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시트에 덮여 돌아오다

27일 새벽 청와대
박진환 특보는 26일 자정께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으로부터 '빨리 청와대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박특보는 '나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왜 부를까. 혹시 방공 연습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청와대로 갔다. 도중에 탱크가 두 대나 보였다. 낯선 군인이 검문을 해 더욱 불안하게 생각했다. 청와대 본관으로 가니 접견실에 병풍을 치고, 책상을 갖다 붙여 제단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임방현 대변인을 찾아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디서?'
'궁정동에서…….'

박특보는 더 물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듯 했다.. 김일성이 지금 당장 우루루 밀고 내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와대 현관에 나서니 박대통령의 두 딸이 옷 보따리 같은 것을 안고 말없이 서 있었다. 밤 공기는 싸늘했다. 누군가가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키가 작은 것을 보고 박특보는 '각하다'고 생각했다. 병풍 뒤에 시신을 안치했다. 5년 전 육영수 여사의 몸이 눕혀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박특보는 '이 일을 어쩌나'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새벽 3시쯤, 촌 할머니 같은 분이 달려왔다. 시신 앞에 퍼져 앉더니
'정희야! 니가 이게 우짠 일고……' 하면서 통곡했다.

10월 26일 박대통령이 타계하던 날 밤 김종필씨는 언론사 사장들과 이태원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음식점으로 보고가 들어왔는데, 궁정동 어디서 총소리가 나고 청와대 주변이 아주 부산하다는 겁니다. 그래 이거 무슨 사건이 생긴 모양이라면서 다들 술도 제대로 마시지 않고 집에 일찍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청와대로부터의 전화가 그날 밤에 걸려왔다. 그 전화는 박대통령의 전화가 아니고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의 전화였다.

'밤 11시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가슴이 덜컹 하더만. 전화를 받았더니 박승규 비서관이 울먹이면서 '곧 들어오셔야 겠습니다' 그래요. '왜 그러느냐'니까 '들어오면 아시니까 빨리 들어오라'는 겁니다. 그래 금방 가니까 청와대 정문이고 어디고 다 허술해서 검문하는 사람도 없고 서 있는 사람도 멍하니 서 있어요.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오른쪽 접견실에 탁자를 길게 해놓고 경호원들이 그 위에 흰 시트를 깔고 있어요.

'이게 뭐냐'니깐 경호원들이 대답을 않고 엉엉 울어요. 그때 2층에서 박비서관이 내려오더니 날 붙들고 또 엉엉 우는 겁니다. '각하가 돌아가셨습니다' '뭣이, 각하가 돌아가시다니!' '조금 전에 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처리를 하느라고 늦어지고 있는데 여기로 오시는 중입니다.' 조금 후에 시신이 오셨습니다. 보니까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 피가 흘렀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어요. 얼굴은 깨끗했는데, 아하, 벌써 몸이 뻣뻣해지셨는데…….

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이런 생각도 나고, 너무도 엄청나서 눈물도 안 나오고! 원래 조그만 분이지만 탁자 위에 눕혀 놓으니까 애기 같아요. 이분이 이렇게 가셨구나!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던 분이 숨을 거두니까 이런데 누우시는구나! 아주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김계원씨가 피투성이가 돼서 왔어요. 그래 2층에 끌고 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했더니 얘기를 쭉 합디다.' (『월간조선』1987년 1월호 인터뷰 기사에서 인용)

62년 전, 며느리를 둘이나 본 44세의 어머니는 임신한 것이 창피스러워 낙태를 시킬 양으로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셨다. 그래도 뱃속의 생명은 끄덕 없이 태어났고, 이 땅의 유사이래 최대의 변혁을 가져온 주인공이 됐다. 조국 근대화란 화려한 명제 아래에서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은 성취됐으나 '도덕성의 황폐'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한 인간 박정희는,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하듯, 그 최후의 날에 농촌의 양광과 궁정동의 총성을 고루 경험하며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부하의 손으로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마지막 술자리는 유신정권의 축도

어떤 사건의 범인이나 사고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선 현장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수사의 보고'라는 현장에는 물증·암시·실마리가 숨어있는 법이다. '유신정권의 붕괴'라는 역사적 대사건의 현장은 궁정동의 술자리였다. 여기 모인 네 사람은 그 정권의 핵이었다. 정당이나 행정 및 치안 기관은 이 네 사람의 도구에 불과했다. 네 사람은 모두 군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마지막 대화에는 '공작' '전차' 등 군사 용어가 더러 나온다. 그들이 정치를 타협이나 대화가 아니라 전투로 생각하고 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부마사태, 김영삼 제명, 신민당 당직사퇴 공작, 선별수리등등 유신정권을 괴롭혀 그 종말을 재촉하던 10월의 고민거리들도 모두 거론되고 있다. 부마사태의 원인에 대해 박대통령이 '신민당의 조종'이란 잘못된 정보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도 나타나고 있다. 유신정권의 두 수문장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강경과 온건의 대립도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대통령이 무심코 내뱉은 '미국놈'이란 말에서는 그의 뿌리 깊은 반감이 엿보인다.

'공작' '잡아넣는다' '깔아뭉갠다' '버러지 같은 놈' 등등 살벌한 낱말에서는 도덕성의 위기를 본다. 유신정권의 권력구조, 그 핵심부의 논리와 윤리 및 취약점이 종말의 현장에서 하나의 축도로 집약돼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17년에 걸친 군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1963년 8월 30일이었다. 전역식은 그가 한때 사단장을 지낸 바 있었던 7사단 사령부연변장에 서 있었다. 박정희 대장은 미리 준비한 연설문을 담담한 어조로 읽어내려 갔다.

'지난날 수십만 전우들의 선혈로써 겨레를 지켜온 조국의 전선, 초연은 사라지고 오늘은 초목에 싸인 채 원한의 넋이 잠든 산야. 이 전선에 본인은 군을 떠나는 마지막 고별의 인사를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여기 저 능선과 이 계곡에서 미처 피기도 전에 사라져간 전우들의 영전에 삼가 머리를 숙이고, 십여 년 전 이 포연의 전지에서 조국방위를 위하여 젊은 청춘을 바쳤던 그날을 회상하면서 오늘 본인은 나의 무상한 반생을 함께 지녀온 군복을 벗을까 합니다.…… 전통적 의미의 민주주의국가에서 군의 혁명이 그 얼마나 불행한 것이며 또 그 혁명의 악순환이 종국적으로 국가를 쇠망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본인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가치구현이라는 문제 이전으로 돌아가서 그 자체가 파멸에 직면했을 경우를 상도(想到)할 때 거기에 혁명의 불가피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인은 군사혁명을 일으킨 책임자로서 이 중대한 시기에 처하여 일으킨 혁명의 결말을 맺어야 할 역사적 책임을 통감하면서 2년에 걸친 군사혁명에 진정 종지부를 찍고 혁명의 악순환이 없는 조국재건을 위하여 항구적 국민혁명의 대오, 제3공화국의 민정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창연히 우리 민족의 앞날에 새 역사를 창조할 제 3공화국의 여명에 서서 4·19와 5·16의 이념을 계승하여……'

다소 감상적인 박장군의 연설은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면서 끝맺음을 했다. 박장군의 연설을 끝내고 손수건으로 눈 주위를 닦아냈었다. 박정희는 그 16년 뒤 민간 복을 입고 숨을 거두었으나 그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군인이었다.

김재규의 심리 분석

이날 김재규가 취한 행동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미스터리성은 아니지만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알아보면,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은 김재규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걸 전제로 한 말이다. 김은 특출한 인물이 아니었고 평범한 인간이었다. 피를 보면 흥분하고, 자신의 행위에 두려워하고, 살고 싶어하고 죽기 싫어하는 보통 인간이었다. 김이 보통 인간이었다면 이날 반의 일들은 거의 이해가 된다.

김의 살의는 정승화 총장의 초대를 결심했을 대부터 비롯됐지만, 만찬장의 분위기 여하에 따라선 포기할 수도 있는, 굳어지지 않은 살의였다. 김재규도 진술했다시피, 그 전에도 세 차례나 살해나 납치를 결심하고 권총까지 준비했는데도 '대통령의 얼굴을 대하면 마음이 약해져' 그만두었던 예도 있었다. 울컥하기 쉬운 사람은 포기도 잘하는 법이다. 더구나 시해 전날까지도 김재규는 야당 공작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살의는 순간적이었고, 사그라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찬장의 분위기는 김재규를 집중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김재규가 7시 10분쯤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박선호에게 결행 준비를 지시한 이때야말로 김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굳어진 시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김재규는 차실장과 대통령을 쏘면서도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충고하는 투의 이야기를 했고, 김계원에게도 '각하를 똑똑히 모십시오'라고 소리치고 있다. 가장 절박한 순간의 본능적 이야기가 가장 진실 되다면 김재규는 끝까지 박대통령에 대한 외경 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살해 장면의 상황에선 차실장에 대한 원색적인 감정 분출이 압도적이다. 김재규의 독특한 사생 관으로 미뤄볼 때 그가 박대통령을 시해할 만한 인물이었고, 총격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박대통령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차실장에 대한 증오심이 뇌관을 터뜨리는 구실을 하여 시해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조카사위 김종필은 이렇게 말했다(『월간 조선』) 1987년 1월호 인터뷰 기사).

'김재규는 나한테 찾아와서 박대통령 영구집권 공작을 할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협박하던 잡니다. 그런 자가 영감을 시해한 겁니다. 그러니 이 자가 차지철과 충성 경쟁하다가 지게 되니까, 빵하고 차지철이를 쏘고 나서 혼비백산해서 눈이 뒤집혀 가지고 영감까지 쏜 겁니다.

이 자가 후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 얘기를 지어 가지고 그럴 듯하게 픽션을 꾸민 겁니다. 아예 생각할 수도 없는 얘깁니다. 전에도 그자가 발작을 몇 번 일으켰습니다. 화내지 않아도 될 일을 가지고도 막 성을 내고 그런 일이 국회에서 몇 번 있었습니다.'

박대통령 사위 한병기(韓丙起)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 미움이 된 겁니다. 자신을 그토록 아껴주었던 대통령이 차지철을 더 좋아하게 되자 배신당한 여자가 남자에게 독을 품듯 증오심을 불태우다가 그런 짓을 한 겁니다.'

편집국의 비상

10·26은 6·25와 함께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이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던가―당시 『조선일보』사회부 기자였던 이상현(李相鉉·현재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의 취재 수기를 소개한다.

1979년 10월 26일 밤 9시 5분, 조선일보 사회부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날 밤, 사회부 데스크 당직을 맡았던 나는 후배 경찰 기자들과 함께 비교적 저녁식사를 일찍 끝내고 들어와 철야 태세를 막 갖추려는 순간이었다.

'인천(仁川)의 천기잡니다.' 전화 목소리는 매우 다급했다. '인천의 공기가 아주 이상합니다. 경찰이 술렁대고 있는 것으로 봐서 무슨 일이 터진 모양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이쪽에서 묻기도 전에 천기자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화급하게 전해오는 것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현재 상황은 그게 전부였다고 했다.

'서울에는 아직 이렇다 할 상황이 파악된 게 없으니, 계속 잘 체크하시오. 어떤 내용이든, 잡히는 대로 즉시즉시 연락하시오. 여기서도 알아볼 테니까.'

전화기를 놓는 순간, 뭔지 모르지만 오늘 밤 고생은 하게 됐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조간신문의 제작을 위한 또 하루의 밤이 시작되려는 순간, 지방 주재 기자의 연락은 본사 철야 야근 팀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전화가 당시 10·26 사건을 맨 먼저 알려온 첫 실마리였던 것이다.

인천 주재 천기자의 이 첫 연락은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국내의 모든 매스콤에서 가장 빨리 정보를 얻어낸 것이었다. 당시 부산과 마산의 비상사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서울 인근 지역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은 뭔가 큰 일이 생긴 것임에 분명했다. 야근 팀은 곧 이의 확인작업을 펴기 시작했다. 비상이 떨어진 것이다. 전화통마다 불꽃이 튀었다. 치안본부 상황실, 서울시경 상황실, 그리고 각 일선경찰서의 야간 상황실로 전화통을 붙잡고 상황을 캐내기 시작했다.

'따르릉!'
두 번째 전화벨이 울렸다. 역시 인천이었다.
'인천 상공에 비행기 소리 같은 게 납니다. 아무튼 공기가 험악합니다. 그 이상 다른 상황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는 서울의 움직임에 대해 거듭 물어왔지만, 금방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별다른 답변을 해줄 수가 없었다. 서로 계속 체크해나가면서 연락을 취하자고 했다. 때마침 삼각지 근처에서 일부 기자들과 식사를 하던 최병렬(崔秉烈) 사회부장이 곧 연락을 받고 기자들과 함께 편집국으로 뛰어들었다. 최병렬 사회부장, 안병훈(安秉勳) 정치부장 등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에 따라 알 만한 사람들에게 다이얼을 돌려대기 시작했다.

야간 편집국이 점차 흥분(?)에 싸이기 시작했다. 귀가한 국방부, 내무부 등 관계 부처의 출입기자들을 모두 불러냈다. 일련의 '구름 잡기' 속에서 시작된 취재 과정에서 사회부 최부장이 맨 먼저 한 가닥 움직임을 끌어냈다. 국방부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열리고 잇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때가 밤 11시 50분.

국방부로 잠입한 기자

그러나 심야의 비상국무회의 안건이 과연 무엇 일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비상의 원인이 '대북(對北)관계'가 아닐까 하는 정도에서 추측이 오갔다. 설사 대북 관계란 사실이 확인된다 하더라도 사태의 성격상 공식 발표 전에는 신문 보도가 어려울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한쪽에서는 혹시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닌가. 남북간의 산발적인 교전(交戰)이 벌어진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꼬리를 물었다. 고급 관료들이나 경찰 고위층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 별일이 없다. 서울의 밤은 현재 조용하다. 아는 바 없다. 잘 모르겠다'는 식의 답변들이어서 우리는 모두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모 부장은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청와대 본관 어디서,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는데 '회의 중'이라는 당황한 목소리였다. 이에 따라 사태에 대한 추측의 심각성은 더욱 짙어갔다.

밤 11시 20분쯤, 편집국에 불려나온 국방부 출입의 정기자는 국방부 대변인을 찾아 다급하고도 열띤 질문을 폈다. 이미 경찰 쪽으로부터 일부 얻어들은 정보로, 군경(軍警)에 갑호 비상이 내렸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그렇다면 대 간첩 작전이 아니겠느냐'는 답변뿐이었다.

이때 치안국의 간부들은 이미 치안본부 상황실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정기자는 국방부로 뛰어나갔다. 그가 국방부 청사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40분 전후. 그 시간까지만 해도 국방부 청사의 정문 경비요원들로 사태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를 프리패스 시켜주었던 것이다.

정기자는 '국방부 청사 현관 앞에 검은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했고, 일부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제1보를 전화로 알려왔다. '무슨 차량이든 차번호를 무조건 적어서 전화로 알리라'고 이쪽에서 지시를 내렸다. 차량 번호가 들어오는 대로 본사 데스크는 이를 경찰에 물어 확인했다.

모두들 정부의 장관 또는 고위층의 승용차 번호였다. 비상인지 아닌지 또는 국무회의인지 뭔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심야에 국무위원이 국방부 회의실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었던 것이다. 11시 50분쯤, 승용차 번호를 본사에 연락하고 난 정기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기자실을 나와, 현관에 대기 중이던 어느 승용차 부근에서 평소 안면이 있는 어느 장관의 비서를 만났다. 서로 궁금하던 상황이어서 얘기를 나누다 국방, 내무, 법무장관들이 이미 초저녁 8시 30분쯤, '빨리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여기에 왔음을 알아내게 되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국방부에 와 있다는 사실도 차량 번호 확인에 의해 알게 되었다. 정기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내가 발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는 국방부 대변인의 말을 본사에 전한 데 이어 '몇 시간 있으면 정부 대변인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다른 관계자의 코멘트도 함께 전해왔다.

27일 새벽 0시 30분쯤 국방부 측에서는 모든 민간인은 기자실에서 일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운전기사들도 차에서 나오지 말도록 조치를 내렸다. 물론 정기자는 모든 매스콤 중에서 가장 먼저 국방부 청사에 들어 갈 수 있었으며, 취재기자로서는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다.

새벽 0시 40분,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점퍼 입은 사람이 기자실에 나타나 조사할 것이 있으니 위층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층계를 따라 올라가자, 얼마 후 다른 층의 소파가 있는 방으로 안내됐다. (바로 정기자가 위층으로 옮겨진 3∼4분 뒤 김재규 부장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같은 층에서 벌어졌던 것은 김부장의 체포 경위가 발표된 11월 6일에서야 알 수 있었다)

계엄군 나타나다

한편 편집국은 계속 들어오는 갖가지 정보에 따라 상황에 대한 판단을 굳혀가고 있었다. 김용태 야간국장은 수시로 관계 부장들과 사태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황 분석을 해갔다. 새로운 정보는 그때그때 편집국 간부들에게 연락되고 동시에 취재 방향에 대한 지시가 내려졌다.

0시 30분. 수시로 입수되는 정보를 놓고 분석과 판단을 거듭한 끝에 전방 또는 인천 앞 바다에 북괴와 관련된 상황이 발생해서 비상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추리였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그런 결론밖에 내려질 수 없는 판국이었다. 편집국장의 질문에, 나 자신도 남북간에 교전(交戰)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주장을 했었으니까. 어쨌든 모든 분석은 '남북간의 문제'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비상국무회의라 하더라도 하필이면 중앙청 회의실을 쓰지 않고 국방부 청사에서 회의가 열리느냐는 점도 그 같은 추측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때도 이미 비상계엄이 내려졌거나 내려질 것이라는 정보를 얻어냈으나 이것 역시 당국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는 기사화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숨막히는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미 조간신문의 11판(경기·강원도 지역에 배달되는 신문) 마감인 0시가 넘었다.

이런 상황과 판단에서 김국장은 일단 11판을 그대로 넘기고 12판(서울 지역판)에서 보도 여부를 최종 판가름하기로 결정했다. 12판 신문의 기사 마감 시간인 새벽 2시 30분을 불과 5분 앞두고 있는 극적인 순간에 '전국(全國)에 비상계엄'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김용태 야간국장은 흥분된 얼굴로 10줄 미만의 짧은 기사를 직접 썼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라는 대서특필의 제목을 달고 12판 신문의 윤전기가 돌았다. 4시간 반에 걸쳐 약 20여 명의 기자들이 달라붙었던 취재 결과로서는 너무 짧고 간단한 기사였으며, 결론이었다.

내용의 중대성으로 미뤄, 당국의 발표 없이 기사를 쓴다는 문제에 적잖은 의견들이 있었으나 '상황이 이런 이상 내 자리를 내걸고 이 기사를 그대로 쓰자'는 김야간국장의 용기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새벽 3시 35분, 밤새도록 피워댄 기자들의 담배 연기로 편집국이 안개 속에 파묻힌 듯했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었을 때, '탱크 소리가 난다'고 소리쳤다. 기자들이 몇 명 우르르 광화문 큰길로 뛰어나갔다. 2대의 탱크가 시청 쪽에서 중앙청 쪽으로 지나가고 있었고 그 뒤에 무장 군인을 가득 태운 트럭이 줄지어 가다 길 건너 동아일보, 서울신문 그리고 본사 앞에 군인들을 풀어놓았다.

편집국은 더욱 흥분에 휩싸이게 됐다. 이때, 편집국 입구에서 둔탁한 군화소리가 들렸다. 완전무장한 군인 2명과 함께 장교 한 사람이 거수경례를 하고 들어섰다. 그는 김야간국장에게 '이곳을 보호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왔다'면서 병력이 주둔 할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달라고 말했다. 바로 그 시각, 새벽 3시 45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4시에 중앙청에서 문공부장관의 발표가 있으니 기자를 보내달라는 중앙청 상황실의 당직자인 황선필(黃善必) 문공부 보도국장의 연락이 있었다. 이 연락이 전해지자, 편집국은 불꽃이 튀는 듯 바빠졌다. '빨리! 빨리!' 정치부의 김선배, 사회부에서는 내가, 그리고 사진부의 이기자, 세 사람이 정신없이 편집국을 뛰어나갔다.

문공장관의 발표, '대통령 유고!'

신문사 차로 중앙청 기자실을 향하는 도중 우리 취재팀은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비상계엄―과연 그 이유와 내용은 무엇 일까에 대한 궁금증과 촉박한 상황에서 기사를 급히 송고(送稿)해야 하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당국이 미리 조치를 해두었는지 중앙청 동편 측문이 활짝 열려 있어 차는 그대로 중앙청 정문까지 질주할 수 있었다. 우리 세 기자는 단숨에 기자실로 뛰어 올랐다.

기자실 역시 이미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우리들이 맨 먼저 들이닥쳤던 것이다.
기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표 장소가 바뀌었나?'
우리는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김선배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되돌아 들어왔다.

4시. 김성진(金聖鎭) 문공장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혼자 기자실에 들어섰다.
김장관은 기자실 테이블 위에 있는 물 주전자에서 물 한 컵을 따라 마셨다. 몹시 꺼칠하고 침통한 표정이었다.
'왜들 아직 안 나오지?' 물을 마신 뒤, 혼잣말을 하고 기자실을 둘러보았다.
이때, 먼저 와 있던 우리들이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장관에게 물었다.
그러나 김장관은 이에 대한 답변을 피한 채, 약 1분쯤 말없이 머물렀다가 초조한 표정으로 기자실을 나갔다. 김장관은 4시 10분쯤 다시 기자실에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다른 기자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서 발표하십시오.' 우리는 다급하게 발표를 재촉했다.

'윤전기가 지금 계속 돌고 있습니다. 어서 발표하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김선배는 김장관을 붙들고 늘어져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라는 짤막한 내용을 캐냈다. 김선배가 급히 전화로 이 짤막한 내용을 신문사에 알리는 동안, 나와 이기자는 김장관을 기자실 칠판 앞으로 이끌어 우선 발표하는 포즈를 취하도록 했다.

김선배는 계속 김장관이 발표문을 꺼내 읽도록 만들었고, 나는 당초 취재 분담을 한 대로 '현장 스케치'를 메모해 나갔다.
김장관은 우리들의 강력한 극성에 못 이겨 드디어 양복 왼쪽 호주머니에서 발표문을 꺼냈다. 기자 3명을 상대로 메모지 3장 분량에 빨간 색연필로 쓴 발표문을 몇 줄 읽어 내려갔다.

약간 목이 메이는 듯 싶었다.
사진부 이기자의 플래시가 불을 뿜듯 터뜨려지기 시작했다.
김장관은 사진 포즈를 위해 잠시 몇 줄 읽다가 발표문을 칠판에 쓰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그때까지도 우리들뿐이었다.
아직 나오지 못한 기자들을 위해 써놓으려는 것이었다.

'임시국무회의 발표―79년 10월 26일 23시에 긴급히 소집된 임시국무회의는 대통령의 유고(有故)로……' 라는 놀라운 내용을 묵묵히 써내려 갔다.
'대통령 유고'라는 충격적인 대목은 김장관이 칠판에 쓴 발표문의 세 번째 줄에서 밝혀졌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김선배는 즉시 전화통에 이 극적인 역사적 순간의 발표 내용을 불러댔고 나도 이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스케치해 송고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떤 유고냐고 캐물었다.
김장관은 '그건 나중에 따로 발표될 것'이라고만 짤막하게 언급하고 나갔다.

이때 보도진들이 허겁지겁 몰려들었다.
신문사에서 야근을 하다 뛰어나온 기자, 집에서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온 석간신문, 그리고 방송기자들의 눈에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듯이 보이기도 했다.
'대통령 유고'란 뉴스가 편집국에 알려지자 편집국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대통령 유고로 전국에 비상계엄'이란 어마어마한 타이틀로, 기다렸던 윤전기는 불꽃을 튕기듯 돌아갔다.

김선배는 발표 기사 송고를 끝낸 뒤 중앙청에서 심야회의를 하고 있던 총무처 직원들에게 '대통령 서거'라는 사실까지 캐내어 함께 신문사로 헐레벌떡 돌아왔다.
신문사 고위 간부들까지도 심야에 뛰어나와 편집국에서 일선기자들과 함께 숨가쁜 순간 순간을 지켜봤던 그날, 초저녁부터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눈코 뜰 사이 없었던 그 역사적 사건 앞에 나도 격동기 역사의 한 증인이 된 것이다.
그 거대한 사건의 밤을 지켰던 행운(?)과 그 다음날 새벽, 쓰린 눈을 비비며 훌훌 마셨던 뜨거운 해장국물, 그리고 한 잔의 소주 맛도 내 기억을 오래도록 적셔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