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노래지는 경험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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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어?”
  
  노인이 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칠십고개를 마지막으로 오르면서 우리는 강가의 퇴락한 집에서 낄낄대고 웃으면서 바둑처럼 지나온 삶을 복기해 보고 있었다.
  
  “군대 시절 구보를 하다가 잠시 쉬는데 하늘이 노래져서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지. 그런데 왜?”
  
  “내가 고시 공부를 시작하고 일차만 계속 일곱 번을 떨어졌어. 그래도 고등학교 때는 수학의 천재라는 칭찬을 듣고 반에서는 일등을 했었지. 그래서 법대에 들어갔는데 고시에는 이차시험에는 응시도 한 번 못한 채 삼십대 중반까지 나이만 먹어 버린 거야. 일곱 번째 불합격을 통보받는 순간 주변이 온통 노래지는 거야. 거기다가 기분 나쁜 회색까지 감도는 거야. 정말 그랬어. 나중에 아는 의사가 그러는데 사람이 갑자기 충격을 받으면 주변이 노랗게 변하고 심하면 앞이 안 보이는 수도 있대. 내가 그 직전까지 갔던 거지.”
  
  그 말을 들으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앞이 막막했던 적이 있었다. 나도 낄낄거리면서 맞장구를 쳤다.
  
  “대학 졸업 무렵 군의 입대영장이 나왔어. 그걸 연기하고 고시 공부를 더 해 보려고 당시 이차대학의 고시 장학생을 신청했었지. 당시 대학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이차대학에서 고시반을 운영하면서 장학생을 뽑았잖아? 메달을 따게 하기 위해 운동선수들을 가두어 놓고 무지막지하게 훈련을 시키듯 고시생들을 머리를 빡빡 깎게 하고 깊은 산 속 암자에 가둔 채 공부를 시켰지. 시험에서 떨어지면 버리고 말이야. 그런데 거기 들어가서 일차시험에서 바로 떨어져 버린 거야. 단체로 공부하던 절에서 혼자 쫓겨났는데 아무데도 갈 데가 없더라구. 서울의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얼마간 여관을 전전했지. 낮에는 대중목욕탕에서 죽치면서 끼니 때가 되면 짜장면을 시켜 먹었어. 한번은 우울하기도 하고 잠이 오지 않아 약국에서 수면제를 사서 술과 함께 먹었지. 그런데 약을 조금 많이 먹었는지 발끝부터 문어같이 흐느적거리는 느낌이 차츰차츰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거야. 죽음의 공포가 순간적으로 오더라구. 여관의 천정을 바라보면서 이 젊은 나이에 이렇게 삼류여관방에서 더럽게 죽어서는 안되는데 하고 혼자 발버둥친 적이 있지. 순간 앞이 노란 게 아니라 캄캄했었지.”
  
  친구와 마음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젊은 날 겪었던 아픔들을 훌훌 털어놓았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아팠던 점들을 얘기하는 것은 흘러가는 맑은 강물에 상처를 씻으면서 치유하는 것 같았다. 아픈 기억들도 시간의 강물을 타고 하류에 이르면 모두 추억으로 변했다.
  
  “과거를 복기해 보면 또 어떤 생각이 나?”
  내가 물었다.
  
  “한 살 때 소아마비가 걸려 걷지 못했으니까 그건 일상이었지. 고통으로 느끼진 못했어. 내가 젊은 날 고통으로 느낀 건 처절하게 가난했다는 거였지. 대학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한 적이 있어. 그런데 인간이 마지막 절망의 바닥에 떨어질 때쯤이면 구원의 천사가 나타나긴 나타나더라구. 대학의 동아리에 눈에 띄지 않은 수더분한 여대생이 있었어. 그 여대생이 수학 과외 자리를 소개했지. 당시 광화문에 있던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었어. 그게 인연이 되어 대학도 졸업하고 나중에 변호사가 돼서도 그 집에서 사건을 맡겨 도움을 받기도 했지. 과외를 소개한 동아리의 여대생이 그 집 딸이었어.”
  
  우리들에게 그 시절은 바늘 같은 뜨거운 햇빛이 내려쬐던 청춘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인생의 가을을 지나 소리없이 눈이 내리는 노년의 겨울을 맞이했다. 인도에서는 노년이 되면 숲으로 들어가 조용히 혼자 사는 시기를 맞이한다고 한다. 창밖의 어둠 속 하늘에서 하늘하늘 흰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강가 퇴락한 친구의 집 앞으로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나무들이 눈을 맞고 싱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그대로 볼 수 있는 노년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21-01-08, 16: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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