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만 먹으면 걷는다는 동네 친구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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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나보다 네 살이 많은 형뻘 되는 분을 사귀었다. 칠십대 초의 그분은 작달막한 덩치에 신선같이 대머리에 옆에 새하얗게 털이 나 있다. 그 분한테 나는 육십이 넘어 처음으로 바둑을 배웠다. 그는 은행원을 하다가 중간에 퇴직을 하고 사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삶은 소박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그와 만나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그에게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 밥만 먹으면 걷는다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서 걷고 점심을 먹고 나서 걷고 저녁을 먹고 나서 동네 고등학교 운동장을 걷는다. 하루에 이만 보 이상을 평생 끊임없이 걸어왔다고 했다. 어제는 저녁에 함께 밥을 먹고 초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강남의 거리를 걸었다. 걸으면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밤에 집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나가면 열심히 걷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나도 함께 걸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별로 즐거운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호숫가가 숲속 오솔길을 걷는 건 그래도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한밤중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 운동장을 도는 건 정말 아무 감흥도 재미도 없는데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걷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어요. 태어나면 늙어야 하고 병이 들면 죽게 되는 걸 우리는 모두 알죠. 그렇지만 죽을 때까지라도 걷지 않으면 근육이 말라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요. 그러면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되죠. 그걸 극복하려고 하는 거죠. 그냥 재미로 걷는 게 아니에요. 나만 해도 밥만 먹으면 걷는데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걷지 않으면 소화가 되지를 않았어요. 칠십을 넘은 지금은 근육이 다 빠져버리면 아들 고생시킬 거 아닙니까? 그래서 걷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제 주변의 친구들 모두가 늙고 병든 인생이 됐어요. 돈도 떨어지고 말이죠. 남은 날들을 걱정하면서 삽니다.”
  
  얼마 전 내게 전화를 걸었던 한 영감의 생활이 떠올랐다. 국가 보조금으로 혼자 쪽방을 얻어 사는 그는 허리가 아파 밥을 해 먹기가 힘들다고 호소했다. 내 말에 동네 친구가 된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젊은 시절 나하고 같이 은행원 생활을 하던 동기들을 보면 퇴직을 하고 시간이 흐르니까 남은 게 집 한 채인 경우가 많아요. 돈벌이가 하나도 없고 저축도 없어진 거죠. 그래서 늙어서 아파트 경비들로 많이 가는데 그렇게 직장을 잡으면 자유가 완전히 없어지는 거에요. 대부분이 그렇게들 살아요.”
  
  그래도 그건 괜찮게 사는 사람들의 노년일 수도 있었다. 내가 매일 오후에 산책하는 길에는 제법 큰 고물상이 하나 있다. 그 시간에는 상자나 파지를 수집해 리어카에 싣고 들어가는 노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인간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다 고통이라고 했다. 옛 선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기에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모든 걸 버리고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수명들이 길어져서인지 늙어가면서 가난의 고통도 공평하게 밀려오는 것 같다. 얼마 전 내가 전방에서 장교시절 사단장으로 모시던 분을 길거리에서 만나 식당으로 모신 적이 있었다. 나중에 육군 대장과 중국대사를 하던 그분은 이미 팔십대 중반을 넘어섰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장군 출신 백 명이 모여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돈이 있는 사람이 없었어. 군에서 근무하다가 퇴역을 하고 작은 연금으로 간신히 살아가니까 장군들 모임에서 밥값을 내고 싶어도 그걸 낼 사람이 없는 거지. 그래도 군대시절은 장군이 되어 호기를 부렸는데 각자 밥값을 내는 것도 우리들 정서에는 맞지 않고 말이야. 할 수 없이 그래도 육군 대장을 한 나와 국방장관이 반씩 나누어서 몇십만 원씩 냈어.”
  
  예외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늙음이 온다. 늙지 않으려고 성형수술로 얼굴을 펴고 주름살을 없애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해가 지듯 가난도 서서히 공평하게 다가온다. 부위가 달라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병과 친구로 지내야 하는 게 노년이다. 죽음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공정하다.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이 지혜가 아닐까.
  
[ 2020-06-18, 19: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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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27 오후 6:53
걷는다는것!!! 감사해야 하는것이다!!! 행복한것이다!!! 집근처의 호수공원을 걷는다!!! 일요일 교회가는 것 공원 걷는다는 것이 제일 축복받은것으로 부족함은 하나도 없다!!! 육유십이 엇 그제였는데 어느새 내일 모래면 구십이다!!! 아직도 하나님은 내가 필요하지않은지 불러주지 않는게 더 걷다가 오라고 하는것같아 오늘도 또 걸었다!!! 공부할때 공부했고 일할때 일했고 이제 걷는 축복까지 받아 걸을수 있는 날까지 걸을것이다!!! 감사! 감사!! 또 감사하며!!! 없는길에서 도 바르게 걷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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