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학봉의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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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이학봉의 반론>
  
  나는 12·12 군사 반란의 주역이었던 이학봉씨의 변호인이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정권의 이면에 있는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고 그가 살아 있을 때 마음을 열고 내게 많은 얘기들을 해 주었다. 이미 그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나이가 먹어가고 언제 존재가 물거품같이 없어져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조류가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들은 진실들은 글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후일의 작가들이나 역사를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증언자의 입장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광경으로 돌아간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이천팔년 사월 팔일 오후 여섯 시쯤이었다. 나는 서초동의 조용한 이면 도로에 있는 작은 한정식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전두환 대통령이 더러 찾는 음식점이라는 말도 들었다. 종업원이 이층의 난초실로 안내했다. 방 안에 이학봉씨가 앉아 있다가 “어이구 오래간만이요. 엄 변호사”라고 하면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눈썹에 긴 흰털이 수북하게 난 이미 칠십대의 노인이었다.
  
  “5공화국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항상 검은안경을 쓰고 권총을 찬 모습이던데요.”
  내가 드라마 속의 그의 모습과 현실의 그의 모습을 속으로 비교하면서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난 검은 선글래스를 쓴 적도 없고 그렇게 권총을 차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드라마 작가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들어 놓은 거지.”
  
  “요즈음은 어떻게 세월을 보내십니까?”
  내가 인사말을 했다.
  
  “아직도 주위에 친구나 후배들이 많아요. 수시로 만나서 술 마시고 그렇게 살죠.”
  종업원이 조용히 들어와 도기 주전자에 담은 술과 전채 음식을 탁자 위에 놓고 나갔다.
  
  “이 집은 전두환 대통령 단골집이기도 한데 이 술 한잔 들어보세요. 아주 귀한 술입니다. 명인이 찹쌀을 다려서 증류한 술이에요.”
  
  나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술이 몸에 받지 않는 나는 호기심에 잔에서 퍼지는 냄새를 맡으면서 혀끝을 대봤다. 바로 쿨럭하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독한 중국술 같은 느낌이었다.
  
  “엄 변호사는 술을 못하나 보네. 그러면 재미 없는데. 허허”
  그가 말하면서 이번에는 자기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이런저런 얘기 후 수지 킴 배상 재판에 관한 얘기를 했다. 그는 장세봉 안기부장과 함께 그 재판의 피고였었다. 분위기가 조금 편해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의 호기심이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그는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감옥을 갔었다. 판사에게 그가 가진 재산이 삼십만 원 가량이라고 해서 가십 기사가 나기도 했었다.
  
  “각하께서는 요즈음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죠.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초청들을 많이 해요. 한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수십 명은 넘어요. 지난 달에도 진해에서 예전에 내 선거운동을 하던 사무국장이 각하를 초청했어요. 각하를 보면 어떤 사람이 초청을 하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그 지위를 가리지 않고 두말하지 않고 움직여요. 나도 내려가서 합석을 했는데 과거 내 선거운동의 평범한 조직원 여덟 명 정도를 불렀죠. 각하와 함께 여덟 명이 꼭지가 돌도록 마셨어요. 그 한 달 후에 내 사무국장을 하던 그 사람이 병으로 부산의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알려왔어요. 그 소식을 듣더니 각하가 나보고 부산에 내려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고 난 화분이나 하나 보내시죠라고 했어요. 그만큼 소탈하고 사람을 잘 사귀는 분이에요.”
  
  전두환은 그런 사람이었다.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앞에 있는 여성 속기사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이학봉씨의 얘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자주 들른다는 그 한정식집 이층 조용한 방에서 나는 이학봉씨와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소리없이 들어와 정갈하게 담긴 음식 접시들을 놓고 나갔다. 이학봉씨가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군대 시절부터 사람 배 속을 꿰뚫어 보는데는 귀신이죠. 또 부하들한테 잘하기도 하고 말이에요. 거의 이십년 전쯤인가 정확하지는 않은데 장세동한테 이십억을 하사하셨다니까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나죠.”
  그의 얼굴에 순간 부러운 표정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런 거액들이 다 어디서 나옵니까?”
  내가 물었다.
  
  “다른 분야는 배제하고 정치자금에 대해서만 얘기합시다. 비례대표 한 명당 정확히 삼십억을 받았어요. 서른 명이면 당장 그것만 해도 구백억 아닙니까? 그걸 거의다 민정당 운영자금으로 내려보냈죠. 그때까지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돈을 다 그렇게 만들어 썼어요. 김대중이나 김영삼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지나고 보면 김영삼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런 행위들을 포괄적 뇌물범으로 만들어서 작살을 내버린 게 아닙니까? 전체 받은 돈에서 당에 쓴 돈을 빼고 나머지를 추징한다면 그래도 일리가 있지. 그런데 받은 총액 전체를 내놓으라니까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그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상 위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 속에 털어넣었다. 그는 젓가락을 들고 전을 한쪽 집어 먹었다. 정치 권력을 잡으면 검찰을 칼로 사용해서 상대방을 죽이곤 했다. 똑같은 행위를 했어도 권력을 가진 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도 그 입장에서 억울한 일들이 많았어요. 대통령을 그만두니까 백담사로 보낼까 스위스의 레만호쪽으로 보낼까 말이 많을 때였어요. 그때 예전에 데리고 있던 비서관이 와서 하는 말이 노태우의 일등공신인 박철언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권했어요. 거기서 전 대통령이 분노한 겁니다. 명색이 대통령을 했던 사람인데 자기가 데리고 있던 일개 비서에게 빌라고 했으니까요.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걸 권유한 비서관을 보지 않았죠. 원래는 그렇게 권유한 비서관을 전두환 대통령이 아주 총애했어요. 그 사람도 좋은 뜻에서 충고를 한 거구요. 하지만 자존심 강한 대통령에게 말하는 방법이 틀렸죠. 박철언이가 찾아올 테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라고 운을 떼면 눈치 빠른 전 대통령이 다 알아들었을 거란 말입니다.”
  
  이학봉씨가 다시 술잔을 비우고 안주로 나온 삶은 돼지고기 한 점을 먹고 말을 계속했다.
  
  “참 요즈음 박철언이가 여자 교수에게 맡겼다는 돈을 내놓으라고 소송을 제기했는데 엄 변호사는 그걸 어떻게 봐요? 이미 그 여교수가 돈을 다 빼돌려서 소송에 이기더라도 한푼도 받지 못하고 망신을 당할 게 뻔한데 말이요”
  
  그 얼마 전 주간지에서 그에 대한 선정적인 제목을 본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되면 왜 그렇게들 갑자기 부자가 되는지 의문이었다. 재벌들이 당선축하금이라는 명칭으로 거액을 바치고 수시로 돈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한번 대통령을 지내면 가족들이 자자손손 잘먹고 잘사는 왕족이 되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박철언이 소송을 건 배경은 노 대통령의 부인이 뒤에서 돈을 내놓으라고 다그쳤을 거요. 박철언이가 계속 몰리고 몰리다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을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실익이 없는 소송을 제기할 이유가 없는 거지. 노 대통령 부인은 국민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죠. 노무현 정권 때 김옥숙 여사가 권양숙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한 적이 있어요. 자기 시동생이 되는 노태우 대통령의 동생이 맡아 놓았던 돈을 떼먹었으니 받게 해 달라는 거였어요. 그 동생은 부모와 가족을 살피는 댓가로 받은 돈이라고 하면서 그걸 투자했다고 언론을 통해 항변하고 말이죠. 권양숙은 청와대 민정비서실에 청원서를 내보라고 의례적인 말을 하고 민정에서는 슬쩍 언론에 흘려버렸겠지. 뻔히 뒷통수를 맞을 짓을 한 김옥숙 여사가 지혜가 부족하셨던 거죠. 대통령이나 그 가족은 항상 조심해야 되는 건데 말이요.”
  
  나는 이학봉씨를 통해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가에 대한 상세한 얘기들을 들었다. 알고 보면 그들도 보통사람이었다. 보통사람들에게 몇 년 동안 왕의 의상을 입히고 청와대라는 무대 위에서 임금의 역할을 하게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무대를 내려와서도 그들의 정신세계는 그대로 왕이었다. 가족도 왕족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걸 유지하는데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것 같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가난한 가정에서 출발했다고 하고 노태우 대통령은 보통사람들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무대에 올라간 그들의 영혼은 왕이 되어 버렸던 것 같다.이학봉씨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학봉씨와 둘이서 앉아있는 한정식집의 통유리 창으로 어둠이 내리는 뜰이 내려다보였다. 수은등의 푸른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전두환 정권의 이면이 궁금해서 드문드문 여러 가지 사항들을 묻고 있었다.
  
  “당시 부정축재자라고 해서 많은 재산을 권력이 환수했는데 그 돈들은 어떻게 썼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방 금고에 있던 돈을 전두환 사령관이 임의로 썼다고 하면서 말들이 있기도 했다. 이후락이나 김종필 등 박정희 정권의 실력자들 재산이 환수되기도 했었다.
  
  “제 생각은 그때 환수절차도 그리고 사용결정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서 재산들을 압수할 때 철저하게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도록 했어요. 그리고 그런 재산을 처리하는 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거기서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하게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어요?”
  
  김종필의 제주도나 서산농장이 환수됐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이고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씨도 그때 혼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따금씩 태풍이 일어 바닷물의 위아래가 섞이듯 세상도 반란이나 혁명이라는 태풍이 일어 변하는 것 같았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였습니까?”
  이학봉이라는 신군부 실세의 생각이 신군부 자체의 의사일 것 같았다.
  
  “전에도 내가 엄 변호사한테 한번 말한 적이 있을 겁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광주에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기가 꺾이고 주춤한 적이 있어요. 겁이 난 거죠. 광주에서 같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 봐요. 끔찍하죠. 우리는 광주에서 붙은 불이 서울로 옮겨올까 봐 겁도 먹었고 말이에요. 나는 광주로 여러 번 내려갔었는데 솔직히 그 뒤에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 진짜 빨갱이들이 그 속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는지 제대로 몰랐어요. 현장에서 잡혀 온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잘못하면 나중에 상당히 문제가 될 건 직감적으로 느꼈죠. 그래서 가급적 많이 풀어주는 방향을 택했어요. 많이 잡아 온다고 전부 징역 몇 년씩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죽은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아 묘지를 만드는 것도 사실은 반대했어요. 나중에 그 한(恨)들이 모여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봤으니까요.”
  
  광주문제에 대해서 그는 의외로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신군부가 시위로 인해 겁을 먹고 위축되고 전전긍긍한 모습들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학봉 의원은 전두환 정권을 만드는데 일등공신 아닙니까? 국회의원을 하고 장관을 하고 대권에 대한 야심은 없었습니까?”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이 되시고 일등공신인 허화평씨나 허삼수씨를 외국으로 보냈는데 그 분 성격상 부하들중 나만 키운다는 건 형평상 맞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저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만 꼬박 오 년을 있었다니까요. 그리고 학원안정법을 만들 때 그걸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그 법은 사실상 엄청나게 무서운 법입니다. 대학가의 혁명세력을 뿌리뽑아 버리자는 거였으니까요. 일본도 대학가의 자생 공산당이 문제를 일으키니까 산속 아지트까지 급습해 적군파를 다 쏴 죽여 버렸잖아요? 그 법이 통과됐으면 운동권 출신들이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그 학원안정법을 반대하니까 잠시 안기부 해외차장으로 내려가 있으라는 명령이 내렸죠. 일종의 유배죠. 장세동씨가 부장을 하는데 제가 일에 관여할 위치도 아니었구요. 유유자적했죠. 그 덕분에 수지킴 사건에서도 책임을 면할 수 있었던 거죠.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5공 정권에서 삼성가도 건드리셨죠? 동양방송을 빼앗고 말이죠.”
  
  “당시 재벌가의 장남에 대한 소문이 많이 떠돌았죠. 골프장에 가서도 예쁘장한 캐디를 보면 바로 호텔에 데리고 가기도 하고 여자 문제가 복잡하다는 첩보가 많았어요. 정권의 입장에서는 사회정화를 하는 입장인데 재벌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죠. 동양방송도 그런 차원이었는데 나중에 정부에서 수천억을 그냥 지원해 준 걸 따지면 삼성가에는 손해가 전혀 없었을걸요?”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 밤이 깊었다.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그가 직접 보고 들은 짙은 농도를 가진 얘기들도 많았다. 그는 자신의 차로 나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2020-11-07, 08: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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