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폐지하자면서 북한인권법은 반대(이인영)
주사파가 만든 전대협 1기 출신
박원순 캠프의 상임 선대본부장이었던 이인영 前 의원 및 대변인을 맡았던 우상호 前 의원은 전국대학생연합회(이하 전대협) 제1기 출신이다.
1987년 결성된 대학생조직인 전대협은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이라는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했으며, 主思派(주사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조직이다.
국가안전기획부의 전대협 수사결과를 담고 있는 <주사파에 장악된 전대협의 실체 수사결과>, <전대협 유인물과 북한방송 대비분석>, <전대협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 <전대협의 조직실체> 등 복수의 공안문건들은 “전대협은 항상 金日成(김일성)과 한국민족민주전선(이하 한민전․북한의 對南선전매체)을 추종하는 지하혁명 조직에 의해 움직여 왔다”며 주사파의 전대협 장악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록은 전대협 내부의 金日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사례도 적고 있다. 예컨대 한◯◯라는 전대협 간부의 자술서 등에 따르면, “1991년 4월 하순 경희대 총학생회실에서 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장 손◯◯ 주재로 개최된 정책주체전국회의(전대협 정책실원 5명과 전대협 각 지구 조통위 실무자 11명 참석) 후 참석자 전원이 ‘金日成 주석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한 후 ‘金日成 수령님 만세’ 삼창 후 회의를 종료”하는 등 전대협 간부들이 회의·집회·시위·MT 후 金日成에 대한 충성의식을 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金日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때 외었던 또 다른 결의문·맹세문 내용은 이렇다.
<위대한 수령님 金日成 동지와 우리의 지도자 金正日 비서의 만수무강과 한민전의 영도 아래 이 한 목숨 끊어질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결단으로 나아가자. …위대한 수령 金日成 장군님을 따라 숨통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죽음으로 혁명을 死守(사수)하며 조국과 민족이 완전히 해방되는 그날까지 열사 헌신하겠습니다[출처: 전대협을 장악한 主思派 지하조직 중 하나인 자민통이 1990년 8월 중순 한탄강 소재 민박촌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 등에 출마할 88학번 6명(한◯◯, 최◯◯, 천◯◯, 강◯◯, 김◯◯, 박◯◯)과의 MT에서 金日成에 대한 충성 맹세 강령·규약 中]>
‘위수김동’ ‘친지김동’
전대협의 김일성 추종은 전향 주사파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숱하게 제기돼 왔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洪晋杓(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지도부는 주사파가 장악했다. ‘주사파는 극소수 학생만이 추종했던 이념’이라는 전대협 출신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라며 2004년 10월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사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전대협, 한총련 등을 조직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소위 김일성 원전을 읽고 한민전을 청취하며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주사파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진심으로 추앙했다>
역시 전향한 지식인인 <시대정신> 편집위원 崔弘在(최홍재) 씨는 ‘잃어버린 세대 386’이라는 논문에서 “4․ 19세대와 1970년대 민주화운동세력은 민주화 자체가 목적이념인 반면 386에게 민주화는 사회주의나 북한의 통일로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었다”며 이렇게 밝혔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을 경과하며 주사파 NL그룹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표적인 사회운동도 이런 입장을 지니게 된다. …주사파는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전대협(1987년)과 한총련(1993년)을 조직하게 되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전대협 連帶(연대) 사업국장 출신으로 주사파에서 전향한 李東湖(이동호) 북한민주화포럼 사무국장은 “전대협이 북한의 主體思想(주체사상)을 추종했으며, 한민전의 투쟁방침을 따랐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그룹은 1987년 반미청년회·조국통일그룹·관악자주파 등을 결성했고, 이 과정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같은 해 8월 전대협을 건설했다. 대중조직인 전대협은 합법조직을 지향, 사상이나 투쟁노선을 대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전대협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에 의해서 지도됐기 때문에 그들의 노선과 자료 등 곳곳에서 주체사상과 투쟁노선이 나타나 있다.>
1980년대 또 다른 主思派 조직이었던 ‘反美청년회’ 출신의 전향 우파인사 강길모 前 <프리존뉴스> 대표는 “전대협은 주사파에 장악됐던 것이 아니라 주사파가 만든 것이 전대협이며, 주사파가 아닌 전대협 간부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며 2006년 12월 <월간조선> 등을 통해 현재 박원순 캠프의 우상호 상임선대본부장을 주사파 출신으로 거명했다.
국보법 폐지 주장하면서 북한인권법은 반대
<김일성주의 조직이었던 반미청년회 등이 1987년 만들었던 것이 전대협이다. 현재는 노무현 정권 실세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정치인들이 내가 속한 조직에서 교양됐다. 전대협 출신 열린우리당 의원 우상호·오영식 씨, 청와대 제1부속실장 문용욱 씨, 前 제2부속실장 이은희 씨, 前 청와대 대변인 김만수 씨, 前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여택수 씨 등.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찬양했다>
이인영·우상호 氏는 2007년 이른바 간첩·빨치산 추모제 추모위원으로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었다. 한국진보연대는 2007년 10월13일 오후 5시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사의 정신으로 일어서라! 민중이여!”라는 구호 아래 소위 “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개최했다. 공식자료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인영·우상호 등 22명의 국회의원이 추모위원으로 기록됐었다.
당시 분향소·전시물 추모대상인 500여 명의 소위 ‘烈士(열사)’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추모대상에는 남파 간첩 출신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다수의 共産(공산)혁명기도자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와 “열사”로 호칭하며, 각각 “통일조국을 위한 사업을 위해 남한에 파견”, “조국통일투쟁에 전념하시다” 등으로 미화했었다.
이인영·우상호 氏는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폐지의 전면에 섰었다.
▲2004년 8월4일 열린우리당 내에서 ‘국보법 폐지를 위한 입법추진위원회’에 참가했고, ▲2004년 12월23일 국회본청 내 2층 계단에서 ‘국보법 연내폐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대표·국회의원 공동기자회견’에 나섰다. ▲2007년 5월31일에는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일’ 지정촉구결의안에 참가했다. 이 案은 “6·15 남북공동선언은 통일의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는 소중한 합의”라며 “6월15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자”고 결의했다.
특히 전대협 1기 의장 출신인 이인영 氏는 ▲2004년 9월2일 소위 ‘美國의 북한인권법 제정에 항의하는 국회의원 서한’에 참여했고, ▲2005년 7월14일 소위 ‘美日의 북한인권 문제제기 규탄 결의안’에 참여했으며, ▲2006년 10월13일 북한 핵실험 후 ‘포용정책 지속’을 주장하는 성명에 서명했다.
박원순 캠프에 참여한 이들의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칼럼 몇 토막을 소개한다. 아래는 이인영 氏가 국회의원 재직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이다.
<자주의 나라, 아 그리운 나라. …평소에 온건하다고 생각했던 장로님과 목사님께서 기도 도중 ‘저 오만한 미국으로부터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게 하시옵고’ …느닷없이 울컥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어쩔 수 없어 두 손을 꼭 잡고 부르르 떨었습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그리던 자주의 나라였습니까? 아니 얼마나 목청껏 외쳐보고 싶었던 자존의 선언이었겠습니까?(2002년 12월9일 칼럼 中)>
<사학법 개정은 자기 확신과 역사에 대한 투철한 신념행위였습니다. 그것은 改革(개혁)과 守舊(수구)의 칼날 같은 대척점에서 망설임 없는 확고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를 훼절하거나 물러서서 방치한다면 우리 가슴에 자기 부정의 독버섯이 싹트게 됩니다. …지난 해 사학법은 우리에게 改革과 守舊의 건곤일척의 대척점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2006년 4월20일 칼럼 中)>
주사파가 만든 전대협 1기 출신
박원순 캠프의 상임 선대본부장이었던 이인영 前 의원 및 대변인을 맡았던 우상호 前 의원은 전국대학생연합회(이하 전대협) 제1기 출신이다.
1987년 결성된 대학생조직인 전대협은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이라는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했으며, 主思派(주사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조직이다.
국가안전기획부의 전대협 수사결과를 담고 있는 <주사파에 장악된 전대협의 실체 수사결과>, <전대협 유인물과 북한방송 대비분석>, <전대협은 순수학생운동조직인가>, <전대협의 조직실체> 등 복수의 공안문건들은 “전대협은 항상 金日成(김일성)과 한국민족민주전선(이하 한민전․북한의 對南선전매체)을 추종하는 지하혁명 조직에 의해 움직여 왔다”며 주사파의 전대협 장악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록은 전대협 내부의 金日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사례도 적고 있다. 예컨대 한◯◯라는 전대협 간부의 자술서 등에 따르면, “1991년 4월 하순 경희대 총학생회실에서 전대협 조통위 정책실장 손◯◯ 주재로 개최된 정책주체전국회의(전대협 정책실원 5명과 전대협 각 지구 조통위 실무자 11명 참석) 후 참석자 전원이 ‘金日成 주석의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한 후 ‘金日成 수령님 만세’ 삼창 후 회의를 종료”하는 등 전대협 간부들이 회의·집회·시위·MT 후 金日成에 대한 충성의식을 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金日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때 외었던 또 다른 결의문·맹세문 내용은 이렇다.
<위대한 수령님 金日成 동지와 우리의 지도자 金正日 비서의 만수무강과 한민전의 영도 아래 이 한 목숨 끊어질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결단으로 나아가자. …위대한 수령 金日成 장군님을 따라 숨통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죽음으로 혁명을 死守(사수)하며 조국과 민족이 완전히 해방되는 그날까지 열사 헌신하겠습니다[출처: 전대협을 장악한 主思派 지하조직 중 하나인 자민통이 1990년 8월 중순 한탄강 소재 민박촌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 등에 출마할 88학번 6명(한◯◯, 최◯◯, 천◯◯, 강◯◯, 김◯◯, 박◯◯)과의 MT에서 金日成에 대한 충성 맹세 강령·규약 中]>
‘위수김동’ ‘친지김동’
전대협의 김일성 추종은 전향 주사파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숱하게 제기돼 왔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洪晋杓(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지도부는 주사파가 장악했다. ‘주사파는 극소수 학생만이 추종했던 이념’이라는 전대협 출신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라며 2004년 10월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사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전대협, 한총련 등을 조직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소위 김일성 원전을 읽고 한민전을 청취하며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주사파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진심으로 추앙했다>
역시 전향한 지식인인 <시대정신> 편집위원 崔弘在(최홍재) 씨는 ‘잃어버린 세대 386’이라는 논문에서 “4․ 19세대와 1970년대 민주화운동세력은 민주화 자체가 목적이념인 반면 386에게 민주화는 사회주의나 북한의 통일로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었다”며 이렇게 밝혔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을 경과하며 주사파 NL그룹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표적인 사회운동도 이런 입장을 지니게 된다. …주사파는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전대협(1987년)과 한총련(1993년)을 조직하게 되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전대협 連帶(연대) 사업국장 출신으로 주사파에서 전향한 李東湖(이동호) 북한민주화포럼 사무국장은 “전대협이 북한의 主體思想(주체사상)을 추종했으며, 한민전의 투쟁방침을 따랐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그룹은 1987년 반미청년회·조국통일그룹·관악자주파 등을 결성했고, 이 과정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같은 해 8월 전대협을 건설했다. 대중조직인 전대협은 합법조직을 지향, 사상이나 투쟁노선을 대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전대협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에 의해서 지도됐기 때문에 그들의 노선과 자료 등 곳곳에서 주체사상과 투쟁노선이 나타나 있다.>
1980년대 또 다른 主思派 조직이었던 ‘反美청년회’ 출신의 전향 우파인사 강길모 前 <프리존뉴스> 대표는 “전대협은 주사파에 장악됐던 것이 아니라 주사파가 만든 것이 전대협이며, 주사파가 아닌 전대협 간부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며 2006년 12월 <월간조선> 등을 통해 현재 박원순 캠프의 우상호 상임선대본부장을 주사파 출신으로 거명했다.
국보법 폐지 주장하면서 북한인권법은 반대
<김일성주의 조직이었던 반미청년회 등이 1987년 만들었던 것이 전대협이다. 현재는 노무현 정권 실세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정치인들이 내가 속한 조직에서 교양됐다. 전대협 출신 열린우리당 의원 우상호·오영식 씨, 청와대 제1부속실장 문용욱 씨, 前 제2부속실장 이은희 씨, 前 청와대 대변인 김만수 씨, 前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여택수 씨 등.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찬양했다>
이인영·우상호 氏는 2007년 이른바 간첩·빨치산 추모제 추모위원으로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었다. 한국진보연대는 2007년 10월13일 오후 5시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사의 정신으로 일어서라! 민중이여!”라는 구호 아래 소위 “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개최했다. 공식자료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인영·우상호 등 22명의 국회의원이 추모위원으로 기록됐었다.
당시 분향소·전시물 추모대상인 500여 명의 소위 ‘烈士(열사)’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추모대상에는 남파 간첩 출신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다수의 共産(공산)혁명기도자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와 “열사”로 호칭하며, 각각 “통일조국을 위한 사업을 위해 남한에 파견”, “조국통일투쟁에 전념하시다” 등으로 미화했었다.
이인영·우상호 氏는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폐지의 전면에 섰었다.
▲2004년 8월4일 열린우리당 내에서 ‘국보법 폐지를 위한 입법추진위원회’에 참가했고, ▲2004년 12월23일 국회본청 내 2층 계단에서 ‘국보법 연내폐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대표·국회의원 공동기자회견’에 나섰다. ▲2007년 5월31일에는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일’ 지정촉구결의안에 참가했다. 이 案은 “6·15 남북공동선언은 통일의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는 소중한 합의”라며 “6월15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자”고 결의했다.
특히 전대협 1기 의장 출신인 이인영 氏는 ▲2004년 9월2일 소위 ‘美國의 북한인권법 제정에 항의하는 국회의원 서한’에 참여했고, ▲2005년 7월14일 소위 ‘美日의 북한인권 문제제기 규탄 결의안’에 참여했으며, ▲2006년 10월13일 북한 핵실험 후 ‘포용정책 지속’을 주장하는 성명에 서명했다.
박원순 캠프에 참여한 이들의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칼럼 몇 토막을 소개한다. 아래는 이인영 氏가 국회의원 재직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이다.
<자주의 나라, 아 그리운 나라. …평소에 온건하다고 생각했던 장로님과 목사님께서 기도 도중 ‘저 오만한 미국으로부터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게 하시옵고’ …느닷없이 울컥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어쩔 수 없어 두 손을 꼭 잡고 부르르 떨었습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그리던 자주의 나라였습니까? 아니 얼마나 목청껏 외쳐보고 싶었던 자존의 선언이었겠습니까?(2002년 12월9일 칼럼 中)>
<사학법 개정은 자기 확신과 역사에 대한 투철한 신념행위였습니다. 그것은 改革(개혁)과 守舊(수구)의 칼날 같은 대척점에서 망설임 없는 확고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를 훼절하거나 물러서서 방치한다면 우리 가슴에 자기 부정의 독버섯이 싹트게 됩니다. …지난 해 사학법은 우리에게 改革과 守舊의 건곤일척의 대척점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2006년 4월20일 칼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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