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1월 월간조선>
흥미 부추긴 知的 게임 뭔가 보여 줄만한 거리를 갖고도 그걸 보여 주지 않고 있는 사람은 대개가 멋져 보인다. 9회 2사 만루에 배터 박스에 들어선 4번 타자, 아직 보자기를 풀지 않은 마술사, 결투자세를 취한 명사수, 중환자를 진단한 뒤 가족 앞에 나타난 의사 등등. 이들에 대한 호기심은 기대감으로, 기대감은 외경심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기대나 외경이 아니고, 그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일 경우가 많다.
그가 「보여주려는 것」의 불확실성이 클수록 구경꾼의 가슴은 더욱 죄어들고, 주인공은 실제보다도 훨씬 크게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뭔가 보여 주겠다는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안개와도 같은 환상은 쨍쨍한 햇볕 앞에서 무산 돼버린다. 불확실하던 것이 확실해질 때 평가도 비정해진다.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4번타자는 야유 속에서 사라지고 상대를 거꾸러뜨린 명사수는 신화가 된다. 보여줄 만한 것을 다 드러내버린 사람들은 대체로 총알을 다 쏘아버린 사수처럼 무력해졌다가 곧 망각돼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형사지법 합의13부 李宰勳 부장판사는 지난 여름과 이번 가을에 걸쳐서 「뭔가 보여줄 만한 거리」를 간직하고 있었던 몇 안되는 한국인 중의 하나였다.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 재판장인 李판사가 어떤 선고를 내릴 것인가 하는 문제는 퀴즈처럼 흥미진幣?화제였다.
선고일이 다가옴에 따라 사람들은 마치 코리언 시리즈에서 어느 팀이 이길 것이냐를 내기하듯 李판사가 어떤 선고를 내릴지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재판이 지적(知的) 게임으로서 이처럼 흥미를 유발한 적은 별로 없었다. 언론을 통해 단속적으로 보도되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대다수 국민들은 李판사에게서 어떤 개성을 발견했고, 그것은 선고의 귀추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이다.
선고 뒤 李판사도 인정했듯이 언론의 보도는 그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그런 언론을 통해 李판사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싸움을 말리는 사람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면전에서 『어용판사 물러가라!』고 외치는 혈기방장한 학생피고인들, 능수능란한 22명의 변호인단, 굳은 표정의 공안검사들을 달래고 으르고 하면서 산산조각 나려는 재판을 어떻게든 모양을 갖춰 끌고가려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날카롭게 맞서기만 하는 사회풍토에서 싸움을 뜯어말리고 판이 깨지지 않도록 애를 쓰는 사람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중용(中庸)적 인간상을 그에게서 찾으려 했었다.
명판결 바랐던 국민
변호인들도 재판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李재판장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부터 李판사에게 호감을 가진 변호인들이 많았다. 홍성우(洪性宇) 변호사는 李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했던 서울 영천시장 폭발사건 피고인의 변호인이었다. 洪변호사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李판사의 집념에 감복한 사람이다. 현장검증 시간도 실제상황에 맞춰 한밤중으로 잡는 등 李판사의 독특한 재판스타일에 매료된 洪변호사였다.
『국가보안법 재판에서 무기구형을 받은 피고인이 최후진술을 1시간30분이나 하는데 그걸 중단시키지 않고 다 들어주는 걸 보았습니다. 공판 뒤 제(洪변호사)가 물었더니, 오랫동안 감방생활을 한 사람의 마지막 말인데 어떻게 중단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하더군요. 李판사는 특히 검찰측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재판을 줏대있게 주도하는 인상을 심었습니다』
李판사와 가장 날카롭게 부딪치게 됐던 조승형(趙昇衡) 변호사도 처음에는 『스케일이 크고, 재판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덕망 있는 판사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기대를 걸었었다』고 했다. 朴燦鍾 趙昇衡 변호사 등은 李판사의 그런 점을 강조하면서 피고인들을 달래 재판을 받게 했었다. 피고인들과 재판장 사이의 신뢰관계도 재판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약해지기는 했으나 파탄되지는 않았다. 무겁고 차분한 인상을 주는 李재판장은 법정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여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기자나 일반인이나 일부 변호인들까지 李판사가 처한 곤혹스러운 입장을 이해하여 그의 실수를 덮어주고 싶은 마음이 됐던 것이다.
『나의 말이 곧 법률이다』
『법원안에는 경찰관이 없다』
『누가한테 삿대질이냐』는 등등 지나친 발언이나 과민한 발언제한, 또는 재판의 급속진행을 위한 무리까지도 봐주려는 마음. 그러나 봐준다는 그 마음에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기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 경우, 반대급부는 명판결이었다. 피고인과 변호사가 꿈꾸는 명판결은 반드시 같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어쨌든 감정을 억누르며 말못할 고뇌를 한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李판사가 재판에서 자신을 훌훌 터는 선고 공판날에 가서는 뭔가 멋진 것을 보여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점에선 같았다.
李宰勳이란 인격체가 선고를 통해 드러나 감동이 없는 이 사회에 큰 울림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9회말의 역전 홈런을 꿈꾸는 것과 비슷한 심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李재판장은 평소 참선을 하고 선고 때마다 『재판장은 신의 대리인』임을 다짐하면서 성사(聖事)를 올리는 자세로 『신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까』하고 생각에 잠긴다지 않았던가. 「참선하는 판사」처럼 매력적인 이미지가 달리 있는가. 무신론자들까지도 선고를 통해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명판결을 많은 국민들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재량에 맡겨진 시대상황
피고인이나 변호인들이 바란 명판결은 파격적 선고였다. 20명의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쟁점은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이었다.
朴燦鍾 변호사는 『다른 죄목에서 유죄선고가 나오더라도 국가보안법 부분에서 무죄가 된다면 사법부 만세를 부르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국가보안법은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의 지휘자인 함운경(咸雲炅)군(21·서울대 물리학과 4학년)에게만 적용됐었다. 농성사건과는 직접 관계없는 일로서 咸군이 지난 봄 「레닌주의의 기초에 관하여」(스탈린 지음)를 북괴?이롭게 할 목적으로 읽었고,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때 「양키는 집으로 돌려보내져야 한다」「핵기지를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전문을 돌려 북괴 주장에 동조했다는 것이 그 기소내용이었다.
미국 문화원 농성 사건에서는 용공혐의가 일체 발견되지 않았지만, 咸피고인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 때문에 문화원 사건 전체와 咸군이 소속된 삼민투 조직이 공·좌익 성향을 띤 것으로 국민들에게 인상지어저 있었다. 역대 정권 아래서 수많은 국가보안법 관련 재판이 있었지만 예상외의 선고는 거의 없었다. 예외적인 선고를 한 판사는 예외없이 그것으로 이름이 났고 변호사 개업을 했었다.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재판의 영향으로 법정 바깥에선 여러 차례 비바람이 몰아쳤다. 법무장관과 서울대 총장이 갑자기 갈리고, 학원안정법 파동이 있었으며, 결심공판 가까이 가서는 이 재판의 주역 변호사인 朴燦鍾의원 사건이 터졌다. 미국 문화원 사건과 재판은 그 파급효과로 해서 이미 2·12총선 다음 가는 올해의 큰 뉴스로 자리를 굳혔다. 그럴수록 李宰勳 판사의 선고에 대한 흥미는 더욱 높아갔다. 법정 바깥에서 잇따라 벌어진 사건들은 재판 분위기를 절로 고조시켜 하나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긴박감을 축적시켜갔다. 李판사는 어느새 태풍의 눈, 한가운데 서게 됐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람이 판사였기 때문에 호기심은 더욱 컸다. 판사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된 몇 안되는, 안전한 지식인 집단 중의 하나다. 법규상으로는 양심의 결단에 따른 불이익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끔 돼 있다. 실제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변호사 개업을 하는 정도니 위험도 모험도 아니다.
그런 독자성 때문에 선고에 대한 책임도 홀로 져야 한다. 『나는 그러지 않고 싶었는데 위에서…』라는 조직인의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이처럼 큰 국가적 문제의 결정권이 한 개인의 독립적 판단에 맡겨진 예는 별로 없었다. 李판사는 그의 품안에 이 시대의 상황을 끌어 안게 됐던 것이다.
피고인측과 재판장의 신뢰감
李판사는 자신의 스타일로써도 이야기거리를 많이 만들었다. 서울형사지법에서 가장 출근이 빠른(아침7시)사람, 공판날엔 새벽5시에 나오는 사람, 골프실력이 법조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사람, 술·담배·코피를 한꺼번에 끊어버린 사람, 「독일 병정」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철저하고 분명한 사람…. 일반인들은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서 선고를 점치기도 했다. 골프 실력이 그 정도라면 자신을 내던지는 선고를 어려울 것이라느니, 매사에 철저한 성격으로 보아 선고가 어느 쪽으로 나오든 화끈하게 떨어질 것이라느니, 참선하는 판사니까 뭣이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둥, 일반 시민들의 술상·밥상에서까지도 침이 튀었다.
재판기간 중 금치조처, 병합심리, 공동접견 거부, 기피신청 등 형사소송법상의 용어들도 뻔질나게 등장, 국민들에게 법률 공부도 많이 시켰다. 법조인들은 대체로 일반인들과는 달리 예상외의 선고는 어려울 것이란 냉담한 태도였다. 어느 젊은 변호사는 『이 재판에서는 선고도 중요하지만 공판과정의 공정성이 더 중요하다. 미 문화원 점거의 동기가 충분히 드러나야 하는데 李재판장이 그걸 막고 있다. 피고인의 용어선택에까지 간여할 정도라면 선고는 보나마나다. 재판장의 인격은 절차에서 드러나는 법이다』고 잘라 말했다.
사법파동의 진원이었던 이범열(李範烈)변호사는 『재판장이 공판에 너무 깊게 간여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재판의 주역은 판사가 아니에요. 검사와 피고인이 주인공들이죠. 양쪽이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다 보면서 그 싸움을 통해 드러나는 증거들을 기초로 하여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운동 경기하면 재판장은 선수가 아니고 레퍼리죠』 선수는 검사와 피고인이라는 이야기인데, 李변호사는 가장 바람 직한 재판장의 자세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판을 진행하는 판사의 마음은 동네 꼬마들이 하고 있는 야구 경기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고 있는 정년퇴직한 노인의 무심한 눈초리 같아야 한답니다』
문화원 사건 변호인단도 재판부에 대한 불신임 표명인 기피신청을 마지막까지 미뤄왔었다. 판사나 변호인들이나 이 재판이외에 앞으로도 법정에서 계속 얼굴을 대할 사람들이고, 서울법대나 경기고등학교 등 동창관계로 얽혀 있는 이들이다. 李재판장은 사실심리가 끝날 때까지 변호인단에게 결정적인 꼬투리를 주지 않았고 변호인들도 어떤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양쪽을 이어놓은 가냘픈 신뢰의 끈이 끊어진 것은, 변호인단이 신청한 증인들을 재판부가 거의 채택하지 않았을 때였다.
광주사태 증인 신청 모조리 기각
재판부는 지난 8월21일 변호인 신청 증인 18명 가운데 15명을 기각했다. 기각된 신청 증인들 가운데는 워커 미국대사, 미국대사관 정치담당 참사?던롭, 미 문화원장 레빈, 광주시태와 관련된 군 관계자들, 광주사태 유족대표 1명, 재야인사 백기완씨, 관악경찰서장 또는 정보과장, 이현재(李賢宰) 서울대총장등이 들어 있었다. 변호인단에서도 증인들이 모두 채택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유족 1인과 미국대사관측에서 한명 정도만 채택돼도 기피신청은 제기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였다.
변호인단에선 미국 문화원 농성중 학생들과 던롭씨 사이에 맺어진 이른바 「던롭 각서」(경찰압수)의 제출명령, 광주시 망원동 묘지 현장검증, 광주사태 관련 비디오 테이프 검증 등도 신청했으나 이 또한 모조리 기각됐다. 변호인단은 8월30일 증거결정에 대한 이의신청을 재판부에 냈다. 이것도 기각됐다. 그래서 9월2일 변호인단과 피고인들은 법관 기피신청서를 서울형사지법에 냈다. 趙昇衡변호사가 작성한 기피사유소명서는 「재판장의 불공정한 공판진행 사례들」을 낱낱이 들춰냈다.
이 소명서는 재판장이 예단, 즉 선입견을 갖고 재판을 이끌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의 강행에 대해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하자 재판장은 『항소할 때, 그 문제를 다루라』고 했는데, 이것은 항소를 전제로 한 말로서 유죄의 예단을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변호인이 『광주시민들의 시위가 평화적 시위였느냐』고 피고인들에게 물을 때 재판장이 「평화적」이란 말을 빼고 「시위」라고만 물으라고 강요한 것도 실형에 처해야겠다는 재판장의 예단을 보인 것으로 피고들의 방어권을 침해했다고 소명서는 주장했다.
재판장이 피고인들에게 「정권」을 「정부」로, 「집권층」을 「정부·여당」으로, 「광주학살」을 「광주사태」로 바꾸어 말하도록 수십 회나 지적한 것도 소명서는 놓치지 않았다.
「정권·집권층이란 말은 사회과학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순화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정치권력을 휘어잡고 있는 소수집단만을 뜻하므로 정부·여당이란 말과는 다르다. 피고인들의 구호중에 『광주 사태…』」운운의 내용이 있어서 『광주 학살…』이라고 외친 일이 있느냐고 신문했을 때 『광주 사태…』운운으로 바꾸어 신문하라고 강요하였는 바 그 취지는 불문가지의 일이라고 할 것이다. 「재판장은 『여하한 경우에도 대통령의 이름이 나온 신문이나 진술부분은 대통령이라 정정하여 공판조서에 기재하라』고 참여 사무관에게 명령한 것이 수삼 차나 된다. 공판조서에는 이렇게 명령한 대목들이 기재되어 있지도 않다」
『용어금지 수 십회 반복』
「『피고인들이 광주사태를 그릇 인식하고 있다』는 공소사실에 대해 그릇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신청한 여러 증인들과 현장검증, 자료검증 등을 기각했다. 이대로 결심한다면 검사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들과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증거방법들만이 재판부의 증거결정에 따라 일방적으로 조사됐을 뿐이고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정상에 관한 증거 방법은 모두 기각됨으로써 판단결과는 삼척동자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피고인들의 광주 사태에 대한 인식에 관한 변호인들의 신문에 있어서, 비디오, 외신사건, 각종 보고서, 사망자 유족들의 말을 통하여 알아낸 내용부분의 신문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본건 심리에 있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쟁점인 광주사태에 대한 일체의 신문이나 진술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피고인들의 본질적인 방어권을 침해하였다」
「검찰측 증인 홍성문에 대한 변호인의 반대신문에서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이 정확한 주소와 소속을 진술하도록 촉구하자 재판장은 이를 막았다. 그러나 변호인측 증인 유영준에 대한 검사의 반대신문에서 검사가 동증인이 법정에 서게 된 경위를 묻자 증인은 신문취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고 검사도 그 이상의 유도신문을 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돌연 동 증인에게 『증인과 朴燦種변호사는 동기동창생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냐』고 유도신문하여 검사를 도왔다」
이 기피신청에 대해 서울형사지법합의 12부(재판장 이건웅)는 지난 9월6일 「불공정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기각했다. 9월9일 피고인들을 대리한 변호인단은 즉시 항고장을 냈다. 여기서 변호인단은 「검사의 공격자료와, 피고인들의 방어자료의 법정 현출 상황을 비교하면, 공격자료는 그 어느 쟁점에 관하여도 빠짐없이 나타나 있고 방어자료는 그 어느 쟁점에 관하여도 법관들의 불법한 변론제한으로 현출되어 있지 못하다」고 했다.
서울고등법원 제3형사부(재판장 정만조)는 9월11일 항고를 기각했고, 9월14일 변호인단은 재항고장을 냈다. 재항고장에서 변호인단은 「…위와 같은 용어금지를 수십회 반복 강행하였고 그때마다 그 용어사용으로 표현 진술하려 한 바를 송두리째 진술하지 못하게 마이크를 끄게 하거나 공판조서에 기재하지 않도록 명령하거나 삭제하겠다고 말하는 등 심리내용의 진실마저 흐리게 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 재항고도 9월19일 대법원 제3부(재판장 강우영)에 의해 기각됐다. 그러나 변호인단이 지적한 재판장의 공판진행 방법 자체는 거의가 사실이었으므로 그것들을 하나의 기록으로 남기는 데는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법은 정치의 시녀!』
피고인측의 법관 기피 신청이란 것은 『재판장 물러가라』는 듯의 법률적 표현이다. 기피신청이 기각되긴 했지만, 변호인·피고인측과 재판부 사이에는 이미 심정적으로 금이 가버린 셈이었다. 기각 확정 뒤 처음 열린 9월25일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재판부의 불공정한 증인채택과 朴燦鍾변호사에 대한 업무정지 처분에 항의, 사임해버렸다. 이날 사임에 앞서 金守변호사는 재판부를 향해 『비록 재판부 기피신청이 기각되긴 했지만 과거의 예를 보면 기피당한 재판부 스스로가 그 재판을 회피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번 재판부도 그런 회피의 결단을 내리는 고도의 예의를 보여달라』고 자진사퇴를 건의했다.
李宰勳재판장은 언성을 높여 『그런 회피는 관례가 아니다. 사석에서라면 무식하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고 말했다. 9월25일 결심공판 날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은, 처음부터 작심하고나온 피고인들에 의해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입정하면서부터 극렬한 구호를 외치는 피고인들, 입을 틀어막는 교도관들, 격렬한 몸싸움, 틀어막힌 입을 통해 『흑흑』『컥컥』하는 격음과 함께 간간히 터져나오는 부르짖음- 『…처단하라』『사법부독립 보장하라』『…퇴진하라』『…물러가라』
피고인들을 억지로 자리에 앉히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소란은 그때부터였다. 함운경(咸雲炅)피고인이 일어나 국선변호인을 거부하겠다고 말하고『저희들은 현정권의…』라고 무슨 말을 시작하자 李재판장은 입을 뗐다. 『사선 변호인들은 피고인이 참으로 변론이 필요한 시기에 피고인들을 버렸다. 변호인들은 지금까지 법률적 주장보다는 파행적 주장으로 소송 진행을 사실상 방해하여 왔다. 결심 단계에 와서 피고인들을 황야에 버렸다』 수갑과 포승으로 꽁꽁 묶인 피고인들은 틀어 막힌 입을 순간적으로 놀려 구호들을 외쳐댔다.
『재판부는 자진 사퇴하라』
『어용판사 물러가라』
『양심이 있다면 물러가라』등 재판장을 겨냥한 구호가 많았다. 『朴燦鍾변호사의 기소를 철회하라』는 구호가 잇따르자 朴변호사의 고교후배이고 처남의 친구이기도 한 李재판장은 『이 재판은 박찬종이를 위한 재판이 아니다』고 화가 난 듯 쏘아붙였다. 그는 『사법부독립은 여러분의 소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절차를 지킴으로써 보장되는 것이다』고 달래기도 했으나 피고인들은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더욱 세차게 고함을 쳐댔다.
李재판장은 『구형하십시오』라고 했으나 崔桓부장검사는 눈 앞의 수라장에 엄두가 안 났던지 가만히 있었다. 李재판장은 구호를 외치는 피고인들을 차례차례 퇴정시키기 시작했다. 피고인들은 끌려 나가면서도 고함을 질렀다. 교도관들에게 거의 들려나가다시피 했고 피고인 대기실의 문을 박차기도 했다. 李재판장은 이 수라장을 내려다 보면서 『한심한 작태로구나』고 혼잣말하듯 했다.
『법이 정치의 시녀다』는 피고인의 부르짖음에 대해선 『지금 내가 실시하고 있는 것이 법의 힘이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어느 피고인은 끌려나갈 때 몸부림치면서 방청석을 향해 『아버지 죄송합니다!』고 고함을 질렀다. 李재판장은 몇 피고인이라도 붙들어 두어 결심공판의 모습을 갖추려고 애를 썼으나 모두가 『저를 퇴정시켜 주십시오』라고 자원하는 판이었다. 李판사는 유일한 여자 피고인인 田辰淑양(21·연세대 사회사업과 3년)에게 『전양은 반성문까지 썼던데…』라면서 순순히 재판받도록 달래기도 했으나 田양도 울먹이면서 『퇴정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스무 살이 뭘 안다고』
어느 피고인이 『20여 년 살아오면서 이처럼 부끄러운 자리는 처음입니다』고 고함치자 李재판장은 『자네가 기어다닐 때부터 나는 판사였어. 철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철없을 나이는 지났습니다』『스무살이 무슨 나이라고…』40대 판사와 20대 학생의 이 대화는 퍽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오늘의 학원문제를 진보적인 20대와 보수화된 40대의 대결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의 학부모 가운데는 특히 40대가 많고, 20대 학생들을 단속하는 입장에 선 쪽의 핵심도 거의가 40대이다. 40대는 기성 질서의 심장인 것이다. 이 재판도 40대 판사, 검사, 변호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일제시대 학생독립운동의 전통을 4·19, 6·3사태란 민주운동으로서 현대 한국에 새롭게 되살린 것이 20대 시절의 오늘날 40대였다. 지금 일부 20대의 눈에는 40대가 현실과 타협하여 보수 반동화한 것으로 비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구형은 피고인석이 텅빈 상태에서 이뤄졌다. 崔桓부장검사가 20여분간 구형논고문을 낭독했다. 한바탕 태풍이 스치고 지나간 뒤의 상채기 투성이 무대에서 당사자도 없이 하는 논고였다. 엄정한 법의 권위를 보여줄 분위기는 아예 못됐다. 咸雲炅, 金民錫피고인에게 징역 10년, 洪性瑛등 10명의 피고인에게 징역 7년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5년이 선고됐다. 가족 방청석에서는 까무라치는 소리도, 원망하는 소리도, 『후유』하는 한숨도, 잘했다는 소리도 일체 나오지 않았다. 철저한 무반응 그것이었다.
구형이 끝나자 尹鍾洙국선변호사가 일어나 『국선변호인 지명을 받은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충분한 기록검토와 피고인 접견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 변호기일의 연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尹변호사는 미리 준비한 듯한 변론문을 10여분간 낭독했다. 사선 변호인들이 줄곧 주장해 온 것들을 몇 갈래로 정리한 것이었다. 이날 오후에도 피고인들은 서울 구치소에서 법정까지 실려오기는 했으나 최후진술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을 법정에 세우지도 않고, 피고인 대기실에 사람을 보내 거부의사를 확인한 뒤, 공판을 끝내 버렸다.
李재판장도 지쳤는지 피고인들을 강제로 법정에 세울 생각을 포기했던 것 같다. 金民錫피고인 등은 발언제한을 받지 않고 실컷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최후진술이 기다려진다는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하곤 했다. 이런 재판에선 최후진술이 피고인들의 축제일이 된다. 몇 달을 준비한, 감동적 진술을 얼음처럼 냉철하게, 때론 폭포수처럼 힘차게 쏟아놓아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최후진술은 변호인들을 통해 세상으로나와 김지하(金芝河)씨의 경우처럼 돌아가며 읽혀지기도 한다.
미국 문화원 재판의 막바지에 가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이 이들 피고인들을 격앙시켜 자신들의 잔치상을 스스로 짓밟아 버리게 했던 것으로 보였다. 피고인들의 재판받는 태도는 일관성이 없었다. 맨첨엔 재판을 거부했다가 「임한다」로 바꿨고, 불리한 검사측 신문엔 묵비권을 행사했다가 유리한 변호인 신문엔 응했고, 최후진술을 거부해 놓고는 일부는 그 뒤 최후진술과 성격이 크게 다를 게 없는 진술문을 써냈다. 재판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형식논리에 너무 얽매여 결국은 의연한 인상을 주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하룻밤에 써 내려간 훈계문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3대 중간집단은 교수, 법조인, 언론인일 것이다. 머리수에 있어선 전인구의 0.1%쯤이지만 정신적 영향력에서 99.9%의 국민들을 휘어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의 영향력은 우리 사회의 여러 이해집단들로부터 독립되어 중립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데서 나오고 있다. 이들의 독립성은 그러한 도덕적 권위와 영향력이 원천이다. 최근 들어 이들의 독립성에 대한 비난이 특히 학생들로부터 많이 쏟아졌다.
진리(교수), 진실(기자), 정의(법조인)란 고매한 낱말을 직업상의 모토로 삼고 있는 이 3대 집단이 우리 사회에서 가치판단의 대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어, 그 때문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높이게 됐다는 해석이 있다.
중간 스폰지 역할을 하는 3대 집단이 허약해져 학생과 집권층이 완충제 없이 요란하게 맞부딪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중간집단의 기능회복이 양극단의 예각적인 대립을 완화시키고 나라를 중산층 중심으로 안정시킬 것이라고 바라는 사람들은 미국 문화원 사건 재판의 선고가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올해 들어와 이 3대 집단 내부의 움직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2·12총선 이후 신문은 크게 달라졌고 출판계는 그 훨씬 이전부터 달라져 있었으며 교수, 변호사들의 자기 주장이 약간은 활발해졌다.
문화원 재판기간 중, 대한변호사협회가 대법원장의 사퇴를 건의하고 언론이 이를 쟁점으로 크게 부각시킨 뒤 신민당이 탄핵안 제출을 결정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르게 되었고, 그 한가운데서 선고가 이뤄지게 됐다.
더구나 李宰勳판사는 『나는 어떤 외부 간여도 받지 않고 소신껏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고 공언하면서 사법부의 어용성을 규탄하는 피고인들에게는 『재판을 끝까지 받아봐야 알것이 아니냐』고 나무랐다. 그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선고로써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비췄던 것이다. 선고 4일 전에 만난 李宰勳판사는 느긋한 자세였다. 키는 작지만 옆으로 벌여져 완강하게 보이는 그는 악수할때의 손아귀 힘에 상대방을 주눅들게 할 정도였다. 대학교 재학 때까지는 이장수(李長秀)란 이름을 가졌었는데, 장수처럼 힘이 세었다는 것이다.
그는 재판에 대해선 일체 언급을 피했다. 다만 재판을 종교적 성사(聖事)로 생각하여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말을 또 했다. 피고인들에게 훈계할 뜻도 비췄다. 나중에 밝혀진 그런 식의 훈계일 줄이야 짐작도 못했지만. 李판사는 최후진술을 거부한 20명의 피고인들에게 공문을 보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써 내도록 일렀다. 金民錫 咸雲炅등 10명이 써냈다. 이것은 李재판장이 끝까지 재판의 모양을 갖추고 , 피고인들의 의견을 경청하려고 노력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전진숙(田辰淑)피고인이 이 글에서 반성의 뜻을 보이자 9월28일에 田양을 불러내 그 뜻을 확인했다.
李판사가 직접 문제의 훈계문을 쓴 것은 추석 다음날인 9월30일 밤이었다. 2백자 원고지 50장 가량의 훈계문을 하룻밤에 거침없이 다 썼다고 한다. 이 훈계문에는 학생 피고인들이 최후진술을 대신하여 제출한 글에 대한 반박사항이 몇 개 들어 있다. 피고인들의 글은 형량판단 자료로서 뿐 아니라 훈계문의 자료로서도 이용됐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