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대책회의가 국정을 주도

박정희란 방파제가 무너졌을 때, 정부 및 여권에서도 그 방파제가 막고 있던 민주화의 대세를 더는 막을 수 없다는 합의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화에 대한 스케줄의 천명만이 국민들의 뜻을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은 특정인의 제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진 합의이기도 했다.

10·26 이후 국정은 거의 매일 열린 시국대책회의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갔다. 이 회의는 법정 수권기관은 아니었으나 행정부의 핵심 인물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참석자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신현확 부총리, 박동진 외무, 구자춘 내무, 김치열 법무, 노재현 국방, 김성진 문공, 김종환 합참의장, 정승화 계엄사령관이었다. 이 9명 가운데 6명은 경상도(경북 5명, 경남 1명) 출신이었다. 궁정동의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던 유신정권의 파워 맨 네 사람 가운데 3명이 경북 출생의 군인 출신이었다.

이들 시국대책회의 참석자들은 모두가 박대통령의 개인적 신임을 받았고, 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유정회나 공화당과는 별로 깊은 관련이 없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중요 결정을 내릴 때 공화당이나 유정회와 상의를 하지 않았다. 시국대책회의의 분위기를 김치열은 이렇게 증언한다.

'박대통령의 서거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생각은 모두가 갖고 있었읍니다. 박대통령께서는 말기에 가서 유신헌법을 고치고 다음 임기 이전에 물러나겠다는 소신을 개인적으로 피력하신 적이 있었읍니다. 박대통령마저도 시한부로 생각했던 유신체제를,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도 유지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입니다. 이런 전환기에서 우리 국민들은 상당히 성급합니다. 인내를 할 줄 몰라요. 그래서 서둘러 국정의 방향 전환을 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렇게 하자면 후임 대통령 선거를 빨리 해야 하는데, 후임만은 유신헌법에 의한 통대 선거로 뽑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달리 뽑을 근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통대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빨리 새 헌법을 만들어, 이 새 헌법에 의해 뽑힌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야 한다는 합의를 시국대책회의에서 본 것입니다. 일단 최규하 권한대행을 과도정권의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묵시적 양해도 이뤄졌고 과도기를 1년 반에서 2년 정도로 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됐읍니다. 왜 여당측과 협의를 하지 않았느냐 하면, 당시의 국민적인 분위기가 행정부와 여당의 밀월을 용인하지 않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정총장, 군 본연의 임무 다짐

시국대책회의에 참석한 정승화 계엄사령관 태도에 대해서 김치열은 '아주 건전한 군인으로 보였다'고 했다.

'정승화 장군이 김재규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육본에서나 국방부에서나 두 사람의 행동에서 사전 모의의 흔적은 전연 찾을 수 없었읍니다. 시국대책회의에서도 나는 정총장이야말로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합리적이고 충직한 인물이라고 보았읍니다. 정치적 야심 같은 것은 엿보이지도 않았읍니다. 정총장은 민간 각료들의 결정에 거의 간여도 하지 않았고 우리의 결정을 수명 실천하는 문민 우위의 원칙에 충실했읍니다.'

11월 2일 『뉴욕 타임즈』는 서울 특파원발 기사로 주목할 만한 보도를 했다.

'한국 군부의 고위 장성들이 10월 29, 30 양일간 국방부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유신헌법을 폐기하기로 비공식 합의를 봤다'는 요지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30일의 회합에는 50명을 넘는 군 간부가 출석했다. 박대통령에의 충성이 두터운 전두환 장군 등 일부 젊은 장성들은 빠른 시일 안에 이 헌법을 폐기하는 것에는 반대, 폐기의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합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헌법 폐기의 시기를 군부가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정치에의 개입을 피하고, 단결을 과시한 형식이 됐다'고 덧붙였다.

11월 3일 계엄사령부는 합동수사본부에 흡수된 중앙정보부의 업무 가운데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관한 업무만을 되돌려주어 조직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되살렸다. 이날 밤 박대통령의 국장에 참석했다가 박동진 외무장관과 요담한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은 귀국에 즈음한 성명을 발표, '미국은 한국 군부에 의한 군정에는 반대하며, 한국 군부도 이미 현재의 최대행에 의한 문민정치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이를 환영한다고 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는 이즈음 주한 미국 대사관의 태도가 바뀌는 데 의아해하고 있었다. 미 대사관에서는 10·26 직후에서는 김총재의 '빨리, 최대한 빨리 헌법 개정을 하고 민주화를 해야 된다'는 견해에 동조하는 것 같았는데 차츰 '천천히 하자'는 태도로 바뀌더란 것이다. 11월 8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담화문을 발표, 무분별한 정치 선동과 경제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강력히 단속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우리 군은 하루빨리 국토 방위라는 군 본연의 임무에 전념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대통령의 죽음으로 권력 핵심에서 완전히 소외돼버린 청와대에선 이즈음 한담에 가까운 시국담이 오고갔다. 박정권 말기에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 등 대야문제에 강경책을 많이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 신직수는 특보들 사이의 사담에서 '이제는 유신체제를 정리하고 민주주의를 해야 할 때다. 박대통령의 서거로 유신체제의 존속 이유가 없어졌다'는 주장을 했다가 일부 특보들의 반론을 받기도 했다.

고려대학 교수로 있다가 1975년에 대통령 국제정치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된 김경원(지금 유엔대사)은 10·26 얼마 전 박진환 농업관계 특별보좌관이 '젊은 사람이 왜 이런 데 와서 밥을 먹느냐?'고 농담을 하자 이렇게 털어놓았다.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드시 혼란이나 진통을 겪게 마련이다. 이 진통으로 국가라는 몸을 크게 다치지 않게 하려면 국력을 성장시켜야 한다. 국력의 전반적인 수준이 올라가면 전환기의 진통도 큰 무리 없이 흡수 진정되는 법이다. 나의 할 일은 경제력과 국방력으로 표현되는 이 국력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너무 스산했던 대통령 침실

박대통령의 국장을 치른 뒤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최광수(현외무장관)는 청와대 본관 2층에 있는 대통령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이런 감상을 피력했다고 한다.
'집기라고는 침대와 아령, 그리고 검도용 대칼. 분위기가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읍디다.' 온기 없는 방에서 홀아비 생활을 하다가 간 것이 인간 박정희였다.

박정희 대통령 영애 근혜, 근영양이 15년 11개월 4일 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 서울 중구 신당동 62의 43호 박대통령의 사저로 이사간 것은 11월 21일이었다. 두 영애는 이날 오전 10시 30분 청와대를 나서기에 앞서 소접견실에서 특보, 수석비서관, 경호실 간부들과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이어 전석형 총무비서관이 대통령의 영정을 모시고 신당동 사저에 도착,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청와대 직원들은 이날 아침 영애들이 출발하기 1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있다가 비서실 직원들은 본관 안마당에서, 경호실 직원들은 정문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두 딸을 배웅했다. 큰영애는 그동안 박대통령의 유품은 하나하나 정리해두고 그날그날 써야 할 일용품은 미리 옮겨놨었다. 지만 생도는 교육 관계로 이날 같이 이사를 하지 못했으며 최광수 비서실장서리, 신직수 특별보좌관, 전총무 비서관이 신당동까지 동행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족들을 위해 차량 3대를 배려해줬으나 큰영애는 피아트 1대만 받고 나머지 2대는 사양했다.

신당동 집은 대지 99평, 건평 39평(지하실 2.9평 포함)의 양옥 겸 한옥으로 지난 1958년 5월 16일 박대통령이 7사단장 때 육여사 명의로 구입한 것이다. 당시는 이 집이 대지 30평에 건평 17평의 아주 작은 집이었으나 육여사 생존시에 틈틈이 늘려 명의를 박대통령 앞으로 해 놨었다. 박대통령은 1961년 5·16혁명 당시까지 이 집에서 살아왔고, 혁명 후인 1961년 8월 16일 최고회의의장으로 장충동 공관으로 옮겨갔었다.

이날 신당동 고 박정희 대통령 옛집 앞에는 오전 10시부터 주민 200여 명이 나와 이사 오는 두 영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시 45분쯤 대형 대통령 영정을 모신 서울 0가 1660호 승용차를 선두로 최광수 청와대 비서실장서리 등 비서들의 안내를 받고 상복 차림의 큰영애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박대통령의 조카 박재홍이 모시고 온 영정을 5평 남짓한 응접실 정면 벽쪽에 미리 마련된 상청(喪廳)에 봉안했고 이어 큰영애가 분향 재배한 뒤 박재홍, 장덕진 등 친척과 남덕우, 신직수, 서종철 특별보좌관, 최비서실장서리를 비롯한 수석비서관들이 차례로 분향하는 고유제가 올려졌다.

청와대 당국은 비서관 1명을 상근케 하여 유족을 보좌케 하고 경호원 약간 명을 배치하는 배려를 했다. 큰영애는 국장기간 중 '앞으로 아버지께서 심혈을 기울이신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조그마한 정성을 기울이며 조용히 살아가게다'는 자신의 설계를 밝혀왔었다. 23년간 이 집을 관리해온 박환영은 '유자녀들이 돌아오는 대로 이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개헌' 약속으로 온 국민 흥분

시국대책회의의 협의 과정을 거쳐 최규하 권한대행이 시국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은 1979년 11월 10일, 박대통령의 국장 1주일 뒤였다. 최대행은 담화문에서
'현행 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되 선출된 새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지 아니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빠른 기간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선언은 국민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주일 전의 국장이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구시대를 마감하는 거국적 의식이었다면, 최대행의 이 시국 담화는 새 시대의 지표를 밝혀주는 이정표였다. 이 나라에도 드디어 경제발전에 이은 정치발전의 시대가 열릴 것 같았다.
'우리도 이제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다'는 희망이 이처럼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때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이즈음 어느 정보기관에 체크된 민심 동향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도시의 지게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동전 따먹기를 하고 있다가 어느 지게꾼이 '이런 시기에 우리가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혹시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흉을 보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니 모두가 노름을 중단했다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자중자애해야 한다는 충고를 서로 주고받았으며, 은인자중하는 듯한 군에 대한 신뢰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4·19때 군이 군민들의 편에 섰던 것을 기억하는 많은 국민들은 '군은 우리 편이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박정권 아래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1월 6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제 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3개월 안에 개헌하고 그후 3개월 안에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거토록 하자'고 주장한 데 이어 10일에는 당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11월 17일에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마포 당사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방문, 인사를 나누었다. 여당 총재가 야당 당사를 방문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1월 22일 밤에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김영삼 총재를 공관으로 초청, 세 시간 동안 요담했다. 이 자리에서도 김총재는 조속한 개헌을 촉구했는데 최대행은 개헌시한을 늦추려는 인상이었다고 한다.

'김종필 대통령후보 추대'의 좌절

11월 10일 공화당 당무회의는 '공화당 총재는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당헌을 고쳐 '총재가 궐위중으로 전당대회를 소집하기 곤란한 때에는 당무회의에서 총재를 선출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11월 12일 공화당은 당무회의와 의원총회를 잇달아 열고 김종필 총재 상임고문을 제 3대 총재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공화당은 15일 저녁에도 의원총회와 당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보선에 김종필 총재를 후보로 내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김총재는 다음날 총재 취임식에서 '동지들의 열화같은 요망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총재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온 국민이 차분하게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의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본인은 판단한다'고 전제, '우리는 이러한 국민적 합의를 깨서는 안된다'고 불출마의 변을 밝혔다. 김총재의 이 불출마 결정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행동이다. 구여권 일부에서는 그때 김총재가 보궐선거에 출마, 대통령으로 선출된 다음, 민주화에 대한 그의 평소 소신을 실천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을 여태까지 갖고 있기도 하다. 당시 당무위원이었던 김창근(金昌槿·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무회의에서도 김총재의 대통령 출마에 반대했었읍니다. 지금부터는 페어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져 있는데 여당의 프리미엄을 업고 대권을 가로챈다는 것은 명분론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역학관계에서 될 일이 아니었읍니다. 박대통령의 서거 뒤 행정부와 군을 이끄는 사람들은 박대통령의 친위세력으로 볼 만한 이들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김종필씨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읍니다.

행정력과 물리력, 즉 현실적인 권력을 잡고 있는 이들이 김종필씨를 따라올 리가 만무했읍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총재가 무리하게 일을 진행시켰다면 오히려 그때 당했을지 모릅니다. 김씨가 총재로 선출된 날 어느 장관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왜 그렇게 서두느냐'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으니 대통령 출마를 양해할 리가 있었겠읍니까?'

정승화 계엄사령관도 공화당의 김총재 대통령후부 추대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으며 이 뜻이 김총재에게 전달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시국대책회의에서 유신헌법 재정 방침을 시국담화문으로 발표하기 전에 이미 최규하 대행을 통대의 보궐선거에 추대한다는 묵계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뒤엎은 공화당의 결정이 현실적으로 성공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김종필이 돌아온 공화당은 그가 산파역을 맡았던 옛날의 패기에 찬 정당이 아니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공화당은 권력 핵심에서 소외되었고, 대야(對野)문제에서까지도 정보부와 경호실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체질의 정당을 인수한 김종필 총재는 박대통령이 사라진 무대에서도 권력의 핵심과 손잡을 수 있는 조직이나 인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김종필은 1987년 『월간조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총재께서 대통령이 될 기회를 놓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통대에서 뽑힐 수 도 있었지요?

'나는 80년에 국민들에게 당당하게 심판받을라고 했읍니다. 공화당에서, 통대에서 선출되는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라고 했지만 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없었읍니다. 60년대와 70년대의 영도자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제 80년대에는 국민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만 난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유신헌법 가지고 뭘 한 것 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된 게 훨씬 마음 편하지요. 난 유신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새 출발을 해야지 이 나라가 풀린다고 생각했읍니다. 내가 최규하씨에게 그랬어요. 당신이 대통령을 하시오. 당신이 말년에 대통령을 모시고 있었으니 유신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에서 뒷마무리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하시오.'

―그럼 총재께선 국민의 심판을 받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셨읍니까?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국민들도 그때 그걸 원하고 있었고, 나도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옳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리고 나서 국민들에게 못다 한 것을 보답하자고 생각한 거지요. 설령 국민들한테 지지를 못 받으면 어떻습니까. 과거를 반성하면서 야당을 하는 거지요. 난 지금도 뽄때 있는 야당 한 번 하고 싶어요. 그때 우리가 야당이 됐더라면 난 야당이란 이런 거다 하는 걸 국민들에게 한 번 보여줄라고 했어요.'

―80년의 봄이 3김씨의 지나친 경쟁 때문에 봄이 아닌 겨울이 됐다고 하는 견해에 대해선…….

'맨손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한 사람에게 무슨 책임이 있읍니까?'

1979년 11월은 낙엽이 쌓이는 스산한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정국은 유신체제의 한겨울로부터 서서히 해동되고 있었고, 국민들은 뿌듯한 희망을 간직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우려했던 치안상의 혼란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김종필 총재는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방문, 대화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최대행도 김영삼 총재를 초청, 3시간 동안이나 진지하게 시국 문제를 논의했다. 집단 사표를 던졌던 신민당 의원들은 사표를 돌려 받고 국회에 등원했으며 최대행은 김치열 법무와 박찬현 문교장관에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에 대한 석방과 복교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수사 범위의 축소 바란 정총장

해빙 무드를 보이고 있는 정치 무대의 뒤에서는 박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가 삼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1월 6일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은 시해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이 발표 뒤 기자들과 1문 1답하는 자리에서 전장군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미국 CIA조종설도 부인했다. 이 발표문을 만들 때 일부 참모들은 발표문에 궁정동 만찬장에 여가수와 여대생이 동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넣지 말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전장군은 '지금 시중에는 이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있는데 그 내용을 빼버리면 다른 발표 내용까지도 믿지 않게 된다'면서 사실대로 밝히되 이름만 가명으로 하도록 지시했다.

전장군은 유신체제 아래서 난무한 유언비어의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해사건 발표도 숨김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시해 사건처럼 수사와 재판 과정을 통해 상세하게 공개된 정치사건도 드물 것이다. 시해 사건의 수사는 단순한 살인 사건의 수사와는 같을 수 없었다. 피살자가 대통령이고 범인이 중앙정보부장이란 사실만으로도 이 수사와 재판이 끼칠 파장의 심각함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불려나오는 피의자나 참고인들은 박정권의 핵심 인물들이었고, 그들의 진술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대통령의 시상이나 국정의 근간과 관련되는 엄청난 것들이었다.

청와대와 정보부의 깊은 장막 뒤에서 이뤄진 역사들이 수사와 재판을 통해 드러나게 돼 있었다는 점에서 박정권 자체가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 느낌마저 주었다. 합동수사본부와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수사의 범위를 놓고서 미묘한 이견을 보였다. 수사본부는 김재규를 체포한 직후 김계원 실장의 추가 체포를 정총장에게 건의했으나 정총장은 보류를 지시했다가 나중에 허락했다. 김계원 실장을 내란목적의 살인 혐의로 기소하는 데에는 합동수사본부에 차출된 법조인 중에서도 반대하는 이가 있었다.

합동수사본부는 또 이재천 청와대 경호실 차장을 직무유기로 구속했었는데 정총장이 특명을 내려 12월 5일에 석방시켰다. 이 점에 대해 정총장은 법정에서 '이장군을 불기소 처분토록 한 것은 이장군이 조처를 잘못하여 사태를 악화시킨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징계위원회에 돌려 군복만 벗게 한 것이다'고 해명했다. 정총장은 사건 수사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애썼고, 전두환 장군은 사건을 철저히 밝히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잡아갔다.

정총장은 시해 현장인 궁정동에 있었다는 자격지심에서 연루자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고, 어떤 점에선 신경이 매우 예민해 있었다. 이에 대해 전장군은, 충복이 모시던 주인을 시해했다는 이 사건의 도덕적인 황폐성에 분노하고 있었다. 전장군은 자신을 평소에 신임했던 박대통령에 대한 인간적인 의리에서도 이 사건의 관계자를 철저히 색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김재규를 '패륜아'라고 표현했다. 김재규의 부하와 친척들도 조사를 받았고, 김의 재산도 철저히 조사되어 본인의 재산헌납 서약 형식으로 국가에서 몰수했다. 김재규가 5촌에게 사준 아파트까지 그 대상이 됐고, 이 아파트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약정해놓고는 팔아버린 그 친척은 나중에 배임 혐의로 구속됐다.

'부정부패의 설거지하려고'

김재규는 엄중한 신문을 받았다. 그는 뒤에 강신옥 변호사에게 '나는 조사관들에게 고맙게 생각했다. 심리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이 잊게 해주었다. 박대통령이 그런 부하들을 두었다는 것은 역시 그분의 복이다'고 술회했다. 김재규는 연행된 날인 10월 27일에 1차 자술서를 썼다. 가족관계와 함께 재산관계를 진술했다.

'부동산은 본적지에 답 40여 두락, 본가는 대지 5천 평에 건평 100평, 임야 6∼7만 평, 보문동 집 대지 150평 건평 90평, (다른) 집 대지 50평 건평 25평, 예금 20억, 봉급 60만 원에 월 생계 보조비 120만원, 판공비 월 1억, 미화 1만 달러, 월수입 약 3,200만 원.'

10월 28일자 피의자 진술조서에서 김재규는 범행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1. 사실상 무능력이 노출되었고 각하로부터 경고 친서를 받았다.
2. 차실장의 월권 행위.
3. 요직 인사 개편에 본인이 포함될 가능성이 없다.
4. 본인도 정권을 잡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차에 부산 민란으로 적기라고 판단했다.
5. 구상
가. 철저한 보안 유지가 선행돼야 함. 역대로 이런 거사는 보안 유지를 하지 않고는 성공한 사례가 없다고 판단, 독자적인 구상을 함.
나. 한꺼번에 처치해야 거사에 성공.
다. 장소는 궁정동.
라. 시기는 적절한 기회를 봐서.
마. 경호원도 동시에 처치. 박선호와 박흥주는 본인이 무엇을 하든지 목숨을 바칠 것이라 생각했고, 응분의 대가를 주면 무조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
바. 3일간 보안 유지

11월 8일 김재규의 제 2회 피의자 진술조서에는 주목할 대목이 나온다. '연행된 직후 결행의 결심 시기를 밝히면 자연히 육군참모총장을 계획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를 혁명위원회 구성시기까지 이용하려 했다는 문제가 드러나면 총장의 신변이 위험하게 되어 상당한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본인과 같이 연행이 된다면 군의 혼란이 초래될 우려가 있어 바로 진술하지 않고 지금 진술하는 것입니다.' 김재규는 11월 17일의 검찰관 신문에서 자신의 행동을 대의(大義)에 입각한 것으로 설명했다.

검찰관 : 왜 대통령을 시해하였나요?

김재규 :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으면서 현유신체제와 이를 방어하기 위한 긴급조치의 부작용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는 철폐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는 안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하여야 하는데, 현체제는 강한 체제이므로 대통령을 살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결행하였읍니다.

검찰관 : 왜 차실장까지 살해하였읍니까?

김재규 : 본인이 거사를 하기 위해서는 차실장과 수행 경호원들까지 함께 처리하여야 하고, 또한 차지철이 강경한 발언과 월권적 행동으로 농간을 부려 본인이 각하께 드린 건의가 좌절로 돌아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함께 제거한 것입니다.

검찰관 : 왜 시해후 자살이나 망명을 하지 않았나요?

김재규 : 물론 본인의 목적을 문서로 남겨놓고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으나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겆이를 하여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검찰관 : 각하에게 야단맞은 사실이 있읍니까?

김재규 : 근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사태의 수습에 있어서 중정부장 직책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수습책을 건의하였지만 최근 들어 자주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통령 각하로부터 질책당한 것은 사실이나 본인이 무능하다고 각하께서 생각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또한 사람들이 형제간에 이권문제에 개입하였다고는 하나 금년 4월경 각하의 개인 서신으로 동생인 김항규가 사업상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 데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은 바 있기는 합니다만 당시 중정 감찰실장으로 하여금 동생의 비위사실 및 경위를 조사하여 각하에게 보고, 해명한 사실이 있으나 별것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읍니다.

'대통령 출마도 고려했다'

김재규의 진술사의 특징은 회수가 거듭될수록 점차 동기나 계획 등이 구체화되고 논리적으로 발전되어갔다는 점이다. 군 검찰관들은 이것이 자신의 행동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의거'로 미화하려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김재규는 박대통령 시대 기도를 1979년 4월에도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 당시(4월)에는 3군 참모총장들을 이용하려고 각하가 도착하기 약 30분 전에 식사를 같이 하자고 총장들을 궁정동에 불러놓았는데 당시에는 대통령 각하의 주변 경호가 삼엄하여 거사가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감찰실장 김학호 장군으로 하여금 대신 저녁 대접을 하게 하였던바, 본인이 각하와 만찬을 끝내고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각군 총장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본인이 연희동 불상의 음식점에서 술을 대접하고 끝낸 일이 있읍니다.……

전에는 궁정동 식당 바깥에도 경호차가 2대 정도 대기하고 경호원 숫자도 7∼8명 정도여서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최근에는 경호차가 대기치 않고 경호원도 4∼5명 정도여서 더욱 시해가 용이하였고 궁정동 식당은 전부 본인의 심복인 경비원들이 경계를 담당하는 중정 자체시설이란 점 등을 감안, 범행을 하였고…….'

거사 뒤의 계획에 대해서 김재규는 처음엔 말을 못하고 있다가 검찰관이 '그래도 뭐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고 다그치자 며칠 뒤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이조시대 이래로 두 사람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으므로 혼자서 골똘히 구상하였읍니다.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현장 부근에는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놓고 거사 직후 본인의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케 한 뒤 계엄사령관을 조정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위원회로 전환시켜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했읍니다.

최단시일 내에 혁명 과업을 완수키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기존 정당을 해체하고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본인이, 부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 군인들로 구성하고, 이를 감독하기 위하여 혁명평의회를 설치 구성함에 있어서는 본인이 위원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위원장으로 하고 위원은 관구 사령관급 이상의 육군 주요 지휘관, 함대 사령관급 이상의 해군 주요 지휘관, 작전 사령관급 이상의 공군 주요 지휘관, 도지사급 이상의 각료 전원으로 하고 재경지구에 재직하는 사람은 상임위원, 지방에 재직하는 사람은 비상임위원으로 구상하려고 했읍니다.

또한 혁재와 혁검을 산하에 구성하여,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자, 5·16 혁명 주체로서 권력 주변에서 치부한 자, 악덕 기업 및 특혜 재벌 등 비동조세력을 처단, 재산을 국고에 환수케 한 후 본인의 거사목적과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헌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을 연구 작성케 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함으로써 확정시킨 후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읍니다.

기존 정치인 중 여당권에서는 대통령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인사는 전부 부정부패에 관련되어 있어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고, 야당권에서는 김대중은 사상적인 하자가 있어서 곤란하고 김영삼은 일응 출마는 할 수 있지만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읍니다. 최규하 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도 대통령후보로 꼽을 수 있으며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 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읍니다. 이런 행동은 저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했고, 후회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없읍니다.'

김재규가 진술한 '사후 계획'은 계획이라기보다는 그의 머리 속에만 들어 있었던 생각이었다. 자신을 대통령후보로 생각했다든지 하는 대목에서는 그가 과대망상적 인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갖게 했다. 김재규의 범행 동기 설명은 수사관들까지도 납득시키지 못했다.

'김재규는 소영웅주의자'

박선호 의전과장은 검찰관이나 수사관들을 더욱 실망시켰다. 궁정동에서 두 명사수를 사살한 사람답지 않게 그는 멍청해 보였고 생각도 정리가 안된 상태였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 자리에 있었나'는 개탄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박선호는 11월 20일의 1차 군 검찰관 신문에서 그가 관리 책임을 맡았던 궁정동 내부 사정에 대해서 진술했다. 이날 그는 김재규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한 것으로 '강신옥 변호사의 노트'에 적혀 있다.

'김부장은 본인의 은사로서 직업을 알선해주고 본인을 알아주어 평소 고마운 마음을 가져왔었다. 『삼국지』 『대망』 같은 책을 많이 읽어라, 검소한 생활을 하라, 우쭐거리지 말라 등등 좋은 말씀을 많이 하여 존경해 왔다.'
11월 21일 박선호는 제 2차 검찰관 신문에서 김재규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김부장이 박대통령께 좋은 건의를 하면 차지철이 중간에서 이를 방해하는 등 평소 불만이 많았다. 부산 소요 때 직접 다녀온 김부장은 본인에게 자주 '흐르는 물은 막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건의하는 것을 보고 박대통령에게 정권을 더 이상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만은 차분하고 확고하며 맑은 태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또다시 그런 처지가 된다 해도 나로서는 달리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계원은 11월 17일자 군 검찰 진술에서 '대통령, 유정회 의장(太完善), 공화당 의장, 경호실장(車智澈), 본인이 모인 자리에서 차지철은 '사대주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김영삼이 하나를 제명하지 못하는 국회라면 뭣하러 있어야 합니까. 안되면 내가 탱크로 밀어버리겠읍니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계원은 11월 22일자 군 검찰 진술조서에서 '김재규는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혀 한 번 화를 내면 뒷일을 생각함이 없이 이성을 잃는 사람이다'고 했다. '김재규가 각하를 4월부터 시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정치문제에서 실패하여 몰리자 이성을 잃고 격한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10·26 사건 수사의 일환으로서 국장급인 김재규의 부하들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유신체제의 권력 핵심에 있었던 이들의 진술 내용 가운데는 당시의 국정운영 상황을 엿보게 하는 내용이 많았다.

김재규의 심복으로서 정치 문제를 맡았던 김정섭 제 2 차장보는 '김재규는 자존심이 상했을 때 그 반사작용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소영웅주의적 발상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강변호사의 메모 노트에는 기록되어 있다.

김병주 제 1 차장보는 이렇게 말했다.
'강경책으로는 시국의 수습이 곤란하다는 자신의 판단에서 감정이 폭발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부장은 이번 사태(필자 주 : 부마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야당을 활성화시키고,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각, 국회의 개편, 물가·세제·농정의 시정 등이 시급하다고 보고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

현홍주 기정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시해 사건은 차실장과의 의견 대립에서 기이한 것이라고 본다.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사안에 있어서 차실장은 항상 강경한 보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예컨대 대(對)야당문제에 있어서도 차실장은 강하게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정부장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여 실패하였을 적에 책임이 중정에 돌아오므로 좀더 온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승화 총장의 정치발언 파문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앞 YWCA 1층 강당에서는 결혼식을 위장한 집회가 있었다. 위장 청첩장을 받은 5, 6백 명의 하객 아닌 반체제 인사들이 참석했다. 오후 5시 45분 김정택씨(기독청년협의회 회장)가 사회 마이크를 잡고 '신랑 입장이 있겠읍니다'고 선언하자 느닷없이 박종태(朴鍾泰) 전국회의원이 주례석에 올라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보궐선거를 저지시키기 위한 국민선언문」을 낭독했다. 같은 내용이 담긴 인쇄물이 동시에 식장에 배포됐다. 이때 계엄군이 출동, 현장에서 96명을 붙들었다.

함석헌(咸錫憲)옹과 박종태, 양순직 전국회의원, 김병걸(金炳傑)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도 잡혀갔다. 이날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은 김재규 관계수사를 일단락 짓고 모처럼 집에 돌아가 쉬고 있었다. 이들은 부랴부랴 비상 소집되어 이들 반체제 인사들을 신문하게 됐다. 11월말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언론인들과 만나 최초의 대외적인 정치적 발언을 했다. 그 대상은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의 주장
'정총장은 처음에는 신문사의 발행인, 그 다음날은 편집간부, 그후에는 기자들을 모아놓고 내게 대하여 사상적 중상을 했읍니다. 첫날은 심한 중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뜻밖에도 미국대사관에서 기자들에게 '저쪽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니 우리도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자. 우리들은 정승화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아니 전연 반대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다음날부터 정씨의 톤이 쑥 내려갔으며, 동시에 나를 지지하는 야당 의원들이 국방장관에게 대어들었읍니다. 무슨 증거로 용공이라고 하느냐, 증거를 내어놓으라니까 국방장관이 사과했읍니다.'

당시 정승화 총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김대중이는 핑크다'는 투의 이야기를 했었다고 한다. 이 말 자체보다도 계엄사령관이 처음으로 특정 정치인을 비토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 관심거리였다. 정총장의 정치적 야심이나 군의 정치 간여를 암시하는 코멘트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최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시에 그런 말을 한 것은 정치에 개입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공산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념에 하자가 있는 인물이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소신을 이야기한 것뿐이었다. 내가 정치에 야심이 있었다면 왜 부하들에게 그런 친서를 보내고 그런 말들을 했겠는가.'

정승화가 말하는 '그런 친서'는 이 무렵 그가 육군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보낸 것으로서 내용은 군은 그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정치 불개입의 선언이었다고 한다. 그는 또 예하부대에 나가 지휘관들을 만날 때마다 '이번이 민주화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이니만큼 군은 정치에 절대 중립을 지켜야 한다. 군은 질서 유지에만 신경을 쓰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순수 군인의 전형 정승화

12·12 사건 뒤 내란방조 혐의의 피고인이 된 정승화의 변론인으로서 그와 자주 접촉했던 대구의 여동영(呂東榮) 변호사는 정씨에 대하여 이런 인물평을 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읍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릅니다. 군은 본연의 임무인 국방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신념에 철저한 분이었고, 이번이 그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걸 여러 번 강조합디다. 준법 정신에 투철했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나 계엄사령관의 직권을 이용하겠다는 사심은 전혀 없는 분이었읍니다. 박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지만, 차지철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 쓴 데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읍니다. 김재규의 추천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됐다는 설을 극구 부인했읍니다.

김재규가 그 일에 방해는 하지 않았다고 합디다. 군인으로서 김재규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읍니다. 김재규 바로 다음에 3군단장이 됐는데 참모들이 김에 대해 불평이 많았다고 합디다.' 전투 지휘관으로서 정승화 총장의 평가는 매우 높다. 6·25 초전에는 부대대장으로 있으면서 자기 대대를 온전하게 한강 남쪽으로 도강시킨 몇 안되는 장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개전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될 때까지 그는 전투 부대의 최일선인 보병 대대장으로 있었다. 유명한 백골부대 대대장도 역임했다. 북진 때는 부령까지 진격했다.

유양수 장군(柳陽洙·전동자부 장관)은 정승화의 직속 상관으로 오랫동안 함께 일했는데, '어려운 전투만 있으면 그를 보냈는데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면서 그의 지휘 능력을 극찬한 적이 있다.

휴전선의 철책도 한신(韓信) 군단장(당시)과 정승화 부군단장(당시)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는 육사에 재학중인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문제로 가끔 청와대에 불려와 꾸중을 듣기도 했다는데, 정총장은 전시나 평화시에 훌륭한 참모총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정치적 격동기에는 적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