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바다 이야기(6/6)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 큰 잘못을 저질러 나라가 망할 직전까지 간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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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즈믄해라 불린 거북의 한(6)
  
   우리 군사들은 울돌목 양쪽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하얀 사람들이 노인과 여자, 아이들이 손에 손을 흔들며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신바람 난 응원전이 펼쳐진 것입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우리 민초들이 마침내 통제사가 하늘에 닿는 지략과 땅을 덮는 용기로 반 시진(한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여, 마침내 쨍하는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하자, 자기도 모르게 조총보다 아니 대포보다 더 큰 소리로 응원을 하게 되었나 봅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그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우리 수군은 공포심은 싹 가시고 일제히 신바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에 관중이 하나도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관중은 선수가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잠재 능력까지 끌어올리게 하는 마력이 있지요. 그런데 조선의 명운을 걸고 플라이급 선수 한 명이 슈퍼헤비급 선수 열 명을 상대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아 상대방 선수를 육중한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장면을 눈이 뚫어져라, 숨이 끊어져라 지켜보던 우리 민초들이 고래도 놀랄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응원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즈믄해는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350년 평생 이보다 더 감격적인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겨라! 이겨라! 통제사, 이겨라! 이순신! 이순신! 조선 만세!'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여차하면 도망가려는 우리 전선들도 해류를 타고 용기가 용솟음쳐서 한꺼번에 달려 왔습니다. 대장선을 잃은 데다 상상을 초월한 조선 화포의 가공할 위력을 보고 마침내 뱃머리를 돌리려 했습니다. 그 사이에 조선의 전선이 들이닥쳐 마구 부딪쳤습니다. 조선의 판옥선에 부딪치자 적의 화려하고 날랜 전선이 마구 부셔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당탕탕! 빼곡하게 몰려 있던 적선들이 서로 맞부딪쳐서, 해류에 밀려서, 즈믄해와 이순신 장군이 합작해서 설치한 수중 쇠말뚝 창살에 걸려서(이 때 쇠말뚝에 하두 혼이 나서 왜놈들이 조선 명산마다 쇠말뚝을 꽂았는지도 모르지요.), 마구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리 연습한 대로 쇠말뚝이 없는 곳을 골라서 뱀처럼 매끄럽게 돌아다니며 우리 전선들은 마음껏 적을 유린했습니다.
  
  
   '이겨라! 이겨라! 통제사, 이겨라! 이순신! 이순신! 조선 만세!'
  즈믄해도 질세라 응원을 했습니다.
  
  이겼습니다!
  이겼습니다!
  이겼습니다!
  단 열 두 척 아니 한 척 더 늘여 단 13척으로 133척과 싸워 이겼습니다. 모조리 가라앉히거나 깨뜨렸습니다. 아군 배는 한 척도 안 상하고! 그 바로 뒤에는 70여척이 호시탐탐 틈을 노리다가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습니다.
  
   그 후 곧 왜병은 썰물같이 영남 지방으로 몰려 와서 산보다 든든한 성을 쌓고 틀어박혔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통제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기어코 적을 다 물리치시고 통제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즈믄해야, 즈믄해야, 내가 죽고 한 3백년, 왜병은 단 한 놈도 우리 나라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300년 후 조선은 평화에 찌들어 칼 한 자루 쥘 힘이 없으리라.
  결국 나라를 그놈들한테 빼앗기리라.
  그러나 걱정 마라. 내가 태어난(1545) 지 꼭 4백년 되는 해(1945)에 해방이 된다. 그리고 내가 죽은(1598) 지 꼭 4백년 되는 해(1998)에 나라에 큰 혼란이 온다. 결국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 큰 잘못을 저질러 나라가 망할 직전까지 간다.
  그러나 걱정 마라, 그 후에 조선이 크게 깨달아 즈믄 해 동안 태양처럼 빛나리라.
  즈믄해야, 나는 너를 안다. 네가 조선의 지킴이임을, 나는 안다.
  즈믄해야, 너는 즈믄 해를 채우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나중에 꼭 다시 한산섬에 들르도록 해라. 아니, 그 땐 여기 와서 한 200년 편하게 살아야 한단다.'
  
   무슨 말을 할 줄 몰라 울기만 하는데,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빙긋이 웃으며 통제사가 말했습니다.
  '즈믄해야, 여지녀(女知女)?'
  '즈믄해야, 너 여자 알아?'라는 말이었지요.
  '아지녀해(我知女海).'
   '여해(汝諧)여, 난 당신이 누군지 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통제사의 자는 여해(汝諧)인데, 그 한자는 어려워 즈믄해가 두 자 다 못 배웠습니다. 그래서 아는 한자를 대신 가리킨 것입니다.
  통제사의 자가 '그대는 해학 그 자체 곧 유머의 대가이다.'라는 뜻임을 알았다면, 즈믄해가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허허허, 여자의 바다라. 그놈 참 농담 한 번 걸쭉하게 잘하는구만. 허허허.'
   역시 해학의 대가답게 통제사는 껄껄 웃으며 정말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즈믄해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통제사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아픔을 잊고 자기가 진담으로 한 말을 농담으로 한 번 더 새겨듣고 껄껄 웃으며 돌아가시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즈믄해의 머리가 사람 못지 않은데, 혹시 거북과 사람의 신체구조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날 가려라!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라고 다급한 중에도 침착하게 말씀하실 할 때에 즈믄해가 급히 판옥선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큰 돛으로 그분을 가린 자리에서 통제사와 즈믄해가 나직나직 주고받은 말이 바로 위에 적은 것입니다.
  
   즈믄해는 강화도에도 한 번 안 가 보고 슬피 울면서 다시 5대양을 돌아다녔습니다. 한 군데 자리를 못 잡고 10년, 20년이면 떠났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걸 다 구경했습니다. 무얼 봐도 별 흥미 가 없었습니다. 허전한 마음에 바람도 더러 피웠습니다.
   제2의 고향도 둘러봤습니다. 백인의 총칼이 번득였습니다. 즉시 떠났습니다.
  
   즈믄해가 500회 생일에 맞춰 강화도에 한 번 들렀습니다. 나라는 평화로운 듯했지만, 장길산이다, 운부다, 배고파서 사람 잡아 먹는다 해서 온통 뒤숭숭했습니다.
  
   강화도에서 고향에 왔다는 생각에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다가, 그만 어떤 어부의 그물에 덜컥 걸렸습니다. 이 때에 비로소 즈믄해가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500살이란 것도 알려졌고요. 즈믄해의 등에 쓰인 '高'자를 보고 상서로운 동물이 나타났다고 난리였습니다. 살만큼 살았으니 죽일 테면 죽여 봐, 란 심정이었습니다. 고향에서 죽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후회되는 것은 한산섬에 못 들렀다는 것과 칠천량에 가서 거북선 부스러기들을 다시 못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상서로운 동물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즈믄해를 바다에 놓아 주었습니다. 별로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한산섬에 가서 한 맺힌 울음을 울고 다시 칠천량에 가서 더 슬피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처 없이 또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춥디 추운 남극에도 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새 즈믄 해가 되고 다시 한 열 해 더 있다가 그 때 다시 와 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즈믄 해를 조선이 빛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했습니다. 만약 그리되면 통제사 말대로 강화도와 한산섬을 오가면서 여생을 조선의 황해와 남해에서 마칠 생각으로. 시체는 칠천량 거북선 잔해 아래에 묻을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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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쯤 아마 즈믄해가 아직 살았다면, 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뀐 줄도 모르고 태평양을 건너 헤엄치고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아까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을 한 걸 보아 한국의 배가 세계 곳곳에 안 돌아다니는 데가 없는 걸 벌써 알고 있나 봅니다.
  
   2010년, 강화도나 한산섬에 꼭 가 보세요. 어쩌면 등에 '高'자가 선명한 거대한 거북 즈믄해가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갈 때, 한자로 대문짝 만하게 이렇게 쓴 깃발을 들고 가세요. 그럼 틀림없이 그대 쪽으로 즈믄해가 넘실넘실 헤엄쳐 올 겁니다.
  --女知女? 또는
  --我知女.
  
   아참, 즈믄해가 지은 시조가 한 수 있습니다.
  
   꽃섬에 님을 싣고 두둥실 떠가던 날
   왜적의 새총 소리 간신배 입 총 소리
   다 잊고 물장구치며 달에 꽃에 취(醉)컸네
   --끝.
  속말: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다.
   (2000. 8. 7.) (2006. 9. 1.)
  
  
  
[ 2006-09-08, 22: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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