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지 않을 테니 일 좀 주세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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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를 하던 친구들도 어느새 대부분 정년퇴직을 했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교수 시절에는 세상을 넘어다보고 강의도 빼먹던 불성실하던 교수들이 퇴직을 한 이후에 달라진다는 것이다. 근무하던 대학 근처로 이사를 와서 더욱 학교에 가까이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정을 산책하다가 총장을 만나면 무료로 할 테니 한 시간이라도 강의를 달라고 사정을 한다는 것이다. 일 자체가 소중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또다른 얘기를 들었다. 매년 아프리카로 의료봉사를 가는 의사들이 있다. 녹슨 양철지붕을 달구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끝도 없이 늘어선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밤 열두 시까지 일을 한다고 했다. 일 년 동안 목욕 한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진료실에 와서 풍기는 악취는 거의 폭력적이라고 했다. 늦은 밤까지 진료와 수술을 하면서 녹초가 되어도 의사들은 비로소 자신이 의사인 것을 실감하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기쁨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고 했다.
  
  서울의 병원에 근무할 때는 거의 모든 환자가 돈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사장이나 원장은 병원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의사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불필요한 검사를 권유하기도 하고 심지어 한번 하면 될 수술을 두 번에 걸쳐 나누어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떤 소아과 의사 친구는 자기를 고용한 원장이 중한 병명으로 보호자를 겁먹게 하라고 했다면서 분노하기도 했다. 돈에 묶여 있는 의사들에게 일 자체에 대한 기쁨이 없었던 것 같다.
  
  영국의 의사 출신으로 세계적 작가가 된 크로닌의 글이 떠오른다. 젊은 의사가 돈을 벌기 위해 주식에 손을 댔다. 어느 순간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특정주식을 샀다. 가격이 급상승하는 순간을 노려서 적시에 팔면 큰 수익을 얻을 게 틀림이 없었다. 그런 순간이 닥쳐오기 직전이었다. 마을에서 산모가 애가 나온다고 하면서 왕진의뢰가 왔다. 난산이었다. 머리부터 나와야 할 태아가 발을 내밀고 있었다. 산모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의사는 진땀이 흘렀다. 아이를 산모의 배 속에서 꺼내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증권을 매도해야 시간이 닥쳐오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가 나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미끈거리는 발목을 잡고 있다가 그만 마루바닥에 떨어뜨렸다. 아이를 들어올려 호흡을 살피고 피를 닦아주었다. 어느새 주식을 매도할 시간을 놓친 것 같았다. 새로운 생명의 보드라운 살결을 느끼면서 그는 자신이 의사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인간에게 직업이란 그게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주는 소명인 것 같다.
  
  삼십 년이 넘게 변호사를 해 왔다. 처음에는 돈을 벌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돈이 있어야 먹고 살고 아이들 공부도 시킬 수 있었다. 병든 아버지를 보면 돈이 절실했다. 돈에 갈급할 때 더러 큰 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많은 돈은 악마의 낚시 미끼였다. 그 속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들어있어 자칫하면 아가미가 꿰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양심의 소리가 경고음을 내면서 위험을 피하게 했다. 우연히 한 글귀에서 돈에 대한 철학을 배웠다. 카알라일이 ‘돈은 속인의 속박을 면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라고 했다.
  
  돈은 빼앗는 것과 얻는 것과 버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병이 걸리거나 감옥에 들어가 궁박한 처지에 있는 걸 이용해서 받는 돈은 빼앗는 거나 다름없었다. 땀을 흘리고 일한 품삯만 받아야 맞았다. 시간의 강물을 따라 어느새 노년의 언덕에 도착했다. 이제는 돈에 상관없이 일 자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좀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 2019-10-04, 06: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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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19-10-04 오전 10:51
또 성경같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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