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계장(係長)'과 소시민의 삶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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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로 시작해서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벌의 영업과에 속칭 ‘만년 계장’이 있었다. 후배나 부하가 승진을 해도 그는 항상 작은 책상 앞을 지키는 그 자리였다.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입사해도 그는 신입사원 옆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작은 건설회사로 그룹이 시작될 때 창업 공신이었다. 다른 창업 공신들은 모두 임원을 거쳐 계열기업의 사장급이었다.
  
  직원들 사이에는 그가 만년 계장인 배경에 대해 여러 소문이 떠돌았다. 돈을 횡령했었다는 얘기도 있고 사장의 여자를 건드렸다는 말도 돌았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아주 간단한 동기였다. 작은 건설회사로 출발한 초기에 사장과 몇 명의 직원들은 밤낮이 없었다. 공사현장에서 먹고 자고 사고가 나면 그걸 수습하느라고 이리저리 뛰는 삶의 전쟁터였다. 휴일도 없고 휴가도 없었다. 그 시절 직원 한 명이 몇 달 만에 겨우 하루 휴가를 얻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그는 모처럼 강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 순간 사장의 호출전화가 왔다. 새로 건축을 수주받을 일이 생겼으니 회사로 급히 들어오라는 명령이었다. 그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몇 시간 후 그가 낚시를 하는 장소 근처로 사장이 왔다가 우연히 그를 목격했다. 수주받는 빌라 단지의 터가 바로 그 강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의 배신감과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사장은 그를 해고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를 승진시키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 만나도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만년 계장’이 됐다.
  
  머리가 백발이 되고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힌 그가 정년퇴직을 하는 날이었다. 회장실로 인사하러 가는 그를 보면서 사원들은 그가 회장의 목이라도 조르지 않을까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노인이 된 같은 또래의 회장이 책상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인사온 그의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만년 계장으로 있었던 덕분에 그래도 가족과 함께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강물에 낚시를 드리울 시간도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그런 행복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뒤틀림이나 원망기가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런 감정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삭아버리고 어느 경지에 오른 깨달음이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퇴직 후 계획이 어떠신가요?”
  회장이 물었다.
  
  “내가 평생 좋아하던 낚시를 계속 하면서 여생을 마치겠습니다.”
  “떠나시는 마당에 회장인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될까요?”
  회장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뭡니까?”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회장을 보았다.
  
  “계열회사의 사장으로 임명을 하려고 하는데 승낙해 주시겠습니까?”
  창업 공신인 동료들의 반열에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회장의 섭섭함도 사라진 것이다. 만년계장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양하겠습니다. 제겐 낚시가 더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모습이었다. 내가 본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기억의 서랍 밑바닥에 있던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 역시 30년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했었다. 내가 야심을 가지고 법대를 지원할 때 아버지는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소시민으로 회사에 다니면서 평화롭게 살아. 말단인 나는 주말이면 낚시도 가고 산에도 갈 수 있어. 또 작은 마당이지만 거기에 나팔꽃도 심고 말이야. 그런데 사장은 그렇게 못해. 일에 돈에 사업에 묶여서 불행해.”
  
  나는 아버지의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인생 광야를 돌다가 어느 날에야 갑자기 그 의미를 깨달았다. 법원 뒷골목에 작은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렸다. 일거리가 없는 시간도 행복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사는 ‘만년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 욕심그릇을 줄일 때 비로소 행복이 꽉 차는 것 같았다.
  
  
[ 2019-09-03, 10: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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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03 오후 6:22
큰 마음을 조용하게 넉넉하게 전하시는 만년 변호사님의 글에 언제나 큰 위로와 평안을 받습니다!!! 감사!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정답과오답   2019-09-03 오후 4:23
감동을 주는 잔잔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욕심을 버리면 행복이 온다는 말씀에 갚은 감동이 생기는듯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하는대 저는 아직도 그게 어렵습니다
  초피리1   2019-09-03 오후 12:34
만년 변호사님, 매번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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