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식용이 되고 안 되고의 결정 권한 가졌나
개 먹는 사람이 씨가 마를 이 판국에, 보신탕을 반대?…시대 변천을 이용. 자기 출세를 노리는 게 아닌가?

무학산(회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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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가 '노자(老子)'를 팔아 쌀을 사는데 개고기인들>
  
  오늘이 중복이다. 이런 복날에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보신탕집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보신탕집이라곤 안 보인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그때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개를 먹었고, 그나마 살림이 조금 나은 사람은 영양 보충을 위해 먹었다. 현대의학이 개고기는 아주 양질의 고단백 식품이라 한다. 의학 지식도 없던 우리 조상님들이 개고기의 값어치를 어떻게 알았을까 존경스럽다.
  
  이젠 배부른 시대가 되었고 채식주의가 각광받는 세월이 되었다. 시대 변천과 함께 보신탕은 저절로 사라지게 돼 있었다. 이 마당에 보신탕 추방 운동까지 벌어지는 판이니 보신탕집을 어떻게 찾아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보신탕은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개 먹는 사람이 씨가 마를 이 판국에, 무슨 대단한 열정이나 가진 듯이 보신탕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대 변천을 이용. 자기 출세를 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중앙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세상에 식용 위한 개는 없다. [다큐 '누렁이' 감독 기고]》
  
  개고기를 먹는 일에 반대하는 것에는 반대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저 발언은 너무 나갔다. 식용이 되고 안 되고의 결정까지 할 권한이 자기에게 있는가? 자기가 조물주인가? 참람하게도 조물주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오로지 조물주 혹은 자연만이 식용이 되고 안 되고를 정한다. “사흘 굶고 남의 담 안 넘는 사람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개를 먹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굶어는 보고 저런 말을 했을까?
  
  언젠가 장기표 씨의 강연을 들었는데 이런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굶어 죽을 순간이라면 도둑질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래서 우리는 남의 담을 넘는 대신 개를 잡아 먹었다. 이랬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다. 그들이 듣는 데서《세상에 식용 위한 개는 없다》고 말하면 그들은 뭐가 되는가.
  
  조선조의 이덕무는 책 읽기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간서치(看書癡.책벌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런 사람이 '노자(老子)'란 책을 팔아 밥을 해 먹고는 “노자가 인간을 살리는구나” 했다고 한다. 노자라면 조선 선비가 껌뻑 죽는 사람 아니던가. 그래도 배고픔 앞에서는 팔아 치웠던 것이다. 하물며 개 한 마리일까.
[ 2022-07-26, 11: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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