 주방 쪽에선 총소리가 났다. 어리둥절해 있는 박의 손에서 누군가가 권총을 빼앗아갔다. 김재규였다. 김은 다시 엉망진창이 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야수의 마음으로 쏘다

저녁 7시 40분께 김재규가 쏜 첫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쪽 팔목을 꿰뚫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아!'(김재규의 고함)
'김부장, 왜 이래, 왜 이래.'(차지철의 목소리)
'이거 무슨 짓들이야!'(박대통령의 고함).
이런 세 마디는 거의 동시에 들렸다고 김계원은 증언했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고 김재규는 일어서면서 맞은편의 박대통령 가슴을 쐈다. 심양은 뒤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여 기타를 멈추고 일어섰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정좌를 하고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각하가 옆으로 슬며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총을 맞은 것을 알았습니다'고 증언했다.

이때 전등불이 나갔다. 김계원은 김재규를 떼밀면서 '불을 켜라!'고 소리치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김재규는 달아난 차지철을 향해 방아쇠를 더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그는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이때 차지철은 화장실의 문만 열고 내다보면서
'각하, 괜찮습니까?'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나는 괜찮아'라고 했다.
가수 심양이 대통령 곁으로 다가가 '진짜 괜찮습니까'하고 물었으나 심한 신음만 들렸다. 심양이 대통령을 일으켜 앉혔다. 옆에 있던 여대생 신양이 등뒤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았다.(심양의 법정 증언) 차지철은 '경호원, 경호원!' 소리치며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방패처럼 잡고 있었다(신양 증언).

김재규는 불발이 된 권총을 버리고 정원까지 나와 박흥주 대령에게 권총을 달라고 했으나 실탄을 다 소모했다는 말에 되돌아오다가 대기실에서 나오는 박선호를 복도에서 만나 그의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빼앗아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다(계엄사 수사결과 발표문). 차실장이 문갑을 잡고 피하는 것을 발견, 김재규는 그의 복부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심양은 '차실장에게 한 발 이상 쏜 것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던 심양은 이때 김재규와 눈이 마주쳤다(그때 전등불은 다시 들어 와 있었다).
'설마 하는데 김재규가 (구부리고 앉아 있는)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길래 방을 뛰쳐나갔습니다.' (심양의 증언)

대통령의 등에 손을 대고 피를 멈추게 하고 있던 신재순양은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나 숨었다. 김재규는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50센티미터쯤 앞에서 대통령의 머리를 쏘았다(그의 법정 진술).
'야수의 마음으로 개인의 정분을 끊고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것이다.
복도에서 전기 스위치를 더듬고 있던 김계원은 불이 들어오고 김재규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간 뒤 쾅 하고 넘어지는 소리와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김재규가 방을 뛰쳐나왔다.

김재규는 김실장에게
'일이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철저히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하지?' 김재규는 현관 쪽으로 가면서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하여 돌아가셨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법정 진술) 하고 말했다.

신음, 그리고 확인사살의 총성

술판이 벌어진 식당 안에서 탕! 탕! 총소리(김재규의 최초 발사)가 나자 이기주는 미리 열어두었던 차 문을 열어 젖히고 뛰어나갔다. 후문 뒷담 쪽 낮은 담 위로 올라가 유리창을 통해서 주방 안으로 두발을 쏘았다. 전등불이 꺼졌다. 안에 있는 경호관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전등불을 끈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둠 속으로 네 발을 연거푸 쏘아버렸다. 박대령은 차 문이 잘 열리지 않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데 시간이 걸려 약간 늦게 주방 쪽에 도착, 하얀 벽만 보이는 주방 안쪽으로 너 댓 발을 쏘았다. 유성옥도 네 발을 쏘아 넣었다.

이들 세 명은 조준 사격을 하지 못하고 대충 짐작하는 대로 모두 10여 발을 쏘았다. 이 총격으로는 대통령의 비공식행사 전용차 운전사 김용태(경호실 특수차량 계장)와 경호관 김용섭이 피살되고 경호관 박상범은 중상을 입었다. 불이 다시 켜지자 이, 유, 두 사람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성옥은 피살된 두 사람의 몸을 뒤져 권총을 빼냈다. 하나는 허리춤에 차고 다른 하나는 보일러공에 주었다.
이때 식당내 화장실에 숨어 있던 신양은 잠시 주위가 조용해져 바깥으로 나왔다. 문 앞에 차지철이 쓰러져 있었다. 신양은 누군가 다른 사람과 함께 부축하여 일어나시라고 했다.
'나는 못 일어날 것 같애!' 신양은 얼른 바깥으로 나가 사잇방에 들어가 오돌오돌 떨면서 숨어 있었다.

차실장의 신음이 들리더니 총소리가 계속 났고, 그 와중에서 전화가 몇 번 걸려왔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캐묻는 전화였다. 신양은 무조건 '모릅니다'고만 했다. 이기주와 유성옥은 주방에서 쓰러져 있는 경호관들의 몸을 뒤지고 있다가 김계원 실장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얘들아! 어서 들어와! 각하가 부상당했어!' 이기주가 만찬석상으로 들어가니
'밝은 데 있다가 들어가서 그런지 술집 조명보다도 더 어두운 듯했다'(법정 증언).

이기주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사람의 다리가 보여 '꼼짝마!' 라고 외치면서 권총을 겨누었다. 이때 김계원이 권총을 빼앗아갔다. 김실장은 '각하부터 모시라!'고 고함을 쳤다. 이기주는 비로소 쓰러진 사람이 각하인 줄 알고 그쪽으로 갔다. 경비원 서영준이 들어오기에 그의 등에 대통령을 업히고, 이기주는 뒤에서 받치고 현관 쪽으로 나갔다. 유성옥은 대통령 승용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김계원이 뒷자리로 들어가 대통령을 받아 무릎 위에 누이고 앉았다. 서영준은 조수석에 탔다. 김실장은 차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몰아!' 라고 했다.

총소리가 나도 중정 경비원들은 대기실에서 무장한 채 있었다. 박선호 과장이 오더니 '걱정할 것 없다. 청와대에서 경호원들이 오면 사살하라!'고 했다. 경비원 김태원은 이 말을 듣고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법정 진술). 박선호는 김을 따라오게 하여 신관 정문 쪽으로 갔다. 거기에 있던 이기주가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들어가서 한번 더 쏘고 오라. 과장님의 지시다'고 했다.
'무서워서 어떻게 들어가나요? 부장님과 할아버지(필자 주 : 박대통령)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기주는 '부장님과 할아버지는 피신하셨다'고 답했다.

김태원은 M16총을 들고 이기주와 함께 대기실로 갔다. 문 입구에 엎어져 있는 사람(안재송)에게 한 발, 방 안쪽에 엎어져 있는 사람(정인형)에게 두발을 쏘았다. 두발을 쏜 것은 '한 발이 맞지 않은 것 같았고, 이기주가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신음중인 차실장에게 두 발을 쏘았고, 주방 입구에 쓰러진 김용섭 경호관을 향해 또 한 발을 쏘았다. 주방에는 중정 직원(운전기사)인 김용남이 어깨에 총을 맞고 꿇어앉아 있었다. 확인사살은 15분쯤 걸렸다.

얼마 뒤 청와대 경호실에서 세 경호원들이 왔다.
'총소리를 못 들었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느라고 못 들었습니다.' 경호원들은
'이상하다. 상부지시로 비상근무 중이다. 확인 보고를 해야 한다'면서 남효주의 직책과 이름을 묻고 돌아갔다. 남효주는 '남호림'이라고 속였다. 국군 서울지구병원에서 유성옥이 전화를 걸어왔다. '각하의 생존 가망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러 또 전화가 왔다. 유성옥 이었다.

'보안대 사람들이 현장으로 가자는데 어떻게 할까요?' 박과장에게 보고했더니
'오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뒤 박선호는 대방동의 자기 집으로 갔다. '꼬마가 있어 차에 싣고 방배동 처가에 데려다 놓은 후 사무실에 돌아왔습니다. 저절로 발길이 거기로 갑디다.'(법정 진술)

'이미 죽었습니다.'

김계원은 승용차 뒷자리에서 피를 흘리는 대통령을 껴안고 있었다. 서울지구병원으로 들어가면서 위병에게 '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고 하는 것을 듣고서야 운전사 유성옥은 김계원인 줄 알았다. 김계원, 서영준, 유성옥 등 세 사람은 박대통령을 응급실로 모셨다. 김계원은 들어오면서 '수술 준비 빨리 해!'라고 외쳤다. 당직 군의관 송계룡 소령과 정규형 대위가 달려왔다.

'이 분을 꼭 살려야 합니다. 빨리 진단부터 하십시오'라고 김실장이 지시했다. 송소령은 진단을 했다. 환자의 얼굴에는 수건이 가려져 있었고 가슴은 피투성이였다.
'심장소리도 안 들리고 호흡과 맥도 잡히지 않아 이미 죽은 것을 알았으나 같이 온 사람들이 있어 죽었다는 말을 못하고, 약 10분간 응급소생술을 실시한 다음, 도착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체온이 있어 조금 전에 운명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때는 각하인 줄 몰랐습니다.'(법정 중언)

대통령이 절명했다는 말을 듣고 유성옥은 '이제는 나도 죽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김계원은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고 출입자를 단속하라'고 유성옥에게 시킨 뒤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그때가 저녁 8시 5분쯤 이었다.

8시 20분께 김병수 병원장(공군 준장)이 당직 사령의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대통령 주치의인 김준장은 '비서실장이 왔다가 그냥 가버렸기 때문에 환자가 비서실 직원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정도를 가지고 왜 나를 불러냈느냐'고 당직 군의관에게 화를 냈다. 8시 40분쯤 김실장이 김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실장님이 모시고 올 때 벌써 죽었습니다.'
'어쨌든 정중히 모십시오.'
이 말에 김준장은 불쾌했다. 아무리 비서실장이지만 죽은 사람을 데리고 온 것이 기분 나빴던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또 김실장이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했소?'
'난들 어떻게 합니까. 산사람도 안 되는데 죽은 사람을 어떻게 합니까.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기시지요.'
'그건 절대 안돼요! 각하 전용 병실로 옮기시오!'
'실장님 정신 나갔습니까?'
김실장은 환자가 대통령이란 말을 하지 않고 '정중히 모시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때야 김준장은 이상한 느낌을 가졌다.

환자의 얼굴을 덮은 수건을 들추어봐도 잘 알 수가 없어 아랫배를 벗겨보았다. 희끗한 반점을 보고서야 '각하다!'고 생각했다. 김준장은 위생병과 군의관들을 퇴근시키고 유성옥·서영준을 시켜 피묻은 옷을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혔다. 유성옥은 그 뒤에도 김준장을 따라다니면서 전화 거는 데로 참견을 했고, 통화 내용을 캐물었다.

육본 벙커

한편 별채에서 처음 만난 정총장과 김정섭은 초면 인사를 나눈 후 부산·마산 사태 등 시국담을 교환하면서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날 무렵 수발의 총성이 들리자, 의아스럽게 생각한 참모총장이 2차장보에게 '총소리가 난 것 아니오' 하니 김정섭이 밖으로 나와 경비원에게 인근에 있는 궁정동파출소에 무슨 총성인지 확인하여 보고토록 하라고 지시한 후 다시 식탁에 돌아와 과일을 들고 있었다.

저녁 7시 45분경 김재규는 시해 현장으로부터 맨발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급히 나가다가 이미 방밖으로 나와 있던 김계원을 만나자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라고 외치고 별채를 향해 허겁지겁 뛰면서
'차 어디 있어! 저 방 손님 모시고 나와! 물, 물……' 하는 고함과 함께 황급한 모습으로 땀을 흘리며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경비원으로부터 물 한 컵을 받아 마시고 나서 정총장의 팔을 잡고
'총장, 총장, 큰일났습니다' 하며 현관 쪽으로 끌고 나가면서
'빨리 차를 타시오' 하는 말에 정총장은 김재규에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묻자 김재규는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때 정총장은 어떤 기습을 받아 김재규가 도망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김재규의 승용차 뒷좌석 중앙에 탔는데 오른쪽에는 김재규, 왼쪽에는 김정섭, 앞좌석에는 박흥주가 탔다.

차중(車中)에서 정총장이 김재규에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다그쳐 묻자
'큰일났습니다. 정보부로 갑시다' 하여 다시 총장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자 대답은 하지 않고 각하를 뜻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저격 당했다는 표시를 하였다. 총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묻자 김재규는
'돌아가신 것이 확실하다'고 대답했다

김재규는 경호차가 따라오는지 수차 초조하게 확인하더니
'보안 유지를 해야 됩니다. 적이 알면 큰일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강조할 뿐 '외부의 침입이냐, 내부의 일이냐?'는 정총장의 물음에 대해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보안 유지만을 거듭 강조하였다.

승용차가 삼일고가도로를 향하고 있음을 의식한 정총장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김재규는 정보부로 가는 것이라고 하므로 정총장은 만일에 작전의 필요시 지휘에 용이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육본으로 갑시다' 했더니 김재규가 갈까말까 망설이자 앞자리에 앉은 박흥주 대령도 '육본으로 가지요'라고 하여 방향을 바꾸어 육본으로 향했다.

이때 김재규는 순간적으로 참모총장을 협박할까 망설였다. 오는 차중에서 맨발에 와이셔츠 바람이던 김재규는 박흥주 대령에게 '자네 윗도리와 신발을 내게 벗어달라'고 하자 박흥주 대령은 예비로 가지고 온 상의와 신발을 김재규에게 주었다. 이 차량은 궁정동을 출발하여 내자호텔과 광화문을 거쳐 삼일고가도로와 후암동을 지나 미8군 영내 도로를 통과하여 밤 8시 5분경 벙커에 도착했다.

육본 벙커에 도착한 정총장은 상황실에서 상황실장 조대령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국방장관, 합참의장, 해군총장, 공군총장 및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전화를 연결토록 하여 육본 벙커로 오도록 직접 연락하고 기타 참모총장 이하 관계 참모를 소집했다. 1,3군에 비상태세를 발령함과 동시에 청와대 내부에서 일어난 피습사건으로 생각하여 수경사령관에게 병력 장악을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고 수도권 일부 부대에 대해서도 출동 준비 지시를 하는 한편, 필요한 수도권 부대 지휘관을 육본 상황실로 오도록 했다. (이상은 계엄사 발표문에서 일부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