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없는 학원, '정철 카세트'의 탄생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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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한 고교 선배가 책을 보내주었다. 인생 칠십 고개를 넘은 기념으로 고교 동기들이 되돌아 본 인생을 글로 엮어 문집을 낸 것이다. 그 중 정철이라는 선배가 쓴 글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다. 여러 철학책을 읽었다. 특히 그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도(道) 닦는 얘기들이었다. 그는 참선 단전호흡 요가에 심취하며 단식도 하고 도통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입시에 떨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리산에 들어가 암자에서 가부좌를 틀고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식량을 조달하러 서울에 왔다가 운명이 바뀌었다. 도를 닦아도 현실에서는 입에 밥이 들어가야 했다. 그는 영어학원 강사가 됐다. 스물두 살이었다. 학원강사를 하면서도 그는 도를 닦는 일을 놓치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참선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언젠가는 산에 들어가 도사가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교실 없는 학원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녹음해서 팔았다. 그게 ‘정철 카세트’였다.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삼십칠 년 전 목표매출액이 백억이었다. 갑자기 돈이 소나기같이 쏟아지고 그는 부자가 됐다. 그가 공들여 모신 하늘과 땅, 일월성신, 미륵불의 효험이라고 여겼다. 그 해 갑자기 국세청 조사반에서 들이닥쳤다. 거액의 세금으로 그가 만든 회사는 부도가 났다.
  
  이번에는 아들의 권유로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이천년 말경 한밤중에 그는 성령을 받아들였다. 어떤 분이 모든 것을 직접 만지고 계시다는 걸 느꼈다. 새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밖의 나무가 살아 있었다. 그는 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어린이들이 영어로 복음을 낭송하면서 좋은 문장들이 머리 속에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고 자라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 영혼들이 스펀지처럼 생명의 물을 빨아들였다. 산중에서 도통하려던 그가 칠십의 할아버지로 어린이 영어 선생님이 되고 그의 프로그램을 전국 칠천여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이십대 젊은 시절 태백산이나 가야산 깊은 계곡에 있는 암자의 뒷방에서 겨울을 나며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지금도 머리에 생생한 한 장면이 있다. 바로 옆방에서 주지스님이 열댓 살 먹은 행자승을 가르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부처님이 가르치시길 예쁜 여인을 보면 징그러운 뱀이나 호랑이 같이 여기라고 했느니라.”
  노인 특유의 쇳소리가 나는 주지스님의 말이었다.
  
  “절에 오는 화장한 보살님들을 보면 꽃같이 예쁘기만 한데 그게 어디 뱀같이 보여요? 주지스님은 그렇게 보여요? 말도 안 돼.”
  어린 행자의 항변이었다.
  
  “이놈아,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런 걸로 알아라.”
  “아닌데 어떻게 그런 걸로 알아요? 나 원 참”
  
  도통한 걸로 알려진 주지스님과 행자의 싸움은 항상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따금씩 행자가 몰래 내 방으로 와서 말했다.
  
  “공부하는 학생요, 그 다락에 숨겨둔 장조림 한 개만 주이소.”
  
  절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었다. 어린 행자는 내 방에 있는 유리병에 든 장조림을 곁눈질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장조림 한 덩어리를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린 어린 행자에게 넣어주었었다.
  
  도를 닦는다는 게 무엇일까. 깨달음의 실체란 어떤 것일까. 어떤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설정하고 고행을 계속하는 것은 아닐까. 설령 진리를 보는 어떤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슬기로움을 감추며 세속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게 지혜를 얻은 사람들 아닐까. 그게 세속에 살면서 세속을 초월하는 것은 아닐까. 꼭 세상 인연을 끊고 심산유곡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다.
  
[ 2020-04-11, 20: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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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토   2020-04-11 오후 9:06
잘 읽었습니다..지난 글 댓글에서 신철식님 저서인 평전 신현확증언을 언급했었는데 엄변호사님 예전 글을 더듬어 기억해보니 두 분이 고교동기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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