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과 박노해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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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배낭 속에 노트북을 넣고 여기저기 도서관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나는 강물에 낚시를 드리운 한적한 노인같이 되고 싶었다. 책의 강 속에서 아름다운 언어나 진리라는 물고기가 낚이면 뜰채로 떠서 어망 속에 넣는 낚시꾼처럼 노트북 폴더 속에 집어넣었다. 어떤 때는 내가 하는 행위가 시장에서 야채를 사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폴더 속에 담은 진리나 좋은 문장들을 휴대용 작은 독서 노트에 적는다. 그건 시장에서 사온 야채를 물에 씻어 다듬는 행위같다.
  
  일을 하기 위해 타고 다니는 지하철 안에서 명상음악을 들으면서 그 문장을 중얼거려 보면 잔잔한 기쁨이 마음 호수에서 새벽 물안개같이 피어오른다. 그런 걸 ‘퀘렌시아’라고 한다던가? 류시화 시인의 수필집에서 읽었던 대목을 실천해 보았다. 좋은 일들은 따라 해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가슴에 스며드는 선인들의 삶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시집을 읽다 보면 시 자체가 아니라 시인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품이기도 했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은 일생을 평민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어쩌다 쓴 시나 수필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내용이었다. 병약하고 가난했던 두보도 고난 자체였기 때문에 시인이었다. 며칠 전 뒤늦게 김시습을 조금 알았다. 육백년 전 인물인 그는 과거 준비를 하던 책을 다 불태워 버리고 길을 떠났다. 유랑하면서 순간순간 다가오는 느낌을 잡아 시로 만들었다. 오대산에 잠시 초막을 짓고 머물기도 하고 경주의 금오산 자락에서 ‘금오신화’를 썼다. 금오산에서 쓴 새로운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그는 양반집 자제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쳤다. 그는 매월당 문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도피한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나는 매일 쓴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그 시대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꿈을 꾸다가 죽은 늙은이’라고 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시 속에서 살아있었다.
  
  북악산 자락에 있는 정독도서관의 구석진 서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시인이 있었다. 박노해 씨였다.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그의 시집들을 만났다. 혁명가라는 편견이 시집을 읽고 바로 없어졌다. 처절했던 삶을 침묵의 체로 여과한 수정같이 맑은 시들이었다. 콘크리트 사이의 비좁은 틈 같은 감방 안에서 어떻게 그렇게 맑은 영혼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감탄했다. 그의 시들은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본 그는 구도자였다. 뼈까지 얼어붙는 듯 춥고 고독한 감방에서 쇠창살을 통해 그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들을 보았다. 그의 시에는 더이상 증오와 투쟁이 보이지 않았다. 회개와 사랑이 가득했다.
  
  석방된 그는 사진기 한 대를 목에 걸고 세계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시로 만들고 있었다. 과거의 투쟁경력을 간판으로 권력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자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시인인지도 모른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에서의 지위를 제사상 위패에 적고 싶어하는 인간도 많다. 정말 소중한 것은 소박하고 맑게 살았던 신성한 삶의 기억을 남겨주는 것이 아닐까.
  
[ 2019-09-24, 10:1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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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중   2019-09-24 오후 4:26
박노해씨가 혁명가입니까? 누가 그를 혁명가라고 부르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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