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하지 않는 마음>

재벌그룹의 회장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조상 때부터 백 년 이상 부(富)를 자랑하는 명문가였다. 내게 찾아온 회장은 명문고와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온 수재였다. 그의 아버지도 대학자였고 국무총리를 지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같아 보이는 집안이었다. 그가 집안 사건을 내게 의뢰하면서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엄 변호사, 사건 수임료는 알아서 줄 테니까 내게 맡겨줘.”

회장이 호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넉넉하게 많은 돈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순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치는 돈을 받으려는 기대가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 내 영혼은 노예가 될 수 있었다. 예전 선거 때 고무신 한 켤레만 받아도 사람들은 그 쪽으로 표를 찍었다. 남에게 조금만 거저 받아도 마음이 약해지는 게 인간이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보수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내가 땀을 흘린 만큼 그리고 일한 시간만큼만 주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 편하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다면 알았어. 그렇게 하지.”

회장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의 머리 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 재벌그룹에는 사내변호사도 있고 고위법관 출신의 쟁쟁한 법률고문들이 많았다. 왜 내게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자랑할 만한 전관경력도 해박한 법리적인 지식도 없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내게 왔습니까?”
내가 솔직하게 물었다.

“그동안 엄 변호사를 지켜봤는데 내 생각으로는 평생 같이 갈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는 그 한 마디가 거액의 수임료보다 더 귀한 보수 같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준 회장에게 감사했다.

내가 몇 년간 공직에 있을 때였다. 우연히 권력의 실세라고 불리는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가 어느 날 나보고 자신을 보좌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눈치나 행동이 모두 둔한 편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곰같다는 잔소리를 듣고 자랐다. 내가 사양을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직에 수천 명의 부하들이 있고 비서도 여러 명이 있어.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런 공식적인 일이 아니야. 겉으로는 입에 혀 같이 잘하는 놈들이 많아. 그렇지만 내가 힘이 없어지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거야. 그러니 자네는 뒤에서 조용히 나를 살펴주고 보호해 달라는 거야. 그리고 내가 특명을 주면 그걸 수행해 주면 좋겠어.”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권력가나 돈이 있는 사람과 인연을 맺고 가까이 하면 인간이 바라는 게 생긴다.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머리를 굽히는 것은 어떤 자리를 가지고 싶어서다. 재벌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돈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문제는 욕망은 채워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사이가 뒤틀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배신하고 원수가 되기도 했다. 내가 기도했다. “하나님, 권력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고 나는 그를 보좌했다. 그가 한번은 내게 기밀사항을 청와대에 가서 직접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조직에서 공식적으로 올리는 보고내용이 중간에서 샐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 다음이라는 사람을 만나 보고를 했다. 그가 차를 한잔 마시라고 주면서 넌지시 기대감을 주었다. “자네는 앞으로 괜찮을 거야.”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기도했다면 그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사표를 쓰고 뒷골목의 개인법률사무소로 돌아왔었다.

내가 모시던 그 분은 얼마 후 대학의 좋은 교수 자리를 만들어 놓고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사양하고 대신 부장판사를 하고 나온 친구를 교수 자리에 추천해 주었다. 몇 달 후 교수로 간 친구로부터 법대 학장을 맡았다고 고맙다고 연락이 왔었다. 나의 그릇은 뒷골목의 개인 변호사가 맞다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대의 선물은 요구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