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前 분노의 기록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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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십오 년 전쯤이었다. 대여섯 명의 변호사들과 합쳐 법무법인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나는 인사동을 찾아가 한지로 된 공책을 한 권 사 왔다. 그리고 그 표지에 ‘수모 백번 감당’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매일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감정 상하는 일을 일단 백번까지는 무조건 참자는 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화가 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참고 돌아와서 대신 그 흰 공책에 기록하는 방법으로 인내하자는 결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존감이 약해 남보다 더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약한 내면은 남의 말 한 마디로도 피를 흘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수시로 성경 속에서 예수가 고난당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나의 내면의 상처를 마취시키려고 노력했다.
  
  예수는 가난한 목수집 맏아들이었다. 수시로 야유를 받고 욕을 먹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얻어맞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억울하게 사형대인 십자가에 올라가 죽었다. 예수의 상처와 고난의 흔적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에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멸시를 받아도 개의치 않고 비난도 쉽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벽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한지 공책을 이십오 년 만에 꺼내 들춰 보았다. 내가 어떤 일들로 그 당시 분노했을까. 첫 번째 쓴 건 법무법인 사무실의 일이었다. 내가 법인 대표로 추천했던 사람이 나를 내쫓으려고 한다는 생각에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여행을 간 사이에 나의 사무장을 해고하고 여직원도 내보냈다. 다른 변호사에게도 비슷한 행동을 했던 것 같다. 변호사들의 불평이 쏟아졌다. 패권주의라고 하기도 하고 야망을 가지고 남을 누르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대표의 개인사무실이지 무슨 법인이냐는 볼멘 소리고 나오고 있다고 썼다.
  
  당시는 펄펄 끓었던 분노의 기록을 지금 보면서 피식 웃는다. 나에게 수모를 주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과 미숙한 리더십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모르고 한 행동일 것이다. 내가 직접 모든 걸 다 해야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수모라고 여긴 것이 뭐가 있나 다음 장을 펼쳐본다. 내가 변호를 하던 아이를 판사가 질이 나쁘다고 하면서 법정구속을 했다. 나는 화가 나서 그날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세월이란 참 이상하다. 그 판사의 말이 맞았다. 부잣집 아들이 낸 뺑소니 사고였다. 질이 나쁜 사건이었다. 법정 구속을 하는 게 정의였다. 내가 그날 왜 화를 냈을까. 그 판사가 내 대학 후배였다. 그 학연으로 선처되기를 내가 기대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기대가 뒤틀어지니까 내가 분노한 것이다. 나의 잘못이었다.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부장판사라는 전직을 상품으로 노골적으로 경찰서에서 사건을 유치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글을 써서 변호사 협회에서 나오는 잡지에 기고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엉뚱한 결론이 나왔다. 원고게재가 금지되고 그동안 내가 써 왔던 고정칼럼도 폐쇄하겠다는 통보였다. 집단 이기주의 속에서 내부의 치부를 알리는 나의 글이 같은 업종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던 것 같다. 나는 그날 공책 옆에 이런 짧은 글을 써 놓았었다.
  ‘너희는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하고 모욕하느냐’(아모스 5장10절)
  
  지금 생각하면 분노할 일이 전혀 아니다. 묵묵히 받아들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 외에도 내가 욕을 먹은 내용들이 많이 적혀 있었다. 변협회장 선거에서 고교 선배가 회장 후보로 출마했다. 나는 선거에 관심이 없었다. 변협회장이 된 그가 우연히 나를 만난 자리에서 “너는 적군이야, 되게 미움을 받고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날 그게 불쾌했었던가 보다. 선거에서 그의 편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영논리로 적군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참 많은 욕을 먹은 게 적혀 있다. 내가 변호를 맡았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한 경우도 있다.
  
  “증인이 안 나왔으니까 변호사 잘못이죠. 무죄가 안 나왔으니까 판사가 나쁜 놈이죠. 나를 감옥에 집어넣었으니까 검사는 죽일 놈이고. 전부 나쁜 놈들이에요.”
  
  변호사를 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악랄한 사람도 있고 교활한 사람도 있었다. 얼음장같이 찬 사람도 있고 잔인한 짐승도 섞여 들어왔다. 모두들 천사의 가면을 쓰고 왔다가 나중에야 그걸 벗고 이빨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수의 상처와 고난의 흔적을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면 위로 받기 힘들었을 것 같다. 공책의 표지에 부제목으로 ‘모욕당하는 특권’이라고 볼펜글씨로 적혀 있는 게 보였다.
  
  
  
  
[ 2020-02-01, 21: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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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갑주   2020-02-01 오후 11:11
귀한 글이 주는 교훈을 저도 얻어갑니다.
선생님의 인생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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