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長燁의 망명과 左派정권의 탄압, 그리고 고독한 최후-26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26/황장엽은 민족분단의 고통 속에서 비참하거나 비겁하게 떠나지 않고 고독하게 떠났다.

李明山(마이클 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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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2월12일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한 사건은 1986년 신상옥·최은희의 북한탈출, 1987년 KAL-858기 폭파사건, 1994년 김일성 사망에 버금가는 대형뉴스였다. 황장엽과 같은 거물급 인사의 망명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하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치르면서 국내 사정이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의 일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체제유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나는 지금부터 황장엽이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무슨 이유로 망명을 단행했는지, 서울에 와서 무슨 일을 했으며, 그가 어떻게 생애를 마감했는지 정리하여 보겠다. 지금까지 많은 추측기사와 과장되었거나 비약적인 평가들이 있었으나, 나의 보고는 철저하게 공개된 자료의 객관적 분석에 의존한다.
  
  가. 망명 동기
  
  황장엽은 1923년 2월17일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본의 중앙대학교 법과에서 수학했으며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유학했다. 그는 또 평양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84년 4월부터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역임했고, 1993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말년에는 그가 창시한 主體思想(주체사상)의 창달과 국제보급에 전념을 다했다. 그는 흠 잡을 데 없는 깔끔한 학자였고 김일성은 그를 최대한으로 떠받든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으며 학자로서 그의 위상과 정치적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다.
  
  1990년 5월에 김용순이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고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되었다. 1990년 9월에는 日北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에서 조선 노동당,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의 3당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북한 측 주역을 했다. 1992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해 아놀드 캔터 국무부 차관과 美北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1992년 4월 김용순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면서, 1991년 5월에 허담이 사망해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되었다. 1993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4년 6월에는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으로 남한의 통일부 총리 이홍구와 만났다.
  
  황장엽과 김용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탈북자들의 진술(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용순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술 잘 마시는 사교적 인물이었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친절해 대인관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생활에서는 김정일과 손발이 척척 맞는 패거리였고, 기쁨조 파티에는 거의 빠지는 일이 없는 단골손님이었다. 김정일과 술자리를 같이하는 사람들 중 음주의 최강자를 뽑으라면 장성택, 김용순, 계응태, 김기남 등이 있었으나 춤과 노래에는 아무도 김용순을 따를 자가 없었다.
  
  公務(공무)에서도 김정일의 비위를 아주 잘 맞추는 김용순을 간부들 사이에서는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그를 ‘아첨꾼’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황장엽도 그중의 하나였다. 특히 황장엽과 김용순은 열한 살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두 인물 모두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었고, 당의 국제담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직을 역임한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학자풍의 황장엽은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김용순은 체질적으로 바람기가 있었으며 숱한 염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의 경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김용순은 김경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장엽은 김일성에게 고하여 김용순을 질책하고 근신하게 했다.
  
  이 사건은 황장엽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됐다. 앙심을 품은 김용순과 김경희는 황장엽에게 애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워낙 깔끔하고 빈틈없는 황장엽에게는 걸고넘어질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황장엽은 자기를 신임하던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공허했고 김정일의 통치스타일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외감을 느낀 황장엽은 主體思想(주체사상) 창달과 전파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던 중, 모스크바 主體思想 강연회에 가서 심혈을 기울인 강연과 토론에서 많은 교수와 학자와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主體思想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사실을 파악한 김용순은 김경희와 합세해 김정일에게 황장엽을 거세할 것을 건의했다. 그들은 아래와 같이 황장엽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주체사상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제창한 철학이며 통치이론이다. 어째서 황장엽의 학설이 될 수 있는가. 황장엽은 일개 학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위대한 수령을 모독했으며 그분의 명예를 가로챈 반역자이다.”
  
  이 말을 들은 김정일이 그를 숙청하기 위해 더 결정적 약점을 노리고 있을 때, 황장엽은 위기감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97년 2월12일 그 결심을 결행했다.
  
  나. 서울에 와보니
  
  황장엽은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껴 목숨을 걸고 남으로 망명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는 놀라운 경제적 풍요와 자유분방한 세상에 살면서 어째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편들고 從北세력들이 공개적으로 설치고 있는데 정부가 방심하고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망명 초기에는 안기부가 그를 보호했으나 김대중·노무현 집권기간 동안에는 국가정보원(국정원) 安家(안가)에 연금되어 있었으며 모든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강연과 논문과 출판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는 데 노력했다.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북한의 反인륜적 인권말살과 체제모순을 종식시키기 위해 국제사회가 협력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민감한 사항에 대해서는 그가 소신대로 말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는 10년간 親北정권의 對北정책과 황장엽의 북한 비판이 불협화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햇볕정책과 대립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황장엽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망명 동반자인 김덕홍은 황장엽이 그 재갈을 뱉어버리고 목숨을 걸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좌우지간 황장엽은 정부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임수경이 탈북자들을 '배신자'라고 말한 것처럼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황장엽을 김정일에 대한 '배신자'라고 은근히 미워했을 것이다. 황장엽은 미국 방문을 희망하였고 미국 정부도 그의 訪美(방미)를 요청했으나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신변안전을 구실로 김대중이 그의 방미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미국에 가서 서울에서 말하지 못한 것을 미국 정부에 폭로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는지 모르나, 정확하게 그가 무엇을 염려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시절에 원로정치인 이철승과 미국의 북한 인권운동가 ‘디펜스포럼’ 회장 수잔 숄티의 막후교섭으로 2003년 10월27일~11월4일 기간 동안 그는 워싱턴에 다녀왔다. 그러나 4명의 경호감시원이 밀착 동행했고, 그곳에 가서도 황장엽은 소신껏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다만 노동당 군수공업담당 비서 전병호의 말을 근거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수준과 비참한 인권탄압 실태와 체제모순에 대해 증언했으며, 김정일의 제거를 국제사회에 강력히 호소했다.
  
  국내에서는 황장엽이 재독학자 송두율은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사실을 폭로했는데, 노무현 정권과 親北단체들이 이를 사실무근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노무현 정권은 송두율을 서울에 불러들여 親北세력의 이론적 정신적 지도자로 심어두려고 의도했으나 법원의 조사에서 황장엽의 진술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자 노무현은 송두율을 관대히 처분해달라고 호소했고, 당시 법원은 그가 독일시민이기 때문에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외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면서 북한을 드나들며 利敵(이적) 행위를 하였다 할지라도 국보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며 2004년 8월 그를 서둘러 독일로 돌려보냈다.
  
  다. 지성인의 고독한 최후
  
  황장엽은 고독한 지성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북한에서 존경받는 최고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는데 북한 사회의 체제모순에 불만을 품고 남한으로 온 것에 대해 환영했다. 그가 김정일을 비판하고 북한의 참상을 폭로한 것은 어느 누구의 말보다도 설득력이 있었다. 특별히 많은 남한 정치인들과 학자들에게 북한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반면에 언론 일각에서는 황장엽이 40여 년간 북한의 최고 권력자 주변에서 영화를 누렸고, 主體思想 이론으로 일당독재와 일인독재의 기틀, 그리고 수령절대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봉사했다고 여겼다. 또 자유민주주의 민족통일이나 평화통일을 위해 특별히 노력한 일이 없으면서 김정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 남한으로 도망쳐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그가 2010년 10월10일 강남구 논현1동 자택에서 87세로 숨을 거두었을 때 이명박 정부는 그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이에 대해 부당성을 지적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김정일을 비판한 것이 공로라고 인정을 한다면 남한에는 그보다 더 강도 높게 김정일을 비판한 인사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들도 죽으면 현충원에 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그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황장엽에게 1등급 훈장인 무궁화 훈장을 추서했다.
  
  결국 2010년 10월14일에 그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필자는 그 일을 아주 잘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가슴이 넓은 나라이며, 황장엽이 과거에는 김일성을 위해 평생 충성을 다하였다 할지라도 그 일을 뉘우치면서 일단은 대한민국의 품에 들어왔고 마지막 인생을 대한민국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다 갔기 때문에 그의 최후를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과거 北에서 아무리 충성을 다한 고위급 간부라 할지라도 일단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면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 죽어서 국립묘지에도 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北으로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北에 남겨두고 남으로 왔다. 가족의 안전보다 북한의 참상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그가 탈출하지 못하면 어차피 숙청당할 것을 예감하고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후일 그가 출판한 회고록에서 황장엽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애절한 사연과 자신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소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피를 토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황장엽의 가족은 부인 박승옥과 아들 황경모와, 장성택의 조카딸인 며느리와, 두 딸과 두 손자가 있었다. 그가 南으로 망명한 후 당은 아들과 며느리를 강제 이혼시켰고, 남은 가족은 1998년 중반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같은 해 여름 부인과 아들이 미화 9만8000달러를 소지하고 평양을 이탈해 중국으로 도피하려다 평북 용천 부근에서 체포됐다. 이후 이들은 1999년에 처형되었으며, 딸과 손자들은 제14호 수용소에 보내졌다.
  
  서울에서 황장엽 사망 당시 그의 주변에는 호적에 입적된 수양딸 김숙향과 동거녀 엄00씨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열한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황장엽은 비참하거나 비겁하게 떠나지 않고 고독하게 떠났다. 민족분단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반신욕을 하다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떠났다.
  
   <계속>
[ 2014-10-22, 16: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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