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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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손녀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아파트 근처 마트 안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있었다. 우리 자리 바로 뒤쪽에 칠십대쯤의 노인 세 명이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낯이 익었다. 오랫동안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탤런트였다. 그가 불편해 할까봐 일부러 모른 체했다.
  
  “나 이제 조금 있으면 엄마 아빠한테 갈 거야”
  늙은 탤런트가 친구인 듯 앞의 노인에게 내뱉는 소리가 허공을 날아와 우리의 귀에 꽂혔다. 그 순간 아내가 ‘킥’하고 웃었다. 노인이 다시 아기가 되어 엄마 아빠한테 간다는 소리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나도 지난 한식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혀있는 공원묘지로 가서 그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곤히 주무시고 있는 듯한 봉분을 보면서 이제 나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기같이 잠이 들면 편하겠다는 느낌이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거기 나오는 인물들이 죽으면 조상 옆으로 돌아가서 잠이 든다는 표현들이 자주 나오곤 했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슬라이드 영상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했다가 췌장암으로 죽은 후배 변호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뭔가 되어 보려고 그는 끝없이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어느 날 딛고 올라가던 계단 한쪽이 없는 걸 모르고 무심히 밟았다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판사를 하다가 우울증으로 자살한 친구가 있었다. 깊은 산속 암자의 뒷방에서 둘이 공부할 때 그는 내게 이렇게 자신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형제가 많은 가난한 집에서 서울법대를 나온 장남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아나?”
  
  그의 영혼은 거대한 바위 같은 의무에 짓눌려 있었다. 그는 그 바위를 끌며 힘겹게 살다가 어느 날 스스로 다른 세상을 선택했다. 지난해 요양원에서 죽은 또다른 고교 동기의 우울한 얼굴이 허공에 나타난다. 명문고를 나온 그의 인생은 욕망만큼 풀리지 않았다. 그는 영업사원이 되어 동창들을 찾아다녔다. 정수기도 팔고 비데도 팔았다. 그러나 동창들을 만날 때마다 세상에서 자신의 실패를 절감한 것 같았다. 나를 찾아온 그는 자꾸만 존댓말을 쓰려고 했다. 이미 자존감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래야 하지’
  
  그는 자기분열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저녁에 자신의 반지하방으로 돌아가서는 소주를 마시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뇌출혈을 일으켜 요양원으로 갔었다.
  
  내가 변호사를 개업하고 몇 년 안 되어 의뢰인으로 왔던 동창의 허여멀건 얼굴이 허공에 떠오른다. 부유한 장관집 아들인 그는 외국의 명문대를 유학하고 와서 재벌가의 사위가 됐다. 장인은 그를 그룹의 후계자로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와 장인 사이에 마음의 벽이 생기고 심한 갈등이 벌어졌다. 그는 배우지 못하고 시골 장판의 가짜 약장수로 출발한 장인을 경멸했다. 장인은 나약한 장관집 도련님을 비웃는 것 같았다. 장인과 딸은 그에게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쫓겨난 셈이다. 어느날 사무실을 찾아온 그는 나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찾아갔어. 꼬마 아들이 나를 보자마자 막 도망을 가는 거야. 그래서 쫓아가 아들을 안고 물어봤더니 외할아버지와 엄마가 네 아빠는 미친놈이니까 보면 빨리 도망치라고 했다는 거야.”
  
  그는 슬퍼했다. 패배감을 이기지 못한 그는 사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다. 그가 죽기 몇 시간 전 중환자실에 있는 그를 보면서 물었었다.
  
  “이제는 살고 싶지? 그런 게 다 뭔데?”
  
  그는 내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 재수술을 위해 들어갔다가 죽었다. 그의 꼬마 아들이 지금은 그룹의 경영권을 이어받아 회장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회장이 된 그 꼬마는 지금 죽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들 모두는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이 세상에 왔다가 허락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간다. 온 것 같이 사라져 간다. 어떤 한탄이 있을까.
  
[ 2020-04-30, 20: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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