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표의 12·12 사건의 설명
12월 12일은 최규하 대통령이 새 내각의 내정을 끝내고 발표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김치열 법무의 경우, 이날 오전 이임식을 해버리고 짐을 정리, 오후에는 집으로 갔다. 박동진 외무와 노재현 국방의 유임은 확실한 것 같았다. 이날 김재규 구명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윤보선 전대통령은 성명을 발표, 군법회의에서 재판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변호인단에 대한 압력을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최근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인터뷰에서 12·12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가원수를 시해한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 김재규라는 사람은 그다지 능력도 없는데 박대통령에 의해 성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을 시해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고 재판함에 있어서 큰 혼란이 있었읍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애국투사나 혁명가인 양 부각시키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군내에도 김재규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읍니다. 자칫 수사방향을 오도해서 김재규가 영웅이라는 방향으로 갈 조짐이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 대립되는 듯한 판국이었지요.
만약 이 두 주장이 맞부닥친다면 김일성이가 쳐들어올 수 있는 틈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망쳐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수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셨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그런데 수사가 벽에 부닥쳤읍니다. 왜냐하면 합동수사본부장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이 박대통령 시해 당시 그 옆방에 와 있었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양을 보고, 또 군의 생리를 보았을 때 우리는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이 모든 직책을 다 내놔야 한다고 생각했읍니다.
설혹 같이 모의를 한 형사적인 책임은 없다손 치더라도 도의적 책임은 져야 마땅하다는 거지요. 이런 분이 안 나가고 수사의 방향을 딴 데로 끌고 가려 하니까 수사를 공정하게 진행할 수 없었던 거예요. 나는 원래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씨와 친한 사람이었고, 옛날에 그분의 은혜도 입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솔직하게 이런 의견을 계엄사령관에게 건의해서 수사가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에 합의했읍니다.
존경했던 상관이니까 그분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의 직책을 내놓게 하고 그밖의 다른 직책, 예를 들면 합참의장 등의 직책을 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되어, 종국에 가서 군이 어떤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군대가 나온 것은 아니고 몇 사람의 개인이 나선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은 총장 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러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지금도 총상을 입은 그 당사자는 하반신을 못 쓰고 있어요. 그게 발단이 되어 일시적으로 혼란이 일기도 했어요. 그리고 본인이 처음부터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닙니다. 포위가 돼서 극히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었는데, 그런 상황으로 몇 시간 동안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됐고, 이런 소식이 우리 부대까지 알려지고, 거기서 또 연락이 오고 해서 이를 수습할 수 있는 길이 결국 상대방이 힘으로 장악하고 있으니까 힘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병력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수습된 거지요.'
노대표는 12·12 사건의 정당성을
① 정총장의 시해사건 수사 방해,
② 군부내 김재규 추종세력의 제거,
③ 정총장을 모시러 간 수사관에 대한 선제 공격,
④ 정총장 쪽의 병력 동원에 대해 방어적 병력 동원에 의한 사태 수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이 정당성을 공인받으려면 정총장의 연행을 누가 허가했으며, 언제(연행 전인가, 후인가) 허가했느냐 하는 발단의 문제가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연행을 납치라며 병력 동원'
12·12 사건에 대한 국방부의 발표는 12월 24일에 있었다. 국방부 대변인은 사건의 경위에 대하여 이렇게 밝혔다.
'김재규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정총장의 관련 혐의점이 드러났으며 정이 전 3군사령관 이건영, 전특전사령관 정병주 등 추종 세력과 계속 회합 연락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돼 즉각 조사할 필요가 있었으나 국민의 충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김재규 일당 및 추종 세력의 반발에 의한 정국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어 대통령 선거후 정국 안정 때까지 수사를 미루어왔다. 정총장이 스스로 깨닫고 양심에 따라 용퇴할 것을 기대했으나 그런 기미가 없고,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월권이 계속돼 조사를 단행키 위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정이 육군총장으로서 군령권의 즉각적인 행사가 불가능한 일과시간 후에 총장 공관에 체재중 조용히 연행키 위해 12월 12일 오후 7시 수사관들이 총장 공관으로 갔다. 수사관들은 자발적으로 출두, 수사에 협조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정총장이 동행을 거부하고 소리를 지르자 경호병들이 즉각 사격을 시작해 공관 경비병과 수사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전 3군사령관 이건영, 전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역시 김재규 범행에 관련혐의가 있어 조사하려던 중 이들이 정총장 연행 사실을 알고 휘하 조직을 이용, 정총장의 연행을 납치라며 동조자를 규합, 병력을 출동시키고 전차 등 장비를 동원, 무력으로 수사를 거부했다.
이 사태가 발전되면 단순한 저항이 아니고 국가 안녕질서가 파괴되는 사태로 확대될 것이 우려돼 계엄군이 증원 추가배치돼 추종분자들을 검거했다.'
발표문은 또 이날 밤의 총격전으로 사망 3명, 중상 4명, 경상 16명 등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은 이밖에 이건영 전 3군사령관은
'12·12 사건 때는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하면서 병력 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
'정병주 전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전수령사령관, 문홍구 전합참본부장 등과 연락을 취하며 병력을 출동시켜 저항을 했다'
'장태완 전수경사령관은 정총장을 구출한다고 전차부대 및 병력을 출동케 하고 발포 명령을 내리는 등 저항을 했다'
'문홍구 전합참본부장은 수경사로 가 장태완과 같이 추종 세력의 단합과 저항을 선동했다'고 했다.
총장 공관에서의 총성
이 사건 뒤에 유언비어가 많이 돌았었다. 국방부에서 총격전으로 수십명이 죽었다든지, 정총장이 총에 맞았고, 특전사령관이 부하의 총질에 죽었다든지 하는 것이 대표적인 유언비어였다.
국방부 총격설
공수특전여단 병력이 사태를 평정하기 위해 국방부로 진입 하기 전 경비 병력과 총격전을 벌이지 않고 인수 인계하기로 양해가 되었으나 국방부 경비병의 일부에 이 합의 사항이 전달되지 않아 오인 사격이 있었다. 곧 진정이 되었고 소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특전사령관 사망설
특전사령관의 체포 과정에서 비서실장 김모 소령이 사망했고 응사하던 정병주 사령관은 팔에 경상을 입고 지금도 생존해 있다.
전두환 장군의 경질설
정총장이 12·12 직전에 전보안사령관을 한직으로 전보하려는 인사 이동 결재를 원했으나 최대통령이 보류시키고 있었다는 루머가 나돈 적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정총장은 인사 이동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서류로 기안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정승화 총장의 피격설에 대해선 오해를 없애기 위해 상세한 상황 설명이 필요하겠다. 정총장이 변호인이나 측근에게 한 체험담 등을 종합하면 대강 이러했던 것 같다.
12월 12일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육군본부 사무실로 불렀다. 전장군은 용무를 끝낸 뒤 '오늘 중요한 내용을 보고드릴 게 있다'고 했다. 정총장은 '오늘 저녁에는 아내와 함께 처가집에 가기로 되어 있는데 좀 일찍 사람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관들이 총장 공관에 도착한 것은 12일 오후 6시 50분께였다. 응접실로 안내됐다. 정총장이 외출용 사복을 입고 2층에서 내려왔다. 정총장은 우경윤(禹慶允) 대령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정총장은 그날 발표된 장성 진급자 명단에서 우대령이 빠진 데 대해 몇 마디를 했다. 허삼수(許三守) 대령에게 정총창이 보고 사항을 물었다. 두 수사관은 하루 전에 있었던 김재규의 변론 거부 이야기를 꺼낸 뒤 재판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서 정총장으로부터 진술을 한 번 더 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총장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전에도 진술을 했는데 뭘 또 받으려는 것인가'고 말했다. 허대령은 김재규가 수사 과정에서 '정총장에게 돈을 주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을 들어야겠다고 말했다.
정총장은 '여기에 녹음기가 있으니 여기서 진술하겠다'고 했다. 허대령이 '우리가 준비한 장소로 가시는 게……'라고 이야기하자 정총장은 '도대체 누구의 지시냐?'고 화를 냈다. '각하의 지시를 받고 왔다'는 말에 정총장은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때 두 대령이 정총장을 연행하려고 했다. 정총장은 '헌병! 헌병!'이라고 외쳤다. 대여섯 명의 경비병들이 뛰어들어왔다.
전군에 비상, 일촉즉발의 상황
그들은 두 대령에게 달려들어 떼어놓으려 했다. 먼저 우대령이 정총장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어느 경비병이 총을 쏘았다. 그는 하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유도 유단자인 허대령은 재빨리 권총을 뽑아 정총장의 머리에 갖다 댔다. 경비병들은 어쩔 줄 모르고 몇 걸음 물러났다. 그는 계속 권총을 머리에 대고 정총장을 바깥으로 끌고 가 타고 온 승용차에 태웠다. 출발하는데 큼직한 철제 정문이 닫히고 있었다.
허대령은 정총장에게 소리쳤다.
'총장님 죽고, 제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납니다. 선택하십시오.'
정총장은 문을 열도록 부하에게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을 태운 승용차는 미끄러져 나갔다. 이 순간 총장 공간 당번병이 육군본부로 전화를 걸어 '총장님이 납치되셨읍니다'고 알렸다. 육본에선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정총장의 심복인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이때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랴부랴 자기 사령부로 돌아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고 이건영 3군사령관이 이들에 협조했다. 이에 맞서 서울시 외곽의 일부 병력이 시내로 들어오기도 했다.
양쪽 병력이 움직이면서 일촉즉발의 대결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전두환 장군과 참모들은 특전사령부와 수경사령부 안의 후배나 동기들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 병력 출동을 중지시키고, 정총장 편에 선 두 사령관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했다. 당시 일선 사단장이던 노태우 소장이 사단을 이끌고 서울에 진입, 대세를 결정지은 것으로 알려진 것은 다소 과장이다.
노사단장은 사단 병력을 투입한 것이 아니라 1개 연대 병력을 끌고 왔으며, 그때는 이미 대세가 결정된 뒤였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13일 새벽 4시께 국방부에서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직행, 정총장 연행에 대한 최규하 권한대행의 결재를 받음으로써 12·12 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 당시 김종필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얼마만큼 몰랐나 하는 것은 12·12 사태의 내용을 보통 사람처럼 늦게 파악할 수 있었다는 데서 엿볼 수 있다. 12월 12일 저녁 그는 플라자호텔에서 장영순(張榮淳) 총재보좌역 등 5, 6명의 측근들과 저녁을 들고 있었다. 밤 9시쯤 그는 그의 공주고보 후배인 모 실업인으로부터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 사건이 났고 정승화 총장이 다쳤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수행 경호원인 정희창 경위를 시켜 상황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정경위는 차가 막혀 현장에 접근하지 못했고 파출소 경비 전화를 통해 몇 가지 어설픈 정보만을 주울 수 있었다. 이날 밤 김종필은 '모 부대가 총장 공관을 공격했으나 진압됐다'는 소식을 듣고 밤 11시쯤 귀가했다.
이튿날인 13일 신라호텔에서 의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도 그는 12·12 사태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사태 추이에 대한 감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13일 오전 그의 측근들은 '어쩐지 썰렁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었다. 이후부터 '시계(視界) 제로론'이 그의 연설의 주소를 이루게 된다. 12월 12일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었다. 김영삼 총재를 상대로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던 조일환 등 3명이 이날 소를 취하한 것이었다.
'힘의 공백기'에 종지부
12·12 사건은 10·26 이후의 '힘의 공백기'에 종지부를 찍은 고비였다. 10·26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통해서 드러나기 시작했던 군부내의 갈등이 이 사건으로 어쨌든 해소됐다. 그 결과 한국군의 수뇌부에선 세대교체가 일어나 전두환 장군을 구심점으로 하는 정규 육사 그룹이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단일화된 지휘체제 아래에서 군은 가장 강력한 파워 그룹으로 등장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군이 직접 표면에 나서느냐, 아니면 누구를 미느냐 하는 선택뿐이었다. 12·12로부터 5·17까지는 그런 선택의 시기였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몇 사람의 개인이 나섰다'고 했는데, 12·12 당일 저녁 자리를 같이 했던 몇 사람들은 모두 5공화국의 핵심인물로 기용됐다.
유학성(전안기부장·당시 국방부차관보·중장), 차규헌(당시 수도군단장), 황영시(감사원장·당시 제1군단장), 노태우(당시 사단장), 장세동(전안기부장·당시 수경사 대령), 박희도(육군참모차장·당시 공수여단장), 박준병(국회의원·당시 사단장), 허삼수(전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당시 보안사 대령), 허화평(전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당시 보안사 대령), 이학봉(현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당시 보안사 대령) 등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개혁주도세력'이라고 한때 불리기도 했던 이들은 박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런 만큼 10·26 뒤의 박대통령 격하 분위기에 울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재판은 그런 기분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12·12 사건의 발단은 정총장의 연행을 둘러싼 총격전이었고, 연행의 명분은 김재규가 말한 정승화 장군에 대한 금품 제공 사실 여부의 조사였다.
정총장은 법정에서 돈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정총장은 변호인에겐 '그 돈은 무슨 뜻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의례적인 것이며 나만 받은 것도 아니고 액수도 많지 않았고 시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정총장의 운명은 결국 시해 사건의 그림자 아래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멍에가 되어 그의 행동을 제약했고, 그의 기반을 굳힐 겨를도 없이, 김재규 재판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가운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또 전술가로서 정총장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다.
10·26 뒤 그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노력했던 자취도 부인할 수 없다. 김재규와 같이 꼭같이 정승화 장군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고 이종찬 장군(전육군참모총장)을 꼽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장군은 자유당 시대 한국군의 정치불간여 원칙을 지킨 상징적 인물이었다. 정승화 장군은 그러나 장면 총리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패배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와 역사의 무대에서 패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곤 경멸이나 동정뿐이다. 정총장이 그토록 군의 정치적 중립화를 신념으로 삼았다면 그는 그렇게 만들어놓았어야 했다. 그는 그럴 만한 힘도 갖고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느 쪽의 선의(善意)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듯, 그의 생각이 아무리 고결했다고 해도 힘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없었을 때 그런 신념은 하나의 감상에 불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정승화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은 10·26∼12·12 사이 온 국민들이 가졌던 그 부푼 희망을 그가 지키지 못했다는 데 대한 좌절감, 배신감, 경멸, 그리고 동정인 것이다.
감정적인 연기, 최후 진술
일요일을 빼고는 매일 진행되던 김재규 재판은 12·12 사건으로 13일에는 공판을 열지 못했다. 연기 통보를 받지 못한 채 육군본부로 나갔던 강신옥 변호사는 곳곳에 흩어진 총탄자국과 핏자국을 보고 기겁을 했다. 14일부터 공판이 재개되었다. 김재규의 사선 변호인 거부로 국선 변호인이 된 안동일, 신호양 변호사는 공판이 끝난 뒤에도 김재규를 찾아가 면회, 다음날의 공판에 대비해야 했다.
15일엔 궁정도 시해 현장에 있었던 여대생과 여가수, 17일엔 박대통령의 시신을 인수했던 김병수 국군서울지구병원장 등에 대한 증인 신문이 있었다.
이날 김재규는 변호인단의 보충 신문을 받았다. 그는 오후에는 '머리가 어지럽고 메스껍다'면서 몸을 가누지 못해 누워 있게 됐다. 그러나 공판이 재개되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태윤기 변호사는 '공판진행을 지연시키고 싶어도 김재규는 몸의 고통을 무릅쓰고 꼿꼿한 자세로 신문에 응하는 판이니 지연이 될 수가 없었다. 고지식한 군인 기질로 해서 재판은 더욱 빨리 진행됐다'고 했다.
12·12는 김재규가 갖고 있었을지도 모를 희망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정승화 총장이 계속 계엄사령관으로 있었다면 김재규가 목숨을 부지했으리라고 믿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순진한 가정법에 불과하다. 정총장은 12·12 이전에도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 하지 않았고, 될 수 있는 대로 오해를 풀고 싶어했으므로 김재규에 호의를 보여 스스로 올가미를 쓸 리가 없었다. 김재규를 살려주어야 할 의리 관계도 없었고, 구명을 요구하는 김의 인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김재규 재판은 파워 게임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을지는 모르나 12·12로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12월 18일 9회 공판에서 검찰측은 유석술 피고인을 제외한 전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이어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있었다. 김재규 피고인의 최후진술만은 비공개로 했다. 일반 방청객과 기자들도 퇴장시켰고 변호인단과 가족만 참석시켰다. 계엄사의 보도 관계자가 나중에 최후진술의 요지를 기자들에게 전했다. 저녁 6시 40분부터 35분 동안 계속된 그의 최후진술은 변호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피고인은 눌변인 줄 알았는데, 그날의 진술은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놀라운 웅변이었다'고 했다. 김재규가 그의 마지막 무대로 설정한, 재판이란 드라마 가운데서도 최후진술은 그 클라이맥스였다. 제재가 잦았던 1문 1답식의 신문에서는 밝힐 수 없었던 생각을 그는 줄기차게 토로했다.
10·26 뒤 40여일 동안 그가 논리화하고 체계화한 이 최후진술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만든 김재규 혼자의 작품이었다고 신호양 변호사는 말했다. 그 내용은 주로 자신의 합리화로 흐르고 있지만, 연기를 진지하게 하면 배우 스스로가 감동에 빠지는 것처럼 김재규는 혼신의 힘으로 그의 정치적 유언을 쏟아놓았다. 이 최후진술은 당시에는 전문이 공개된 적이 없으므로 역사적 자료로서 여기에 옮겨둔다.
피고인 김재규의 최후진술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어 감사합니다.
목이 잠겨 말이 안 나오나 끝까지 말하겠읍니다.
금번 본인은 내란죄로 기소되어 재판받고 있읍니다. 합법적인 민주당 정권은 5·16군사혁명에 의하여 밀려났읍니다. 10월유신은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한 또 한 차례의 혁명이었읍니다. 금번 10·26 혁명은 이 나라 건국이념이요, 국시인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혁명한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우리가 6·25를 통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바쳐 지켜온 것입니다. 이 혁명이 어찌하여 내란죄로 심판받느냐. 자유민주주의는 남녀노소 3,700만 우리 국민이 갈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한 10·26 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집권욕이나 사리사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10·26 혁명의 결과 자유민주주의 회복은 보장되었읍니다. 최대통령도 대행으로 있을 때 공약하지 않았읍니까? 최대통령은 현임기를 마치지 않고 도중에서 그만 둔다고 하였는데 이는 과도정부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과도는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가 아니겠읍니까. 따라서 10·26 혁명은 완전히 달성되었읍니다. 국회에서도 긴급조치 9호의 해제 결의를 하였읍니다. 10·26 혁명이 없었던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으며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일입니까? 이 또한 이 혁명의 성공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10·26 혁명은 5·16 혁명이나 10월 유신에 비하여 정정당당한 것입니다. 10·26 혁명은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도전하여 타파하는 데 성공했읍니다. 그리하여 민주회복혁명은 완전 성공한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정정당당한 혁명입니다. 무혈혁명이 혁명으로는 가장 바람직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무혈이 안될 때는 최소한의 희생이 따르고 최소한의 희생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민주회복과 그 자신의 희생은 숙명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그 희생 없이는 민주회복이 안됩니다. 박대통령을 잃은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고 마음 아픔을 비할 데가 없읍니다.
그러나 유신 이후 7년이 경과되었고, 영구집권이 보장된 이상 최소한 20년 내지 25년내에는 자유민주회복이 안됩니다. 마음 아프지만 국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하여 이 혁명은 필연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 감상적이고 감정이 몹시 앞서 있기 때문에 사리 판단에 있어서 지나치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나에 대한 내란죄 심판도 그런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감상이나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정치 현실은 현실대로, 감상은 감상으로 엄연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나 경우를 잘 가리기 위하여 판례를 중히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가 내 생명을 구걸하거나 구걸하기 위하여 최후진술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내가 갈 수 있는 명분을 찾은 것 고맙게 생각하고 나는 죽어서도 영생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구걸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런데 10·26 혁명의 그 이념과 정신과 그 성공을 뚜렷이 하기 위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법이 허용하는 한 나는 투쟁하는 수밖에 없읍니다. 5·16 혁명, 10월 유신이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10·26 혁명도 정당한 것입니다. 10·26 혁명이 범법이라면 의미 없는 혁명이 되고 맙니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건국이념이고 국시입니다. 전체 국민이 수난당하며 지켜왔던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도 말살될 수 없읍니다.
그런데 10월 유신으로 까닭 없이 말살되었읍니다. 10월 유신은 국민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박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체제였읍니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체제를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있어도 말살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로부터 받을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체제반대 민주회복의 소리가 높아지자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구속되었읍니다. 이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번져나갔읍니다.
정보부장으로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유신체제를 유지하려면 정부와 국민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이승만과 박대통령을 비교하면 이승만은 그만둘 때 그만둘 줄 알았으나 박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끝까지 방어를 해낼 사람으로서 그만둘 사람이 아닙니다. 본인은 이를 알기 때문에 유신의 지주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지만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입니다.
10·26 혁명의 목적은,
① 자유민주주의 회복,
② 국민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고,
③ 적화 방지(건국 이래 미국 관계 가장 나쁘다),
④ 민주 회복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국방, 외교, 경제상 국익 도모,
⑤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라고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명예를 회복한다.
그런데 위 모두가 10·26 혁명의 결행으로 해결이 보장되었읍니다. 한 마디 확실히 말할 것은 나는 결코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이 없었읍니다. 나는 군인이요 혁명가이고, 군인이 정권을 잡으면 독재자가 될 우려가 있읍니다. 내가 독재를 마다고 혁명한 사람이 다시 독재의 요인을 만들겠읍니까?
나는 개인의 의리를 배반하고 대통령 무덤 위에 올라갈 정도로 도덕관이 그렇게 타락되지 않았읍니다. 혁명의 결행은 성공했으나 혁명과업은 수행 못했읍니다. 이 나라에는 5·16 이후 19년 동안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읍니다. 이런 쓰레기 위에 자유민주주의가 회복을 한다면 출발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또 곤욕을 치르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유민주주의가 나쁘다는 애매한 수모를 먹게 됩니다. 이런 쓰레기를 설거지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정의가 살았다고 할 수 있겠읍니까?
6·3 사태 때 이 사태 진압을 위해 서울에 계엄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그때 사정을 잘 압니다. 6·3 데모가 일어난 것도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고, 오히려 4대 의혹사건과 같은 비민주주의적인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고 악순환한 것입니다. 4대 의혹사건 자체도 국민을 우롱하는 일이었읍니다.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 행위로써 수없이 많은 돈을 치부하고 책임진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읍니다. 또 그때 치부한 돈이 한푼도 회수되지 않았읍니다. 이를 설겆이하지 않고서야 혁명과업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겠읍니까?
지금은 이 나라에 핵심이 없읍니다. 이 상태가 가장 어려운 상태이고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4·19같은 주인이 없읍니다. 4·19 후와 같이 힘센 놈이 덤비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악순환이 또 옵니다. 이를 막는 것은 오로지 민주회복혁명을 지도한 저만이 할 수 있읍니다. 자유를 회복해 놓고 새로운 정권에 대해서 군 수뇌와 협의하여 그 정권을 보호하여 민주당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읍니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평화적 정권교체가 된 적이 없었읍니다. 4·19, 5·16 등 악순환이 거듭되었읍니다. 이런 악순환을 언제까지 가게 하겠읍니까?
정권을 순리적으로 넘어가게 하는 것을 토착화하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최대통령에게 말씀드립니다 자유민주주의가 대문 앞에 와 있는데 문을 열고 있지 않고 있읍니다. 자유민주주의 때문에 절대 혼란은 오지 않습니다. 자유당 때는 부정선거, 국민의혹사건 때문에 혼란이 왔었읍니다. 지나치게 급격한 변화가 문제는 되겠지만, 혁명과업은 3∼5개월이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빨리 민주회복을 하지 않고 천연하면 내년 3, 4월에 민주회복운동이 일어나서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입법부에 말합니다. 진정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라면 국민의 갈망을 받아들여 10·26 민주혁명을 지지결의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는 민주회복되고 난 후에 자유민주회복을 위해 무얼 했느냐 물어보고 싶습니다. 긴급조치 해제 건의는 지엽적인 것입니다. 더 긴급한 것은 자유민주회복 뿐이고 자유회복 결의가 더 원천적인 결의인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가만히 눈 감고 생각하면 내 혁명의 원인이 되어 혼란이 오고 국기마저 흔들릴까봐 큰 걱정입니다.
최대통령께 지금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나를 끌어내어 나와 같이 혁명과업을 수행합시다.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읍시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이성으로 돌아가 냉혹하게 정치현실을 판단해야 합니다.
심판관님께, 재판장님께, 연일 공판에 매우 피곤한데도 장황한 이야기 경청해주어 고맙습니다. 마지막 하직해도 고마움 간직하겠읍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놓았다는 자부 가지고 나는 갑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만발을 보지 못하고 나는 가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에 자유민주주의 만발하기를 기원합니다.
10·26 민주회복국민혁명 만세!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만세!
세상을 하직하고 가면서 자유민주주의 회복 보지 않고 가니 한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 기약되었으니 웃으며 갈 수 있읍니다. 나에게는 소신에 의한 행동이니 그에 알맞는 형벌을 내려주십시오.
끝으로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복종했고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읍니다. 모든 것이 저에게 책임이 있읍니다. 저 하나가, 중앙정보부 지낸 사람이 총책임 지고 희생됨으로써 충분합니다. 저에게 극형을 주고, 나머지는 극형만 면해주도록 부탁합니다.
특히 박대령은 단심이라 가슴 아픕니다. 매우 착실하고 결백하며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이 있던 사람입니다. 군에서 곤란하더라도 여생을 사회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극형을 면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