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상큼한 기운이 담긴 바람이 보길도 작은 어촌의 바닷가로 불고 있었다. 잔물결 치는 바닷가에 고만고만한 작은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빈 집들도 눈에 띄었다. 그런 집 하나를 얻어 ‘섬마을 변호사’라는 작은 간판을 달고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삶의 나머지 시간을 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윤선도는 그 섬으로 귀양을 와서 많은 시(詩)를 남겼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에게 건네는 말 한 마디에 사랑이 담기고 그게 시가 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요즈음 나는 제대로 인생의 항해를 해 온 것인지, 도달해야 할 항구까지 얼마나 남은 것인지 남은 금 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 보곤 한다.

돌이켜 보면 내 배의 돛을 펴게 하고 바람을 보낸 존재가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잡아 키를 꺾은 게 내가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1986년경이다. 정동에 있는 작은 빌딩 5층 구석에서 처음으로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내 사무실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쓰는 공간 일부를 그가 없을 때 잠시 빌려 신세를 진 것이다.

삼십대 초반의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두렵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중풍 든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처와 어린 아들딸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먼저였다. 돈만 준다면 어떤 일도 할 것 같았다. 철저히 세상 사람이 되려고 마음먹었다. 철면피한 사기꾼 변호사가 되면 어때 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매일같이 내면에서 들려왔다. 넓은 바다 같은 세상을 향해 인생의 배를 띄운 나는 어떤 방향으로 키를 꺾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법률사무소를 돌아다니면서 공짜 지식을 얻으려는 얌체가 많았다. 사건 하나 선임해 볼까 하는 욕심으로 하루종일 입품만 판 경우도 많았다. 밤새 법률검토 보고서를 만들어 가지고 가 브리핑을 해도 그걸로 끝인 경우도 있었다. 품삯을 줄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사건 하나를 물면 국회의원 출신이나 전관들이 날아와 매같이 먹이를 낚아채 가기도 했다. 돈은 흐리고 더러운 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교통사고를 낸 사장이 기사를 범인으로 조작해 감옥으로 보내게 해달라고 했다. 변호사는 담당 검사의 눈꺼풀을 덮는 브로커 역할이었다. 밀수를 하고 그 죄를 직원에게 뒤집어씌운 사장도 있었다. 돈은 법을 마비시키는 독약이었다. 살인을 하고도 대신 징역을 살 사람을 고용하는 부자나 조폭 두목도 있었다. 변호사는 불법이나 탈법의 상품을 팔아야 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남들이 다 하는데 뭐 어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세상이 다 그런데 하는 속삭임이 내면에서 들려왔다.

그런 때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채찍으로 나의 양심을 후려 갈겼다. 미련한 탓에 많이 얻어맞았다. 나는 그 존재가 채찍을 내려놓고 지팡이를 쥐고 휘두르는 바람에 유혹의 연못에 있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허겁지겁 달아나야 했다. 그 존재는 이 세상에서 나의 희망을 모두 꺾어 버리고 나를 그의 나라로 강제로 끌어가고 있었다. 그 존재는 내게 재물을 주지 않고 굶어죽어도 좋다는 마음을 주었다.

남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맞아죽을 각오를 하게 했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새 나는 인생의 황혼을 맞아 어둑어둑해지는 밤을 앞에 두고 있다. 나의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채찍과 지팡이로 나를 몰아 그의 푸른 초장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