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단죄문이 된 항소이유서

12월 20일 재판부는 유석술 피고인에게만 징역 3년을 나머지 피고인에겐 구형대로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단심제 적용을 받는 박흥주를 제외한 피고인 전원은 항소했다. 이때부터 김재규는 다시 사선 변호인들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을 바꿨다. 강신옥 변호사 등 7명이 항소심 변호인으로 일했다. 이런 정치사건에선 직무상의 관계를 떠나서 피고인과 변호인간에는 공감대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김재규의 과거 경력과 10·26 당일의 거사 사이에는 설명이 안되는 단층이 너무 커서 꺼림칙했다는 변호사도 있다.

김재규는 자필 항소이유 보충서를 제출했다. 이 보충서는 변호사를 통해 시중으로 나가 수천 부가 복사되어 돌아왔다. 그 내용이 정연하고 명문이라 정말 김재규가 쓴 것이냐고 의심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김이 쓴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모 변호사가 체제를 잡아준 것이다.

7명의 변호인들이 제출한 항소이유서는 박대통령과 유신체제의 단죄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실정법에 따라서는 김재규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 김재규가 5·16처럼 하여 정권 탈취에 성공했더라면 법정에 서지 않았겠지만 실패했으므로 그는 정치적 패자의 운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변호인들은 김재규를 단죄하려는 실정법의 근거인 유신체제의 비합법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피고인이 국헌 문란을 꾀했기 때문에 내란목적의 살인죄가 성립된다는 1심 판결에 대해서 항소이유서는 '피고인의 목적은 민주회복이었고 유신 선포에 의하여 문란된 국헌의 회복이요 정상화였으므로 내란목적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역으로 치고 나왔다.

항소이유서는 또 '피고인이 현재의 헌법이 유신이라는 혁명에 의하여 불법하게 만들어진 무효의 헌법이라고 보기 때문에, 진정한 헌법을 되찾기 위해 유신헌법을 파괴하려고 한 행위는 자연법에서 인정한 저항권의 행사라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변호인들은 서울대 김철수 교수가 쓴 『헌법학연구』에서 저항권에 관한 대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헌법 체제가 권력자에 의하여 위기에 빠뜨려져 인권을 무시하는 탄압이 행하여지는 것 같은 경우, 자유로운 인권의 기저에 숨어 있는 저항권을 불러내는 것밖에 다른 수단이 발견될 수 없을 경우도 있다. 부득이한 경우, 즉 입헌적인 의지의 통로가 폐색되어 정상적인 헌법 절차의 이용에 의한 수정이 불가피할 경우 저항권의 발동까지도 불사하는 강인한 의지와 자각을 가진 국민이 있으면 헌법은 최대의 보장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다.'

항소이유서는 또 비공개의 남용, 공판 조성의 미비 및 열람·등사권의 박탈, 다른 피고인 진술 때의 김재규 피고인 퇴정 명령의 부당성, 신문 및 진술의 제한, 녹취권의 박탈 등 절차상의 위법을 따졌다. 김재규 재판이 가진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졸속으로 처리된 점도 지적했다.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려가듯 1979년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거의 연일, 아침부터 밤까지 무리한 공판 진행을 함으로써 변호인들은 방대한 수사 기록을 거의 열람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최종변론에 임해야 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이 무렵에도 매주 한 번꼴로 김재규를 면회했다. 면회 시간에 제한은 없었으나 교도소측에서 입회를 했다. 김재규는 대체로 태연하고 꼿꼿한 자세로 염주알을 굴리며 이야기를 했다. 그의 목소리는 바리톤으로서 맑았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14일 면담에서도 강신옥 변호사에게 구국여성 봉사단의 전총재 최태민을 비난했다.

1월 15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박대통령의 여자 관계를 많이 털어놓았다. 유부녀와 간호장교도 소개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든지, 고○○, 한○○, 양○○ 등 탤런트의 이름을 들면서 설명을 했다. 임신한 여자의 낙태 문제 등등 뒤처리 관계도 이야기하였다. 박근혜양과 구국여성봉사단, 그리고 박지만군의 문제에도 언급했다.

1월 21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10·26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이야기를 했다.
'5·16과 10월유신과 10·26의 의미는 엄청나게 다르다. 5·16과 유신은 민주역행이었고 10·26은 민주회복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성공했으나 혁명과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1월 27일 강신옥 변호사를 만난 김재규는 재산 포기·헌납서는 군 수사기관에서 심하게 조사를 받을 때 쓴 것이라고 했다. '국고에 환수당할 만한 부정한 재산은 없다'고 말한 김재규는 '10억원쯤 되는 재산을 사형당할 부하들의 가족에게, 그리고 살 사람은 어린이 중심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재산이 아까와서 불평하는 게 아니다. 피아노까지 (헌납) 품목으로 넣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28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박지만군의 이야기도 했다. 지만군이 육사에 재학중에 무단 외출을 하여 '재벌 아들과 함께 여자들과 어울려 다닌 것을 육사 교장이 알고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군을 위해서도 퇴교시켜 유학을 보내도록 합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1980년 1월 28일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꼭 같은 판결을 내렸다. 관할관의 판결 과정에서 김계원 피고인만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피고인 전원은 상고했다. 1월 31일 김재규는 이런 자술서를 썼다.

'항소이유서 2항에 적시한 사실은 본인이 1979년 10월 27일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수사관들의 집단 구타와 갖은 고문을 받아가면서 본인이 모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는 등 강박을 당해 재산 포기서와 헌납서에 날인한 것은 부당하며 본인의 재산은 본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취지였읍니다. 그러나 보안사에 연행되어 연속적으로 신문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순리적인 방법으로 조사가 진행되었고 기본적인 조사가 이미 끝난 후 본인 소유재산에 대한 조사가 착수되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 재산을 방위성금으로 헌납하기로 결심하고 있던 차였고 수사관으로부터 소유재산 처리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수사관의 강요에 의하지 아니하고 소유재산을 국방 방위성금으로 헌납할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재산 포기서와 재산 헌납서를 작성, 날인, 수사당국에 제출하였던 것이 사실이므로 정정합니다.

1980년 1월 8일 진술서에 기재된 재산에 관한 것은 이미 수일 전에 변호사를 통해서 초안 작성한 것이었으며 1월 28일 본인은 본인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 증여, 또한 방위성금으로 헌납키로 문서를 작성하였고, 당일 선고 공판일 법정에서 본인의 앞에서 본인 소유재산을 방위성금으로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말한 바 있으며 따라서 이 내용은 최후적이며 반드시 상고이유 보충서에 첨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시력 장애로 장문이 자필 불능하여 타자로 대필한 본문안을 대위 차○○이 읽어주므로 이를 확인, 서명 날인함.'

2월 5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꿈 이야기를 했다. 볼펜으로 강신옥 변화사의 노트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11월 중순에 꾸었다는 이상한 꿈을 설명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22줄의 무지개가 보이더라. '二十二'를 세로로 써보라. 그러면 임금 왕(王)자가 나타나지 않는가.'

2월 26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수사를 받을 때 썼던 재산 포기서와 헌납서 관계에 대해서 흥분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제부터는 한 번 더 협박하면 혀를 깨물고 자살하겠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또 이날 면회에서 3군단장 시절(1973년 2월)에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조국 산천을 내려다보다가 떠오른 시상으로 썼다는 「장부한」(丈夫恨)이란 한시를 강신옥 변호사의 노트 위에 써주었다.

'眼下峻嶺覆白雪 千古神聖誰敢侵 南北境界何處在 國土統一不成恨'

3월 1일 김재규는 일종의 유언을 강신옥 변호사에게 구술시켰다.

'국민 여러분, 나는 민주회복을 이룩하고 갑니다. 자유의 물이 흘러내리는 강을 둑으로 막아놓은 것을 내가 그 둑을 부수어 흐르게 하였읍니다. 이 자유를 애지중지하여 잘 지켜야 하겠읍니다. 유족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인연법이 있는데,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서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대의 때문에 아무런 사감이 없는데도 희생을 주고받았읍니다. 이런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양가족이 앙숙의 관계를 맺으면 제 2, 제 3의 불행이 생깁니다. 인을 만들지 않으면 연이 생기지 않듯이 서로가 더 이상 불행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3월 6일 박흥주 대령의 사형이 서울 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집행됐다. 하루 전날 밤 박흥주의 가족들은 '내일 집행될 듯하다'는 귀뜸을 받고 6일 아침 일찍 교도소로 면회갔으나 형장으로 끌려간 뒤였다. 그의 변호인이었던 태윤기는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의 부하들 중 지적 수준에서 그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고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많은 비밀을 안고 죽었을 것이다. 주범인 김재규의 사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종범부터 먼저 사형시킨 것은 너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재규는 3월 8일 면회에서는 주로 불교 이야기를 했다. 3월 12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거사를 한 것은 아니다. 지금 정부가 흔들리는데 내가 풀백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또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라는 말로써 자신의 거사 동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낮추어 보는 이야기를 했다. 김재규는 10·26 뒤 신문을 받을 때 썼다는 한시 한 수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平生大事一朝成 雲水行脚今後事 成佛得道大哲願 旣心成就今生中'

생의 미련 못 버리고

3월 19일 김재규는 『금강경』을 인용하여 설법하듯 이야기를 했다.
'매사에 망상이 없어지도록 해야 한다.'
'마음을 다스려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다.'
'나는 이미 성인의 경지에 들어 섰다.'

3월 25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민심이 천심이다. 재주를 피우다간 탈이 난다. 자유민주주의는 하늘의 뜻이다. 국민을 우매하게 보지 말아라. 국민을 우매하게 보면, 그렇게 보는 자가 우매한 것이다'고 좋은 말을 골라가면서 했다.
또 꿈 이야기를 했다.

'월요일 꿈에 범이 꼬리로 내 눈을 치더라. 다리 밑에서 움막을 쳐놓은 봉사를 보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화두(話頭)라는 것은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 한 가지 망상으로 생각을 집중하여 자기 마음이 확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4월 8일 면회에서도 김재규는 『반야심경』을 인용했다.
4월 13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나의 구명이 되고 안되고는 지엽적인 문제다. 이 혼란기가 탈없이 스무드하게 넘어가야 한다. 나를 죽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4월 18일 김재규는 '군인은 순수해야 된다'면서 '10·26 혁명 정신에 의해서 새 헌법이 제정되면 언젠가는 헌법 전문(前文)에 나의 거사정신이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4월 23일 면회에서 김재규는 변장한 스승을 모르고 잡아 먹고 식인 습성을 버린 대만의 식인종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자신의 죽음이 민주화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5월 15일 오전, 대학생들의 데모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고 있는 중에 김재규는 강변호사를 만났다. 데모 소식을 전해듣고 있었던 김은 들떠 있었다. 잘되면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그의 표정에 역력했다. 그는 '대법원 판결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강변호사에게 묻기도 했다. 강변호사는 '반대의견을 취할 대법원 판사가 몇 명은 될 것입니다'고 답했다. 이것이 마지막 면회가 됐다.

소수의견 대법원판사 5명, 사직하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미 그 며칠 전, 아마도 5·17 이전에 합의는 끝났었다. 대법원에 상고된 것이 2월 8일. 그 뒤 약 100일 동안 모든 대법관들은 이 세기적인 사건의 기록 검토에 매이게 됐다. 맨 처음 이 사건은 네 명의 소합의부에 배당이 됐다. 양병호, 안병수, 서윤홍, 유태흥 대법원판사 등 4명으로 구성된 이 합의부에선 의견이 엇갈려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건은 전원합의체로 넘어갔다.

복사된 사건기록이 대법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나눠졌고 세 차례의 전체 회의까지 열려 의견 개진이 있었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판결에 대한 외부 압력은 없었다고 한다. 이 판결문에 파기·환송 의견, 즉 소수의견을 단 대법관이 6명 있었다. 양병호·민문기·임항준·김윤행·정태원·서윤홍 대법관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내란목적의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양병호 대법원판사는
'내란목적의 살인이 되려면 상당히 넓은 범위의 모의와 조직, 다수에 의한 폭동 및 일정한 지역의 평온을 해치려는 계획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사건은 김재규 혼자서 사전 모의 없이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저지른 범행이기 때문에 단순 살인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 사건을 단순 살인으로 보면 10·26 직후의 계엄령 선포도 적법한 것이 아니란 얘기가 되는 등 검찰관측의 수사와 재판의 논리 구조 자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란목적의 살인으로 할 경우엔 김재규의 범행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문제점도 있다. 단순 살인죄를 적용하면 김재규의 하수인들은 사형만은 면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내란목적의 살인이냐, 단순 살인이냐는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다.

이 대법원 판결문에 소수의견을 쓴 6명의 대법원판사들 중 정태원을 제외한 5명은 그해 8월 9일 사직했다. 대법원판사들이 무더기로 임기 전에 그만두게 된 것은 이것이 사법사상 두 번째 일이었다. 강신옥 변호사는 대법원 확정판결 뒤 곧바로 재심 신청을 냈는데 그날 사무실로 돌아오는 도중에 모 기관에 연행됐고 거기서 조사를 받던 도중 김재규의 사형집행(5월 24일) 소식을 들었다.

집례 거부하고 죽은 김재규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
1980년 5월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장에게 모처로부터 어떤 전갈이 왔다. 그 내용은 구치소장을 비롯한 일곱 명의 실무 간부들에게만 통보됐다. 사형수 담당 김준영 목사에겐 '내일 아침에 대기를 해달라'는 연락이 갔다. 다음날 새벽 4시께 군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재규는 서울구치소 보안청사의 지하실 독방으로 이감 수용됐다. 수갑이 채이고 포승으로 묶인 채였다.

봄날의 아침이 밝아올 무렵인 정각 아침 7시, 구치소 직원 3명이 김재규를 데리러 왔다. 두 직원은 김의 양쪽 팔뚝을 붙들고, 한 직원은 김의 뒤에서, 그를 데리고 나갔다. 김은 얼굴을 치켜든 채 말없이 걸어갔다. 위에는 흰 한복, 아래는 잿빛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운동장과 9사(舍) 사이의 골목 같은 길을 지나 1분쯤 만에 당도한 곳. 흰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기와 목조건물이었다. 사형 집행장이다.

집행장의 옆문을 통해 김재규는 계호를 받으며 들어왔다. 그는 정면 단하(壇下)의 돗자리 위에 앉혀졌다. 단상 정면엔 집행관인 교도소장, 그 오른쪽엔 스님과 목사, 그리고 검찰 관계자, 뒷벽을 따라선 관계 공무원들이 앉아 있었다. 김의 뒤에는 교도소 계호담당 직원 3명이 섰고, 양쪽 측문 쪽엔 6명이 계호 직원이 서 있었다. 집행장의 바닥은 퇴색한 마루. 1년에 한 번 정도, 처형이 있을 때만 문이 열리고 청소되는 곳이 이 건물이다.

집행기구가 낡아도 수리를 하려 하지 않는다. 집행장에 손대는 걸 모두 꺼리기 때문이다. 목에 거는 밧줄이 새까맣게 때가 묻어 반들반들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그런 데 있다. 김재규에 대한 인정신문이 시작됐다.

집행관(교도소장)은 죄수 번호, 성명, 생년월일 본적, 주소를 1문 1답식으로 물었고 김은 대답했다. 이어서 집행관은 김재규의 범죄 사항과 재판 경과를 날짜에 따라 읽고 나서는 '오늘 법무부장관의 사형집행 명령에 의해 그 형을 집행합니다'고 선언했다. 집행관은 '유언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했다. 김재규는 '할 말이 없읍니다'라고 했다. 집행관은 '스님을 모셨읍니다. 집례를 받으시겠읍니까?' 하고 물었다.

김재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로 흔들어버렸다. 보는 이에 따라선 '모든 게 귀찮다'든지 '나 혼자 힘으로 최후를 맞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는 계속 염주를 헤고 있었다. 교도소에 의해 초빙된 고광덕 스님은 단상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행관이 사인을 주자 김의 뒤편에 섰던 세 계호 직원이 재빨리 움직였다.

한 직원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하얀 천의 용수를 김의 머리에 덮어 씌우는 것과 동시에, 두 직원은 김의 상체와 두 다리를 포승으로 감아 묶었다. 교수될 때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안대도 씌웠다. 뒤에서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그를 비스듬히 뒤로 끌고 갔다.
직원들은 내려뜨려진 흰 커튼을 젖히고 별실 같은 집행 장소로 약 3미터쯤 끌고 갔다. 도르레에 달린 밧줄이 내려와 있었다.

앉혀진 김의 목에 올가미가 걸렸다.
직원들을 비켜서면서 '준비 완료, 포인트 제껴!'라고 고함을 쳤다.
건물 바깥에 나가 있던 직원이 벽에 붙은, 포인트로 불리는 손잡이를 젖혔다.
김이 앉은 네모 마루 판자는 그 받침대가 빠지면서 ㄱ자로 젖혔다.
'쾅!'
마루 판자가 지하 광의 벽을 때리는 소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집행장을 쩡 울렸다.
김재규의 몸은 지하로 떨어져 허공에 매달렸다.
비명은 없었다.
이럴 때 사람에 따라선 숨이 콱 막히는 '컥!' 소리를 듣는다고도 하지만 판자가 지하벽을 치는 소리에 묻히고 만다.

25분쯤 흐른 뒤, 의무관이 지하광으로 내려가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사망을 확인했다. 다시 5분을 기다렸다가, 생명이 달아난 김재규의 몸을 풀어 내려놓았다. 집행의 모든 과정, 인정신문에서 사망 확인까지는 컬러 사진으로 기록됐다. 54년간 이어져온 남자의 삶을 정지시키는 데 든 시간은 약 30분이었다.

'밧줄이 꺼끄럽습니까?'

통상적으로 사형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된다. 김재규의 네 부하들은 이 관례에 따라 10시부터 차례로 최후를 맞았다. 10시에 집행장으로 끌려온 전의전과장 박선호는 김준영 목사의 집례하에 마지막 예배를 올렸다. 김목사는 「디모데 후서」를 읽고 간단한 설교를 한 다음 박의 손을 맞잡고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편안히 쉴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향이 어디든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김목사는 이어서 '인생 상호간의 살생하는 참극을 끊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

박선호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가족에게 교회 열심히 나가도록 전해달라'는 유언을 김목사에게 했다. 그도 김재규처럼 분위기에 놀란 듯, 스스로를 줏대 있게 가누지 못하고 교수형을 맞았다. 형장에선 대부분의 사형수들이 도통한 자세를 보인다. 삶을 포기하고 종교에 귀의한 그들은 모두에게 감사하며 천당 가는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다. 소수의 사형수는 '돈이 없어 죽는다'느니 '억울하다면서 통곡을 하기도 한다. 극소수의 사형수는 자기를 교수대로 보낸 사람을 저주하고 죽는다.

사형 집행을 많이 목격한 목사나 직원들은 어느 쪽이든 '인간다운' 죽음이기에 꼭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한다. 남을 저주하고 죽는 이가 남에게 감사하고 죽는 이보다 못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그렇게 죽어야 하는 존재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태도로 인생을 끝막음해야 깊은 인상을 남기는 법이다. 죽음이란 것이 삶의 총체적 결산이기 때문이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그런 점에서 '어중간했다'는 평이었다.

박에 이어 교수대에 선 이기주(전중정 경비원), 유성옥(전중정 운전사), 김태원(전중정 경비원)은 격렬한 저주를 남기고 사라졌다. 유성옥은 바로 전날 무슨 예감이 있었던지 교화 담당자와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목에 밧줄이 걸리면 꺼끄럽습니까?'
'그런 생각 마세요.'
'꿈에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닐라 삼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꺼끄럽지 않을 겁니다. 편안히 가게 됩니다.'

함성과 총성 속에서……

김재규 등 5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조갑제 기자는 광주 금남로의 어느 여관에서 들었다. 5월 25일, 비가 부슬부슬 뿌리는 일요일, 조기자는 텔레비전의 자막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조기자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있었다. 현장을 지켜본 몇 안되는 경상도 출신 기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날 그는 전남도청과 상무관, 그리고 전남의대 병원을 돌면서 시체들을 확인하고 다녔다. 관 뚜껑을 열고 치명상을 알아보기도 했다. 총상 이외에 둔기로 머리가 박살난 시체가 많았다.

광주시내는 시민들의 장악하에 있었다.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복면한 청년들이, 빼앗은 군용차량을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단 청소년들도 보였다. 밤은 일찍 왔다. 이른바 '시민군'이 통행금지를 일찍부터 실시하는 바람에 밤 8시께부터 중심지 거리는 무인지경으로 변했다. 낮에 있었던 시민궐기대회의 열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쌩, 쌩, 달리는 차소리와 함께, 간간이 연발사격의 총성이 들려왔다. 광주는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광주시 외곽은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선으로 변해 있었다. 그 선을 넘나드는 것은 38선을 오가는 정도의 위험은 아니지만, 상당한 모험이었다. 조기자는 여관방에서 잠을 청했다. 드르륵―. 또 먼 총성이 북쪽에서 들려왔다. 낮의 함성, 밤의 총성, 그 가운데서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