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골목길과 인도인 부부의 신관(神觀)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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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써놓았던 일기는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다. 요즈음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그때의 나의 모습을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미래의 내가 과거로 돌아가 나를 보는 것이다. 나는 십이년 전인 이천팔년 사월 말경으로 돌아가 있었다.
  
  부산의 영도 항에서 팔만칠천 톤의 렙소디호를 타고 밤새 동지나해를 지났다. 검은 밤하늘에 파랗게 별들이 떠 있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에서 인도로 가는 배 타고르호 갑판에서 주인공은 바로 저 별을 보았겠지 하고 상상했다. 배는 다음날 새벽 바다에 붉은 먼동의 기운이 퍼질 무렵 상해에 도착했다. 선실 창문을 통해 파도 소리와 갯내음이 섞인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소설을 통해 알게 된 상해는 누런 강물 위에 정크선이 떠 있는 유럽풍의 중국 도시였다. 장개석의 군대와 모택동의 군대가 싸우고 항일운동이 전개되던 역사의 무대였다. 앙드레 말로의 작품 속에 등장한 중국인 테러리스트 ‘칭’이 긴장하며 숨었던 골목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배에서 내려 상해의 오래된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걸었다.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오래된 이층 벽돌집들이 마주보고 있었다. 이층의 창문에서 길게 내민 장대에는 온갖 빨래들이 영혼이 빠져나간 몸처럼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골목에는 국수집이 보이고 담배 가게가 보이고 재봉틀을 놓고 옷을 수선하는 가게가 보였다.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나는 골목 안의 한 허름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벽에 붙인 메뉴 종류에 술인 백주와 황주 그리고 흑주가 적혀 있다. 소설을 읽고 그 장면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나는 종종 그곳으로 여행을 한다. 중국소설 ‘허삼관 매혈기’속에서 주인공은 안주로 돼지껍데기를 시키고 반주로 황주 두 근을 마시곤 했었다. 뽀얀 국물 위에 파란 파가 썰려있는 완탕과 황주를 반근쯤 시켰다. 황주는 쌀로 만든 술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후 그 음식점을 나와 황포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옆으로 누런 강물이 흐르는 넓은 수로가 보였다. 강물은 유리조각 같이 정오의 강한 햇빛을 퉁겨내고 있었다. 수로 저쪽에 신시가지의 고층빌딩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후 내내 나는 오래된 골목길들을 돌아다녔다. 골목 골목이 역사의 페이지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둥그런 안경을 쓴 김구 선생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화약 냄새 피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오기도 했다. 시간 저편에 묻혀있는 신음 소리 울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노을이 질 무렵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로 돌아와 그 안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처음보는 인도인 부부와 식탁에서 마주 앉았다. 우연히 스치는 인간들을 만나는 것도 귀한 여행의 한 요소다.
  
  “어떻게 여행을 오시게 됐어요?”
  내가 그들 부부에게 물었다. 길다란 코에 깊은 눈을 가진 노인인 듯한 남편 옆에 있던 부인이 대답했다.
  
  “남편이 여든세 살인데 기계에 관련된 사업을 하다가 퇴직을 했죠. 저는 칠십대 중반인데 사십 년간 교사를 했어요.”
  
  외국인들은 대체로 담백하다. 자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 인도인 부인이 말을 계속했다.
  
  “우리 인도는 북쪽하고 남쪽이 너무나 많이 달라요. 외국인처럼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죠. 그래서 공용어로 영어가 쓰이고 있죠. 그리고 지역 지역간 협력이 안되서 발전이 늦어요. 여기 중국같이 중앙정부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죠.”
  그들 부부는 나라에 대해서도 솔직한 감정을 나타냈다.
  
  “제가 알기로는 인도는 철학의 나라 아닙니까?”
  내가 말했다. 나는 라즈니쉬가 쓴 책을 여러 권 읽었었다. 선량한 눈빛을 가진 남편이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걸 신(神)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행복도 불행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신 앞에 겸손하고 함부로 비판하거나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인도철학에서는 모든 게 제로로 수렴하게 되어 있어요. 그건 무(無)일 수도 있고 공(空)일 수도 있어요.”
  
  역시 인도 사람들의 영혼에는 또 다른 신의 축복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인도 노인의 아내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세상에 나아가 먹고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가르쳤어요. 노동이 기도이기도 하죠.”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 스치는 풍경은 내게 또 다른 인생의 책이라는 걸 깨달았었다.
  
  
[ 2020-11-11, 22: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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