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조용하고 단단히'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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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나를 의사로 만들려고 했다. 초등학교 무렵 편도선이 부어 입원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를 보게 하며 마치 천사를 대하는 것 같이 머리를 숙였다.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학교 폭력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얼굴에 칼을 맞았다. 상대방은 재벌집 아들이었다. 무기정학을 받았다. 징계처분이 공정하지 못했다. 피해를 입었는데도 싸움을 했다는 이유로 둘 다 처벌한 것이다. 알고 보니 가해자를 위한 방편이었다.
  
  나는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 어두운 청계천 거리를 돌아다니며 카바이트 램프를 밝히고 금서(禁書)를 팔고 있는 리어커 책 장사들을 순례했다. 사상서적을 사서 탐독했다. 그 책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한 계급이 존재한다고 알려주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링컨도 앞으로 노예제도보다 더한 혹독한 계급이 미국에서 생길 것이라고 했다. 돈 없는 사람은 흑인 노예보다 더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막연히 혁명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대학 시절이었다. 유신독재로 대학은 전쟁터였다. 신기했다. 힘 있는 집 자식들에게 데모는 한 때의 낭만적인 장난이었다. 경찰차를 향해 돌을 던져 잡혀가도 저녁이면 웃으면서 풀려 나왔다. 가난한 집 자식들은 멋모르고 서 있다가 사진 한 장만 찍혀도 사상범이 되어 이 사회의 골짜기 아래로 휩쓸려 추락했다. 김남주 시인의 말처럼 모래 한 알을 성벽에 던지는 행위는 하기 싫었다. 증오도 싫었다. 증오는 자기부터 병들게 하는 독이었다.
  
  계엄령이 내린 군사정권 시절 직업 장교가 됐다. 원했던 게 아니라 병역의무를 치러야 하는 이 땅에서 태어난 젊은이의 운명이 나를 그쪽으로 끌고갔다. 제복이라는 거푸집 속에서 영혼까지 정형화되는 게 군대 사회였다.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법시험을 치르고 다행히 합격했다.
  
  제대를 하고 몇 년간 권력기관에 들어가 보았다. 조직의 위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 안은 최고 권력자를 위해서 광신도 친위대가 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힘을 빌려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변호사가 되어 잠시 로펌에 있었다. 조직이란 어디나 개인의 영혼을 억압하게 되어 있었다. 돈 벌기 위해 부자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또다른 장사꾼의 세계였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뒷골목의 작은 개인 법률사무소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기로 했다.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를 넘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연대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가난하고 주눅 든 사람을 변호하면서 그가 아니라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성경은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해라”라고 했다. 천직은 지금 각자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을 통해서 제시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일에 종사할 때까지는 발견할 수 없었다. 법정이 나의 일터가 되고 제단이 되었다.
  
  변호사는 나에게 즐거운 천직이었다. 부업을 선물로 받았다. 아무리 작은 사건 하나라도 그건 살아있는 단편 소설감이다. 소설가들은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소재를 구하지만 변호사인 나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였다. 나는 문학에 영혼을 바치는 소설가처럼 변론서를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어 갔다. ‘가늘고 길게 조용하고 단단히’가 나의 방침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문지면을 채우는 세상적인 사다리 위로 간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과 비교하지도 않고 부럽지도 않았다. 그들이 병아리 시절 잠시 동행해 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를 일방적으로 어느 틀에 구겨 넣지는 않으셨다. 천직이 아닌 곳으로 가게 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느끼게 했다. 더러는 실패하게 했다. 실패는 하나님이 그 길로 가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인생의 성공이란 각자의 그릇과 몫을 알고 자기 그릇에 자기 몫을 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 2019-09-27, 02: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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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19-09-27 오후 3:07
고귀한 인생사 잘 배우고 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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