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시력이 없어지니까 다른 한쪽이 더 잘 보여요.” ​사흘 전부터 왼쪽 눈으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가 눈앞을 가렸다. 식탁 앞에 앉은 아내의 존재가 형체마저 없어졌다. 또 병이 손님같이 찾아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십오 년 전이다.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나는 한 눈으로만 글을 읽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백내장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

의사는 부작용이 천분의 일이라고 했는데 내가 거기에 해당됐다. 큰 병원에 가서 눈알에 주사침을 박고 약물을 투여했다. 몇 년 후 길거리 건물의 모퉁이가 증발하는 것 같았다. 사물이 흑백영화 속의 장면같이 보였다. 다시 수술을 했다. 새로운 수정체를 끼우고 바느질하듯 여러 바늘 단단히 꿰맸다. 눈은 계속 말썽을 피웠다.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이따금씩 하얀 안개가 끼어 시야를 가렸다.

눈이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같이 고생하던 눈이었다. 치열하던 입시(入試)와 고시(考試)를 같이 겪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던 마음의 창이었다. 시야검사 후 의사는 사무적인 어조로 녹내장 말기라고 간단히 진단을 내렸다. 모든 것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고통은 겪는 것이지 사람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남은 나의 고통을 알기 힘들다. 고통을 얘기해서 남을 지루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한밤중 나의 골방에 들어가 그 분과 맞짱을 뜨기 시작했다.

‘자 이제 끝냅시다. 어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세요.’
그분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내면의 깊은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나의 마음의 귀에 들려왔다.

‘나는 내가 만든 인간들을 시간이 가면 눈도 보이지 않게 하고 귀도 들리지 않게 만든다. 근육을 말려서 걸어가지 못하게도 한다. 고통을 받아야 이 세상이 싫어지지 않겠느냐.’

‘그냥 어느 날 휴거가 되듯이 그렇게 사라지게 하시면 안됩니까?’
‘지상에서 그대의 영(靈)이 성숙하는 데에도 고통이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통해서 그대가 더 많은 것을 내려놓고 더 많은 것을 자각하니까 말이다. 고통은 내게 가까이 오게 하는 나의 채찍이니라. 네가 고통으로 우는 마음 열린 마음이 되어야 내가 너에게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쪽 눈은 남겨두지 않았느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걸 원한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 대신 영안(靈眼)을 열어주시면 안될까요? 전능하시니까 못할 게 없으시잖아요? 염치 없지만.’

그분이 미소지으며 침묵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분은 다른 방법으로 위로를 슬쩍 던졌다. 지하철에서 몇 년 전 한쪽 눈을 잃은 선배 변호사를 만났다. 서울대병원에서 일곱 번 수술 끝에 실명했다고 했다. 한쪽 눈으로 대법관까지 올라가 그 수많은 기록들을 보는 법조인 얘기도 귀에 들어왔다. 어느 날 법정을 나서다가 한쪽 눈으로만 사는 사십대 여성변호사를 만났다.

그녀는 장애인 고아들을 위한 공익변호로 다른 변호사들 몇 배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한 눈으로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물었다.

“어려서 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어요. 시간이 가니까 안 보인다는 사실 자체도 망각하게 됐어요. 익숙해지니까 아무 불편도 없어요. 한쪽 시력이 없어지니까 다른 한쪽이 더 잘 보여요.”

나는 두려움을 벗어나고 있었다. 육십오 년이 넘게 타고 온 육체라는 자동차는 부품이 고장나고 뻘건 녹물이 흘러 나오기 마련이다. 마지막까지 몰고 가다가 정지되는 곳이 목적지 아닐까. 그때 나의 영혼이 그 속에서 나와 새로운 차를 그분께 얻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