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열 법무장관의 증언

김계원은 국군 서울지구병원에서 택시편으로 저녁 8시 15분경 청와대에 도착했다. 경호실 차장 이재전(李在田) 중장을 불러
'경호실장이 지휘를 할 수 없게 됐다. 당신이 병력을 장악하고 경거망동을 금하라. 국가에 중대사건이 발생했다. 지금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총리와 일부 장관 및 수석비서관들에게 연락, 청와대로 오게 했다.

1979년 10월26일 밤 8시 20분께 김치열 법무장관은 자택에서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김계원 비서실장이었다. 즉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말투는 다급했다. 김치열 장관은 '정보부장 임명 통보'라고 짐작했다. 청와대로 가는 차중에서 김장관은 골똘히 생각했다.

강경 일변도인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맡은 일은 철두철미하게 파악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격상 고질적인 불면증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 김장관은 '남아답지 못하다'는 핀잔을 듣지 않고 정보부장 자리를 고사하는 길이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 사흘 전인 10월 23일 김장관은 박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단둘이서 장시간 부마사태 등 시국문제를 이야기했다. 며칠 뒤에 두 번째의 단독 면담을 했었다. 김치열 장관이 청와대 2층 비서실장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26일 밤 8시 45분께였다. 최규하 총리가 맨 먼저 와 있었다. 김계원 실장은 최총리가 도착하자마자
'오늘 저녁 궁정동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던 중에 김재규가 잘못 쏜 총탄에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고 보고했었다. 이어서 김치열 법무가 들어왔다. 과거 정보부장·차장 관계에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김실장은 김법무를 구석으로 부르더니 김재규의 총탄에 대통령이 서거했음을 귓속말로 알려주었다(지금까지는 김계원이 대통령 시해 사실을 최총리한테만 보고 한 걸로 알려져 왔다). 김치열 장관은 '김부장이 잘못 쏘아서 대통령이 죽었다'는 설명은 믿기지 않았다고 최근 나에게 말했다.

만찬 자리에서 대통령과 경호실장의 자리는 정해져 있고 방향이 전혀 다른데 '차실장을 쏜다는 것이 대통령을 맞췄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박대통령의 시신을 업어 옮긴 김계원의 양복 소매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다시 김치열이 본기자에게 한 증언을 소개한다

얼마 있다가 김계원 실장이 육본 벙커에 가 있던 김재규와 전화 통화를 했다. 내(김치열)가 옆에서 듣고 있으니까 '청와대로 오라' '못 가겠다'는 투의 대화였는데. 김재규는 청와대 경호 병력이 무서워 이리로 못 오겠다는 태도인 듯했다. 김계원 실장은 최총리에게 '육본 벙커로 가시지요'라고 했고, 최총리, 박동진 외무, 나, 구자춘 내무장관이 반대 없이 따라나섰다. 육본 벙커로 가는 차중에서 나는 '김재규가 쿠데타를 하여 육본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김재규가 그런 사태장악을 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육본 벙커에 도착한 것은 밤 9시 30분쯤. 벙커 안에는 수많은 장성들이 와 있었는데, 리더가 없어 우왕좌왕하거나 '망연히' 서로 보고만 있었다. 나는 김재규가 육본을 장악하지 못했고 장성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최총리와 김재규와 장관들이 의자에 앉았다. 저절로 회의처럼 됐다. 김재규는 살기가 동등하고 초조하게 보였다. 앉다 보니 김재규와 나는 마주보게 됐다. 김재규는 연신 물을 마셔댔다. 김재규는
'지금 각하께서 유고입니다. 전방 경계를 강화하고, 이 사실을 최소한 48시간 국내외에 비밀로 부쳐야 합니다. 그리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미국에도 비밀로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이 말을 받아
'어떤 이유에서 48시간이나 보안에 부쳐야 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김재규는
'북괴 남침 위험 때문입니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보안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태 수습의 방안으로 현명하지 못합니다. 미국에선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며, 국민들에 대한 정치도의상 예의가 아닙니다. 북괴의 남침 위험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출동 준비가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오히려 미국에 알려야 효과적인 대비책을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의 이 반박에 박동진 외무장관이 옆에서 가세했다.
'미국에 비밀로 부치는 것은 한·미 우호정신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사실상 보안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격앙된 목소리로
'나는 김법무의 의견과 달라요 라고 했다.

이 순간 나는 맞은편에 앉은 김재규가 권총을 뽑아 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최총리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장관들과 김재규 사이에만 설왕설래하고 있는데, 노국방이 '여기는 좁으니 저의 방에 올라가 이야기합시다'고 했다. 이렇게 되어 최총리와 장관들, 김재규·김계원은 국방부 장관실로 옮겨갔다(필자 주 : 최총리는 김재규가 범인이란 사실을 노국방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노국방은 김재규가 흥분상태에 있는 것은 김을 그토록 아끼던 대통령의 유고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노국방은 차지철의 소행이 아닌가 생각하여 김재규에게 '당신이 현장을 본 것인가, 아니면 보고를 들은 것인가'고 캐묻기도 했다).

최총리 등은 김재규와 함께 국방부 장관실에 앉아 국무위원들의 도착을 기다렸다. 나는 바로 옆에 김재규가 앉아 불안했다. 흥분한 김재규가 '헉, 헉' 숨을 가쁘게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 때 사용한 권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 장관실에서 또 나와 격론이 벌어지면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아서 옆에 있는 상황실로 가버렸다.

신현확 부총리의 증언

이날 밤 중요한 역할을 한 신현확 당시 부총리가 최근 나에게 털어놓은 얘기를 정리한다.

나는 밤 10시 20분쯤 집에서 비상국무회의 소집 통보를 받았다. 나는 경악했다. 국방부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열리는 것은 유사이래 처음이었다. '북괴의 남침이 아닌가' 하는 불안 속에 내가 국방부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께였다. 상황실 앞에서 김성진 문공장관과 마주쳤다. 김장관은 '각하께서 유고인 것 같다'고 귀뜸 했다. 나는 장관실로 들어갔다. 최총리가 상좌에 앉고 양쪽에 김재규, 구내무, 노국방 등이 앉아 있었다. 말없이 침통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김재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앉자마자 '무슨 긴급사태입니까'고 물었다. 김재규는
'대통령이 유고이십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하겠습니다'고 했다.
'유고의 내용이 뭡니까?'
'그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유고이신 데 못 밝히겠다니, 다치셨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병이 났습니까?'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아무리 기밀이라지만, 유고의 내용도 모르고 비상계엄령을 어떻게 선포할 수 있습니까?'
내가 '밝히라'고 따지고 김성진 문공이 거들었지만 김재규는 계속 '밝힐 수 없다'고 버티었다. 김재규는 독기가 느껴질 만큼 살기 등등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김재규를 좋게 보아왔다. 나의 외가가 김의 고향인 선산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가깝게 느끼고 있었고, 김재규도 나에게는 깍듯이 대했다. 정보부가 추진해온 어떤 사업을 나는 합의 과정에서 반대를 한 적이 있었다. 정보부의 담당 국장이 찾아와 사정을 했다. 그 사업은 상당히 오래 추진해온 것이라 단념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직접 김재규에게 알려, 불가함을 설명했다. 의외로 김재규는 순순히 납득을 했다. 그래서 나는 역시 국민학교 교사를 한 사람이라 합리적인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딴판이었다(장시간 옥신각신해도 당시 박대통령의 시해 상황을 알고 있었던 최총리는 입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나는 방구석에 김계원 실장이 있는 것을 발견, '김실장, 이리 오시오'라고 불렀다. 등뒤로 다가온 김실장을, 머리를 돌려 비켜 쳐다보면서
'어떻게 된 거요. 김실장은 대통령 각하와 늘 행동을 같이 하는 분이니 알 것 아니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 어째서 모른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집요하게 묻자 김실장은 조금 털어놓았다.
'제가 각하를 업고 병원에 갔었습니다.'
'지금 수술 중입니까, 사고가 나서 다치셨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다 끝났습니다. 별실에 안치를 했습니다.'

맞은편의 김재규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국가에 위기가 닥쳤구나' 하는 점을 실감했다. 내부에서 허점이 드러나면 북괴가 밀고 내려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째서 그렇게 됐습니까'라고 또 물었다. 김실장은 '사고인데 저도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고 했다. 장관실에서 이런 설왕설래가 길어지는 바람에 밤 11시로 예정됐던 국무회의는 11시 50분께 국방부 상황실에서 열렸다.

최택원 총무처 차관의 증언

당시 비상국무회의 소집 책임자였던 최택원(崔澤元·당시 총무처 차관)은 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10월 26일 나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참석, 단상에서 박대통령이 훈장을 주는 것을 거들어주었었다. 그날 밤 10시 30분쯤 나의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는 내가 잘 아는 유혁인(대통령 정무수석 비서관)씨였다. 그런데 그는 '대 간첩 대책본부장입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 옆에는 지금 총리가 계시는데 국무회의를 국방부 상황실에 소집하여 주십시오.'

나는 최총리의 지시라고 판단, 즉시 총무처의 총무국장에게 소집준비 지시를 내린 뒤 승용차를 타고 국방부로 향했다. 나는 국방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는 것으로 보아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부마사태가 악화됐거나 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의도에서 국방부로 가는 길에 창 밖을 내다보았다. 공습과 같은 사태의 조짐을 찾을 수 없었다.

밤 11시쯤 국방부 상황실에 도착했다. 장관들이 7∼8명 모여 있었다.(필자 주 : 이때 상황실 옆의 장관실에는 최총리, 김재규, 김계원, 노재현 등이 있었다). 잡담도 하지 않고 침통한 표정이었다. 거의가 국무회의를 소집해야 했던 사태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노국방이 상황실로 들어오길래, 나는 '안보위원들도 불러야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야기를 했다. 노국방장관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전쟁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소집 책임자인 나는 총무처 국과장들을 통해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국무위원들에게 연락을 하느라 분주했다. 신현확 부총리에게 연락이 잘 닿지 않아 애를 태웠다. 국무회의가 열린 것은 26일 반 11시 50분께였다. 국방부 장관실에 있던 최총리는 상황실에 나타나 정좌하자, '국무위원이 아닌 분은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총무처장관 심의환씨가 그 며칠 전 별세하여 그를 대신해 참석, 시종일관 이 국무회의를 지켜볼 수 있었다. 이 비상국무회의에 관해서 지금까지 씌어진 거의 모든 기사는 국무회의벽두에 최총리가 '대통령께서 유고이십니다'고 했고, 노국방이 비상계엄령 선포 안건을 상정했으며, 다른 국무위원들이 '유고의 이유를 밝혀라!'고 들고일어났다고 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최총리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지금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였으므로 국무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서거, 유고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뒤이어 노국방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를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 유고'란 표현을 쓰지 않았고 '중대 사태'라고만 했다. 그래서 그때까지도 나는 대통령이 시해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이 유고의 사유를 밝히라고 대들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때 국무위원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나는 잘 알고 있으나 여기에 밝힐 뜻은 없다. 다만, 내가 비애를 느꼈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인간의 약점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10분간 정회하자고 했다. 정회 시간에 일부 국무위원들은 바깥으로 나갔다. 그때도 아직 많은 국무위원들은 대통령 시해를 모르고 있었다.

10분간의 정회가 30분, 40분간 길어졌다. 새벽 1시가 넘어 최총리, 신부총리 등 일행이 다시 들어와 국무회의가 속개되었다. 박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갔다 온 것을 알았다. 최총리는 '대통령께서 서거하셨고, 우리가 가서 확인했다'고 말했다.

일부 기록에는 '대통령께서 피격 당시 서거하셨다'고 최총리가 말한 것으로 적혀 있는데 피격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사태를 잘 모르는 국무위원들 중에는 그때까지도 대통령이 병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김재규가 범인이란 사실도, 그가 이미 체포당한 사실도 국무회의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의 위기 때 나는 비애를 느꼈다.

김계원의 증언

여기서 독자들이 이해를 돕기 위해 김계원이 1979년 12월 10일 군법회의 법정에서 검찰관 신문에 응답한 내용을 소개한다.

―총리에게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허위 보고를 한 것이 아닌가.

김 : 아닙니다.

―10월 26일 궁정동 사태를 보고할 때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알렸는가.

김 : 총리께는 김재규와 차실장이 싸움 끝에 각하가 서거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법무·내무 장관 등에게는 구체적 내용을 설명 안하지 않았는가.

김 : 구체적 내용 설명은 안 했습니다.

―이차장에겐 차실장이 죽은 사실을 알렸는가.

김 :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일러 줬습니다.

―육본 벙커에 있는 김재규와 전화를 했다는데.

김 : 김재규에게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모시고 청와대로 오라고 전화했습니다.

―큰 영애가 아버지가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데 '또 물으면 어떻게 하지' 하고 묻지 않았는가.

김 : 그런 얘기 한일 없습니다. 큰 영애에게는 그 이튿날 아침 2시까지는 대통령 서거에 대해 얘기한 일없습니다.

―2차 통화 내용은.

김 : 1차 때와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내가 '총리께서 여기 있으니 이리로 오라'고 말했더니 김재규가 '여기 모두 모여 있으니 총리 모시고 이리 오세요'라고 해서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김재규는 '이리 오시오'라고 강한 어조로 언성을 높여 얘기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김 : 아닙니다. 김재규의 전화는 두 번 다 조용조용했습니다. 마치 누가 들을까봐 못 듣게 하려는 듯 조용한 어조였습니다.

―그때 군부대가 김재규의 장악 하에 들었다고 생각했는가.

김 : 장악했다고 생가하기보다는 장악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몇 시쯤 육본 벙커에 도착했는가.

김 : 정확히는 모르나 오후 9시 30분이 넘은 듯했습니다.

―벙커에는 장성들이 많았는가.

김 : 많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했는가.

김 : 처음엔 깜짝 놀랐습니다. 부대 출동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들 있었는데 전체적인 기색을 살피니 내용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도,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검찰에서는 김재규가 군을 장악했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는데.

김 : 처음 육본에 들어설 때 병력이 움직이는 상황을 보고 장악한 게 아닌가 하고 순간적으로는 느끼기는 했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김 : 처음 총리를 모시고 들어가니 겨우 몇 사람만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사람이 많아서 김재규의 계획 하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하고 놀랐습니다.

―벙커 안에서는 어떤 얘기들이 오갔나.

김 : 들어가 보니 장관, 각 군 총장등 장성들이 많았습니다. 육군총장이 총리에게 부대 출동상황을 보고했는데 나는 육군총장이 이 일을 어떻게 알고 있나 궁금해서 조용한 곳에 데려가 물으려 했으나 김재규와 그 부하들이 계속 주시하고 따라다니기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바로 옆방에는 총리 및 장관들이 있었고 벙커 안에는 정보부 인원들이 왔다갔다하고 있는 상황이라 문제가 커지면 안 된다는 판단 아래 나는 알았다는 듯이 말하고 바로 나왔습니다.

―화장실에 갔을 때 궁정동에서 빼앗은 권총을 갖고 있었으니 김재규를 바로 사살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

김 : 김재규를 사살하면 총성이 들릴 것이고 바로 옆방에 총리 이하 각료들이 있어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 예견됐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김재규는 화장실에서 계엄사 간판을 혁명위 간판으로 바꾼다는 얘기를 하니 피고인이 '알았소' 하고 대답해서 동조한 것으로 여겼다는데.

김 : 알았다는 태도만을 취했지 아무 말도 않고 나왔습니다.

―계엄이 선포되면 사령관은 누가 되는가.

김 : 육군참모총장입니다.

―김재규가 군부를 장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김 : 벙커에 들어갈 때 처음 느꼈던 것입니다.

―회의실에는 혼자 갔는가.

김 : 김재규와 같이 갔습니다.

―총장실에는 사람이 많았는가.

김 : 잘 모르겠으나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관실에서는 무엇을 논의했는가.

김 : 주로 계엄 선포에 관해서, 사유는 무엇으로 하는가 하는 것과 미군·유엔군을 어떻게 이해시키는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총리가 최소한 무슨 이유든지 사유를 얘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김 : 사유를 명백히 해야 하는데 서거, 유고, 또는 그 외의 사유에 대해 의견을 물었습니다.

―당시 총리가 계엄 선포의 사유에 대해 물으니 김재규가 '치안 사태'라고 하면 된다고 주장했고 '사태가 조용한데 어떻게 그런 이유를 달 수 있는가'고 여러 사람이 말했다는데.

김 : 그건 조금 뒤의 얘기입니다. 총리께서 먼저 얘기를 하고 그 뒤에 장관들이 불규칙하게 들어오곤 하는 상태였습니다. 서거로 하면 곤란하니 유고로 하자는 말이 나왔고 최소한 국무위원들에게는 사태를 설명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서거로 하면 군 주둔 시간과 안 맞기 때문에 유고로 해놓고 군이 주둔한 후에 서거를 발표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유고'조차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총리께서 '그건 말도 아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유고'란 말은 피고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닌가

김 : 아닙니다. '유고'란 말은 총리가 처음 한 말입니다. 총리께서 '서거' '유고' '그 외의 사유' 중에서 어느 것으로 하느냐고 해서 내가 '유고'로 하자고 한 것입니다.

―김재규는 '유고'도 안 된다며 '브레즈네프' 얘기를 꺼냈었는가.

김 : 그렇습니다.

―국무회의 분위기는 반대 분위기가 아니었는가.

김 : 아닙니다. 의견이 집합 안된 상태였습니다.

―국무위원은 얼마나 모였었는가.

김 : 난 장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장관과 총장에게 김재규의 범행 사실을 말한 것은 언제인가.

김 :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장관실에서 얘기 도중 기회가 있기에 밖에 나가 말했습니다.

―어딘가.

김 : 장관부속실 옆 작은 방이었습니다.

―뭐라고 했는가.

김 : 총장과 국방장관을 조용히 불러 달랬더니 두 사람이 왔기에 김재규가 범인이고 각하가 사망했다고 알리고 소란을 벌이면 안되니 조용히 체포하라고 말했습니다.

―군부가 이 사건에 가담이 안 된 줄은 언제 알았는가.

김 : 처음 벙커에 들어갈 때는 놀랐으나 조금 지나 사태를 파악하고는 안심했습니다.

―그럼 왜 화장실에서 김재규를 사살하지 않았는가.

김 : 그랬다면 최소한 둘이서 총을 맞 쐈을 것이고 밖의 상황 등으로 보아 더 큰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체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김 : 나 혼자서 행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계속 감시당해 있었고 총장과 장관에게 그 얘기를 하자마자 금방 김재규가 나타나는 아슬아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때도 나는 순간적으로 김재규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총장, 계엄군의 숙식비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시오'라고 엉뚱한 말로 꼬리를 돌렸으며 다시 '총장은 조치를 빨리 취하시오'라며 총장이 자리를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김계원의 진술에 따르면 11시 50분에 국무회의가 열렸을 때는 김재규 체포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최택원의 증언과 종합해볼 때 국무회의 참석자 중 총리, 국방장관, 법무장관 등은 이미 김재규가 범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국무회의에서는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회(정회 도중 박대통령의 시신 확인) 뒤에 속개된 국무회의에서도 최총리 등은 김재규를 범인이라고 밝히지 않았고, 피격된 사실도 분명히 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되다

다시 신현확의 증언을 듣는다.
나는 국무회의가 정회된 뒤 최규하 총리, 김성진 문공, 구자춘 내무, 노재현 국방, 김계원 실장과 함께 국군통합병원 서울지구병원으로 갔다. 나는 구내무 차에 편승했다. 김병수 원장의 안내로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갔다. 흰 시트를 벗겼다. 박대통령의 몸은 피를 닦고 옷을 갈아 입혀 놓은 듯 했다. 두 번째 총알은 귀 뒤로 들어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은 거의 변형되진 않았다. 나는 박대통령의 얼굴이 창백한 것은 출혈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대통령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어 잠자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신 분이 정말 가셨구나' 하는 감회로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국방부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노국방이 '범인' 김재규의 체포를 지시해두었음을 알았고, 국방부에 도착하여 '체포 완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국방부 상황실에서 국무회의가 속개된 것은 27일 새벽 2시께였다. 회의를 속개하는데 즈음하여 최총리가 몇 마디 말을 시작했을 때 내가 '조금만 계십시오.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고 나서면서 말을 시작했다.

'박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우리가 직접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 왔습니다. 그 사고의 내용은 앞으로 상세히 밝혀지겠지만, 이 사실을 전제로 하고 국가 위기의 수습 방안을 의논해야겠습니다. 국가의 통치권자가 사고가 나서 공석이 되었습니다. 한시라도 통치권자의 공석은 있어선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 헌법에는 통치권자의 공석이 있을 때의 승계 순위가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규정에 의하면 국무총리가 계승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최규하 총리께서 지금부터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셨으니 이 점을 국무회의에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이때 국무위원석 뒤에는 수십 명의 군장성들이 배석해 있었다. 나의 말이 끝나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장성들은 일제히 일어나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경례를 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또한 어떤 위기 속에서도 박대통령의 뜻을 이어 국가를 보위해야겠다는 다짐으로 보였다.

나의 사회로 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했다. 전국을 계엄지역으로 선포하면 모든 행정 권한이 계엄사령관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제주도를 제외시켜 국방부장관이 계엄사령관을 지휘 감독할 수 있게끔 했다.

정부 발표문에는 일단 '대통령 유고'로 했다가 아침에 조사가 진행되는 대로 유고의 이유를 발표한 것도 합의했다. '서거'라고 할 경우엔 서거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하는데 당시엔 아직 확실한 상황이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또 경제 장관들은 따로 남아 대책을 의논하자고 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 비상국무회의가 끝난 것은 새벽 3시 45분께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새벽 4시 30분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