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요즈음 박탈감이 느껴지지 않니?”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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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군인들이 득세하던 시절이다. 처가 쪽에 육군본부에서 중요 보직을 맡았던 장군이 있었다. 가족들의 공식적인 행사에 군복을 입고 나타난 그의 어깨에는 하얀 별이 두 개가 달린 계급장이 보였다. 그리고 장군이라는 명예는 그의 표정에도 활기를 불어넣어준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가 전역했다. 평범한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어느 날 그 집을 찾아간 내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집사람이 눈총을 주는 거야. 그러다가 나보고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떼어 오라고 하더라구. 가족들이 모두 바쁠 때는 그 정도는 도와줘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 말이지.”
  
  당시 군에서 장군이면 전속부관이나 당번병이 모든 일을 해주던 때였다. 전화조차 자신이 걸지 않고 비서 역할을 하는 장교들이 걸던 시절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내가 물었다.
  
  “동사무소에 갔더니 신청용지가 있더라구. 그래서 펜으로 신청서에 내용을 써서 9급 공무원인 동 서기에게 줬더니 이 친구가 나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아저씨 명필이네 글씨를 아주 잘 써’라고 반말 비슷하게 하면서 칭찬을 하더라구. 속에서 주먹 같은 게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더라구. 군대 같으면 그 놈 계급이 뭐쯤 될까? 하사관이나 육군 소위쯤 안될까?”
  
  그의 머리 속에는 계급의식이 바위같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평생 계급이 절대인 사회에서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후 그는 그림을 배우고 일요화가회에 가입해서 이십 년 이상 서양화에 전념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집념을 가진 사람이라 개인 전시회까지 여는 경지에 갔다고 했다.
  
  내가 공직에서 상관으로 모셨던 선배가 있다. 젊은 시절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고 권력의 핵심에서 국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최고 명문의 학벌에 우수한 성적으로 고시에 합격하고 그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로 대통령의 눈에 띄어 승승장구하던 분이었다. 선거가 있었고 그가 돕는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그는 대통령 다음의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을 예정이었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될 무렵 그는 내게 은밀히 지시했다.
  
  “내 물건을 모두 그 사무실로 옮기고 신문에 보도될 나에 대한 인물평의 초안을 써봐라. 그걸 언론사에 줄 거니까.”
  
  그러나 대통령이 된 사람은 그에게 약속했던 자리를 주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수많은 약속을 하고 쉽게 그걸 어기는 것 같았다. 상관으로 모시는 선배가 내게 이런 의논을 했다.
  “나한테 편한 다른 자리를 주겠다고 제의를 하는데 그걸 받아야 할까 사양해야 할까?”
  
  “달래려고 적당히 자리를 주어 입막음하려는 건데 거절하시죠. 백범일지를 보면 벼랑에서 나무를 잡고 매달려 있을 때 그걸 놔 버리는 게 용기라고 합니다. 능력과 경험이 출중하시니까 다음 번 대통령에게 발탁되실 겁니다. 미혹에 끌리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아직 삼십대의 젊었던 나는 그렇게 의견을 말했었다.
  
  “그렇지? 그게 맞겠지?”
  내가 모시던 선배인 상관은 그렇게 사직을 하고 나왔다. 그때 나도 사표를 내고 공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형님 동생같이 지내고 있다. 그가 공직에서 나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산을 같이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였다. 문득 그 선배가 내게 물었다.
  
  “넌 요즈음 박탈감이 느껴지지 않니?”
  “박탈감요? 그건 높은 사람이나 있지 저 같은 미관말직에게 무슨 그런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선배가 나를 총애한다는 이유로 조직의 간부들이 뒤에서 나를 모략하면서 힘들게 했다. 그런 시기와 경쟁을 벗어나니 마음이 후련한 게 사실이었다. 행복을 마음 밖에서 구하면 그건 꼭 괴로움으로 귀착하는 것 같다. 어떤 지위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보면 박탈감으로 어쩔 줄을 모르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래서 현인들은 명예, 정욕이 다 무상하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욕망은 충족되면 다음 욕망을 낳는다고도 했다. 이제 팔십대에 들어선 그 선배는 논어에 집중해서 현대판 현인이 된 것 같다.
  
  
  
  
[ 2020-08-21, 11: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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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8-21 오후 5:20
또 좋은 얘기 감사히 듣고 갑니다.
  정답과오답   2020-08-21 오후 4:29
한국의 특징인지 정치인들은 다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의원들 조금 상대해 본 결과 거짓말 잘 하는거 같습니다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 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으로 보일 지경이니..
허기사 일반인들도 약속의 무거움을 아는사람 흔치 않은거 같구요
반면에 일본인은 물론 미국인은 우리와는 많이 다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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