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아끼던 그 낡은 책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한테서 ‘어린이 세계 명작 전집’을 선물 받았다. 그날부터 나는 그 책 속에 있는 황홀하고 넓은 세상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 책 속에서 암굴왕을 만났고 장발장을 만났다. 그리고 소설 속 식탁에 놓인 따뜻한 빵과 포도주도 나의 영혼을 덥혀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교과서에서 스쿠루지 영감을 만났다. 인색한 영감의 주변에서는 냉기가 흘렀다. 그 냉기는 주변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다. 그런 그의 영혼이 빠져 나와 자기의 장례식을 내려다보고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는 걸 들었다. 내가 만난 스쿠루지 영감은 정말 중요한 게 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는 세계 문학전집과 한국 문학 전집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외톨이 이고 돈이 없는 소년에게 그 책 속의 인물들은 다정한 친구들이었다. 톰소여를 만났고 허클베리핀을 만났다. 한국문학전집을 통해 6.25 전쟁 무렵의 피난지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책 안에서 바글거리는 이름 없는 피난민들과 함께 눈이 하얗게 덮인 산속의 동굴에서 찬바람이 몰아치는 골짜기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대학 시절은 특이한 인물을 만났다. 프레드릭 포 사이트라는 작가의 ‘쟈카르’라는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치밀하고 대담한 인물이었다. 그는 묵묵히 내게 집요한 인생을 말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벽에 문학, 역사, 철학책을 가득 쌓아두고 빈 시간이면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책을 볼 수 있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었다.
  
  작은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렸다. 나는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독서인이 되기로 했다. 도스토엡스키, 톨스토이, 아나톨 프랑스, 크로닌, 카챤차키스, 생케비치, 에밀졸라, 게오르그 등 수많은 작가들과 그들이 만든 작품 속의 인물들을 만났다. 도스토엡스키의 소설 속에서 죠시마 장로라는 성자를 만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책 속에는 나와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다. 존경하는 성자, 소설가, 철학자, 한 시대를 살다간 뛰어난 선인들이 있었다. 노력하지 않고 게을렀다면 자칫하면 그들을 못 만나고 끝날 수 있었다.
  
  내가 집념같이 그들을 만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다. 아버지는 박봉에도 월부로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들을 사 모았다. 그 책들로 책장을 가득 채우고 흐뭇해했다. 다른 것은 빌려주어도 그 책들은 절대 남들에게 빌려주지 않았다. 그만큼 애착을 가졌었다.
  
  그러나 말단 회사원에게 문학전집을 읽을 여유는 거의 없었다. 사장은 사원의 시간과 인생 전체를 담보 잡은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된 일을 하고 밤 늦게 회사를 나와 소주와 순대 몇 점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던 아버지에게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책을 언제 다 읽을 거냐고 물었었다.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면 여유있게 그 책들을 볼 거라고 했다. 퇴직을 한 아버지는 일 년도 안 되어 중풍으로 몸이 마비됐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저세상으로 갔다.
  
  아버지가 아끼던 그 낡은 책들을 그냥 없앨 수 없었다. 나는 묘한 의무감을 가지고 그 책들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다 읽었다. 예전의 선비들이 세상을 멀리 한 채 산 속에 초막을 지어놓고 평생 책을 읽었듯이 나도 뒷골목의 조용한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려 놓고 평생 독서를 하며 살아온 셈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세상 친구들과는 점점 사이가 멀어졌지만 책 속에 있는 수많은 인물들과 매일 만나고 사귀었다. 그들은 시간의 바다 위에 떠서 늙지 않고 내게 속삭이며 가르쳐주었다.
  
  나는 하나님도 만났다. 그분은 유리와 벽돌로 된 건물 속이나 금십자가 은십자가 속이 아니고 성경이라는 책 속에 계셨다. 인생이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느냐이다, 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은 초라하다. 그러나 나는 산 자뿐만 아니라 책 속에서 수많은 죽은 자와 만나 친구로 지냈다. 나는 외롭지 않고 초라하지 않다. 지금도 책상 위에는 내가 이십여 년 동안 읽고 또 읽고 있는 백 년 전 한 노인의 설교집이 있다. 그 노인은 죽었어도 죽지 않고 매일 내게 삶이 무엇인지 영혼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를 조용히 알려주고 있다.
  
[ 2020-06-10, 18: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이중건   2020-06-11 오전 12:04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이고 아들입니다. 일하느라 피곤해도 책을 향한 마음 비록 읽지는 못했지만 아들에게 계승시킨 것 만도 큰 업적이지요.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