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국회에 불을 확 질러버리고싶었다"

연재 22/"이 방이 누구 방인지는 몰라도 처음 왔을 땐 확 불을 지르고 싶은 분노가 앞섰지만 국가 재산이 아까워서 참았소. "
군사쿠데타 18일 후인 1961년 6월3일 오후4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실력자 朴正熙 부의장은 대구 <매일신문> 서울분실 鄭景元(정경원)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 5월23일에 외신기자들과 회견한 이후 처음이었다. 최초의 단독 인터뷰를 대구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배려인 것처럼 느껴진다. 박정희의 인간성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인터뷰 기사의 全文은 이러했다.

<기자=오늘은 同鄕(동향) 선배를 대하는 마음에서 좀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구 淸水園(청수원) 아주머니의 안부도 전해드리고요.

박정희=좋습니다. 청수원 아주머니한테는 신세도 많이 졌는데 편지라도 한 장 해주어야겠는데…. 또 취재하러 왔소? 나는 고향 친구라기에 이야기나 좀 하고 싶었는데.

기자=박 장군이 군사혁명을 결심한 동기는?

박정희=과거 25년간의 군인 생활을 통해서 나는 누구보담도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기성 정치인들에게 정치를 맡겨 놓으니까 꼭 망할 것만 같았어요. 아, 그래 국가 민족이 망해가는 판에 군이라고 정치에 불관여한다는 원칙만을 고집할 수 있겠소? 그래서 최후 수단을 쓴 것뿐입니다.

기자=李(이) 정권하에서도 군사혁명의 기운이 있었다는데 이번 5·16 혁명의 직접적 동기를 좀….

박정희=하기야 이승만 정권 때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흥분한 일부 영관급 장교단이 들고 나서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4·19 혁명이 일어나 학생들에게 맡긴 셈이지요. 그건 그렇다 하고 이번 군사혁명의 직접적인 동기야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장 정권이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팽개치고 무능과 부패로 일관해서 도저히 그들로서는 긴박한 위기를 타개할 힘이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국민을 기아로 몰아넣은 그들의 무능도 무능이려니와 장면 씨의 리더십이란 게 말이 아니었거든요. 사실 혁명 구호에도 있지만 이북 공산당의 간접 침략은 눈에 보일 정도였고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경제 파탄은 결국 국민을 극도의 불안과 浮黃症(부황증)으로까지 몰아넣지 않았소. 이래 가지고야 군대인들 안심하고 국토방위에만 전념할 수 있었겠소? 아닌 게 아니라 이러다간 1년 후에는 공산주의가 시골 농촌까지 침투할 것이라고 나는 분명히 판단했소.

기자=간접 침략을 분쇄하자는 혁명 구호를 내걸 만큼 張 정권은 반공에 무력했던가요.

박정희=무력 정도가 아닙니다. 놀라지 마시오, 망할 놈들. 허, 이번에 조사해 보았더니 붉은 마수는 이미 張 정권의 장관급까지 뻗치지 않았겠소(흥분한 박 소장의 두 눈에는 순간 불꽃이 인다).

기자=아니 그게 정말입니까?(어안이 막힌 기자는 숨을 죽이고 박 장군의 입만 지켜본다)

박정희=그 鮮于宗源(선우종원·전 조폐공사 사장)이란 놈하고 김영선(전 재무장관), 金善太(김선태·전 무임소 장관) 같은 자가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서 공산당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으니 더 말해서 뭘 하겠소. 더구나 선우란 놈은 간첩임을 자백하고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어. 이 따위 놈들이 정권을 맡았으니 백성이 살 게 뭐요? 2, 3일 후에는 사건 전모를 공표하겠지만 그밖에도 나는 감투와 돈과 이권에 눈알이 뒤집힌 그들의 흑막을 낱낱이 천하에 공개할 방침이오>

박정희가 말한 반공 검사 출신 선우종원 씨 관련 간첩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된다.

1961년 6월3일의 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에 대한 <매일신문(대구)> 정경원 기자의 인터뷰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기자=그런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을 장 정권이 몰랐단 말입니까.

박정희=천만에, 경찰은 이미 사건을 인지했지만 압력에 눌려 흐지부지해 버렸다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니오? 여북하면 미국에 가 있는 최경록 장군 같은 분은 재미 유학생들이 그곳에서 영주하려 한다고 전해 왔겠소?

기자=박 장군의 가정환경을 좀….

박정희=신당동에 집 한 칸 있는데 처하고 열 살, 일곱 살 나는 기집애 둘, 네 살짜리 머슴애 하나뿐입니다. 재혼해서 모다 어리지요, 허(박 장군은 처음으로 웃었다).

기자=군사혁명 전후의 사정을 이야기해 줄 수 없습니까?

박정희=다 지나간 얘기인데 참가 부대는 다 알 거요. 알려 달라고? 30사단, 33사단, 공수전투대, 해병제1여단, 6군단 포병…. 서울서 행동한 주류 부대는 이 정도고 이밖에 대구, 부산, 광주, 논산훈련소, 청주(37사단) 등 후방부대와 일부 야전군 사단에서도 호응을 약속했습니다. 최초의 계획은 작년 12월부터지요. 그땐 영관급 장교들이 열렬했고 2군 참모장이던 이주일 장군의 협력도 많이 받았지요.

기자=도중에 정보가 새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박정희=일부 정보가 새어서 초조할 때도 있었지만 나 자신은 군사혁명을 결심했을 때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소. 물론 우리 동지들은 이번 거사에서 만일 배신한 자가 있으면 극형에 처하도록 서약했었소.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실패했더라도 후회는 안 했을 거요. 내 뒤를 이어 제2, 제3의 혁명은 당연히 豫期(예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기자=정보는 왜 새었습니까?

박정희=글쎄 한 놈이 배신했기 때문에 약간 당황했지만 미군 계통은 장도영 중장이 잘 커버했지요.

기자=아슬아슬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박정희=12일의 거사 계획이 정보 누설로 실패하고 13일 全(전) 혁명군에 16일 오전 3시에 행동하도록 지시를 완료했소. 사실은 정보가 새었기 때문에 예정보다 1시간 늦었고 한강에서는 헌병들과 본의 아닌 교전까지 있었지요. 예정대로 됐다면 장면이도 장관들도 모조리 내 손으로 잡아넣는 건데…그때 지휘 위치가 어디냐고요? 6관구 사령부였소.

기자=박 장군이 가진 신조는?

박정희=나는 군인이니까 국가에 충실하게 봉사하겠다는 일념뿐이지요. 아무리 썩고 혼탁한 세상이지만 올바르게 살아보겠다는 신념은 굽히지 않았지요.

기자=실례가 되면 양해해 주십시오. 항간에선 박 장군을 아주 냉혹한 군인으로 알고 있는데….

박정희=허, 그건 너무한데요. 사귀어 보이소.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하기야 나는 5·16 전에 많은 사회단체와 사회인들과 접촉해 보았지만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거의 도둑질, 협박 같은 얘기에만 열심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되도록 그들과 絶緣(절연)하게 되었지요. 청탁, 부탁 같은 것을 이 사회에서 없애자는 게 내 신념이고, 인간 혁명이란 말도 있는데 요새도 나한테 부탁 오는 사람이 있으니 곤란합니다. 아직도 정신이 덜 난 모양이지요?

기자=박 장군의 취미는?

박정희=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색하거나 史書(사서) 읽는 걸 좋아합니다. 어떤 책을 좋아하냐고요? 각국의 혁명사를 좀 읽었는데 그것도 역사 서적에 들어가나요? 요즘은 경제 공부도 좀 합니다. <나의 투쟁>이란 영화(히틀러의 일대기를 다룬 기록영화)를 봤냐고요? 대구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지요.

기자=양담배를 피워 본 적은?

박정희=5·16 전에는 나도 양담배를 피웠지요. 혁명 후에는 딱 끊었소(이렇게 말하고는 피우다 남은 아리랑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면서 “담배는 하루에 이놈을 두 갑 피운다”고 픽 웃는다).

기자=舊(구)정권 때의 국회의원에 대해서 옥석을 구분할 용의는?

박정희=부패 부정한 정권과 이에 동조한 자는 다시는 출마를 못 하도록 법령으로 만들어놓고 군도 물러나야겠소. 이 문제는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옥석은 가려야겠지요.

기자=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은 어디다 기준을 두고 있나요?

박정희=어쨌든 앞으로 보다 깨끗하고 애국하는 젊은 세대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기자=항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인사가 어쩌면 너무 이북계에 치우친다는 오해도 있는 모양인데.

박정희=우리에겐 그런 편협한 지역 관념은 없소. 사실 이번 혁명에는 以北 출신 동지들이 보다 많이 참가했으니까요.

기자=朴 부의장이 부정의 온상이란 국회의사당에 들어온 첫 느낌은?

박정희=이 방이 누구 방인지는 몰라도 처음 왔을 땐 확 불을 지르고 싶은 분노가 앞섰지만 국가 재산이 아까워서 참았소. 어쨌든 언론인 여러분 잘 부탁합니다>

이 인터뷰 이틀 뒤 박정희 부의장이 구미면장 張月相(장월상) 앞으로 친필 私信(사신)을 전한다. 장월상은 박정희와 함께 구미보통학교를 다닌 동기생이기도 했다.

<조국과 민족의 이 절박한 현실을 눈으로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一死奉公(일사봉공) 愛國至誠(애국지성)에 불타는 젊은 청년 장교들과 국군장병들의 구국 정신이 발화점에 도달하여 궐기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습니다. 5월 12일 최후의 결심을 하고 상경하는 도중 금오산 상공을 통과하면서 그리운 고향산하와도 작별하고 지나갔으나 天佑(천우)와 神助(신조)가 우리를 버리지 않았고 삼천만 동포들의 염원이 무심치 않아서 금번 혁명대업이 성공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000년 역사를 통해서 누적된 積弊(적폐)와 舊惡(구악)들을 완전히 拔本(발본)하고 자손만대 행복과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조국 대한민국의 굳건한 토대를 닦아야 되겠다는 것이 우리들 혁명군 장병들의 일념입니다.

이 민족적인 대과업은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안 될 것이며 군인들의 힘만으로써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全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이 거대한 민족적인 사명 완수에 총진군하는 길만이 성공의 유일한 첩경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생사를 초월하고 목숨을 걸고서 기어코 이 과업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고향에 계신 여러분, 우리들도 남과 같이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정신과 노력으로써 이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앞날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조국 건설을 위해서 우리들은 분발합시다. 우리들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당대는 희생을 하고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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