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항소심의 다른 판사님들이 사건에 포함된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보고 판결을 하고 싶습니다＂ 2019년 3월 14일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봄이다. 도심을 뒤덮고 있던 미세먼지와 황사도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나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려 안산법원의 한 법정으로 들어갔다. 세 명의 판사가 법대(法臺)에 앉아 재판을 하고 있었다. 배석인 여성판사는 아직 대학생 같은 어린 티가 났다. 부장판사인 재판장도 어려 보였다. 그들이 어린 게 아니라 내가 늙은 것이다. 세상 모든 게 자기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앞의 원·피고석에 앉아 있는 변호사들도 막내아들보다도 젊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재판장이 앞의 원고석에 있는 한 남자를 보고 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사비용을 청구하셨는데 말이죠. 법원으로서는 건축 감정을 해야 증거로서 인정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네요.”

모범생으로 살아왔을 재판장은 전문가의 객관적인 자료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재판에는 매뉴얼들이 있다. 교통사고가 나도 신체감정서가 있어야 상해를 입은 것과 일하지 못하게 된 손해를 인정한다.

“감정비를 낼 사정이 안돼서 감정을 신청하지 못하겠습니다.”
원고석에 앉은 남자가 뒷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재판을 하다보면 각종의 감정료가 변호사비만큼이나 비싼 경우가 흔했다. 예전에는 더러 보이지 않는 부정도 개입했었다. 감정인한테서 법원 서기가 리베이트를 받는 일도 있었다.

“저희 재판부는 감정서 없이는 청구하시는 비용을 인정하기 힘든데요.”
재판장이 말했다. 법원이 요구하는 사항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소송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 같았다.

공사를 맡아서 일해주고 돈을 받지 못해 법원에 청구했는데 감정서가 없으면 지는 것이다. 증거서류를 만들 돈이 없어서 진 걸 가지고 세상은 그가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까 이윽고 나의 차례가 왔다.

“법인의 이사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시려고 소송을 제기하셨네요. 왜 그것만 확인을 구하시는 거죠?”

“다른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판사가 적당히 위조된 회의록만 보고 열리지도 않은 이사회를 열렸다고 판결한 겁니다. 없는 사실도 판사가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창조를 하듯이 있는 겁니까? 판결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만 정확히 하려고 재판을 청구한 거죠.”

오랜 세월 변호사로서 재판을 받아오면서 이상한 일이 많았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도 판사가 너는 논리적으로 살인범이어야 해 하는 식으로 살인죄를 인정하는 경우를 봤다. 당사자로서는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채꾼이 제출한 가짜 차용증을 믿고 돈을 주라고 하는 판결도 보았다. 판사가 잘못하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 생사람 잡는 경우가 많았다. 판사들이 논리에만 치우치다 보면 그 그물에서 핵심이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법대 위에 있는 재판장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항소심의 다른 판사님들이 사건에 포함된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보고 판결을 하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재판을 연기하겠습니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 보면 간단한 건데요, 그리고 이사회에 참석한 적이 없는 이사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고 증명도 분명한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내가 되물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주장도 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 나오는데 방청석 끝에 앉은 아내의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법정 문을 나서는데 이제는 나이 먹은 아내가 한 마디 했다.

“판사님들이 사건자체나 진실을 보는 것보다 매뉴얼을 따르느라고 바쁜 것 같아. 형식 외에 다른 건 안보여.”

봄날 법정 풍경이었다. 예전에는 반발했는데 이제는 그냥 현실로 받아들인다. 저 판사들도 언젠가 마음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