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로마 교황청의 교황이었소…교황이지만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채 비참한 탐욕의 덩어리였소" 도서관에 가서 조병화 시인이 평생 쓴 시를 한데 모은 전집을 모두 읽은 적이 있었다. 꽤 많은 양이었다. 그의 전집 안에 한 시인의 일생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노년에 그는 어릴 적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혼자 살았다. 그의 아내가 병이 걸려 먼저 저세상으로 간 것 같았다.

그의 시는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동굴같이 텅 빈 아내의 방을 보면서 공허를 알리고 있었다. 그의 집은 현관에 달린 등불 하나가 깜깜한 어둠을 조금 밀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언제 데려가실 거냐고 따지기도 했다. 가지고 있는 돈도 바닥이 나고 있는데 데려가시기로 정한 날이 언제냐고 시를 써서 하늘로 보내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은 남보다 더 노년의 외로움과 아픔 이별을 힘들어하는 모습이 시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주변의 친구들이 늙어가고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지 오래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고 빈 가지만 남듯이 모임에서도 한 명 두 명 빠지기 시작한다. 나도 자주 나가지는 않는다. 늙은 친구들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는 퇴직금을 모아두었던 것을 사기당했다고 하면서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가 돈을 찾을 방법은 막연하다. 현실의 법은 늙고 무기력한 노인의 호소를 잘 들어주는 편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랜 시간 변호사를 한 체험으로 안다. 그런 친구들은 이제 가난으로 굴러떨어지는 급경사길에 선 것이다. 중풍이 들어 요양원에 간 친구들도 있고 이따금씩 동창들의 본인 상(喪)을 알리는 부고가 핸드폰의 메시지로 뜨기도 한다.

나는 요즈음 외로움에 강한 노인이 되려고 더욱 노력한다. 어제 해가 질 무렵도 지하철을 타고 내가 자주 찾는 호숫가를 산책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얘기를 하면서 저녁을 먹을 수도 있다. 아직 건강이 있는 한 모임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외로움에 강한 노인이 되기 위해 혼자 명상음악을 들으면서 호숫가를 돌았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떠한 인간도 피할 수 없는 것을 너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세상의 어떤 성인(聖人)이 십자가의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 않던가? 예수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단 한 시간이라도 괴로움이 없이 지낸 적이 있을까?’

그게 나의 어제의 화두였다. 외로움과 병 그리고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임이 깨달음의 강 저쪽에 도착하는 일이 아닐까. 오늘 아침 단테의 ‘신곡(神曲)’ 중 연옥(煉獄)편을 두 번째 읽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연옥편을 보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귀신들의 모습과 흡사한 것 같다. 아직 지옥에도 가지 않고 천국에도 못 간 귀신들이 세상 여기저기 모여 있기도 하고 혼자 외롭게 떠돌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의 모습이 그랬다. 단테가 길바닥에 엎드려 있는 수많은 귀신같은 혼들을 보면서 깜짝 놀란다. 먼지 속에 엎드린 수많은 혼들이 땅바닥에 붙어 기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인간 단테는 바닥에 엎드려 신음을 하고 있는 한 혼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며 왜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살아있는 몸으로 이곳에 온 것이니 현세에 전할 말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그 혼은 흐느낌을 멈추고 단테를 바라보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나는 로마 교황청의 교황이었소. 1276년 7월 교황이 되어 하드리아누스 5세라는 칭호를 받았다오. 그러나 재위 38일 만에 세상을 떠나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교황 직위는 현세에서는 더 이상 높은 자리가 없는 최고의 자리였소. 그런데도 마음속에는 끝없는 욕심이 치솟는 것이었소. 나는 교황이지만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채 비참한 탐욕의 덩어리였소. 그래서 천국으로 가기 전 이렇게 벌을 받는 것이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바닥에 엎드려 기어다니는 벌을 내리신 걸까요?”
단테가 물었다.

“눈이 현세의 것에만 쏠려 있어서 빛나는 하늘을 보지 않았다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눈을 땅바닥에 닿게 하는 벌을 내리신 거요. 나는 죄가 씻길 때까지 이렇게 엎드린 채 바닥을 기어다녀야 하오.”

“그래도 교황 성하께서 어떻게 이렇게 기어 다니실 수 있습니까?”
단테가 그 앞에서 무릎을 같이 꿇으며 물었다.

“영계(靈界)에서 현세의 신분은 무의미한 것. 여기서는 살아있을 때 교황이라도 존경받을 수 없다오.”

인간의 받아야 할 고통의 일정량이 있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다 받지 못하면 천국과 지옥 사이 귀신들이 방황하는 곳에서라도 그 고통의 양을 채우고 참회해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어부나 목수 세리같은 보통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책이라면 단테의 ‘신곡’같이 오랜 세월의 여과 과정을 통해 전해오는 책에도 우리에게 전하는 진리가 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게 할당된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